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표, 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
[편집국에서] 박상표를 추모하며
2014.01.24 09:32:47
박상표, 그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나?
지난 19일 밤늦게 지인들로부터 급한 문자 혹은 전화 몇 통이 왔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국민 건강을 위한 수의사 연대 박상표 정책국장 별세."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수년째 박 국장이 일종의 희귀병을 앓으며 고통을 받아온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다니.

그런데 이어서 전해지는 소식은 더욱더 놀라웠다. 박상표 국장이 서울의 한 호텔에서 오후에 숨진 채 발견되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하고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연말에 받은 박상표 국장의 답장을 보내지 못한 메일도 생각이 나고, 이제 세 살 정도가 되었을 딸아이 생각도 났다. 도대체 왜?

박상표 국장과 <프레시안>과의 인연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이른바 '4대 선결 조건'의 하나로 광우병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재개를 추진했었다. 그 때 노무현 정부는 '소의 치아로 나이를 감별해서 30개월 미만의 쇠고기를 수입하면 광우병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논리를 폈었다.

노무현 정부의 선동에 "그건 아냐"를 외치며 등장한 전문가가 바로 박상표 국장이었다. 수의사였던 박 국장은 꼼꼼한 자료 검토와 치밀한 논리 전개로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이어지는 통상 관료의 혹세무민을 폭로했다. 고백하건대, 그가 없었다면 <프레시안>을 비롯한 일부 언론이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개방 움직임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촛불이 '독'이 되었다

수년간 박상표 국장이 여론을 환기해온 덕분에, 결국 수많은 시민이 2008년 촛불을 들고서 거리로 나섰다. 그 여름, 그는 거리에서 방송에서 시민들과 만나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이 왜 심각한 위험을 야기할 수 있는지를 외치고 또 외쳤다. 시민들이 그에게 붙여준 '촛불 의인'이라는 별명은 참으로 적절했다.

돌이켜 보면, 그 여름의 촛불은 박상표 국장에게는 심각한 독이었다. 우선 그 때 그의 몸 상태가 엉망이 되었다. 희귀병을 치료하느라 요양을 해도 모자랄 상황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을 막느라 동분서주했으니 그럴 만했다. 그 즈음부터 그가 보낸 메일에서는 항상 다음과 같은 호소가 빠지지 않았다. "심신이 지쳐서 쉬고 싶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 여름 촛불 덕분에 서울시 금호동에 개원한 작은 동물 병원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는 기회도 놓쳤다. 만사를 제치고 동물 병원에만 매달려도 형편이 빠듯한 상황에서, 오히려 제 돈을 쓰면서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운동에 쏟아부었으니…. 동물병원 운영이 엉망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재주가 많았던 박상표 국장은 가벼운 호주머니 사정을 타개하고자 바쁜 시간을 쪼개서 번역과 집필에 나섰다. 캐나다 수의사 데이비드 페린의 <빨리요, 송아지가 나오려고 해요>(고려원북스 펴냄)나 <조선의 과학기술>(현암사 펴냄) 같은 책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랬다! 그는 수의사면서도 과학사, 의학사, 지역사 등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하나 같이 경제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자기보다는 타인을 걱정했다. 박상표 국장이 자신의 문제의식을 중간 정리한 <가축이 행복해야 인간이 건강하다>(개마고원 펴냄)를 펴내고 나서, 주고받은 메일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생각보다 책이 안 팔려서 출판사에게 많이 미안합니다." 그는 이런 사람이었다.

ⓒ프레시안(손문상)


회의하는 과학자

2008년 촛불 집회 와중에 박상표 국장이 보였던 강경한 모습 때문에, 그를 고집불통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는 뚝심 있는 사회 운동가였다. 그는 2008년 촛불의 열기가 꺼진 뒤에도, 광우병을 둘러싼 과학 연구나 규제 정책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회운동도 유행을 좇는 어떤 이들과도 달랐던 것이다.

그 와중에 박상표 국장은 가끔씩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광우병의 위험이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년간 자기 활동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 수 있는 이런 질문을 서슴지 않고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의 정체성은 바로 끊임없이 회의하는 과학자였다.

사실 박상표 국장이 적당히 타협했더라면 대학에 자리를 잡는 것도 가능했다. 실제로 수의과대학의 몇몇 교수들이 그에게 공동 연구도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주류로 편입되는 대신에 끝까지 시민에 편에서 '대항 전문가(counter expert)'로 남았다. 양심뿐만 아니라 (그가 그토록 옹호했던) 과학까지 배신하는 주류 전문가의 모습을 그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최근에 박상표 국장의 관심이 이른바 '청부 과학자' 비판으로 이어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담배 회사 내부 문건 2042건을 분석한 '담배 회사 내부 문건 속 한국인 과학자 분석' 등의 논문을 통해서 담배 회사의 '컨설턴트'로 활동한 한국인 과학자를 폭로해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대항 전문가' 박상표는 영원하다

박상표 국장은 떠났다. 한국 사회는 그에게 받은 것의 100분의 1도 보답하지 못하고 그를 보냈다. 정작 그를 보내는 한국 사회의 마지막 대접은 고작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 따위의 기사 몇 건뿐이었다. (그에게 큰 신세를 졌던 진보 언론을 자처하는 일부 언론도 다르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 점이 제일 속상하다.

하지만 박상표 국장은 앞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주류 전문가에 맞서 시민의 이익을 옹호한 대항 전문가의 한 전범을 보여줬다. 한국 사회에서 대항 전문가로 나설 용기를 내는 후배에게 박 국장은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항 전문가를 격려하는 상이 제정된다면, 그 상의 이름은 당연히 '박상표 상'이 되어야 한다.

차일피일 미루다 연말에 받은 안부 메일의 답장을 보내지 못했다. 그 때 따뜻한 격려의 인사를 전하지 못한 것이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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