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에게 쓰인 '자살' 두 글자만 걷어냈으면…"
[조선소 잔혹사] 유가족 인터뷰 "4개월 전 문자가 자살 정황이라니요"
2015.08.05 10:35:07
"남편에게 쓰인 '자살' 두 글자만 걷어냈으면…"
현대중공업에서는 2014년에만 13명(계열사 포함)의 노동자가 일하다 죽었습니다. 모두 하청 노동자였습니다. 올해에도 2명의 노동자가 죽었습니다. 역시 하청 노동자였습니다. 이들은 왜, 어떤 일을 하다가 죽었을까요? 죽음을 막을 방법은 없었을까요? 왜 죽음은 반복되는 걸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들 죽음의 이면에는 구조적 문제가 존재하리란 생각을 해봅니다. 반복되는 죽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 죽음이 지금도 반복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로 치부됩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일하다 죽는 노동자'를 당연시 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그렇게 당연시되어야 하는 걸까요. 그 죽음의 고리를 찾아보고자 <프레시안>에서는 '조선소 잔혹사'를 기획했습니다. 이 기획은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과 '노동건강연대'의 협조로 진행됐습니다.   
<조선소 잔혹사>
남편은 조선소 노동자였다. 이름은 정범식. 조선소에서만 12년 일한 베테랑이었다. 샌딩공이었다. 샌딩은 건조 중인 선박 표면에 고압의 쇳가루를 분사해 선체 표면을 갈아 매끄럽게 만드는 작업이다. 도장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한 작업이다. 

남편은 전국의 조선소를 떠돌아다니는 '물량팀'이었다. '하청의 하청'으로 일하는 일당직 비정규직 노동자를 뜻한다. 보통 적게는 10명, 많게는 30명씩 팀을 꾸려 움직였다.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일했다. 목포, 거제도, 울산…. 일거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일요일도 마다않고 일했다. 

남편은 10여 년 전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당시 부산 구포시장에서 생활용품을 팔았다. 부산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조선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결혼 후 둘째 아이를 낳고 얼마 안 되면서부터였다. 자영업자로는 살기 빠듯했다. 조선소에서 일하면 그럭저럭 돈은 번다는 큰 형의 권유로 일을 시작했다. 실제 돈은 만졌다. 하지만 몸은 고됐다. 집을 떠나 숙소생활을 해야 했다. 가족이 그리웠다. 

큰아이가 중3 때였다. 쭈뼛쭈뼛하면서 남편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친구가 아빠와 맥주 한 잔 마시면서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하는 모습이 무척 부러웠단다. 자기도 아빠와 그렇게 지내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는 더 늦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편은 딱 5년만 더 일한 뒤, 다른 일을 하기로 자신과 약속했다. 정착금은 마련해야 했다. 

ⓒ매일노동뉴스(정기훈)


5년 뒤 함께 살자고 했는데…

하지만 꿈은 '꿈'으로 끝났다. 작년 4월이었다. 남편이 현대중공업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보름째 되던 날이었다. 정오 무렵이었다.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남편이 사고를 당했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로 흘러나왔다. 남편은 작업용 에어호스에 목이 감긴 채 발견됐다. 질식사였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발견 당시 남편은 지상 3.5m 높이의 작업대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바닥에서 50cm가량 허공에 뜬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 작업하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두꺼운 작업복과 방진 마스크를 착용했고, 이중으로 된 작업용 장갑에 손목 부위에는 쇳가루가 들어가지 않도록 테이프도 칭칭 감은 상태였다. 누가 봐도 작업하다 사고를 당한 모습이었다. 

일하다 사고가 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위험은 고사하고 힘든 내색 한 번 보이지 않았던 남편이었다. 죽고 나서야 그가 얼마나 위험한 환경에서 힘들게 일했는지 알게 됐다. 그가 죽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15년 가까이 살을 비비며 살아왔던 이가 사라지자 하루아침 모든 게 달라졌다. 무엇보다 사람들과의 대화가 무서워졌다. 아무렇지 않게 서로의 남편 이야기를 하는 상황이 고통스러웠다. 자기 처지를 아는 주변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도 불편했다. 마음의 병이 커졌다. 자연히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게 됐다. 

그래도 살아야 했다. 남편이 죽고 나서 막막해진 게 생계였다. 조그마한 의류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아는 언니가 일하는 곳이었다. 자신의 사정을 알고는 집에만 있지 말고 나와서 일도 하고 사람들이랑 이야기도 하라며 제안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가 힘들었다.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다. 결국, 한 달 만에 그만뒀다. 

보다 못한 친동생이 자신과 미용실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게 올해 4월의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멍하니 가게에 앉아 있을 때가 많다. 손님들이 동생에게 '저 언니 얼굴은 그늘져 보인다'고 수군거리기도 한다. 표정은 감춰지는 게 아니었다.   

내가 왜 남편 제사상을 차려야 하나

지난 5월에는 남편 제사상을 차렸다. 어떻게 준비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제사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찾은 마트에서부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왜 남편 제사상을 차려야 하나'. 

그래도 아이들 때문에 버틴다. 자기가 무너지면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걱정이 앞선다. 슬하에 고등학교 2학년 남자아이와 중학교 2학년 여자아이가 있다. 아이들은 가슴의 못이다. 

