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백혈병' 이어 '삼성 뇌종양'…"하루종일 납 냄새 맡았다"
[현장] 산재 불승인 심사청구 제기한 한혜경 씨
2010.04.12 17:49:00
'삼성 백혈병' 이어 '삼성 뇌종양'…"하루종일 납 냄새 맡았다"
"이.건. 말.이. 안.되.잖.아.요."

한혜경(32) 씨는 띄엄띄엄, 한 글자씩 꾹꾹 눌러가며 말했다. 열아홉 어린 나이에 삼성전자에 들어가 LCD 사업부에서 6년간 일을 하고 얻은 뇌종양 때문에 짧은 문장을 말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혜경 씨는 뇌종양 제거 수술 이후 언어, 보행, 시력 모두 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그런 혜경 씨가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이건 말이 안 되죠. 차라리 나한테 (솔더크림이 위험하다고) 말을 해줬으면. 삼성은 나빠요. 나도 그렇고 예전에 일하던 애들도 화날꺼야. 왜 산재 인정도 안 해줘요? 이러면 안 되요. 나 같은 사람이 또 생기면 안 되잖아요."

너무 깊숙이 자라 있어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종양은 지금도 혜경 씨의 뇌에 남아 있다. 의사는 언제 다시 암이 활성화될지 모른다고 했다. 한 씨의 어머니 김시녀 씨는 "머리가 조금 아프다고 해도, 어깨가 결린다고 해도, 혹시 재발한 것은 아닌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두 모녀의 한 달 수입 0원…"4개월째 재활치료도 못 받아"

혼자 힘으로는 밥조차 먹을 수 없는 혜경 씨가 12일 어머니 김 씨와 함께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을 찾았다. 지난 1월 나온 공단의 '산재 불승인' 처분 때문이었다. 삼성전자에 들어간 지 3년 만에 월경이 완전히 사라지고 지난 2005년 소뇌부뇌종양 진단을 받게 된 한 씨에 대해 공단은 "업무로 얻은 질병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어머니 김 씨는 이날 공단의 산재 불승인 처분에 대한 심사청구를 제기하며 "최소한의 치료라도 받을 수 있도록 산업재해로 인정해주면 안 되냐"고 호소했다. 한 씨는 지난 1월부터 4개월 동안 재활치료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한 달에 20~30만 원이 드는 재활치료비가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움직일 수도, 가만히 앉아 있지도 못하는 한 씨의 병 간호로 어머니는 일을 구할 수가 없다고 했다. 두 모녀의 현재 수입은 0원. 지난해 9월까지는 기초생활수급권자로 최소한의 생활비라도 받았지만 지금은 그마저 없다. 한 씨가 들었던 민간보험사에서 지난 2008년 보험금 4000만 원을 받았는데 이 돈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 돈은 고스란히 8400만 원이나 됐던 한 씨의 수술비와 입원비 빚을 갚는 데 써 "받기도 전에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지만 이런 사정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부터 3달 간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측이 치료비를 보태줘 간신히 재활치료를 받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지난 넉달 동안 전혀 재활 치료를 받지 못하면서 한 씨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고 있다.

"엊그제는 혜경이한테 '우리 막다른 길도 고민해보자'는 얘기까지 했습니다. 산 사람은 최소한의 치료라도 받을 수 있도록 근로복지공단이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김 씨가 울먹이는 동안 혜경 씨는 휠체어에 앉아 말이 없었다.

▲ 열아홉 어린 나이에 삼성전자에 들어가 LCD 사업부에서 6년간 일을 하고 뇌종양을 얻은 한혜경 씨. 한 씨는 뇌종양 제거 수술 이후 언어, 보행, 시력 모두 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매일노동뉴스(정기훈)

한 씨 주치의 "뇌종양, 재직 중에 생겼다"

한혜경 씨가 삼성전자 LCD 사업부에 입사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5년 10월이었다. 어머니와 둘이 살던 한 씨는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다른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때 삼성전자에 입사를 했다.

