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소설- ‘창랑지수‘ <1>
아버지의 초상(肖像)
2003.08.05 16:23:00
중국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소설- ‘창랑지수‘ <1>
오늘부터 중국을 가장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소설로 알려진 '창랑지수(滄浪之水)' 연재를 시작한다. '창랑지수'는 중국인과 중국 사회의 속을 훤히 꿰뚫어볼 수 있는 소설, 중국정부에서 일체의 보도나 광고를 금지했으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수백만 부가 팔려나간 베스트셀러로 유명하다.

중국 당대 최고의 작가라 할 옌쩐(閻眞)의 장편소설 '창랑지수'(전 3권. 北京 人民文學出版社. 2001. 10. 초판 발행)는 유려한 문장, 뛰어난 문학성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와 중국 경제, 권력구조까지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노신(魯迅)의 '아큐(阿Q)정전' 이래 최고의 사회소설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문학평론가 레이다(雷達)는 이 소설을 가리켜 중국인, 중국 사회의 내면세계를 정확히 드러내 보인 "천기(天機) 누설의 책"이라고 평하였다. 그는, 중국인들의 생각, 행동, 처세, 관계(關係, 꽌시) 중시의 사회적 관습 등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여타 사회소설들은 이 책에 비하면 가볍기 짝이 없는 곁가지들에 불과하다면서 이 책의 문학적 위치를 자리매김하였다.

소설은 1957년생인 주인공이 초등학생 시절 문화대혁명을 경험하고, 70년대 초의 중학생 때는 성적이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우파로 낙인찍힌 부친을 따라 산골로 쫓겨 내려가서 약초나 캐면서 고등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다가, 70년대 말 우파분자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홀로 독학하여 중국 최고의 북경중의학원에 입학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작가는 중의학 석사 졸업생인 지대위(池大爲)의 초기 순수하고 웅대한 포부, 직위도 권력도 없을 시기의 고통과 좌절, 권력과 금력의 횡포 및 삶의 고단함에 의해 강요당한 현실과의 타협, 시운(時運)이 도래하여 돈과 권력을 모두 얻게 되는 과정에서 부딪치는 온갖 도전과 경쟁, 음모와 술수, 위생청장이 된 후 젊을 때 가졌던 이상을 실천해 보려다가 기득권자들의 저항에 부딪쳐 포기하게 되는 과정에서의 자기 합리화와 현재 중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적나라한 이야기 전개를 통하여 시장사회주의를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 및 사회구조를 눈에 선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의 편집자들은 이 소설을 다 읽고 났을 때 국가주석 후진타오가 장차 어떤 방향으로 중국을 끌고 가게 될지, 군사위 주석 장쩌민의 앞으로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그리고 월급 30만원 받는 중국인들이 월 3백만원 이상의 생활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지난 봄 중국을 강타한 사스가 발생한 배경과 확산의 원인이 무엇인지, 주한 중국대사가 한국이 중국보다 더 사회주의적이라고 평한 까닭이 무엇인지 등 중국에 대한 궁금증을 실감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설 제목 '창랑지수(滄浪之水)'는 전국시대 초(楚) 나라의 유명한 시인 굴원(屈源)이 쓴 '초사(楚辭)'중 '어부(漁父)'에 나오는 노래로서, 중국인이라면 굴원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창랑지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굴원과 창랑지수는 중국 사람들의 삶과 의식 속에 살아 있는 시인이자 노래이다.

이 소설은 비봉출판사(대표 박기봉)가 한국판을 준비하고 있으며 박혜원(朴惠園), 공(孔)빛내리씨가 번역을 맡고 있다. 프레시안은 책이 나오기 전에 비봉출판사의 양해를 얻어 '즐거운 여름나기'의 하나로 이 소설을 독자 여러분께 선보인다. 편집자

***<서 편>**

***1. 아버지의 초상(肖像)**

아버지의 초상(肖像)을 발견한 것은 아버지의 유물을 정리하던 때였다. 아버지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으나 돌아가신 일이 생생한 꿈만 같았다.

