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례 대표제 확대, 꼭 좋기만 할까요?
[주간 프레시안 뷰] 선거 제도 개혁, 정답은 없다
비례 대표제 확대, 꼭 좋기만 할까요?

그레고리력과 선거 제도 개혁


1587년,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수학자로 칭송받았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갈릴레오 갈릴레이라고 답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쉽게도 아닙니다. 물론 갈릴레오와 관계가 있습니다. 갈릴레오가 대학에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서 그 사람의 추천서를 받으러 가는 중이었으니까요. 그는 크리스토퍼 클라비우스, 예수회가 건립한 로마대학의 수학 교수였습니다.

이름은 잘 모르지만 클라비우스는 지금 우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영향 아래 살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지금의 달력, '그레고리력'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570년대까지 유럽은 기원전 46년에 만들어진 율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율리우스력의 한 해 길이는 365일 6시간으로, 실제 1년의 길이보다 약 11분 14초가 깁니다. 그래서 4년마다 한 번씩 윤년을 두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정확한 1년이 이보다 조금 짧아서 달력상의 날짜가 400년에 약 3일씩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10일 이상의 오차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레고리력은 400으로 나누어 떨이지지 않는 해를 윤년에서 제외함으로써 400년에서 세 번의 윤년을 제외시켰습니다. 그래서 현재처럼 달력의 오차가 4000년에 하루 정도로 줄어들게 되었고, 우리는 앞으로 서기 5500년경에 하루 정도만 수정하면 되는 편리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그레고리력은 1582년에 공식적으로 도입되었는데 그동안 쌓인 오차를 해소하기 위해 달력에서 10일을 제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582년 10월 4일의 다음날은 10월 5일이 아니라 15일이 되었습니다. 실례로 스페인의 성인 아빌라의 성 테레사는 1582년 10월 4일과 15일 사이의 밤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처럼 과학적이고 의미있는 개혁에 종교적 권위까지 있으니 이 개혁은 참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는 아주 치열한 논쟁이 여기저기서 펼쳐졌습니다.

4일과 15일 사이에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은 봉급날을 놓쳐버릴까 전전긍긍했으며, 실제로 많은 도시에서는 그레고리력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클라비우스는 이 달력이 왜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유럽 전역에 설명하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지만, 영국은 약 200년 뒤인 1752년에야, 러시아는 1918년에야 비로소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이게 됩니다.(<갈릴레오의 진실>(윌리엄 쉬어·마리아노 아르티가스 지음, 고중숙 번역, 동아시아 펴냄))


다소 엉뚱하게 중세의 그레고리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바로 우리의 선거 제도 개혁을 둘러싼 논의가 이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오차가 생긴 율리우스력처럼 우리의 선거 제도도 문제가 많아 보입니다. 먼저 민주적인 선거는 평등한 투표권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각각의 투표가 지나치게 과소 대표 되거나 과대 대표 되면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정당 체제나 지역주의, 선거 제도의 특성으로 인해 유권자의 선택권이 제한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많은 사표가 발생한다면 그 역시 민주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유권자들의 선택을 넓히기 위해 정치적으로 소외 계층이나 세대, 성별에 더 많은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유권자들의 의견이 당의 공천에 직접 영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오픈프라이머리를 하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사실 선거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누가 입안을 하는 주체가 되어야 하느냐의 문제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법원은 인구 편차를 3:1에서 2:1로 줄이라고 했고, 국회는 이에 따라 관련 법을 개정하기 위해 정치개혁특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도 안을 내놓았습니다. 각각의 정당들은 내부적으로 혁신위원회를 운영하며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거법 개정 논란에는 이러한 민주적 원칙들이 논리적 타당성을 획득하고 있으니 선거법 개혁은 순조롭게 이루어져야 할 것 같지만, 어쩐지 그렇게 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정치를 무시한 새정치 혁신위

먼저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회가 주장한 내용과 형식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혁신위원회가 원칙적으로 좋은 안을 내놓았는데 국민들이 이를 알아주지 않으니 아쉽다고 합니다. 혁신위 스스로도 그렇게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비례 대표제 확대와 국회의원 수 증원이 정말로 그렇게 원칙적 논리만으로 쉽게 될 줄 여겼다면 더 이상 이 사람들 손에 무슨 일이든 맡겨 놓기 어렵습니다. 만약 세상이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다면, 그레고리역이 왜 어떤 나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데 수백 년이 걸렸을까요? 왜 유럽의 도시에서는 이 과학적으로 옳기만 한 달력을 받아들이는데 폭동까지 일으켰을까요?

