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권력 독점한 기호학파의 산실, 논산고을
3월 고을학교
2015.02.16 14:11:51
조선권력 독점한 기호학파의 산실, 논산고을

3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제17강으로,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며 후기 조선의 권력을 독점한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산실이었으며 물산의 집약지로서 충청도 교역의 중심지였던 논산(論山)고을을 찾아갑니다. 특히 논산은 백제 최후의 결전지인 황산벌의 현장이며 논산 육군제2훈련소는 젊은이들의 고뇌 어린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38년 만에 건립된, 높이 18.2m의 관촉사 은진미륵 Ⓒ논산시


고을학교 제17강은 3월 22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연무IC→강경지역(옥녀봉/죽림서원/임이정/팔괘정/미내다리/원목다리)→관촉사→탑정호(계백장군유적지/김장생유적지)→연산지역(연산아문/연산향교)→점심식사 겸 뒤풀이(막걸리를 곁들인 바비큐우렁쌈밥)→개태사/개태사지→노성지역(노성향교/노강서원/파평윤씨유적지)→서논산IC→서울 순입니다.


▲논산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7강 답사지인 논산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네가 연산의 가마솥과 은진의 미륵과 강경의 미내다리를 보았느냐”

논산(論山)은 지형적으로 동쪽은 계룡산군(鷄龍山群)의 천황봉, 향적산(香積山), 국사봉(國事峰)과 대둔산군(大屯山群)의 대둔산, 월성봉(月峰山), 작봉산(鵲峰山) 등 비교적 높은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은 금강(錦江)과 그 지류인 노성천(魯城川), 논산천(論山川) 등이 금강에 유입되는 넓은 충적지(沖積地)로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어 전체적으로 동쪽이 높고 서쪽은 낮은[東高西低]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충남의 남부 중앙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공주, 서쪽으로 부여, 동쪽으로 대전과 금산, 남쪽으로 전북 익산· 완주와 접하고 있습니다.

철도의 개통으로 내륙교통의 요지가 된 논산이 지금은 중심지지만 해로(海路)를 주로 이용했던 조선시대에는 나라 안팎의 온갖 물산(物産)이 금강을 통해서 들어와 흥청거렸던 곳은 강경포구였습니다. 이러한 물산의 내륙 수송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강경에는 조선 후기에 세워진 튼실하고 아름다운 돌다리가 둘이나 남아 있으니 미내다리와 원목다리입니다.

미내다리[渼奈橋]는 지금 강경천인 미내천(渼柰川)에 세워진 다리라는 뜻이고, 달리 조암교(潮岩橋)로도 불렸는데 조수(潮水)가 물러가면 바위가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기록이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전하고 있어, 당시 이 다리 밑으로 바닷물이 드나들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다리가 놓이기 전 장마철에는 홍수로, 겨울철에는 많은 눈으로 교통이 두절되고 인명 피해가 자주 발생하여 이를 안타깝게 여긴 강경 사람 석설산(石雪山), 송만운(宋萬雲)이 주동이 되어 황산의 유부업(柳富業)과 승(僧) 경원(敬元), 설우(雪遇), 청원(淸元), 여산의 강명달(姜明達), 강지평(姜之平)이 1년 만에 공사를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원목다리[院項橋]는 백제 의자왕이 이곳에 화초를 심어 놀이터로 만들고 꽃이 피는 계절에 와서 놀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들꽃미’라는 낮은 산의 서남쪽에 있습니다. ‘원목(院項)’이라는 이름은 간이 역원(譯院)과 길목(項)의 뜻이 합쳐진 것으로, 나그네가 쉬어가는 주막을 뜻하며, 장대석으로 홍예를 세 칸 쌓은 형태가 전체적으로 미내다리와 비슷하며 영조 7년(1731)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에 전하고 있습니다.

