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자는 과학이 무섭다? 진짜 '융합' 가능하려면…
[프레시안 books] 맥스웰 베넷·피터 마이클 스티븐 해커의 <신경과학의 철학>
인문학자는 과학이 무섭다? 진짜 '융합' 가능하려면…
1. 부분을 전체로 혼동하는 오류 : The Mereological Fallacy

뇌는 사람의 한 기관이다. 사람에게는 뇌 말고도 다른 장기들도 있으며, 신체적 장기 외에 생각하고 느끼는 힘도 있다. 사람을 정신과 신체로 나누어 이분법으로 보느냐 아니냐에 관계없이, 사람에게 마음의 측면은 더없이 중요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런 질문은 마치 한반도에서 제주도가 어디에 위치하느냐라는 질문과 비슷하다. 혹은 개인용 컴퓨터에서 중앙처리장치 CPU가 어디에 꽂혀 있느냐라는 질문처럼 던지기도 한다.

▲ <신경과학의 철학>(맥스웰 베넷·피터 마이클 스티븐 해커 지음, 이을상 외 5인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철학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현대 첨단의 과학 연구를 통해서 그런 질문은 무수히 시도되어 왔다. 그러나 그런 질문은 질문 자체로 성립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다. 그런 질문은 처음부터 개념적 오류라는 것이다. 잘못된 질문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강하게 지적해 낸 책이 있는데, 신경생리학자 맥스웰 베넷과 인지철학자 스티븐 해커 등의 저서로 최근 우리말로 번역된 <신경과학의 철학>(사이언스북스 펴냄)이다.

(방대한 분량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는 것도 이 분야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 서평이 '프레시안 books' 편집자가 애초 청탁한 분량보다 훨씬 길다. 서평의 핵심만 짧은 시간에 파악하실 분은 1절, 2절의 도표 그리고 마지막 7절만 읽어도 무방하다.)

데카르트가 마음과 몸을 구분하여 두 개의 독립된 실체로 본 것이 이분법의 난제였듯이 현대 신경과학자들도 그런 데카르트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고 이 책의 저자들은 강조한다. 마음 대신에 뇌를 살짝 대입하여 뇌와 몸이라는 이분법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재현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이 신경과학자들을 비판하는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경과학자들은 마음을 뇌로 설명할 수 있으며, 마음을 뇌의 작용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다양한 마음의 상태 즉 즐거움과 아픔, 믿음과 의심, 슬픔과 놀람, 두려움과 용기 같은 감정과 정감 혹은 느낌 등의 심적 상태를 관장하는 뇌의 특정 기능이 뇌의 특정 부위에 위치한다고 신경과학자들은 생각한다. 셋째, 그 위치를 찾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 바로 현대 인지신경학자들의 현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비판의 표현 방식이 거의 비난에 가까운 강한 어조로서 이 책에서 서술되고 있다.

ⓒScribner
비판의 대상이 되는 신경과학자들의 대표자는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함께 DNA 이중 나선 구조 모델을 찾아내 유명해지고 1962년 노벨 생리 의학상을 수상한 프랜시스 크릭이다. 크릭은 <놀라운 가설(The Astonishing Hypothesis)>(1994년)에서 지각이 뇌의 특정한 부위를 차지하여 생긴 결과라는 생각을 전개하는데, 저자들은 크릭의 이런 생각을 심각한 오류였다고 하면서 이 책을 시작한다. 뇌의 특정 부위를 마음의 작용이라고 보거나 뇌를 마치 마음의 전체인 양 가정하는 것이 오류의 핵심이라고 했다. 저자들은 이런 오류를 일러서 부분을 마치 전체로 혼동하는 '전체-부분의 오류(The Mereological Fallacy)' 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우리는 뉴런 없이 지각을 할 수 없지만 지각을 하는 주체가 뉴런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과학자들은 이런 오류를 악순환적으로 반복하고 있다고 이 책의 저자들은 주장한다(261쪽).

첫째, '세계'가 어떤 사람의 머릿속에 있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철학적 관념론 비판)
둘째, 우리가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머릿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뇌 국재성 이론 비판)
셋째, 우리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즉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지각 현상주의 비판)
넷째, 우리 머릿속에 어디서 지각이 일어나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저자들의 입장은 1000쪽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우리말) 책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주장되고 있다. 신경과학자들의 주장들은 저자들에 의해 현상주의(phenomenalism) 이론으로 평가 절하되고 있다. 현상주의 이론이란 철학적 실재론(realism)과 대비된다. 철학사에서 실재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인식의 대상이 실제로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실재라는 입장이다. 실재론의 철학자는 그 유명한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많은 형이상학자들을 들 수 있고 또한 대부분의 과학자들도 실재론자라고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이 믿는 실재론을 과학적 실재론이라 하여 철학자들이 믿는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들은 신경과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좁은 의미의 현상주의로 간주한다. 지각된 것은 뇌에 각인된 것으로 해석한다는 뜻으로 신경과학자들에게 매우 비판적 시각을 던지고 있다.