한 씨는 LCD사업부 기흥공장의 모듈공정 가운데 SMT공정에서 일을 했다. 한 씨가 몸에 이상을 처음 느낀 것은 1998년이었다. 월경이 사라졌고 얼굴과 목 등에 심한 여드름과 홍반 등 피부질환이 발생했다. 호르몬 주사도 맞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한 씨는 2001년 8월 회사를 그만뒀다. 3년째 계속되는 무월경 상태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기흥공장에서 나온 한 씨는 춘천 집에서 생활하며 일을 했다. 집 근처 마트에서 과일을 팔기도 하고, 출판사에서 책 편집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씨의 몸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까닭 없이 자주 아팠고 감기를 달고 살았다. 어느 날부터는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워진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자주 넘어지기도 했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느낀 것은 2005년이었다. 종종 쓰러지고 헛소리를 하곤 하는 한 씨를 데리고 간 병원에서 한 씨는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그의 나이 스물 일곱 살, 삼성전자에서 퇴사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 의사는 "종양의 깊이로 볼 때 7~8년 전에 생긴 것 같다"고 했다. 한 씨가 삼성전자 생산직 노동자였던 때, 이미 종양이 자라기 시작했다는 얘기였다.

한 씨가 자신의 질병이 산업재해일지 모른다는 것을 안 것은 '반올림'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피해자들의 얘기가 세상에 알려지고 반올림에 대한 얘기를 들은 한 씨는 반올림을 찾았고 자신이 일하던 곳에 대해 다시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 3월 한 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 신청을 했다. 하지만 뇌종양 후유증으로 생긴 장애를 조금이라도 완화하기 위한 재활치료를 마음 편히 받을 수 있게 되리라는 한 씨의 기대는 1년이 채 못 돼 깨져 버렸다. 근로복지공단이 산업재해 불승인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한 씨에 앞서 삼성반도체 백혈병 피해자 6명도, 림프종 피해자 1명도 모두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박지연 씨도 그 중 하나였다.

이미 사라진 공정…삼성 주장만을 근거로 "업무관련성 없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박지연 씨의 빈소를 찾은 한혜경 씨. 한 씨는 삼성전자에서 6년 간 일한 뒤 뇌종양을 얻었다. ⓒ프레시안(김봉규)
지난 1월 근로복지공단은 한 씨의 산업재해 불승인 판정을 하면서 "뇌종양의 발병원인이 작업환경과 관련성이 있다는 근거가 없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근거가 없다"는 판단의 근거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다. 그런데 이 "역학조사의 근거는 삼성 측의 주장에 있다"는 게 반올림의 주장이다.

당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작업 중 솔더크림에 포함된 납과 주석, 그리고 플럭스, 이소프로필알콜 등의 유해요인에 노출되었지만 납의 노출수준이 암을 일으킬 정도로 높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노출 수준이 높지 않았다는 추정의 핵심 근거는 "국소배기장치가 있었다"는 삼성 측의 주장이다.

환기 시설이 있어서 피해자인 한 씨가 납에 노출된 농도가 낮았다는 것인데, 한 씨의 주장은 다르다. 한 씨는 "배기장치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공유정옥 전문의도 "배기장치는 그 성능과 설치된 위치를 고려해야 한다"며 "실례로 작업자 뒤에 배기장치가 설치돼 있을 경우, 배기장치로 빨려 들어가는 납 냄새를 작업자가 고스란히 맡을 수밖에 없음에도 역학조사는 '환기 시설이 있었다'는 삼성 측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신뢰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더욱이 한 씨가 일했던 공정은 현재 폐쇄된 상태다. 삼성전자는 이 공정을 2001년 폐쇄하고 2002년 매각했다. 한 씨가 일하던 당시의 작업환경을 지금은 누구도 알 수 없다. 배기장치가 있었다는 주장도, 멀리 떨어져 있어 소용이 없었다는 주장도 현재로서는 주장일 뿐이다.

