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오늘, 역사가 꼬였다
[장석준 칼럼] 로자 룩셈부르크, 20세기가 우리 시대에 남긴 숙제
100년 전 오늘, 역사가 꼬였다
1월 15일은 독일 현대사와 20세기 좌파 역사 모두에 커다란 상처로 기억된다. 1919년 독일혁명 와중에 급진좌파의 걸출한 두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이날 무참히 학살당했다. 특히 올해는 그로부터 정확히 100년이 되는 해다.

이때의 역사는 언제 읽어도 당혹스럽다. 독일 주요 도시에 혁명의 불길이 타오른 게 불과 두 달 전(1918년 11월)이었다. 다섯 해째 계속되는 세계 전쟁을 더는 견딜 수 없었던 병사와 노동자가 함께 들고 일어났다. 무기를 들고 함선과 병영을 이탈한 병사들이 시민의 환영을 받으며 주요 도시를 속속 점령했다. 황제는 외국으로 도망쳤고, 황위 계승권자 중 누구도 권력을 인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 강력했던 독일 제국이 며칠만에 무너졌다.

무정부 상태가 된 전시 국가에 이제 정통성을 지닌 권력기구라고는 제국의회뿐이었다. 그리고 이 의회의 제1당은 1912년 총선에서 유권자 1/3 이상의 지지를 받은 사회민주당이었다. 이 당이 내세운 마르크스주의 교리에 따른다면, 사회민주당은 혁명을 쌍수 들고 환영해 마땅했다. 사회주의 혁명은 차치하고라도 전제 왕정을 민주공화정으로 바꾸는 민주주의 혁명은 창당 때부터 이 당의 암묵적 당면 과제였다.

그러나 막상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태도는 영 뜨뜻미지근하기만 했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민주주의 혁명의 투사이기보다는 독일 제국의 만년 야당으로 지내는 데 익숙해 있었다. 이런 체질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군부의 전쟁 수행에 협력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급기야 1917년에는 개혁파, 혁명파 가릴 것 없이 뜻 있는 간부와 당원들이 이런 행태에 분노하며 집단 탈당해 독립사회민주당을 창당하기에 이른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독립사회민주당 안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입장을 대표했다. 1919년 늦가을, 마침내 혁명이 발발하자 이들은 더 왼쪽에 독일공산당을 따로 만들어 혁명을 계속 밀고 나아가려 했다. 별 열의도 없이 임시혁명정부를 이끌게 된 사회민주당(신생 독립사회민주당과 구별해 '다수파 사회민주당'이라 불렸다) 지도부는 이런 시도에 함께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중에 독일 공화국 첫 대통령이 되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비롯한 사회민주당 간부들은 옛 동지들이 아니라 혁명의 적인 구 지배 세력과 손잡는 쪽을 택했다.

집권당인 사회민주당의 의중이 명확해지자 거리 풍경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혁명을 성공시킨 탈영병, 노동자들이 아니라 구 제국군 장교들이 이끄는 부대(젊은 아돌프 히틀러도 그 중 한 명이었다)가 가두를 활보했다. 저항하는 이들은 잔혹하게 진압됐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도 이 와중에 희생됐다. 임시정부를 이끌던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인지와 연루, 지시 없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십 년 동안 같은 당에서 활동한 동지들을 이렇게 살육하다니 100년이 지난 지금도 믿기 힘들다. 혁명의 결과로 등장한 정부가 고작 몇 주 전에 그 혁명에 앞장선 이들에게 총구를 겨눴다는 사실 역시 충격적이기만 하다.

20세기 세계 좌파의 잘못된 출발이 된 100년 전 비극

일제에 강점당한 조선에서 3.1운동이라는 또 다른 혁명을 막 준비하던 때에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너무 암울한 기억이다. 100년 세월이라는 시간적 거리에다 유라시아 대륙 반대쪽 끝이라는 공간적 거리까지 있으니 굳이 100주년이라며 이 어두운 역사를 환기할 필요가 있겠냐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 사건이 이후 인류사 전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너무나 강렬하다. 무엇보다 19세기에 자본주의의 대안이 되겠다며 등장한 사회주의 운동의 이후 역사에 엄청난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사회주의 운동의 두 흐름, 개혁 노선과 혁명 노선 모두에 그러하다.

우선 개혁 노선을 보자. 독일 혁명에서 일단 승자는 다수파 사회민주당의 개혁파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상처뿐인 승리였다. 정적을, 그냥 정적도 아닌 옛 동지를 살해했다는 도덕적 흠결만이 아니었다. 혁명파를 탄압하면서까지 민주주의 혁명을 중도에 그치는 바람에 이들은 다름 아닌 개혁 노선의 미래를 좁은 한계 안에 가둬 버렸다.

