친일파 의사들의 생존법…"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친일파 의사들의 생존법…"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근대 의료의 풍경·3] 친일 의사 17인의 행적
친일파 의사들의 생존법…"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역사에는 밝고 어두운 면,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모습이 섞여 있게 마련이다.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고 연구하여 본보기로 세우는 일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의 한 가지 역할일 것이다. 하지만 도가 지나쳐서 미화와 우상화에 이르면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개인, 집단, 국가와 민족을 선양(宣揚)하기 위해, 누군가 말했듯이 "맞춤형 연구"를 한다면 그것은 아예 역사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역사의 어두운 면을 언급하려면 마음도 불편해진다. 특히 내 자신과 가족, 내가 속한 직업이나 단체와 기관, 내 나라와 민족의 잘못된 모습을 지적하는 게 결코 쉽고 편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부정적인 모습은 감춘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라 속으로 더 곪게 된다. 오히려 드러내고 말함으로써 잘못을 잘 알게 되고 되풀이하지 않게 된다. 그런 일을 할 책무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소임이 아닐까?

나는 지금 임종국(1929~1989)을 떠올린다. 친일파 연구의 개척자인 임종국은 연구를 하던 중에 아버지의 친일 행적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고뇌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그에 대해 묻자 아버지는 선선히 사실을 인정하고 친일파에 대한 글을 쓸 때 자신의 이야기를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아들을 격려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임종국은 친일파 문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역사 연구에 관한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지난해 11월초 민족문제연구소는 오랜 노력 끝에 <친일인명사전>을 펴내었다. 모두 4776명이 수록되었는데, 내가 책을 넘기면서 확인해 본 바로는 의사나 의료와 관련된 사람은 16명이었다. 며칠 전 연구소에 문의해 보았지만 별다른 지적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한두 사람 빠뜨렸을 수는 있을 것이다. (이번 글은 주로 <친일인명사전>을 인용한 것이다.)

사전에 수록된 사람들의 분야는 관료 1207명, 경찰 880명, 친일단체 484명, 군인 387명, 중추원 335명, 사법 228명, 종교 202명, 문화예술 174명, 수작/습작(작위를 받거나 세습한 사람) 138명 순으로 권력과 관계있는 사람이 대종을 이룬다. 의사라 하더라도 의술과 직접 관련된 행위로 선정된 경우는 거의 없고, 다른 친일적 사회 활동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이 명단에 없다 해서 친일 행위가 사면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한편 친일파 명단에 있다 하여 공적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공(功)은 공이고 과(過)는 과인 것이다.

친일 의료인 16명 중 5명은 일본군이나 만주국 군대의 장교(군의관)를 지낸 경력으로 선정되었다. 이제규(1873~?)는 1902년 의학교를 졸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사 19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05년 육군 3등 군의로 임관했고 1910년 병탄 뒤에도 2등 군의로 조선헌병대사령부 등에서 근무했다. 1918년 11월 1등 군의로 승진하는 동시에 예편했다.

▲ 김명식이 일본군 1등 군의로 임명받은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1920년 4월 30일자 기사. ⓒ프레시안
<친일인명사전>에는 수록되지 않았지만 비슷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또 있다. 역시 최초의 의사 19명 중 하나인 김명식(1875~?)이다. 성적순으로 발표하는 졸업생 명단을 보면, 김명식은 2등 졸업이었다. 1904년 3등 군의로 군 생활을 시작한 김명식은 1909년에는 1등 군의가 되었다. 그 뒤 10년간의 경력은 뚜렷하지 않은데, 구한국군 장교를 일본군 장교로 전환하는 칙령에 따라 1920년 4월 28일 일본군 1등 군의가 되었으며, 1922년 8월에는 3등 군의정으로 승진했다.