그날 아버지를 산에 모시고 토담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더 이상 비통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극도로 슬펐으나 그것도 계속되니 더 이상 슬픔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평소 할머니, 아주머니, 고모, 형수, 할아버지, 외숙부, 숙부 등의 호칭으로 불렀던 산골 사람들은 모두 집 안에 둘러서서 서로 말들을 주고받았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법이야."

"하느님이 데려가시겠다면 모택동(毛澤東) 주석도 어쩔 수 없는 법이지."

방안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진삼다(秦三爹) 영감은 계속 담배를 나팔 모양으로 말아서 옆 사람들에게 권하고 있었다. 그 담배 냄새는 내겐 매우 익숙했다. 가공하지 않은 산촌의 막담배에서만 이렇게 짙고 매운 냄새가 난다. 아버지께선 생전에 한 번 앉으시면 몇 시간이고 등잔불 아래에 줄곧 앉아 계시곤 하셨다. 천천히 나팔 담배를 말아 등잔불에 가져가 불을 붙여 피우시고, 한 대를 다 피우시고 나선 또 다시 한 대를 말기 시작하셨다. 그렇게 한마디 말도 없이 하룻밤을 보내곤 하셨다.

황혼의 등잔불 빛은 방안에 있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벽 위에 드리워 그것을 한참동안 보고 있으면 묘한 환각상태에 빠져든다.

그렇게 보내던 밤에 나는 아버지와 마주앉아 학과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벽 위에 드리워진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 그림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그 그림자가 아주 선명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벽이 울퉁불퉁해서 그런 것 같았다.

이제 그런 날들은 가버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께선 이제 저 산 속, 적막한 땅 속 깊은 곳에서 영원히 잠들어 계실 것이다.

밤이 깊어가자 사람들은 하나둘 흩어져 갔다. 나는 등잔불 아래 잠시 앉아 있다가 문지방 위에 걸터앉았다. 그날 밤 따라 바람은 유난히 셌고, 유난히 깨끗했고, 바람결에는 마른 풀잎 냄새가 묻어났다. 산촌 사람들만이 구별해 낼 수 있는 냄새였다. 달은 없고 별들만 하늘에 드문드문 흩어져 먼 산의 흐릿한 윤곽을 두드러지게 했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산들은 저렇게 침묵을 지켜 왔을까. 산촌 사람들이 아니고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득 바람결에 어떤 소리가 묻어왔다. 이미 여러 해 동안 들어왔던 소리,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하소연하는 것 같기도 한 소리.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을 바라보다가 나는 시간이 시작되던 까마득한 옛날에는, 하늘이 시작되는 머나먼 그곳에는, 반드시 어떤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선 이미 돌아가셨고, 한 번 돌아가시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가볍게, 이렇게 쉽게 죽을 수 있는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몸은 극도로 지쳤으나 머리는 극도로 맑았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나는 아버지께서 남기신 물건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몇 벌의 옷, 몇 십 권의 의학서적, 그것이 전부였다. 대들보 위에 놓여 있던 부드러운 소가죽 상자를 내리고 그 뚜껑을 열었다. 퀴퀴한 냄새, 비밀스레 깊숙이 감춰져 있었던 어떤 것에서 나는 그런 냄새가 났다. 등불을 가져다 비추자 안에 책이 몇 권 놓여 있었다. 손바닥으로 상자 바닥을 쓰다듬는데 중간에 한 부분이 불룩 튀어나와 있는 것이 느껴졌다. 등잔불을 가까이 들이대고 자세히 살펴보았다. 뭔가의 모서리가 분명하게 보였다. 심장이 마치 따로 살아서 움직이는 듯 쿵쿵 뛰고 있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진홍색 융단 한 쪽이 칼로 찢어져 있었다. 조심스레 손을 넣어 그것을 꺼낸 다음 등불 아래로 가져가 보았다. 아주 얇은 책 한 권이 나왔다:『중국 역대 문화명인(文化名人) 소묘(素描)』라는 책이었다.