신경과학의 성과들을 현상론의 입장에서 보았기 때문에 신경과학자들이 전체-부분의 오류를 범하게 된 것이라고 저자들은 강조했다. 대상을 지각하는 메커니즘 혹은 지각된 것을 보전하는 장소가 두뇌 속 어디에 위치해 있다고 말하는 신경과학자들의 주장이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는 점을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다. 저자들이 쓰기를, "어디서 잭을 보았니?" 하는 물음에 우리는 "설도니아 극장에서" 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런 대답처럼 "내 왼쪽 눈보다 10센티미터 뒤 뇌피질 안쪽 부분에서" 라고 대답한다면 정말 오류의 극치일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261쪽). 마찬가지로 뇌가 세상을 인지하고 지각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느끼고 지각한다는 말을 저자들은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2. 현대 신경과학자들과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의식에 관한 역사적 연구 성과들을 잘 정리해 준데 있다. 저자들의 비판 대상인 현대 인지신경과학자들의 연구 성과들을 요약하여 설명했다는 점에서 나도 고마운 마음으로 읽고 공부했다. 이 책의 두 가지 주제 즉 신경과학자들이 범했다는 전체-부분 혼동의 오류와 환원주의의 오류를 접근하기 위해 먼저 근대 철학자들이 의식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아본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철학자인 르네 데카르트의 의식 이론 그리고 존 로크와 데이비드 흄을 간단히 정리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려 한다.

"나"를 이해하기 위한 데카르트 실체론 철학의 기초(638쪽)

1. 실체 없이는 사고도 없다.
2. 자기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자신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3. 이러한 실체가 "나"이다.
4. 내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의심할 수 없다. "나"는 실체다.
5. 의심을 하기 위해서는 의심을 행하는 어떤 것이 반드시 먼저 존재해야 한다.
6. 그래서 나는 신체와 전혀 다른 것이다.
7. 자아는 생각하는 비물질적 실체이며 신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나 신체와 구분된다.

"나"를 이해하기 위한 로크 경험론 철학의 기초(641쪽)

1. 자기는 생각하는 실체가 아니다.
2. 자기는 실체에서 수반된 것이다.
3. 자기의 동일성을 유지하면서도 실체는 변할 수 있다.
4. 자아는 심리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5. 자신이 경험한 것을 의식하는 것이 바로 자아다.
6. 자기가 현재의 생각과 행위를 하는 것도 의식을 통해서이며, 자기가 현재의 자기에게 자기로 존재하는 것도 의식을 통해서 가능하다.
7. 우리는 내관적으로(introspetion) 자기를 알고 있다.


로크와 조금 다른 흄의 자아(643쪽)

1. 지각없이 나 자신을 포착할 수 없다.
2. 로크와 같은 내관을 통한 자아는 없다.
3. 실체로서의 자아는 없으며, 경험적으로 수용되는 지각들의 다발이 곧 자아다.


철학사 교과서에 흔히 나오는 합리론자 데카르트와 영국 경험론자 로크와 흄의 인식론적 기초를 나열한 이유가 있다. 이 책의 주요 비판 대상이 되는 현대 인지신경과학자들의 사유 구조의 뿌리가 그들의 인식론적 기초에 있다고 저자들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들은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난점을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지적하고 있다(640쪽).

(1) 데카르트가 말하는 1인칭 대명사로서 "나"는 비물질적 실체를 가리키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신체를 가리키기도 하는 이중성을 은연중에 담고 있다. (2) 비물질적 자아 실체와 물질적 신체 사이의 상호 작용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경험적으로 불가능하다. 데카르트는 상호 작용의 근거로서 송과선 이론을 세웠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이미 판명 났다. (3) 정신적 실체가 지속적으로, 동일성을 유지하여 존재한다는 증명은 어디에도 없다.

저자들의 데카르트 비판점은 새로운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은 현대 신경과학자들이 데카르트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주장에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물의 1차 성질과 2차 성질에 대한 저자들의 비판적 관점이다.

전통적으로 로크와 아이작 뉴턴 그리고 갈릴레이 갈릴레오 등에 의해 중시된 사물의 1차 성질과 2차 성질의 구분을 보기로 하자. 1차 성질은 부피나 크기 혹은 무게와 같이 대상이 가지고 있는 정량적 성질이며, 2차 성질은 냄새나 색깔, 소리 등의 비정량적 성질을 의미했다. 저자들은 2차 성질에 대한 전통적인 구획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한다. 2차 성질이 단순히 우리 내부에 각인된 색깔이나 소리 등의 주관적 지각이 아니라고 말한다. 2차 성질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색깔이나 소리 같은 지각을 촉발하는 무엇이라고 한다(262쪽).