만주국군대, 특히 간도특설대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한 사람은 2명이다. 계병로는 하얼빈의 육군군의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했으며, 마동악은 평양의전을 졸업하고 군의관이 되었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 옌지(延吉) 현 특무기관장 오고에가 만든 조선인 중심의 특수 부대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조선인과 중국인의 연합 부대인 동북항일연군, 역시 조선인이 많았던 팔로군, 그리고 인근 민간인들을 공격하여 살해, 체포, 강간, 약탈, 고문을 자행했다.

1931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원용덕(1908~1968)은 1933년 만주국군대 군의로 임관하여 1945년까지 근무하면서 중교(중령)까지 진급했다. 또 펑텐(奉天) 지역 조선인들의 사상 통제를 위해 일본군 특무기관이 중심이 되어 만든 흥아협회(興亞協會)에도 참여했다. 해방 뒤에는 1953년부터 헌병총사령관으로 특무대장 김창룡과 함께 이승만의 정권 보위에 핵심적 역할을 했다.

김인성도 만주국군대 군의로 근무하다 1939년 상위(대위)로 제대했다.

을사5적 이지용(1870~1928)과 정미7적 임선준(1860~1919)은 대한의원 원장을 지냈지만 의료와는 사실상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대한의원은 일제가 대한제국의 보건의료를 장악하기 위해 만든 당시로는 초현대식 병원이었다. 병원장을 내부대신이 겸임하도록 하여 병원의 위상을 높인 듯하지만, 그것도 일제의 책략일 뿐이었다. (☞관련 기사 : "서울대병원, 왜 일제 첨병 대한의원에 집착하나?")

<대한의원 관제> 제4조에 "원장은 고문과 협의한 후에 병원 업무를 처리(整理)한다"라고 규정하여 병원창설위원장으로 설립 과정부터 주도적 역할을 해온 사토 스스무(佐藤進)가 사실상 원장 역할을 한 것이다. '정미7조약'으로 "차관 정치"가 시작되고 일본인들이 대한제국의 관리가 되는 길이 열리자 <대한의원 관제>를 고쳐 사토가 명목상으로도 병원장이 되었다.

이진호(1867~1946)도 의료와는 별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포함시킨 것은 일본의 <아사노(朝野)신문>(1886년 7월 29일자)에 제중원에 설치된 (의)학당의 생도로 이름이 실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하게 언급할 것이다.) 이진호는 일제시대에 관리로 가장 출세한 조선인 중 1명이다. 몇 가지만 꼽아보면, 경상북도 및 전라북도 도지사, 조선총독부 학무국장(교육부장관 격), 중추원 부의장,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등을 지냈다.

관리로 출발하여 한의사로도 활동한 강영균(강홍대, 1867~?)은 내부 소속 병원인 광제원의 원장을 지냈고 1907년부터 대표적 매국 단체인 일진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병탄 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일진회는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는데, 이때 강영균은 그 동안의 공로를 인정받아 위로금(해산비)을 받았다.

강병옥(1880~1928)은 '한국 황실 특파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1910년 지바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내무성에서 의사면허증을 받아 일본의적(醫籍)에 등록된 최초의 조선인이다. 곧 귀국하여 1년가량 총독부의원에서 근무한 뒤 1911년 말에는 고향인 평양에서 순천병원을 열었다. 강병옥은 1917년 12월 일본인 고위 관리들과 친일적 조선인 유력자들이 설립한 평양 기성다화회(簊城茶話會)에서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런 연유로 3·1운동 당시 시위 군중에게 위협을 당하기도 했지만 친일 활동은 계속되어 192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오긍선(1878~1963)은 1902년 미국에 유학하여 1907년 3월 루이빌 의대를 졸업하고 10월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자격으로 귀국했다. 군산, 광주, 목포의 야소교병원 원장을 지내고 1912년부터는 세브란스의전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1921년에는 학감, 그리고 1934년에는 에비슨을 이어 세브란스의전의 제2대 교장이 되었다.