표지는 이미 갈색으로 바래여 있었다. 상해북신서국(上海北新書局)에서 중화민국 28년에 발행된 것이니, 계산해 보니 이미 38년이나 된 책이었다. 가만히 책을 펼쳐보니 첫 페이지에는 공자상(孔子像)이 있었고, 그 왼쪽 아래에 세로로 "자신의 욕망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니, 만세의 사표이다(克己復禮, 萬世師表)"란 글이 연필로 적혀 있었다. 아버지의 필적이었다. 그 페이지를 넘기자 공자의 일생을 소개한 짧은 문장이 있었다. 그 다음에는 맹자상(孟子像)이 있었고, "목숨을 버리더라도 옳음을 취했으며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었다(舍身取義, 信善性善)"는 글이 있었다.

이어서 굴원(屈原)의 "충성을 다했으나 쫓겨났다. 인간의 감정이 그것을 어찌 감당할 수 있었으랴(忠而見逐, 情何以堪)"는 글이 있었고, 사마천(司馬遷)의 "부친과의 약속을 이루었으니 그 중함이 태산보다 더하다(成一家言, 重於泰山)", 혜강(嵇康)의 "자신을 돌아보아 부끄러움이 없었고, 밖으로 풍속을 어김이 없었다(內不愧心, 外不負俗)", 도연명(陶淵明)의 "부귀는 뜬구름과 같다. 울타리 아래서 국화 꽃 따니 이 또한 즐겁구나(富貴如雲, 采菊亦樂)", 이백(李白)의 "왕후장상들을 우습게 보고 가슴 속에는 장한 기개 품었었다(微傲王侯, 空懷壯氣)", 두보(杜甫)의 "은하수처럼 많은 근심걱정, 천하와 천추 때문이었다(耿耿星河, 天下千秋)"라는 글이 있었다. 그리고 소동파(蘇東坡)의 "군자의 유풍은 그 은덕이 만고에 미친다(君子之風, 流澤萬古)", 문천상(文天祥)의 "죽음인들 어찌 두려워하랴, 일편단심을 역사에 비춰 본다(雖死何惧, 丹心汗靑)", 조설근(曹雪芹)의 "성스럽구나 참는다는 것은, 눈을 밟아도 흔적이 없다(聖哉忍者, 踏雪無痕)"는 글과, 맨 마지막으로 담사동(譚嗣同)의 "사직을 두 어깨에 메려 했으니 간담이 곤륜산만 했다(肩承社稷, 肝膽昆崙)"는 글이 적혀 있었다.

모두 열 두 사람이었다. 그 초상들을 펼쳐 보고 있으니 피가 머리로 좍좍 솟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어떤 몽롱하면서도 강렬한 감정이 나를 엄습했지만, 나 자신도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책을 덮으려다가 맨 마지막 갈피에 종이 한 장이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젊은 현대인의 초상화였다. 약간 찌푸린 미간에 눈매는 평화로웠고 입술은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한 줄 서명은 벌써 상당히 흐릿해져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알아볼 수 있었다.

"지영창(池永昶)의 자화상. 1957년 8월 8일."

그 아래에는 만년필로 가로로 쓴 글이 있었다.

"높은 산 바라보고 넓은 길 걸어가리.
비록 도달할 수 없더라도 마음만은 그것을 향하리."
(高山仰止, 景行行止, 雖不能至, 心向往之).

바로 이십년 전에 그려진 아버지의 초상화였던 것이다! 나의 거친 숨소리가 밤을 배경으로 확대되어 마치 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산바람이 윙윙 소리 내며 울어대는 가운데 하늘이 밝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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