철학사에서 볼 때 칸트를 떠올리면 좀 더 이해가 쉽다. 저자들은 외부 대상이 우리 신경 말단에 닿아 모종의 작용을 함으로써 감각이 산출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2차 성질도 실재하는 대상이 뿜어내는 객관성을 지닌다고 했다(261쪽). 결국 색깔이나 소리 등이 주관적이라고 간주했던 갈릴레오의 생각에서 시작하여, 영국 경험론자 로크나 로버트 보일(1627~1691년), 대륙 합리론의 데카르트로 이어진 17세기 인지 이론은 잘못된 오류라고 이 책의 저자들은 단언했다.

나아가 현대 신경과학자들은 오류투성이인 17세기 이론에 집착하여, 사실이 아닌 형이상학적인 명제들 안에서 허우적거린다고 했다(264쪽). 예를 들어 저자들은 신경과학자들이 "저녁 황금빛 저녁놀을 보고, 은빛 파도를 보며 저녁에 즐기는 밥맛은 그 자체의 황금빛, 은빛이나 밥맛이 아니라 뇌 속에서 만들어진 심적 구성물"이라는 엉뚱한 소리를 한다고 심하게 꾸짖고 있다(266쪽).

그러나 우리는 이 책 저자들의 개념 분석적 탁월성을 인정해야 한다. 저자들은 "붉은 어떤 것을 보는 것과 어떤 것이 붉다고 아는 것은 지각의 형태이지 감각의 형태가 아니다. 보이는 색깔은 보인 것의 속성이지, 어떤 것을 보는 것의 속성이 아니다"라고 했다(276쪽). 그래서 어떤 것을 지각한다는 것은 가설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며, 가설을 형성하는 것이 어떤 것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또 저자들 주장의 핵심은 다음의 명제에 있다. "가설을 형성하는 것은 사람이지, 뇌가 아니다"(279쪽) 분명히 뇌는 사람을 대표할 수 없다.

이 책의 전체 주장은 간단히 아래 두 가지 명제로 요약된다. 첫째, 일상적 차원에서 뇌가 사람을 대신할 수 없다. 둘째, 과학적 차원에서 사람이 뇌로 환원될 수 없다. 이러한 저자들의 입장은 충분히 인정된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지칭하는지, 1000쪽이나 되는 두꺼운 이 책 어디에서도 나오지를 않는다. 그냥 사람이라고만 했다. 뇌과학을 비판하는 저자들의 철학적 우려, 그리고 첨단의 신경과학 때문에 전통의 철학적 인식론이 없어질 것 같은 저자들의 조바심과 불안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뇌'에 침식되어질 수 없는 '사람'의 뜻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저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추질 못하고 있다.

ⓒ최종덕

3. 뇌에 저장된 이미지가 의식이 아니라는 이 책의 입장

보이거나 들리는 것을 뇌에 각인되고 저장되는 하나의 심적 이미지로 간주하는 것이 신경과학자들의 문제라고 저자들은 강하게 비판한다. 저자들은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 제럴드 모리스 에덜먼이나 크릭의 과학적 성과 전체를 부정한다. 저자들은 다음과 말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뇌가 어떻게 지각된 대상의 모습, 운동, 깊이, 색깔을 올바르게 연합시키고 '마구 뒤섞어 놓지' 않으면서 정합적인 그림이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지 숙고해 보아야만 한다."(285쪽)

움직임에 반응하는 세포, 모양에 반응하는 세포, 색깔에 반응하는 세포들이 서로 잘 활동하여 정합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데, 현대 신경과학자들의 연구는 대부분 그것들을 정합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마구 뒤섞어 놓았을 뿐이라고 비난한다(286쪽).

정보는 의미와 다르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예를 들어 사각형의 보라색 상자를 볼 때 보라색과 사각형 그리고 상자다움을 따로따로 정보로 인식한 다음 그것들을 연합하여 전체를 지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존의 뇌신경학자들은 지각의 절차를 정보로만 다루었다는 것이다. 정보는 의미론적으로 정합된 지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과학자들에게 설득시키고 있다(287쪽). 우리가 나무를 본다는 것은 뇌 속에 있는 나무 혹은 나무의 이미지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정원에 있는 나무를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289쪽).

지각을 무의식에서 특정의 가설로 가는 과정이라고 본 헤르만 헬름홀츠의 인식론도 저자들에게 강하게 비판되고 있다. 헬름홀츠의 지각론은 감각을 지성화(intelletualization)시킨 오류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이는 곧 계산주의의 오류에 해당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데이비드 마는 시 지각을 정보 처리 과정의 문제로 간주했다. 마에 따르면 "시각이란 이미지를 통해 세계 속에 드러나는 것과 그 이미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291쪽) 마는 뇌가 외부 세계를 서술하기 위하여 이미지의 특징을 표상하는 상징계를 만들어가는 작용으로 간주되었다고 저자들은 지적했다.