ⓒ매일노동뉴스(정기훈)

아직도 꿈을 꾸면 아이들 뒤에 서 있는 남편이다. 지금도 가지 못하고 아이들 주변을 맴돌고 있다고 믿는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큰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아버지의 죽음 뒤로 큰아들은 1년 가까이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를 잃은 상처가 컸다.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부터는 아침 6시에 등교하기 시작했다. 자기 말로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다. 빈 통학버스를 타고 아직 아무도 없는 학교에 가는 것은 '누구와도 만나기 싫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반면, 엄마에게는 제법 어른흉내도 낸다. 애써 감정을 숨기기도 한다. 생전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없을 때는 네가 동생과 엄마를 챙겨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애써 어른처럼 행동하는 큰아들이다. 어떤 때는 오빠 같기도 하다. 

남편이 죽은 뒤, 생활비가 쪼들렸다. 큰아들은 돈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니던 학원을 그만뒀다. 미안한 마음에 학원에 가라고 해도 학원에서 미리 공부하면 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재미없다면서 되레 엄마를 다독거렸다. 

어느 날은 미용실에서 일하는데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메르스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밖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다. 메르스가 대수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들은 하나 남은 엄마도 갑작스럽게 떠날까 봐 걱정했다. '아빠도 그렇게 가고 싶어서 갔겠느냐'며 '아빠도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한 게 아니냐'고 그간 숨겨왔던 감정을 쏟아냈다. 

아들은 한창 사춘기인 열여덟 살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운다며 버거운 짐을 짊어지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프다.

'자살'이라는 굴레가 준 멍에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가슴 아프게 하는 건, 남편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경찰 조사 결과다. 경찰은 한 달여 수사 끝에 2014년 6월, 고인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 내렸다. 경찰 수사기록에는 '산업재해 가능성은 전혀 없고 현장에서 타살이나 사고사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자살 정황이 뚜렷하다'는 결론이 담겨 있었다.

경찰이 말한 '자살 정황'은 다음과 같다. 남편의 소액 카드 연체, 정신과 진료 내역, 사망 4개월 전 부부싸움이 담긴 문자메시지 등이 전부였다. 정황상 가정불화로 남편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다. 

이해하기 어려웠다. 죽기 전날에도 서로 다정하게 문자를 주고받았다. 카드 연체는 남편이 죽기 보름 전 이미 다 갚았었다. 그런데도 자살이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나마 2014년 국정감사 때 남편 일이 논란이 되면서 경찰이 재조사에 착수했다. 

내심 기대도 컸다. 제대로 수사만 진행된다면 남편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재조사도 지난 3월 '자살'로 결론 내려졌다. 경찰은 100% 자살도 아니고 사고사도 아니라면서도, '굳이' 자살이라고 결론 내렸다. 

남편이 자살할 이유는 없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자상하고 멋진 아버지로 기억한다. 그런 아버지가 갑자기 자살했다고 하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저 남편에게 씌워진 '자살'이라는 두 글자만은 지워지길 바랄 뿐이었다. '자살'이라는 굴레는 회사로부터 보상금도 한 푼 받지 못하게 했다. 산업재해도 인정받지 못했다. 자신에게 찾아와 무릎을 꿇고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했던 업체 사장은 남편 장례식장에서 본 이후 연락조차 되지 않는다. 

남편에게는 홀어머니가 살아계신다. 행여 자기 아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을까 걱정한 시댁 식구들은 고인 가족이 미국에 이민 갔다고 둘러댔다. '덕분에' 왕래가 잦았던 시댁과는 연락을 끊어야 했다. 추석이나 설날에도 오롯이 세 식구만이 함께 해야 했다. '자살'이라는 굴레가 던져준 결과였다.


고인을 언제쯤 떠나보낼 수 있을까

어른인 척하는 큰아들에게는 요즘 소원 하나가 생겼다. 아버지 차 조수석에 앉아 아버지와 동네 한 바퀴를 돌았으면 한단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 빈자리를 부쩍 더 느끼는 아들이다. 함께 미용실을 하는 자신의 여동생도 마찬가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형부 생각이 난다며 전화를 한다. 처제를 유독 잘 챙겼던 남편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치유될 줄 알았다. 오산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가 아버지를, 남편을, 형부를 잃은 상처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고(故) 정범식 씨 부인 김희정(46) 씨는 "남편의 부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커지는 듯하다"며 "가끔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회의도 생긴다"고 토로했다. 

김 씨는 "거기에다 남편의 죽음 앞에 붙은 '자살'이라는 두 글자는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더욱 어렵게 만든다"며 "가정적이었던 남편이 하루아침에 가정사로 비관 자살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 씨는 "아이들,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남편이 죽은 이유를 반드시 밝혀낼 것"이라며 "남편 죽음 앞에 붙은 '자살'이라는 두 글자를 지워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김 씨는 현재 근로복지공단에 고 정범식 씨 사건 관련, 산업재해를 신청해놓은 상태다. 조만간 결과가 나올 예정이다. 하지만 경찰 수사 결과, 자살이라고 결론 내렸기에 낙관할 수 없다.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김 씨, 그리고 김 씨 아이들은 언제쯤 고인을 떠나보낼 수 있을까. 

(이 기획 시리즈는 사단법인 ‘다른내일’준비위원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으로 제작되었으며, 이후 별도의 책자와 영상제작으로 발행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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