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망신 주기' 아니라, 두드리면 열린다는 희망 보이려고"
[현장] 반올림 1023일 노숙 농성 해제 문화제
2018.07.26 09:03:26
"'삼성 망신 주기' 아니라, 두드리면 열린다는 희망 보이려고"

'강남역 8번 출구 5성급 호텔'이 1023일 만에 해체됐다. 한국 최고 기업 본사 앞에 터 잡은 이 호텔은, 그런데 안과 밖의 경계가 고작 천 한 장이다. 여름엔 푹푹 찌고, 겨울엔 '핫팩'을 온몸에 붙여야 잠을 청할 수 있다.

어느 겨울날, 기자가 찾았을 때 농성장으로 자장면을 배달시켰다. 배달원에게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하시라 했더니 돌아온 말.

"아이고, 저는 여러분이 더 걱정스럽습니다. 이 추위에 어쩌시려고."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챘으리라. 이 호텔의 정체는 반올림 농성장이다. '강남역 8번 출구 5성급 호텔'은 활동가들이 농담 삼아 부르는 말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역사지만, 그래도 다시 정리한다.

11년의 싸움, 1023일의 노숙농성

고(故) 황유미 씨는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였던 2003년 10월에 삼성 반도체 공장에 취업했다. 거기서 반도체 세정 업무를 하다가, 20개월 만에 백혈병에 걸렸다. 아버지 황상기 씨는 속초의 택시 기사였다. 투병하던 고인은 아버지가 몰던 택시 뒷좌석에서 숨졌다. 그때가 2007년 3월 6일이다.

이를 계기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반올림)이 결성됐다. 삼성 반도체 및 LCD 사업 부문에서 산업 재해가 빈발한다는 사실을 법적으로 인정받기 위함 싸움이 시작됐다.

2014년 8월, 법원은 고(故) 황유미 씨와 고(故) 이숙영 씨의 산업 재해를 인정하는 확정 판결을 했다. 두 사람은 같은 공장에서 일했었다. 


같은 해 11월, '삼성전자 사업장의 백혈병 등 직업병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조정위)가 만들어졌다. 김지형 전 대법관이 위원장을 맡았다. 직업병 피해자와 삼성의 입장을 두루 듣고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한 기구였다. 느리지만 진척이 있었다. 이듬해 7월, 조정위가 권고안을 내놨다. 독립적인 공익재단을 세워 피해자를 보상하자고 했다. 반올림은 환영했다. 노암 촘스키 등 국내외 지식인과 전문가들 역시 권고안 수용을 촉구했다. 처음엔 삼성이 받아들일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집어졌다. 독립 기구가 아니라 삼성 자체 보상위원회를 꾸리겠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직업병 피해자 가운데 누구를 보상할지를 삼성이 정하게 된다. 게다가 삼성 측은 같은 해 말까지만 보상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했다. 반올림은 항의 차원에서 노숙 농성을 시작했다. 그게 2015년 10월 7일이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농성장은 그대로였는데

그리고 1000일이 넘게 지났다. 그 사이, 한 활동가가 임신해서 아이를 낳고 돌잔치를 했다. 광화문에 촛불의 파도가 일렁였고, 정권이 무너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됐다가 풀려났다. '삼성 저격수'로 통하던 학자가 정부 각료가 됐다. 그래도 삼성전자 서초 본관 앞 반올림 농성장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삼성전자 홈페이지엔 반올림을 비난하는 글이 게재됐다.

그런데 최근 보름여 사이에 상황이 확 바뀌었다. 조정위가 다시 팔을 걷어붙였다. 삼성이 조정위 결정을 무조건 따르겠다고 했다. 반올림은 조정위를 신뢰한다. 그러므로 이제 노숙농성을 이어갈 필요가 없다.

농성 1023일인 26일 저녁, 농성장을 해체했다. 그간의 흔적은 쓰레기봉투 3개에 담겼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작은 축제가 열렸다. 천막 농성 해제 문화제 '참 감사해 유(YOU), 꼭 승리해 유(YOU)'다. 