논산, 특히 강경(江景)은 금강(錦江)과 논산천(論山川)이 합류하는 가항(可航) 포구로서 강경평야, 논산평야 등 국내 굴지의 미곡 생산지를 배후에 두고 조선 후기 이래 전국적인 상업중심지로 성장하였으며 한때 전국 3대시장의 하나로 꼽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군산(群山)의 개항에 이은 철도의 개통으로 강경의 시장권도 점차 위축되었으며, 충청도 전체의 시장권이 철도와 개항장을 거점으로 제국주의적 상품 유통시장으로 재편되었고 그 결과 조선시대 이래 전통적 시장권의 중심이었던 강경의 지위가 하락하고 개항장인 군산이 그 영광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논산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네가 연산의 가마솥과 은진의 미륵과 강경의 미내다리를 보았느냐”고 물어본다고 할 정도로 이 세 가지는 살아생전 꼭 봐야 할 논산의 명물이었습니다. 민간이 주도하여 놓은 돌다리나, 500명이 먹을 밥을 짓는 큰솥이나, 동양 최대의 돌미륵이 논산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이 물산이 넉넉하고 경제가 번성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기호학파 중심지로서 김장생, 김집, 윤증의 출신지

물산이 풍족하니 그 땅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툼도 많았을 터인데 백제와 신라, 그리고 후백제와 고려의 치열한 격전장이었던 황산벌은 논산의 옛 이름이었습니다. 황산벌에서 5천의 군사로 신라 5만 군사와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계백장군((階伯將軍)의 묘와, 그로부터 270년 뒤에 후백제의 기치를 걸었으나 고려에 투신한 견훤(甄萱)의 묘도 있어 논산에는 백제의 애환이 여러 곳에 서려 있습니다.

또한 고려를 건국한 정복자 왕건(王建)의 원찰로 개태사(開泰寺)가 세워졌고 고려의 왕권을 공고히 다진 4대 광종(光宗) 역시 논산에 대형 미륵보살[은진미륵, 恩津彌勒]을 세워 차령(車嶺) 이남의 사람들에게 고려 왕실의 힘을 과시하기도 하였습니다.

논산은 기호학파의 중심지로서 조선의 예학을 주도했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소론(小論)의 거두 명재(明齋) 윤증(尹拯)이 모두 이곳 출신입니다. 특히 김장생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수제자로서 김집의 아버지이자 이후 노론의 영수가 된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같은 기호학파였으나 훗날 소론의 거두가 된 명재 윤증은 노론의 거두가 된 송시열과 회니논쟁(懷尼論爭)을 불러일으켰는데 송시열의 고향이 회덕이고 윤증의 고향이 니산(노성)이라 지명의 앞 글자를 따서 붙여진 작명입니다.

송시열과 윤증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으나, 윤증이 송시열에 대해 그의 정치적 편견으로 남인(南人)들이 죽임을 당했고 지나친 독선과 주자(朱子)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로 평가하자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정적(政適)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서인(西人)은 급격하게 분파되기 시작했으며 송시열을 따르는 세력은 노론(老論), 윤증을 중심으로 모인 세력은 소론(少論)으로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임이정(臨履亭)은 김장생이 인조 4년(1626) 후학들에게 강학하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원래 황산정(黃山亭)이라고 하였으며 <임이정기(臨履亭記)>에 의하면 <시경(詩經)>의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못에 임하는 것같이 하며, 엷은 어름을 밟는 것같이 하라(如臨深淵, 如履薄氷)”는 구절에서 그 이름이 연유하고 있습니다.

팔괘정(八掛亭)은 조선 인조(仁祖) 때 우암 송시열이 건립한 정자로서 퇴계 이황, 율곡 이이를 추모하며 당대의 학자 및 제자들을 강학하였던 장소입니다. 송시열은 스승인 김장생이 임이정을 건립하고 강학을 시작하자 스승과 가까운 곳에 있고 싶어하는 제자의 마음으로 팔괘정을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임이정과 팔괘정은 150여m 거리 안에 있으며 건물 뒤 암벽에는 송시열의 글씨가 각자되어 있습니다.