지식(인식)은 상태가 아니라 능력과 유사하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다시 말해서 지식은 경험적 심적 상태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전체적인 지각 능력에 기인한다는 뜻이다. 지각은 인식의 일차적 출처이다. 그런데 어떤 것을 어떻게 할지를 아는 것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르다고 말한다. 지식과 인식 능력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사전 설명으로 여겨진다.

저자들은 여기서 반복적으로 뇌와 사람의 차이를 말한다. "어떤 것을 아는 것(know what),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아는 것은(know how) 서로 다르지만", 모두를 아는 것은 가능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람이지 사람의 뇌가 아니다"(307) 나아가 지각이나 추리, 전해들은 이야기들을 통해 지식을 획득하는 것은 뇌가 아니라 그 뇌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수없이 반복함으로써 뇌와 사람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데카르트가 이를 혼동하였듯이 현대 신경과학자들도 마찬가지로 혼동하고 있다는 것을 저자들은 강조한다. 이러한 혼동들, 즉 뇌를 사람으로 혼동하는 '전체-부분의 오류'의 실제를 보여주기 위해 저자들은 "뇌가 아니라 사람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많은 증거 자료를 대고 있다. 예를 들어, 앞서 들은 사례 말고도 뇌는 정보를 수반하거나 소유한다고 말하는 것도 오류이고, 좌반구라든가 우반구라는 위치 개념도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했다(309쪽). 신경과학자 피터 밀너와 에릭 캔들을 염두에 두고서 "기억은 신경계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인지 능력이다"(310쪽)라고 썼다. 마찬가지로 "기억은 사람이 보유하는 지식이지, 뇌에 저장한 지식이 아니다"(319쪽)라고 재차 표현한다.

신경계 시냅스 연구 성과에 따르면 지각은 시냅스의 전기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며 그 과정을 통해 정보화 혹은 부호화(encoding)되는 현상으로 추측할 수 있다. fMRI를 통한 측정 자료는 지각에 해당하는 부호화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확증하고 있다. 물론 그 인과관계를 아는 것은 요원하지만 말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신경과학의 성과들을 조금도 수용하지 않는다.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각의 부호화는 없다. 뇌의 특정 부위에 특정 정보를 부호화하는 것도 없다. 왜냐면 신경적 부호와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333쪽)

뇌의 특정 부위에 따라 특정 지각에 해당하는 부호화 연구 성과를 조금도 인정할 수 없다는 저자들의 결의가 대단하다. 저자들의 철학적 입장을 존중하지만, 과학의 성과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독단으로 보인다. 단순히 저자들의 서술 방식만으로 평가하건데, 저자들은 신경과학자들이 이룩해 놓은 기존의 과학적 성과를 부정하기 위하여 또 다른 과학적 반대 명제를 과감히(경험적 증명 없이) 사용하고 있다.

4. 정서, 느낌, 정감

저자들은 정서(emotion), 정감(affection) 그리고 느낌(feeling)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한다. 정감(affection)이나 동요를 느끼는 것이나 기분, 모두 느낌(feeling)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사람은 사랑이나 미움을 느끼고 흥분이나 놀라움을 느끼며 즐거움이나 우울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사랑이나 미움의 정감은 정서(emotion)에 해당한다. 흥분이나 놀라움은 동요(agitation)의 느낌이다. 즐거움이나 우울함은 일종의 어느 정도 지속적인 기분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정감의 느낌과 감각은 다르다. 감각은 느끼는 신체 부위가 있으며 신체 상태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마찬가지로 정감이나 정서는 감각과 달리 특정 신체부위에 국한된 느낌이 아니라는 것이다(392쪽).

이러한 논리적 준비는 정서와 정감의 느낌이 신경계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에드먼드 롤스의 책, <두뇌와 정서(The Brain and Emotion)>에서 시도한 정서의 신경 기반을 비판한다. 저자들은 우선 롤스의 책에서 말하는 정서의 사례를 주목했다. 롤스는 정서의 실험 연구 대상으로서 갈증과 굶주림 그리고 욕정을 택했는데, 이 책의 저자들이 보기에 롤스가 말한 사례들은 정서와 무관한 욕망만을 다루었다고 비판했다.

정서는 감각과 달리 특정 신체 부위에 해당하는 느낌이 아니라는 논증을 앞서 했는데, 롤스의 갈증과 욕정 등의 욕망은 신체 부위를 건드리거나 차지하는 감각적 느낌일 뿐이라고 했다. 쉽게 말해서 갈증의 감정은 실제로 목 부위가 말라서 고통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롤스의 논거는 처음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정서를 신경 기반으로 환원하려는 목적을 가졌지만 결국 비국재성(non-local) 정서와 무관하게 굶주림 같은 국재성(local) 욕망만을 다루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393쪽).