개혁을 하려는 사람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눈으로 개혁의 의도와 내용을 바라본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개혁을 할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데에는 추상적인 대의보다 훨씬 강한 애착이 있게 마련입니다. 정치인들에게 들어가는 세금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국민들이 다수라면 우선 그 문제부터 풀어야 하겠지요.

조금의 식견이라도 있는 사람은 국회의원 정수 확대가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정치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야당에서 이 주장을 하는 즉시 정치 개혁의 모든 주도권을 빼앗길 것이라는 점도 알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결국에는 그레고리역이, 진리가 승리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과학에는 어느 정도 모두가 받아들일 만한 잠정적 정답이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정치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라는 것이 힘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다루는 사회과학의 특성상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 특성이 무엇인지 따져보기 위해서, 앞에서 당연하게 여긴 몇 가지 전제들을 여기서 의심해 보아야겠습니다. (이하 논의는 <선거 제도와 정치적 상상력>(박동천 지음, 책세상 펴냄)에 크게 의존하였습니다.)

▲ ⓒ연합뉴스


비례 대표제 확대는 진리인가?

많은 사람들이 비례 대표제 확대를 이야기 합니다. 지역주의를 완화하고 정당에 대한 유권자의 선호를 더 정확히 반영하는 선거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만큼이나 지역별 정당 선호가 다른 영국이나 미국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비례 대표제를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나라는 양당제 전통을 고수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 나라들을 정치적 후진국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또한 비례 대표제라고 해도 대단히 다양합니다. 명부를 개방형으로 하느냐 폐쇄형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차이가 납니다. 폐쇄형으로 하더라도 후보자들이 순위를 유권자들이 결정하느냐, 누군가를 탈락시킬 수 있느냐 하는 차이도 있습니다.

실제로 비례 대표제를 하고 있는 많은 나라들은 제각기 다양한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핀란드, 네덜란드, 벨기에, 체코, 스위스 등등은 모두 다른 비례 대표제를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그것은 각국의 정치적 역사와 정당, 정파의 분열 양상에 따라 결정됩니다.

선거 제도는 제도 자체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리와 경험, 실천을 통해 작동하고, 제도가 역사와 정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정치가 제도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비례 대표제를 강화하는 것 자체는 선악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필요에 따라 사회적 논의를 통해서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것이지요.

최근 선거 제도 개혁에서 가장 첨예한 이슈는 소위 독일식이라고 불리는 지역구 불균형 보상식 비례 대표제와 이를 한국의 지역주의에 적용한 권역별 비례 대표제입니다. 이 제도는 확실히 사표를 줄이고 비례성의 향상을 가져옵니다. 영호남에서 오랫동안 무의미한 투표를 해 온 유권자들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비례성의 향상 역시 그 자체로 선이 아닙니다. 사실 소선거구제 단순 다수 대표제는 과대 대표를 막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것을 조장해서 안정적인 정치를 유도하는데 제도의 핵심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거대 양당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의회 내 과반 정당이 없는 상황을 지금 우리 국민이 원한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을까요? 여야가 대치하면 어떤 법도 통과되기 어려운 상황, 혹은 10석이나 20석에 불과한 정당이 사실상 입법권을 갖게 되는 상황은 바람직한가요? 그 결과 국회가 식물화되고 제왕적 대통령의 실질적 권한이 더 늘어나는 것은 그저 부득이 감내해야 할 결과인가요?

나아가 거대 양당의 기득권은 이 제도 때문에 생긴 것인가요, 아니면 다른 더 중요한 요인이 있는 것인가요? 혹은 원인과 관계없이 그 거대 양당이 보기 싫으니 일단 어떻게 되든 무조건 그렇게 만들고 보는 것이 좋은가요? 우리는 그런 정치를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 결과는 어떠했나요?

비례성을 높이는 것이 가져오는 부작용도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 국민이 인내심을 갖고 불확실성의 정치를 감내하거나, 대통령을 제대로 통제할 힘이 국민에게 있는지도 사실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검토하고 또 대비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비례 대표제에 대해 무조건적 우려만큼이나 무조건적 기대도 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표(死票)는 무조건 줄이는 게 능사인가?

사표가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결선 투표제나 선호 대체 투표제, 선호 이전식 투표제 같은 사표를 줄이는 다양한 선거 제도가 존재하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제도들은 단순 다수 대표제보다 사표를 줄이고 유권자들이 선호를 더 잘 반영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볼 때 유권자들의 선호를 가장 잘 반영한다고 알려져 있는 제도 중 하나는 유권자들이 후보 전체에 일일이 선호를 기록하고 이를 집계하는 선호 이전식 투표제입니다.