파평 윤씨는 논산지역 니산(노성)에 자리 잡으면서 연산의 광산 김씨, 회덕의 은진 송씨와 더불어 호서삼대족(湖西三大族)의 하나로 지목될 만큼 빠른 성장을 하였는데 노성 일대는 파평 윤씨 노종 5방파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배출된 유서 깊은 곳입니다. 특히 이곳에 집중되어 남아 있는 종학당과 병사, 선영과 영당, 서원과 정려, 종가와 고택 등은 조선시대 호서지역 양반들의 유교문화를 종합적으로 접할 수 있는 보고입니다.

그중에서도 윤증 고택은 윤증(1629~1714)이 직접 지었다고 하며 후대에 수리한 것 같으나 그 세부기법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노성산성이 있는 산자락에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윤증 고택.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여준다. Ⓒ논산시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 윤증 고택

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으며 안채 뒤쪽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논산 지역의 산성(山城)들 중 비교적 규모가 크고 출토 유물도 많은 산성들은 주로 동부지역이나 평야를 향해 뻗어내린 능선의 끝단 등 험한 지형에 석성(石城)으로 위치하고 있고, 서부의 산성들은 주로 토성(土城)으로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출토유물도 많지 않은 편입니다.

따라서 동부에 위치한 산성들은 주로 군사방어시설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동부의 대표적인 산성의 하나인 황산성(黃山城)은 황산벌 전투와 관련이 깊고, 노성산성(魯城山城)은 백제부흥운동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서부의 산성들은 군사적 방어 이외에 다른 목적으로 축조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하는데, 특히 황화산성은 강경평야의 넓은 들판 한 가운데 금강을 끼고 있다는 점에서 백제의 이궁지(離宮址)로 보기도 합니다.

이렇듯 논산의 산성은 크게 동부 산간지대의 석성과 서부 평야지대의 토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동부에는 달이산성, 곰티산성, 황령산성, 산직리산성, 신흥리산성, 매화산성, 황산성 등이 있습니다. 황산벌이 논산의 동부에 자리하고 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은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만큼 방어를 위한 석성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황산성과 노성산성 등은 백제가 멸망하던 660년과 백제부흥운동 기간에 중요한 거점성으로 기능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서부에는 황화산성, 채운산성, 불암산성, 옥녀봉산성 등이 해발 100m 이하의 나지막한 구릉 위에 자리한 토성으로 남아 있습니다. 황화산성은 석성이라는 기록도 있어 처음부터 토성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나, 나지막한 구릉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동일하며 서부는 동부와 달리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어 산봉우리에 자리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논산 지역의 봉수는 전라도 남해안과 서해안(순천, 강진, 진도, 해남)에서 올라오는 것을 서울로 보내는 역할을 했는데 월성산 봉수, 고등산 봉수, 쌍령 봉수가 있으며 은진의 강경포 봉수가 서쪽의 용안 광두원에서 연락을 받아 북쪽으로 노산(황화산) 봉수로, 다시 북쪽니산산성(성산) 봉수로 보내어 다시 북쪽으로 연결하게 되어 있습니다.

논산이 백제의 직접적인 통치 체제로 편입된 시기는 백제가 도읍을 한성(漢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遷都)한 475년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으나 논산이 백제역사에 분명하게 들어나는 시기는 지방통치체제가 새롭게 정비되는 사비백제시대였습니다. 백제가 강성하던 시기에 논산은 백제가 신라로 진출하거나 신라의 백제 진출을 방어하는 요충지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논산 지역에는 백제의 5방성(五方城) 가운데 하나인 동방성(東方城)과 함께 왕도의 동쪽 방비를 위한 많은 산성이 축조되었으며 이들 산성은 사비 천도 이후 논산의 지리적 중요성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제 최대의 격전, 황산벌 전투 현장

논산이 특히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백제 역사상 최대의 격전이자 국운을 걸었던 황산벌 전투가 벌어진 곳이 바로 논산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황산벌 전투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대항하여 벌인 최초의 전투이자 도성 사비(부여)를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전선이었는데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백제는 멸망의 운명을 맞게 되었습니다. 백제의 멸망 이후 논산 지역에서는 백제부흥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663년(문무왕 3) 신라군의 논산 덕안성 공격으로 1,070여 명에 이르는 백제부흥군이 참살되면서 백제부흥의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삼국시대에 견훤(甄萱)의 후백제 관할이었다가 고려 건국 후 연산군(連山郡)으로 개명되었으며, 이 지역에 개태사를 창건함으로서 고려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지역이 되었는데 개태사는 936년(태조 19) 공사가 시작되어 4년만인 940년(태조 23)에 완공되었고 태조 왕건(王建)이 직접 발원문을 지었다고 합니다.