나는 저자들의 롤스 비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첫째 부분-전체의 오류는 전체의 특성을 국재적(local) 부분으로 위치시킨다는 데서 발생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특성을 뇌의 신경 기반으로 환원하여 해석하는 시도는 저자들의 의견에 따르자면 결국 비국재적인 무엇을 국재적인 특성으로 설명하거나 대체하려는 국재성의 남용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국재성 남용을 지적한 저자들의 논증 방법론은 저자 자신의 주장에도 거꾸로 적용된다. 다시 말해서 배고픔이나 갈증 혹은 욕정 등의 느낌을 국재적 감각만으로 간주해버린 저자들의 시각도 국재성의 오류를 스스로 범하게 되고 만다는 뜻이다.

이런 비판과 다르게 정서 일반에 대한 설명은 이 책에서 잘 정리되고 있다. 재정리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정서는 동요(agitation)와 다르다. 동요는 단기간에 일어나는 정감적 교란 상태이며, 일반적으로 전혀 예기하지 못한 것이 촉발한다. 정서는 행위를 초래하지만, 동요는 동기화되는 행위를 일시적으로 억제한다(396쪽).
(2) 정서는 기분(mood)하고 다르다. 기분은 빈번하게 변화하지만 정서는 상대적으로 지속력이 더 높다(397쪽). 그래서 동요는 일회성 정서이며 지속적 태도인 기질적 특성과 다르다(399쪽).
(3) 어떤 사람을 '정서적'이라고 말할 때 그가 타자들에게 사랑이나 증오를 느낀다거나 수많은 공포와 희망을 품는다는 사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정서적 동요에 쉽게 빠질 수 있고 감정을 표출시키기 십상이며, 분노, 사람, 증오 등을 제멋대로 지나치게 표출하여 자신의 정서가 자기 결단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경향과 태도가 있음을 의미한다(400쪽).

이 책은 이처럼 정서에 대한 전통적인 철학적 분석들을 잘 설명하고 있으며, 이런 점들은 이 책의 큰 장점이다. 그런데 저자들의 철학적 견해는 신경과학의 연구 성과에 대하여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본다. 신경생리학자인 조지프 르두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조건으로 정서의 중요성을 들었다. 그러나 저자들이 보기에 르두는 정서를 느끼게 되는 인과적 조건과 정서의 원인을 같다고 함으로써 개념적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정서는 뇌 상태도 아니며 신체 반응도 아니라고 저자들은 르두의 신경생리학 전체를 비판했다. 뇌 상태와 신체 반응은 대부분 정서를 구성하는 '지향성'이나 '대상을 향한 방향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407~411쪽)

내가 보기에 르두를 비판하는 저자들의 견해는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저자들은 르두의 신경생리학 전반을 너무 간단하게 그리고 단정적으로 무시해버렸다. 정서의 지향성 때문에 정서는 신경 기반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명제 하나로써 르두의 신경과학이 비난의 대상으로 단죄되었다. 이러한 단죄는 일종의 독단적 서술 방식의 범례가 된다. 그래서 나는 저자들의 원칙을 이해하면서도 그들의 서술 방식을 수용하기 어렵게 되었다.

저자들은 신경과학계의 철학자로 평가받는 다마지오마저 세차게 비난한다. 다마지오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르두에 대한 비판의 논지와 같다. 다마지오는 자신의 신체 표지 가설(somatic marker hypothesis)로 유명해졌다. 그의 신체 표지 가설은 심상과 행동 유발 사이의 관계를 임상적으로 밝힌 이론이다. 심상이나 신체적 변화(somatic marker)가 의사 결정이나 행동 유발에 도움이 된다는 다마지오의 생각은 현학적 추론이 아니라 임상적 귀결로 추출된 것이다.

반면 저자들은 다마지오의 이론이 정서와 심상의 개념을 혼동한데서 오는 오류라고 단정하였다.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다마지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1) 다마지오는 정서를 심상이 초래한 신체 변화라고 했는데 이는 심각한 혼동이다. (2) 다마지오는 정서와 느낌을 구분했는데, 실제로는 구분할 수 없다. (3) 정서의 원인을 통해서 정서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그들 사이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4) 신체 표지 가설은 잘못된 것이다(414~426쪽).

앞서 말했듯이 다마지오에 대한 비판의 방법론 역시 다른 신경과학자들을 비판하는 요지와 같다. 저자들은 다마지오의 이론을 비판했지만, 그 비판의 방법은 치밀한 논증의 귀결이 아니라 주관적이고 단정적인 부정 논법에서 그치고 말았다. 나 역시 다마지오의 신체 표시 가설에는 논리적 약점이 노출되었다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외부로부터 촉발된 기분이나 느낌의 상태가 행동을 더 유발시킬 수 있다는 언명 가운데에는 자기 순환적 논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일선 과학자들의 임상적 혹은 경험적 실험의 결과물을 연역적인 철학의 추론을 통해 단정적으로 반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 저자들은 과감하게 다마지오의 임상 결과를 개념적 추론으로 간단히 단죄하였다.

