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의 민주주의 신념은 왜 변했나?
[김성희의 정치발전소] 위험천만한 '통치자의 직접민주주의'
문재인의 민주주의 신념은 왜 변했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의원 시절 두 차례나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매번 위기에 빠진 당을 살려내고 임박한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당시 박근혜 대표가 입에 달고 다니다시피 한 말이 '정당의 책임정치'였다. 한나라당에 비판적인 사람도 정당과 의회를 중시하는 그의 소신을 평가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자 돌변했다. 2015년 6월 국회는 입법권을 무력화하는 정부의 시행령 남용을 막기 위해 국회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처리했다. 대통령은 격노하며 즉각 거부권을 행사했다. 국회와 정당을 "갈등과 반목, 비판만 하는 구태정치이자 배신정치"로 규정하고 "배신의 정치를 국민이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그해 겨울 현직 대통령 신분으로 보수적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경제살리기 입법 촉구 국민서명운동에 직접 참여했다. 대통령이 행정권력을 견제하는 정당과 의회의 기본 역할을 부정하고, 통치자가 직접 시민을 동원해 대의정치를 규탄했다. 내전(civil war)을 부추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대통령이 대'국민' 직접정치에 나서자 지지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이 본격적인 직접민주주의 정치운동에 뛰어들었다. 어버이연합, 자유총연맹, 재향경우회 등 190여 개 보수시민단체는 그해 10월 '국회개혁범국민연합'을 결성했다. '국회개혁범국민연합'은 '국회의원 국민소환 및 국민에 의한 국회해산제 도입' 등 직접민주주의적 요구를 내건 정치운동을 시작했다. 2015년 가을부터 2016년 8월까지 전국적으로 1000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다. 탄핵정국 이전 직접민주주의 운동의 주도세력은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파였다.(주1)

보수파의 직접민주주의 정치운동은 새누리당의 총선 패배와 탄핵 국면에서 소멸했다. 최근 검찰의 국정원 수사과정에서 국정원과 대기업으로부터 수십억 원의 돈이 국민연합에 흘러 들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대의정치를 적대화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정치운동에 대통령과 권력기관, 재벌, 친박 보수 시민단체가 합세한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100일을 맞아 "국민은 간접민주주의에 만족하지 못한다"며 "국민은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의 직접민주주의가 '행태' 수준이었다면, 문 대통령은 대의정치를 간접체제라고 규정하고 직접민주주의를 명시적으로 불러들였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의 직접민주주의 발언에 대해 대통령의 강한 소신이라고 설명했다. 

▲ 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 기념 국민인수위원회 대국민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정치인의 소신은 오래전부터 책임 있게 표출됐어야 한다. 과연 그는 직접민주주의자였을까? 

2012년 그가 처음 대선에 출마했을 때, "대의민주주의가 국민과 동떨어지고 있어 직접민주주의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문재인 후보가 아니라 경쟁자인 무소속 안철수 후보였다. 안철수 후보는 직접민주주의 강화를 단일화의 3대 조건 중 하나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당시 문재인 후보와 민주당 측은 "예산과 정책, 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정당 없이는 민주주의 정치를 하지 못한다"(이해찬 민주당 대표), "문 후보는 정당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 안정된 국정운영이 가능하고 정당책임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 후보와 차별화된다"(오영식 전략홍보본부장) 등 정당 중심의 대의정치론으로 안 후보를 비판했다. 2012년의 문재인 후보는 책임정당에 기초한 대의민주주의자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당 대표였던 2015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의회를 압박하는 보수적 시민운동에 직접 참여하고, 그의 지지자들이 직접민주주의 정치운동을 전개할 때,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표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라며 "입법에 관해 국회, 특히 야당과 대화하고 설득해야 할 대통령의 의무를 저버린 처사"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는 의회 민주주의를 존중하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적어도 2015년의 당 대표 문재인은 의회민주주의자였다.
 
촛불시위가 그를 직접민주주의자로 바꿨을까? 시위가 본격화할 당시, 대부분의 평범한 정치인들은 즉각 하야와 퇴진 등 광장의 요구를 쫓아가기 바빴다. 그러나 그는 가장 늦게까지 대의정치과정을 통한 문제 해결에 주력했다. 그는 "국회가 추천하는 국민총리가 정부운영의 중심을 잡는 과도 거국내각의 구성"을 요구했으며, 최순실 게이트에 대해서도 "의회가 중심이 되어 국정조사, 특검"을 해야 한다고 했다. 

대선 과정에서도 촛불시민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다른 후보들이(심지어 홍준표 후보까지!) 국회의원 국민소환제, 국민발안제, 국민투표 의무화 등 대표적인 직접민주주의 수단을 대선 공약으로 줄줄이 늘어놓을 때, 문재인 후보만은 '주민소환제, 주민발안제'라는 지방자치 수준의 정책만을 제시하는 데 그쳤다. 대통령이 된 순간에도 그는 문재인 정부가 아닌 '민주당 정부'를 말했다. 