또한 고려 광종이 호족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자 민심을 무마하고 고려 조정의 권위를 보이기 위해 은진에 관촉사(灌燭寺)을 창건함과 동시에 높이 18.12m의 석조미륵불을 조성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 말에는 공민왕에 의해 개태사가 태조의 영정을 모시는 진전사원(眞殿寺院)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건국 직후 새로운 도읍 후보지로 고려시대의 남경(南京)이었던 한양(漢陽)과 논산의 계룡산 지역이 거론되었는데, 권중화(權仲和)의 주장으로 계룡산 남쪽 아래 신도안(新都案)에 새로운 도읍지를 건설하기 위한 실제 작업이 1년 정도 진행되기도 하였으나 하륜(河崙)의 반대로 중지됨과 동시에 조선의 새로운 도읍지는 한양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에 고려의 지방제도를 답습하였으나 1413년(태종 13)에 이르러 고려의 5도(五道), 양계(兩界) 체제를 8도 체제로 개편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성종(成宗) 때에 완성하였으며 그 결과 논산은 충청도 관찰사의 관할 하에 은진현, 연산현, 니산(노성)현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큰 혼란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러한 혼란을 무마시키고 사회질서 재편을 위한 작업들이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논산에서도 논산 지역의 사족들이 사족지배체제(士族支配體制)의 재건을 위해 향교(鄕校)를 중건하거나 서원(書院), 사우(祠宇), 서당(書堂), 정자(亭子)를 건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전란 이후의 호서사족(湖西士族)들의 학맥은 대체로 논산 출신의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김장생은 후학을 가르쳐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그의 대표적인 제자들은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권시 등으로 기호사림(畿湖士林)에 속했습니다. 별다른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던 호서사림이 김장생의 출현으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훗날 노론의 중심인물이 되어 조선을 좌지우지하게 되었습니다.

논산은 1963년에 전라북도 익산군의 황화면을 편입함과 동시에 구자곡면의 일부와 통합하여 연무읍으로 승격됨으로써 3읍 12면이 되었고 1996년 3월 1일 논산군이 논산시로 승격되었으며, 2003년에는 두마면이 계룡시로 승격, 분리됨으로써 논산시는 2읍 11면 2동의 행정구역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황산벌 전투의 영웅 계백장군 묘역 Ⓒ논산시


니산현, 연산현, 은진현 세 곳에 관아지

조선시대 논산 지역은 니산현(魯城縣), 연산현(連山縣), 은진현(恩津縣)의 세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이들 세 지역은 폐합되거나 분리되는 변화를 겪었습니다. 조선시대에 군현이 폐합되는 경우는 그 지역에서 역적 또는 강상(綱常)의 죄인이 발생하거나 변란과 재해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게 되어 독립 군현으로 존립하기 어려울 때로서, 이렇게 한번 폐합된 군현은 수년이 흐른 뒤에야 복구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46년(인조 24) 니산현 사람인 유탁(柳濯)이 모반을 일으켰으며 이에 대한 조치로 조정에서는 은진현, 니산현, 연산현을 폐합하여 평천역(平川驛) 서쪽에 은산현을 설치하였다가 10년 만인 1656년(효종 7)에 세 현을 복구하였고 그 후로는 별다른 변화 없이 세 현이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해 오다가 1895년(고종 32) 군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논산 지역의 읍치구역은 니산현(노성현), 연산현, 은진현 등 세 곳에 관아지가 남아 있습니다.

니산현은 1777년(정조 1) ‘니산’이 정조의 이름과 같다 하여 고을 이름을 이성(尼城)으로 고쳤으며 1800년(정조 24) 8월 20일 이성을 다시 노성으로 고쳐 노성현이 되었습니다.