오긍선의 친일 활동은 비교적 일찍 시작된다. 1921년, 3·1운동 이후 민심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친일 세력이 조직한 유민회(維民會)의 평의원으로 선임되었고, 1924년 "내선융화의 철저한 실행"을 내걸고 결성된 동민회(同民會)에도 참여했다.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총독부의 교육 자문 기구인 조선교육회의 평의원을 지냈고 1937년에는 경성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 되었다. 1938년에는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의 발기인과 실행위원을 맡았으며 종교 활동을 통한 황민화 운동을 목표로 하는 조선기독교연합회의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또 사상범의 전향을 촉진하는 경성보호관찰소의 주임대우 촉탁보호사로도 활동했다.

1939년에는 조선인의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경성부지원병후원회 이사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임이사를 맡았다.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이 되었다. <반도의 빛> 1942년 1월호에 "임전하(臨戰下)에 신년을 마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여 "전선에서 싸우는 장병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지 말며, 후방에 있는 우리는 각각 자기가 하는 '직무의 군인'임을 한층 더 각오하라"고 했다. 1943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에 학도지원병 지원 촉구를 위한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는 특집에 "환하게 열린 정로(征路) ― 주저 말고 곧 돌진하라"를 기고하여 '대동아 건설'을 위해 적국인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는 결전장으로 주저 없이 나설 것을 촉구했다. 오긍선은 1949년 8월 반민특위에 자수하여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박창훈(1897~1951)은 1919년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1925년 교토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1년부터 총독부의원 외과에서 의원(醫員)으로 일했으며 1924년부터 1928년까지는 경성의전 조교수를 겸했고, 그 뒤에는 개업을 했다. 1933년에는 경성에서 개업하는 조선인 의사들만으로 조직된 한성의사회의 회장을 지냈다. 박창훈은 1940년 10월 국민훈련후원회가 주최한 반도신체제 좌담회 참석을 시작으로 친일 행적을 보이기 시작했다. 1941년 5월 전시 최대의 관변 통제 기구인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에 선임되었고,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일본군이 싱가폴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충용무비한 황군(皇軍)의 혁혁한 전과에 새삼스레 감격하는 동시에 동아 공영권의 기초가 확고부동해진 것을 충심으로 기뻐했다"는 소감을 <신시대> 1943년 2월호에 밝히기도 했다. 해방 후 서울약대와 치대 후원회 이사장을 지냈다.

김명학(1901~1969)은 1924년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총독부의원 외과에서 근무하다 1928년에는 경성제대 의학부의 조수가 되었다. 1930년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에는 함흥에서 병원을 개원했다. 1933년부터 해방 때까지 함경남도 도회의원(관선), 1939년 함흥배영(排英)동지회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이사가 되었다. 1942년에는 사상범들이 출옥 후 다시 항일 운동에 나서지 못하게 "사상적 과오를 청산하고 황도(皇道)정신을 자각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이라는 본연의 자세로 복귀하도록 전향시키는 임무"를 담당하는 촉탁보호사가 되었다. 1943년 11월에는 최남선, 이광수 등과 함께 선배격려대의 일원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지원병 입대를 독려했다. 해방을 눈앞에 둔 1945년 7월에는 조선국민의용대 함경남도 차장을 맡았다. 해방 뒤 의사 생활과 더불어 대한승마협회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대한축구협회 회장 등 체육계에서도 활동했다.