공유정옥 전문의는 "그럼에도 역학조사는 어떤 구체적인 증거도 없이 삼성의 주장만을 근거로 한 씨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모든 공정서 납 취급…하루 종일 납 냄새 맡았다"

"업무 연관성이 없다"는 결론의 또 다른 근거였던 "지속적인 노출이 아니었다"는 판단도 당사자의 주장과는 180도 다르다. 한 씨는 "하루 종일 납 냄새를 맡았다"고 했다. 납 함량이 33~37% 수준인 솔더크림을 직접 주걱으로 떠서 회로기판에 바르는 작업은 삼성의 말대로 하루에 한두 번에 불과했더라도, 그 외에 한 씨가 담당했던 4가지 작업 역시 납과 가까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특히 기계가 잘못 올린 부품을 직접 작업자가 손으로 바로 잡는 '이형 칩 마운터 공정'은 납이 발려진 회로기판을 바로 코앞에서 봐야 했다. 여러 부품이 장착된 판을 열처리를 통해 통째로 납땜하는 열처리 기계 '리플로기'에서 나온 것을 살펴보며 불량을 가려내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열에 녹았다 굳은 납에 한 씨는 얼굴을 들이밀어야만 했다.

한 씨는 근무체계가 4조 3교대로 바뀐 2000년 이전까지는 3조 3교대로 일을 했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을 빼고는 최소 8시간에서 최장 12시간까지 같은 일을 반복했다. 한 씨가 취급했던 발암물질은 납 뿐이 아니었다. 솔더크림을 주걱으로 떠서 바르는 작업을 하다 솔더크림이 손에 묻으면 닦기 위해 사용했던 IPA도, 청소를 할 때 썼던 아세톤도, 납을 녹이는 촉매제로 사용했던 플럭스(FLUX)도 중추신경 등에 영향을 미치는 독성 물질로 알려져 있다.

▲ 한 씨는 "하루 종일 납 냄새를 맡았다"며 "내가 취급하는 물질들이 위험하다는 얘기를 한 번도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매일노동뉴스(정기훈)

한 씨는 "내가 취급하는 물질들이 위험하다는 얘기를 한 번도 누구에게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보호 장구도 없었다. 한 씨가 일을 할 때 입었던 무진복은 제품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옷이다. 공유정옥 전문의는 "무진복으로는 유해가스나 화학물질이 신체에 닿는 것을 막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반올림과 한 씨, 그리고 한 씨의 어머니 김 씨가 근로복지공단의 불승인 결론을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다.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업무상 재해는 의학적 인과관계를 명확히 증명하지 못하더라도 가족력, 현장 등을 고려해 상당인과관계만 인정되면 되는 것"이라며 "그럼에도 공단은 의학적 인과관계만 따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근로복지공단, "역학조사 신뢰한다" 책임 떠넘기기 급급

한 씨와 어머니, 그리고 반올림 관계자들은 심사청구 신청서를 접수한 뒤 근로복지공단 관계자와 즉석 면담을 가졌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오세위 보험급여국 국장은 원론적인 얘기를 되풀이했고,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산업안전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에 문제가 있다는 반올림 관계자들의 지적에 오 국장은 "역학조사 기관에서 정확히 조사했을 것으로 보며 신뢰할 만하다"고 주장했다. 반올림 관계자들이 "신뢰할 수 없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라고 반박하자, 오 국장은 "그 얘기는 산업안전공단에 가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발을 빼기도 했다.

공유정옥 전문의는 "산업안전공단도 안 가 본 게 아니"라며 "산업안전공단에 가면 근로복지공단을 가라고 하고, 산업재해심사청구위원회에 가도 '우리 소관이 아니니 근로복지공단으로 가서 말하라'고 하는데 또 다른 데를 가라는 것이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들은 김원배 공단 이사장과의 면담을 요구했지만 오 국장은 "이사장님이 그렇게 한가한 분이 아니다"면서 거부했다. 양 측은 10일 안으로 심사청구위원장 및 심사청구 담당자 등과 함께 2차 면담을 가지기로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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