그래서 아일랜드에서는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지만, 어쩐 일인지 다른 나라들은 이 제도를 잘 채택하지 않습니다. 이 좋은 제도가 왜 그렇게 널리 적용되지 않을까요? 유권자들이 선거 결과를 가장 예측하기 어렵고, 전략적 투표를 할 기회를 사실상 박탈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일랜드가 이 제도를 30년간 잘 운영해 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영국은 2011년 국민 투표에서 이를 부결시켰습니다. 투표의 가시성이 약하고 제3당에 대한 신뢰가 크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단순히 선호를 반영하기보다는 표의 가치를 향상시키고자 전략적 투표를 하기를 원하는 유권자들도 이 투표제를 선호할 리 만무합니다.

요컨대 유권자들이 투표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고 그에 기반해서 전략적인 투표를하기를 원한다면, 사표가 좀 생기더라도 소선거구제 단순 다수 대표제가 낫습니다. 이에 반해 연기명 중선거구제는 유권자들의 선호도를 좀 더 반영하고 사표를 줄일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투표하면서 누가 당선될지 잘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표의 문제는 그 자체로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유권자들이 어떤 방식의 선거 제도를 선호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부산물입니다.

표의 등가성은 곧 민주주의다?

표의 등가성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흔들릴 수 없는 민주적 가치입니까? 헌법 재판소는 2001년 투표권의 비례성을 4:1에서 3:1로 줄였고, 다시 14년 만에 3:1에서 2:1로 줄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지난 14년 동안 우리는 이 표의 등가성을 사회적이든 정치적이든 진지하게 논의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법원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지금인가요? 여기에는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언제 다시 1:1로 줄여야 할까요? 그리고 만약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당장 1:1로 만들지 않고 4:1에서 3:1로, 다시 2:1로 줄이고 있는 것인가요?

민주주의에서는 표의 등가성도 중요하지만, 소수의 표로 말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 역시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표의 등가성을 높이면 국회의원이 늘어나는 곳은 도시 지역이고 줄어드는 곳은 시골입니다. 지금도 시골에 사는 국민들은 도시에 사는 국민들보다 정치, 경제, 문화적인 부분에서 압도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국가적 관심, 예산, 정책이 인구가 많아서 국회의원도 많은 수도권과 대도시에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다수결이라는 머릿수 싸움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에서는 다수와 소수 사이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어쩌면 필연적입니다. 그러한 부작용을 막으려면 오히려 시골 지역에 대한 일정한 표의 가중치도 필요한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에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논의 자체를 우리가 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국민이 참여하지 않는 선거 제도 개혁은 실패

저 역시 한 사람의 정치학자이고, 제가 생각하는 한국에 좋은 선거 제도가 있습니다. 국회의원 정수를 최소한 두 배는 늘리고, 비례 대표와 지역구 대표를 비슷한 수준으로 만드는 것에도 찬성합니다. 권역별이든 독일식이든 지역주의를 완화하는 제도도 도입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형식적인 선거 기간을 폐지해 선거 운동을 상시화하고, 정치 신인의 후원 제도를 확대하고, 각 정당의 공천권을 자율적으로 그러나 투명하게 보장하는 방식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표의 등가성 문제에 대해서는, 주권 기관인 국회가 헌법 재판소의 판결에 불복해서 시골 지역에 대해서는 3:1 정도의 가중치가 부여되는 것이 오히려 민주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선거 제도에 대한 최종적 판단의 주체가 우리 헌정에서 누구인지를 이참에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제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 옳다고 주장하기도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이 참여하지 않는 선거 제도 개혁은 정당하지도 않고 실제로 잘 운용되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선거 제도의 개혁 자체가 범사회적으로 논의되는 것이 먼저입니다. 법원, 선관위, 정당, 전문가들이 아니라 다수의 국민이 이 논의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선거 제도의 개혁이라는 것은 무의미하고 위태한 실험에 불과할 것입니다.

당장 어떤 선거 제도를 채택할 것인가 이전에, 대한민국은 어떤 국가적 비전을 갖고 있고 그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어떤 좋은 대표자들이 필요하며, 그들을 뽑기 위해서는 어떤 선거 제도가 필요한지에 대해 묻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기존 정치 세력들, 기득권을 쥔 거대 정당들의 뒷거래를 넘어서는 진정한 선거 제도 개혁을 강제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느리게 보여도 빠른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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