노성현 관아는 논산시 노성면 읍내리 구 면사무소 자리로 추정되는데 <노성군읍지(魯城郡邑誌)>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관아 관련 건물로 아사 38칸, 객사 31칸, 현사 3칸, 작청 6칸, 군기 6칸, 관청 13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호서읍지(湖西邑誌)>(1895년)에는 아사 15칸, 책실 6칸, 내사 12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들어 오히려 그 규모가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연산현 관아는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 연산아문과 연산공원 일대로 추정되며 <연산현지(連山縣誌)>에 의하면 아사는 동헌 8칸, 내아 10칸, 익랑 5칸, 중문 3칸이 있었다고 합니다.

은진현 관아는 은진면 연서리 은진초등학교 일대로 추정되며 19세기 말 작성된 <은진지도(恩津地圖)>를 살펴보면 관아 시설의 구조와 배치를 파악할 수 있는데 그것에 따르면 외삼문, 내삼문, 아사, 외노방, 군고, 형청, 누상고(樓上庫), 사령방, 책실, 내아문, 내아, 읍창, 창고, 향청, 관청, 장청병현사, 작청, 삼문, 객사, 옥 등의 관아 관련 시설물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향교도 이 세 곳의 읍치구역에 남아 있는데 연산향교는 조선 태조7년(1398)에 창건하여 그간 수차례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5성위를, 동무에는 송조 2현과 동국 9현, 서무에는 송조 2현과 동국 9현 등 모두 5성 22현을 모셨고 대성전 앞의 명륜당은 강학의 장소였고 동, 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던 장소입니다.

노성향교는 본래 노성면 송당리 월명곡 근처(현 노성초등학교 자리)에 창건하였으며 은진향교와 같은 연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700여 년 경에 현재의 자리로 다시 이전하였는데, 명륜당의 현판에 의하면 숭정 4년(1631)에 현감이 문묘를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오래된 건물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은진향교 대성전은 조선 태조 7년에 은진면 용산리에 있었으나 인조 20년 (1642)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으며 9인의 중국 선현을 포함하여 27위를 배향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봄,가을에 음력으로 2월과 8월 상정일에 유림들이 모여 선현들을 존모하는 행사로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이를 석존제라고 합니다.

▲유서깊은 돈암서원 Ⓒ논산시


서원철폐령에도 보존된 서원들

조선시대 서원은 전국에 900여 개가 세워졌는데 논산 지역에는 사액서원인 돈암서원, 노강서원, 죽림서원과 그 밖에 구산서원, 금곡서원, 봉곡서원, 충곡서원, 행림서원, 효암서원, 휴정서원과 궐리사 등이 건립되었습니다.

돈암서원(遯巖書院)은 김장생을 주향으로 하여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 문묘에 배향된 네 분만을 모시고 있는 보기 드문 선정서원(先正書院)으로 조선 인조 12년(1634) 이곳에서 1.5km 떨어진 숲 말에 세워졌습니다. 현종 원년(1660)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지대가 낮아 홍수 때 물이 뜰까지 넘쳐 들어 와서 고종 17년(1880)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었으며 서원철폐령에서도 제외된 서원입니다.

노강서원(魯岡書院)은 숙종 1년(1675) 김수항의 발의로 윤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 교육을 위하여 건립하였으며 숙종 8년(1682)에 사액을 받은 후 윤황의 아들 석호 윤문거를 추향하고, 경종 3년(1732)에는 노서 윤선거와 그의 아들인 명재 윤증을 추향하였습니다. 숙종 43년(1717)에 정쟁(政爭)으로 인해 윤선거, 윤증 부자가 관직 삭탈되면서 사액 현판까지 철거됐다가 경종 2년(1722) 두 사람의 관직이 회복되어 현판도 복액(復額) 되었고 서원철폐령에도 보존되었던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입니다.