▲ <매일신보> 1943년 11월 26일자에 실린 정구충이 쓴 "학병이여 잘 싸워라." ⓒ프레시안
정구충(1895~1986)은 1921년 오사카의대를 졸업했고 1932년 같은 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3년부터 1928년까지는 안동과 해주 등의 도립의원에서 외과과장으로 근무했고, 1937년부터는 경성여자의전의 외과 교수로 일했다. 1937년 조선군사후원연맹 평의원, 1938년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발기인, 1939년 배영(排英)동지회 평의원,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 등 친일 어용단체에서 활동했다. "학병이여 잘 싸워라"(<매일신보> 1943년 11월 26일자), "출진하는 청년학도에게 고함―역사적 조류를 타라"(<춘추> 1943년 12월호) 등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1945년 8월부터 1948년 5월까지 경성여자의전/수도여자의대 교장/학장을 지냈으며, 1947년 대한외과학회 회장, 1959년 대한의학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다음 두 사람은 젊었을 때 항일운동에 나섰다가 뒤에 친일 행동을 남긴 사람이다. 이용설(1895~1993)은 1919년 3월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할 예정이었으나, 세브란스 학생 대표로 3·1운동에 참여하느라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1919년 가을부터 중국 베이징 협화대학 부속병원에서 외과의사로 근무했으며, 1922년 흥사단 예비단우로 입단하고 귀국했다. 1924년 세브란스의 해외 파견 유학생으로 미국에 가서 1926년 노스웨스턴의대를 졸업했다. 같은 해 9월 귀국하여 세브란스의전 교수가 되었으며 1937년 경성제대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8년 12월 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 세브란스의전 교수직을 사임했고, 1940년 8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용설의 친일 활동은 이 무렵부터 시작된다. 그는 1940년 12월 전향자들의 교화 단체인 대화숙(大和塾)에 참여했고, 1941년 조선장로교신도애국기헌납기성회 회계를 담당하는 한편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그해 12월에는 동양지광사에서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하여 "우리는 곧 신의 뜻으로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고, 신의 사도로서 타락한 미국인들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대동아 전쟁의 의의가 얼마나 큰가를 알아야 하고, 우리들은 다만 최후까지 승리를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했다. 1945년 7월에는 일본기독교 조선교단 재무국장을 맡았다. 이용설은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세브란스의대 학장, 1955년부터 1962년까지 세브란스병원 원장을 지냈다.

최동(1896~1973)은 1921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했다. 3·1운동으로 체포되어 징역 7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26년부터 캐나다 토론토대학 병리학교실에서 상피암종을 연구한 뒤 의이학사(醫理學士) 학위를 받고 1928년 귀국했다. 1930년 세브란스의전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935년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9년 2월 세브란스의전 교장에 취임했다.

1936년 3회에 걸쳐 <재만조선인통신>에 "조선 문제를 통해 본 만몽 문제"를 기고했는데, 3회분에서 재만조선인통신사는 최동이 "조선 민족과 야마토 민족과의 동종동근의 역사적 실증을 들어 참된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의 결합을 당당하게 주장했다"라고 소개했다. 최동은 그 글의 말미에서 "대민족주의의 구심적 국책을 확립해서 그 궤도 내에서 조선 민족의 원심적인 해방·발전에 경제적 원조를 부여하는 일이 제국의 기초를 더욱 공고히 하고, 동아의 평화를 지키며 세계의 안녕질서를 확보하는 근본이라는 사실을 총명한 위정자는 깨닫고, 현명한 국민은 인지하기를 희망한다"라고 했다. 1938년 기독교계의 친일 협력을 위해 조직된 조선기독교연합회의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12월 20일 동양지광사에서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해 "앵글로색슨인이 유색인을 대하는 태도"를 주제로 발표했다. 해방 후 다시 세브란스의전 교장을 지냈고, 의과대학으로 승격한 뒤에는 학장직을 맡았다.

의사나 의료와 관련된 사람으로 친일 행적이 뚜렷한 17명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1916년에 결성된 친일단체 대정(大正)친목회에서 활동한 유병필(의학교 제1회 졸업생)과 안상호(1902년 일본 지케이카이의원 의학교 졸업)의 친일 행적을 거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친일파를 거론하는 것은 그들을 망신주거나 매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불편하더라도 그런 일을 하는 것이다. 또 친일파로 규정되었다 하여 공적이 없어지는 것도 아닐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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