5. 감각질에 대하여

저자들은 감각질(Qualia) 개념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다. 감각질 개념은 원래 철학자들이 만든 것이지만, 바로 이 개념 때문에 신경과학자들이나 인지철학자들도 의식에 대한 연구를 경험 과학의 차원으로 고착시켜 버리는 유혹을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신경과학자들은 철학자들이 잘못 만들어 놓은 감각질 개념을 수용하여 부분-전체의 오류를 확산시켜 놓았다고 저자들은 비판한다(528쪽).

네드 블락의 감각질 정의는 다음과 같다.

"감각질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는 방식들, 고통을 당하고 느끼는 방식을 포함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감각질은 심적 상태를 갖는 것과 같다. 감각질은 감각, 느낌, 지각 그리고 사고와 욕망의 경험적 특성이다."

여기서 저자들의 비판은 심적 상태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 사용된 것이라는 데 있다. 심적 상태라는 개념은 지각이나 감정 일반을 경험적 기준으로 환원하기 위한 전단계 개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감각질 개념 안에는 (1) 모든 경험이 서로 다른 질적 특성을 가지며 (2) 각각의 모든 경험에는 그에 해당하는 특수한 느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3) 뇌가 감각질을 수용하도록 맞춰져 있다는 뜻을 포함한다.

물론 저자들은 그런 감각질 개념을 부정한다. 어떻게 부정되는지를 이 책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아서, 나는 저자들의 부정 논증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저자들의 의견을 로저 스패리의 인용을 통해 최대한 경청해보자.

"많은 과학자들이 그렇듯이 우리는 커피향, 오보에 소리, 지중해의 하늘 색깔이 마음 안에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갈릴레오, 데카르트, 로크, 보일에 동감한다면 우리는 뇌가 사물들의 질서정연한 도식(cosmic schema), 즉 색깔, 소리, 고통, 즐거움, 심적 경험의 다른 양상들은 뇌에 부가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특별한 속임수를 쓴다고 생각될 수 있다." (569쪽)

뇌가 감각질을 수용할 수 있다는 뜻은 감각질 자체가 경험적 환원체로 간주되는 것인데 저자들은 이 점을 신경과학자들의 결정적 오류로 보았다. 감각질은 근대 경험론 철학자들이 말하는 인상과 관념을 현대적 언어로 치장한 개념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사적인 대상'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고 저자들은 말하고 있다(592쪽).

6. 의식과 자아 혹은 자기 의식 : 도대체 자아란 무엇을 말하는가?

의식과 뇌의 관한 이 책의 내용은 저자들의 입장에 따라 좀 더 자세히 정리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의식에 관한 다양한 연구 성과를 일목요연하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식의 주체는 "뇌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은 이 책의 핵심 명제이다. 비록 부정과 비판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이 책은 뇌에 대하여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불행하게도 정작 저자들의 기본 입장인 '사람'에 대하여 설명해 놓은 것이 거의 없다. 나는 저자들이 표현한 '사람'의 의미를 문맥과 행간을 통해 대충 이해할 수 있다. '뇌'가 부분이라면 '사람'은 전체에 해당한다는 점을 미루어, 나는 간접적으로 사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약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의식에 대하여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잘 정리하여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부분으로서 뇌가 아니라 전체로서 사람을 암시하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것은 '지각력 있는 존재'라는 개념이다. 전체로서의 지각력 있는 존재는 단순한 물리적 시스템이 아니다. 전체로서의 자아는 단순한 물리적 시스템이 아니라 지각력 있는 시스템이다. 그래서 물리적 시스템인 뇌를 통해 의식을 설명하려는 신경과학자, 인지과학자 그리고 유물론적 철학자의 가정과 가설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의식은 비물리적 특성이라고 저자들은 말하지만(593쪽) 이러한 주장은 일종의 동어반복처럼 여겨진다. 지각력 있는 존재자는 물리적 존재자에 의존하지만 그에 환원되지 않는다고 저자는 말한다(594쪽). 물론 저자는 의식이 물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해서 의식이 불가사의한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쓸데없이 생길 수 있는 신비주의의 염려를 불식하고자 했다(595쪽). 저자들은 의식의 진화적 창발성을 굳게 유지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의식이 생기론적 창발은 아님을 확인하고 있다(599쪽). 이 정도 논의라면 우리는 저자들의 입장을 대충 추측할 수 있다. 생기론도 아니고 기계론도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실제로 상식이 있는 현대 과학자나 철학자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기초적인 생각들이다.