시민 200여 명이 모였다. 눈에 띄는 정치인으론,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있었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에도 농성장을 찾았던 그는 황상기 씨 옆자리에 앉아서 축하와 위로를 했다. 

"삼성을 망신 주려는 게 아니다. 두드리면 열린다는 희망을 보여주려 했다"

삼성과의 교섭 실무를 담당했던 공유정옥 활동가가 짧게 경과보고를 했다. 앞서와 같은 내용에 새로 추가된 부분도 있었다.

"이름은 밝힐 수 없지만, 많은 정치인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삼성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려고 애를 썼다. 매번 성사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피해자 가족들에게 '이번에도 안 될 것 같네요'라고 이야기해야 했다. 


그게 백 번 조금 안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문을 두드리는 일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그게 쌓이고 쌓여 결국 문이 열렸다고 본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우리의 목적은 한 기업을 망신 주려는 게 아니다. 문을 계속 두드리면 열린다는 희망을 보여주려 했다."

"평범한 게, 그게 좋아서"

망신 주기, 분풀이가 아니라 산 자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기 위해 문을 두드렸던 이들이 계속 발언을 이어갔다.

삼성 LCD 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린 한혜경 씨도 소감을 이야기했다.

"반올림이 농성하는 동안 연대를 정말 잘 해주셨어요. 모든 게 그런 거 같아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것보다 그냥 쉽게 가서 얼굴 비추고, 믹스 커피라도 같이 타 먹으면서 열심히 하라고 해주면 저도 좋고, 상대방도 기분이 좋아지고요. 평범한 게, 그게 좋아서 여기까지 왔어요. 고맙습니다."

"평범한 게, 그게 좋아서"라고 했지만, 11년 투쟁과 1023일 농성이 정말 평범했을 리는 없다.

"마음만 먹으면 풀 수 있는 문제를 왜 지금껏 외면했는지"

재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발언 내내 울음을 삼켰다. 그가 대학을 마치고 처음으로 고른 일이 반올림 인턴 활동가였다. 그는 지난해 추석 당일 사망한 고(故) 이혜정 씨를 떠올렸다. 반올림 집계에 따르면, 이 씨는 삼성 계열사에서 발생한 118번째 직업병 사망자다.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였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5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 기흥 공장에 취업했다. 이후 '전신성 경화증' 판정을 받았다. 몸이 서서히 굳으면서 사망에 이르는, 희귀병이다. 살이 썩고 몸이 굳어서, 엄마가 아이들을 안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며, 재현 씨는 참담했다고 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풀 수 있는 문제를, 삼성이 왜 지금까지 외면했는지 모르겠다"며 "삼성이 역겨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삼성이 새로운 약속을 했으므로, 이제 그 약속을 지키길 바란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제대로 된 사과, 배제 없는 보상, 재발 방치 대책"

황상기 씨 등 삼성 직업병 피해자 가족과 반올림 활동가들인 이날 모인 시민 전원에게 상장을 줬다. '최고의 연대상'이다. '연대'는 이날 나온 발언을 꿰는 키워드이기도 했다.

이날 행사는 참가자 전원이 다짐문을 낭독하면서 마무리됐다. 이런 내용이다.

"삼성이 마침내 물러섰다. 직업병 문제 해결은 이제 다시 시작됐다. 눈물겨운 우리들의 연대로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지켜볼 것이다. 제대로 된 사과, 배제 없는 보상, 재발 방치 대책의 정당한 요구가 실현되는 것을. 그리고 계속 나아갈 것이다. 죽지 않고, 병들지 않고, 일하는 세상을 위해."


▲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숨진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와 삼성 LCD 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린 한혜경 씨의 어머니 김시녀 씨. 25일 문화제에 참가한 두 사람이 활짝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25일 문화제에 참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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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석 기자 mendrami@pressian.com 구독하기 최근 글 보기
교육과 복지, 재벌 문제를 주로 취재했습니다. 복지국가에 관심이 많습니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내려고 김용철 변호사의 원고를 정리했습니다. 과학자, 아니면 역사가가 되고 싶었는데, 기자가 됐습니다. 과학자와 역사가의 자세로 기사를 쓰고 싶은데, 갈 길이 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