대통령이 되어 어느 날 갑자기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론과 직접민주주의 필요론을 들고나오기 이전까지, 적어도 그는 '공식적으로' 책임정당과 의회를 정치에 중심에 놓는 대의민주주의자였다. 그의 숨겨진 신념이 직접민주주의였고 대통령이 되면 그때 그 신념을 드러내겠다고 결심한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한다고 다 같은 것은 아니다. 현재 사람들이 말하는 직접민주주의론에는 네 가지 유형의 주장이 뒤섞여 있다. 

첫째 유형은 평범한 시민들의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직접민주주의론이다. 시민들이 '박근혜 탄핵'을 외치며 촛불 시위에 나선 것을 이해하는 데 복잡한 논리는 필요 없다. 이런 유형의 직접민주주의론은 민주주의 위기 순간에 들불처럼 번지지만,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시민들은 바쁜 사람들이기 때문에 위기가 해소되면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나머지 문제는 그들이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통해 대표된다.  

둘째는 사회적 소수파 또는 약자들의 직접민주주의론이다. 대의체제 안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투입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나 제도권 밖의 진보정당에 의해 주로 제기된다. 신념화되어 있고 지속성을 갖지만, 이들의 실질적 목표는 대의체제 부정이라기보다 대의체제를 확장하는 것이다. 

셋째, 권력자들의 직접민주주의론이다. 과거 학생운동 인맥이나 관과 밀착된 시민운동 자원을 가진 사람, 독자적인 행정자원을 가진 지방자치단체장, 돈이나 미디어, 명사 등 사회 권력자들에 의해 주도된다. 이들의 직접민주주의론은 더 큰 자원과 신분 상승을 위한 하나의 비즈니스일 뿐, 신념이나 가치가 아니다. 이들은 도덕적으로 절대화된 시민을 동원해 정치와 정당, 정부의 역할을 줄이고 공공자원을 민간에 개방하라고 주장한다. 반정치적이며 신자유주의적 권력 효과를 낳는다.   

마지막 유형은 '통치자의 직접민주주의론'이다. 통치자가 국민과의 직접 접촉을 강조하고, 자율적 결사체와 정당, 의회를 적대시하거나 우회해, 통치자 스스로 국민을 직접 동원, 호명한다. 통치자의 직접민주주의론은 내전을 부르는 자해적 정치론이며 정치와 사회를 파괴한다. 민주주의에 가장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베네수엘라의 참담한 상황은 통치자의 직접민주주의가 정치와 사회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잘 보여준다. 통치자와 권력자들의 직접민주주의론은 정치와 민주주의에 범죄적 결과를 낳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례는 이들의 직접민주주의론이 누구의 먹잇감인지도 말해준다. 권력을 집중시키고 사유화하려는 대통령,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지지자와 신분상승을 꿈꾸는 기회주의자, 민주주의를 줄이고 싶은 권력기관과 재벌이 직접민주주의 정치운동의 뒷배였다. 이들의 목표는 더 많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더 많은 권력'이다. 따라서 통치자와 권력자의 직접민주주의는 전체주의의 다른 말이고 극단적 포퓰리즘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솔직히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직접민주주의적 소신이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그 지지자들의 직접민주주의 정치운동이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강조한다 해도, 문재인 대통령의 말에 새로운 것은 없어 보인다. 문재인의 직접민주주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뒤를 잇는 '통치자의 직접민주주의' 시즌2에 불과하다. 

나는 좋은 민주주의를 위한 통치자의 역할에 대해 2012년과 2015년 문재인 대통령이 이미 말했다고 생각한다. 의회와 정당과 정부가 함께 일하는 것, 청와대가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권한과 책임을 나눠 가진 내각이 유능해질 수 있도록 하는 것, 노동조합을 비롯한 결사체들이 통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 등. 이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 대선후보로, 의원으로, 정당 대표로서 주장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불행한 결과가 예정되어 있는 '통치자의 직접민주주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길 바란다. 나는 정치인 문재인이 그랬듯, 대통령 문재인 역시 여전히 책임 있는 대의민주주의자라 믿고 싶다. 

(주1) 국회개혁범국민연합(대표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은 ▲ 국민에 의한 국회해산제 ▲ 국민소환제 외에도 ▲ 중요 전과자 출마제한 ▲ 불체포특권·면책특권 폐지 ▲ 지자체장·의원 정당공천제 폐지 ▲ 무노동 무임금 적용 ▲ 특별감찰관제 실시 ▲ 국회의원 정수 감축 ▲ 국회 선진화법 폐지 등을 대의민주주의 축소 및 직접민주주의를 강령으로 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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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2002년부터 진보정당에서 일하며, 부대변인, 전략기획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2012년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정치교육, 교류, 연구의 공간인 <정치발전소>를 설립했다. 현재는 정치발전소 대표와 정치기획사인 파워플랜트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