저자들은 의식 수반론(epiphenomenalism)도 거부한다(610쪽). 저자들은 로저 펜로즈의 <황제의 마음(Emperor's New Mind)>에서 표현된 비환원주의 의식 이론도 부정한다. 펜로즈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의식은 우리가 새로운 판단을 형성해야만 하는 경우, 사전에 규칙이 수립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 상황을 조정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다. 판단 그 자체는 의식의 활동을 나타내는 것이다. 판단을 비알고리듬으로 형식화하는 것이 의식의 특징이다." (533쪽)

그러나 저자들은 펜로즈의 입장을 '지나치게 지성화된(over-intellectualized'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나는 지나치게 지성화되었다고 평가한 저자들의 의도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펜로즈 해석의 기반은 의식의 신경과학적 특성들을 철학적 형이상학으로 포장해버렸다는 데서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펜로즈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수반론과 비환원주의를 동시에 포괄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들은 의식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조금의 생물학적 요소도 인정하지 않는다. 다음의 문장은 의식에 대한 연구에서 생물학적 배경을 축소하거나 배제한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뇌 활동은 의식에서 생물학적으로 배제되는 정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배제된다." (621쪽)

여기서 저자들의 입장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인간이 의식적 존재라는 것은 개념적 진리다. 인간과 다른 고등동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연적 진리다. 그러나 인간과 고등동물이 의식적 존재라는 것은 우연적 진리가 아니라 개념적 진리다." (625쪽)

저자들이 말한 '개념적'이라는 뜻은 '필연적'의 의미로서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저자들이 실토했듯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한 판단은 귀납 추론이나 경험 과학의 연구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했다. 단지 필연적이고 연역적 사실이라고 강조한다(632쪽). 결론적으로 말해서 저자들이 말하는 의식은 과학자들이 범접할 수 없는 당위 세계의 존재가 되고 만다. 결국 저자들은 과학 연구의 기존 성과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과학자와의 대화를 단절시키고 있다. 개념의 철학과 귀납의 과학 사이에 그나마 어렵게 만든 다리를 환상이고 허황되고 혼동된 오류라고 말할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한 신경과학자들의 의식에 대한 의견을 한 줄로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최종덕

7. 과학과 철학의 소통

기억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철학이 과학에 대하여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기억'에 대하여 최근의 과학적 연구 이상으로 긴 역사를 통해 이뤄낸 철학자들의 전통적 연구들도 많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근대 경험론 철학자들 그리고 프로이트나 들뢰즈 등 현대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철학자들은 기억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존재론적으로 혹은 실존적으로 전개해 왔다. 그들은 깊은 형이상학적 사유, 엄밀한 인식론적 추론, 실존적 고통과 역사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기억'에 관한 철학적 해석을 세상에 내놓았다.

만약 그러한 철학적 해석들을 환원주의라는 단일한 기준으로 재단해버린다면 인간 지식의 역사는 기계적 언어로 가득차게 될 것이다. 정당화의 논리는 풍부해지겠지만 발견의 논리가 빈약해져서 정작 일선의 과학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과학의 성과를 형이상학적 기준으로 재단해버린다면 독단과 이념만이 난무할 것이고 지식은 겉으로 가득차 보이나 풍선 같은 공허함으로 노출될 것이다.

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방식은 상대의 논리적 구조와 누적된 성과를 인정하는 데서 찾아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책의 저자들은 신경과학의 성과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 과학 일반, 특별히 신경과학에서 환원주의를 거부하는 점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러나 환원주의를 비판하기 위하여 과학 일선의 누적된 성과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환원주의 비판'이라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으며 오히려 철학적 비판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게 된다.

예를 들어, 부분이 전체로 대체되어 버리는 오류 혹은 국재성(locality)의 오류를 보여주기 위하여 이 책의 저자들은 사람이 뇌로 환원될 수 없으며 뇌가 사람 전체를 대신할 수 없음을 논증한다. 이 논증을 위한 언명들 중에서 "뇌가 아니라 사람이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기에, 나는 시간을 할애하여 일부러 그런 표현이 몇 번 나오는 지를 세어봤다. 이 책이 워낙 두꺼운 책이라 전체를 셀 수 없었고 이 책 2부에만 국한하여 세어 보았더니 무려 39번이었다. 한편 앞서도 말했듯이 '사람'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한 부분은 거의 없었다.

나는 이 책 저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의식, 감정, 의지, 정감, 같은 개념에 대한 전반적인 해설을 일목요연하게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기존의 신경과학자들의 연구 성과나 인지철학자들의 해석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방법론적 과단성에 놀랄 뿐이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단칼에 베어버리는 언어적 도구를 나열하면 그 과단성을 엿볼 수 있다.