죽림서원(竹林書院)은 <도록(都錄)>에 의하면 인조4년(1626)에 서원을 짓고, 문성공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문간공(文間公) 우계 성혼(牛鷄 成渾)을 모신 후 황산서원(黃山書院)이라 하였다가 뒤에 사계 김장생을 추배하고, 현종 6년(1665) 죽림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은 후,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다시 추배하였는데 서원철폐령에 따라 폐철되었다가 1946년 유림들에 의하여 단소(壇所)가 설치되었고 1965년 사우(祠宇)가 재건되었습니다.

논산 지역은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에 인접한 지역으로 이때부터 직, 간접으로 불교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상 사찰의 창건이 이루어진 때는 고려 전기로 보입니다.

논산 지역에 있는 폐사지로는 문화재로 지정된 개태사지를 비롯해 약 30여 개가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이 중 고려시대에 조성된 사지는 10곳,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지는 7곳이며, 나머지는 언제 조성되어 언제 폐사되었는지 연대를 추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은진에 관촉사, 쌍계사 외에도 마야산에 금지사, 보문사, 염불사, 정토사가 있었으며 연산의 계룡산 인근에 불암사, 상암사, 만운사가, 연산의 천호산에는 고운사가, 니산현에는 탑사가 있었다고 하나 기록에 남아있는 사찰 중 관촉사, 쌍계사를 제외한 나머지 사찰은 폐사(廢寺)되었습니다. 개태사지, 영은사지, 고운사지, 정토사지를 제외한 나머지 절터는 절의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아 마을 이름을 따서 부르거나 현재 있는 절이나 암자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붙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폐사지에 새로운 사찰이 들어선 경우도 많았는데 개태사지의 경우 본래 절이 있던 곳에서 약 200m 떨어진 지점에 1934년 개태사를 새로 지어 운영해 오고 있으며, 송불암 사지에도 남아 있는 석불을 중심으로 새롭게 사찰이 조성되었고 영은사지에도 영주사가 새로이 들어섰습니다.

지금의 개태사는 개태사의 옛터로부터 남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위치하는데 원래의 절터인 동북쪽에는 건물 자리와 주춧돌, 석조, 불대좌(佛臺座), 축대 등이 남아 있으며 또 최근에 조성된 용화사에 이 절터에 있었던 석조불좌상 1구가 안치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출토된 개태사 청동금고(靑銅金鼓)는 지름이 약 105㎝로 국내에서 발견된 금으로 된 북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이며 또 개태사 금동대탑도 출토되어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아쉽게도 지금은 리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개태사 경내에는 태조 왕건 때 조성된 석조미륵삼존불입상, 개태사 5층석탑, 개태사지 석조(石槽), 태조 왕건이 이 절을 세우고 승려 500명의 밥을 지을 솥으로 하사한 것이라 전하는 개태사 철확(鐵鑊)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38년 만인 완성된 관촉사 은진미륵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 은진미륵]은 968년(광종 19)에 승려 혜명이 만들기 시작하여 38년 만인 1006년(목종 9)에 완성한 것으로 불상이 완성되자 미간의 백호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고, 중국의 지안(智眼)대사가 그 빛을 쫓아와 예불하면서 그 빛이 마치 촛불과 같다고 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灌燭寺)’라 하였다 합니다.

관촉사 경내에는 배례석, 관촉사 사적비, 관촉사 석등, 관촉사 석문, 관촉사 석조불단, 관촉사 석탑 등도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특히 관촉사 석등은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고려 광종 19년(968)때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남한에서는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다음으로 거대한 규모입니다. 특히 화사는 물론 기둥에 이르기까지 전형적인 8각 석등의 양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석등 조성 양식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쌍계사의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초기 사찰로 추측되고 있으며 처음에는 500~600칸의 대사찰이었다고 하나 여러 차례 화재로 전소되었고 그 뒤 고려 말의 대문장가 행촌(杏村) 이암(李巖)이 중건을 발원하였고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사적비를 지었다고 합니다.

▲옥녀봉 느티나무 아래로 금강이 흐른다. Ⓒ논산시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17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관람료,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사전예약 관계상 3월 15일까지 참가접수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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