많은 혁명파의 비판과 달리 1919년에 사회민주당 지도부가 저지른 가장 큰 오류는 사회주의 혁명을 시도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1918년 11월 거리에서 대중이 바란 바는 자본주의의 폐지가 아니라 전제 군주정의 종식일 뿐이라는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의 진단은 어쩌면 정확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들이 정작 이러한 민주주의 혁명조차 제대로 밀고 나아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20세기 초 독일에서 민주주의 혁명이란 무엇을 뜻했는가? 독일은 19세기 말부터 미국과 함께 제2차 산업혁명을 이끌던 나라였다. 아직 자동차 산업이 본격 시작되기 전에 그 토대를 놓은 철강 산업과 석유화학 산업이 이 두 나라에서 동시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영국을 대체할 지구 자본주의의 다음 패권국이 독일일지 미국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런 독일이었지만, 사회 구조는 미국과 천양지차였다. 이 나라에서 제2차 산업혁명을 이끈 것은 신흥 자본가만이 아니었다. 그들 뒤에는 제국의 기둥인 대토지 소유 귀족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국가기구 안에 제국 육군이라는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1870년에 통일을 주도한 것도, 1914년에 세계 전쟁을 일으킨 것도 이들이었다. 제국의회에 남성 보통선거권을 인정한 이후에 민주주의가 더 확대되지 못하게 가로막은 거대한 장벽이 바로 이들이었다.

첨단 산업혁명 주도국이라는 사실과 이런 반민주적 국가 체제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둘은 궁합이 잘 맞았다. 제2차 산업혁명의 산물들에 판로를 마련해 이윤을 보장하기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대량 생산-대량 소비 시스템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확실히 그랬다. 한데 혁명 이전 독일에서는 군부가 주도하는 전쟁 경제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귀족-군부는 첨단 과학기술혁명을 주도하는 자본가의 적이 아니라 가장 믿음직한 동맹자였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정치 이력이 무엇보다 군부와 대결하는 데 집중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바로 그 때에 룩셈부르크는 재판 중이었다. 군대 내 인권 탄압을 고발한 활동 때문이었다.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병사와 시민의 마음을 움직여 군부 권력에 맞서려 했다. 리프크네히트 역시 제국의회 의원으로는 유일하게 제1차 세계대전 초기부터 반전운동에 나서서 군부의 최대 적수가 됐다.

그렇다면 독일 민주주의 혁명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다. 구 지배 질서의 기둥이자 세계 전쟁의 원흉인 군부를 해체해야만 했다. 귀족 장교단이 이끄는 군대 대신 공화국 군대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사회민주당은 바로 이 과제를 회피했다. 단순히 피하기만 한 게 아니라 군부 잔당과 야합해 이 과제의 해결을 부르짖는 옛 동지들을 탄압했다. 이런 식으로 수립된 공화국이 결국 나치당 같은 세력에게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이는 단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만의 비극은 아니었다. 개혁파 사회주의자들이 바라는 사회 개혁이 전 세계로 확산되려면, 무엇보다 제2차 산업혁명의 두 주도국에서 개혁이 시작돼야 했다. 불행히도 그 중 한 나라, 독일은 개혁은커녕 파시즘이 승리했다. 개혁은 '뉴딜'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시작됐고, 이 개혁의 내용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 표준이 됐다.

하지만 독일의 사회주의 및 노동운동 전통이 실현할 수도 있었을 개혁은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실제 이뤄낸 개혁과는 분명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개혁의 방향과 수준이 현저히 달랐을 것이다. 전자는 불발하고 후자가 유일한 대안이 됨으로써 20세기에 가능한 사회 개혁의 전반적 방향과 수준도 한계가 뚜렷해졌다. 그 최대치는 자유주의가 허락하는 한계선을 넘을 수 없게 됐고, 또한 그렇기에 시장 자유주의의 반동 공세(지금 우리가 '신자유주의'라 부르는)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형태가 됐다.

이 모든 사건들의 연쇄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1919년 1월 추운 독일의 거리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때 이른바 개혁파의 선택은 사회 개혁의 풍부한 가능성을 스스로 봉쇄해 버렸다. 역설적이게도 이는 혁명이 가장 필요한 시점에 혁명을 기피한 탓이었다.