영어 표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 책의 공동 역자들이 아주 잘 번역해 놓은 우리말을 기준으로 볼 때, 기존의 개념들을 비난하는 저자들의 수식어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엉터리, 혼돈된, 혼동의, 잘못된, 허황된, 환상, 오류의, 모순된, 오도된, 무의미한, 우유부단한, 퇴보된, 조작된, 혼란스런 등과 같은 강한 어조로 문장을 전개해 가고 있다. 이런 방식은 비판 대상인 상대방과의 합리적 소통을 그만하겠다는 간접적 의사로 여겨질 수 있다. 좁은 영역에서 철학과 과학 사이의 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넓은 영역에서 소통과 대화, 만남과 통합 일반을 거부하는 뜻으로 비춰질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이 비판한 신경과학자들의 문제점들을 다시 잘 살펴보면 신경과학자들은 철학적 실재론에 무지하거나 아니면 과학적 실재론자조차 될 수 없는 것으로 평가 절하되었다는 점이다. 신경과학자들이 인식하는 지각을 뇌 속 특정 지점에서 일어나는 전기화학적 신호들의 다발로 간주하며 그렇게 그들의 접근 방식을 비판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러한 신경과학자들의 입장을 현상주의적 관념론으로 몰아가는 저자들의 비판은 과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신경과학자들은 오히려 저자들보다 더한 실재론자이다. 저자들이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면 신경과학자들은 과학적 실재론자에 해당된다. 이 책에서는 관념론과 실재론의 논쟁을 다루지 않고 있지만 저자들이 신경과학자들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획일화의 오류를 거꾸로 범하고 있는 듯하다.

최근 들어 과학인문학이니 융합 학문이니 하면서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상호소통론, 통합 연구, 공동 정책론 등의 소문이 횡행하지만 관련 지식인 일선에서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관심보다 의도된 무관심이 더 많은 듯하다. 인문학자는 과학의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과학이 어렵다는 이유로 과학을 멀리한다. 과학자는 인문학을 효용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허황된 이야기라며 거절한다.

한시라도 빠지지 않고 스마트폰, 노트북, 전자시계, 자동차, 카메라 등, 자기 몸과 함께 하는 반도체가 수백 개가 되면서도 반도체의 과학적 원리를 공부하는 것에 전적으로 무관심하거나, 첨단의 과학적 성과물이 무조건 인간성을 위배한다는 적대적 선입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한편 과학을 맹신하면서 과학기술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과학 유토피아의 신봉자들이 더 늘어나고 있다. 이들 모두 문명의 감각을 닫아 버리고 지식의 자기함정에 빠지고 있다.

과학자는 이미 인문학자이다. 세상에 인문학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고 자기 행동과 자신의 판단을 염려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인문학자이다. 그런 인문학자 중에서 과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과학자라고 부른다. 그래서 과학과 인문학은 원래 상호배제적일 수 없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놓인 현실적 갈등의 원인은 다른 데 있다. 첫째,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변화를 기꺼이 그리고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과학자이다. 둘째, 인간을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은 더 중요하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인간 이해가 없는 사료 분석에 매달린다면 그는 인문학자가 될 수 없다. 특출한 실험 성과로 관련 특허를 많이 가진 사람도 지식 권력 욕구에 빠지면 그는 더 이상 과학자가 아니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인문학자가 아니다. 남들이 이루어 놓은 지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식 네트워크를 무시하는 것이며 이는 곧 과학 추론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런 사람을 더 이상 과학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최종덕

이 책은 첨단의 신경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지식의 현장을 서술하고 있다. 철학의 핵심은 비판과 반성이다. 그래서 신경과학과 조우하는 철학의 목소리는 비판의 목소리부터 들리게 된다. 그러나 소통을 원하는 철학은 신경과학의 연구 성과를 인정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비판의 수준을 맞추는 일이 중요하다. 연역적 철학의 원리를 귀납적 과학의 방법론에 고집스럽게 적용하다보면 과학은 철학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철학은 개념 분석이라는 막강한 연역적 도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사유의 도구를 통하여 지난 2500년 지식의 역사를 끌고 왔다.

그러나 철학의 개념이 과학의 자연을 지배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 사실 2500년 전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에도 철학의 개념이 자연의 사실을 통제해 본적은 없었다. 오히려 자연의 사실을 개념화시켜주는 뒤치다꺼리를 철학이 맡아왔다. 또한 자연이 비윤리적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을 철학이 맡아왔다. 이런 점에서 과학이 철학의 소리를 귀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경험적 귀납의 과학을 이끌어 갈 수 있다는 독단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철학은 전통이라는 이름의 지식족보의 자기한계로부터 과감하게 탈출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철학과 과학의 소통은 가능해진다.

내가 보기에 환원주의 비판과 전제-부분 오류에 대한 비판이라는 이 책의 기본 방향은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논지를 전개하는 방법론에서 약간의 철학적 독단이 드러났다. 이 점 때문에 방대한 지식을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일선 신경과학자들에게 외면당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책에 전개된 신경과학의 철학적 내용의 포괄성과 지식의 조직성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책 후미 70쪽이나 되는 큰 분량의 부록으로 실려진 데닛과 설의 심리 철학 정리 판은 일반 독자에게 매우 유용한 마음의 안내서를 선물하고 있으며 전공자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일반 독자들도 시간의 여유를 갖고 이 책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신경과학계 전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판 출간은 한국 지식계의 의미 있는 진보다. 방대한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간한 번역자들의 끈기는 정말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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