미완의 과제 - '대중', '민주주의'와 하나 된 사회주의


혁명 노선 측면에서도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죽음은 한 세기에 걸친 비극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혁명파 사회주의자라는 점에서 러시아 볼셰비키 지도자들과 통했지만, 크게 다른 점도 있었다. 두 사람은 러시아보다는 대의 민주주의가 좀 더 발전한 독일 사회에서 오래 활동하며 경험을 쌓고 사상을 다졌다. 그래서 대중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사회에서 혁명 정치가 무엇을 고민하고 해결해나가야 하는지 러시아 혁명가들보다 훨씬 명석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1월 15일 사건은 독일, 더 나아가 서유럽 혁명 운동 전체에서 이런 지도자들을 앗아갔다. 이후 독일공산당은 미숙한 젊은 간부들의 지휘 아래 좌충우돌을 거듭했다. 독일공산당만이 아니라 각국 공산당의 국제조직인 코민테른도 유럽 혁명을 추진하며 비슷한 역정을 밟았다. 제1차 세계대전 끝 무렵 시작된 혁명 물결이 이렇게 미로에서 헤매는 동안, 유럽에서는 혁명에 맞선 가장 사악한 대안, 파시즘이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저 서로 다른 경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룩셈부르크의 경우는 특히 그랬다.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급진파 당원으로 활동하며 동시대 다른 혁명가들과는 사뭇 다른 시각을 발전시켰다. 무엇보다 대중을 바라보는 각도가 달랐다.

룩셈부르크가 1905년 제1차 러시아 혁명 경험을 바탕으로 쓴 저작 <대중파업론>(1906년)에 이런 시각이 잘 드러난다. 이때 처음 등장한 대중파업 현상은 사회주의자들도 미처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러시아 제국 곳곳에서 민중은 차르 정부에 맞서 스스로 파업에 나섰다. 노동조합 소속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사회주의 정당들의 지침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많은 고참 사회주의자들이 이 현상이 사회주의 프로그램에 맞는지 아닌지 따질 때에 룩셈부르크는 단호히 이것이야말로 20세기 혁명의 얼굴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대중이 혁명의 주인공이라는 명제를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어떤 이들은 룩셈부르크가 대중을 신비화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그가 이후 안토니오 그람시가 그랬던 것처럼 혹은 프랑크푸르트 학파나 20세기 말 서구 마르크스주의처럼 대중의 여러 얼굴을 더 깊이 분석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신비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룩셈부르크는 대중의 갖가지 얼굴, 서로 반목하고 충돌하기까지 하는 얼굴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얼굴을 혁명운동이 진지하게 마주해야 할 현실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룩셈부르크가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의 선택들을 가혹하게 비판한 이유를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중은 대중파업에서 그랬듯 예기치 않게 앞서 나가기도 하지만, 완강하게 변화를 거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혁명 러시아에서처럼 당-국가가 지적-도덕적 전위를 자임하며 대중에 대한 독재를 실시할 수는 없다. 다시 한 번, 혁명의 주역은 대중 자신이다. 혁명은 철저히 민주주의와 일체여야 한다. 민주주의가 혁명을 전진시키는 결정으로 나타날 때만이 아니라 그 반대 상황에서도 이 원칙은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룩셈부르크는 제헌의회 해산 이후 새 총선 실시를 거부하는 러시아 혁명 정부를 꾸짖었고, "진짜 자유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자유까지 인정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강조했다. 대중 자신의 살아 있는 활동, 가장 자유로운 공공생활을 통해서만 사회주의는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 정부가 인내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길고 험난한 우여곡절을 수반하겠지만, 이것만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20세기 사회주의 경험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이러한 예언적 비판을 항일혁명가 김산(장지락)의 회고록 <아리랑>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다음 대목이다.

"주어진 다수의 투표는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그 다수가 올바른가 않은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레닌 한 사람이 옳고 당 전체가 그를 수도 있다. 그러나 고독한 레닌 한 사람이 옳다고 하는 경우, 레닌이라는 사람이 개인적으로 전혀 오류를 범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라 대중의 다수 의사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옳은 것이다. 또한 당이 그르다고 하는 경우, 그것은 당이 자기 밑에 있는 대중의 다수를 더 이상 대표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민주적 의사표시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지도력의 문제는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지만 그것이 억압당하고 있는 곳에서는 지도력의 문제가 위험하고도 어려운 것이다. 진정한 민주적 대중투표를 하면 잘못된 결정이 내려질 수가 없다." (<아리랑>(님 웨일즈 ‧ 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동녘 펴냄, 2005년) 468쪽)

아니, 실은 잘못된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다. 그래도 이 길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란 결국 대중 자신에 의한 대중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가장 험난하고 지루한 여정을 예고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룩셈부르크는 이 진실을 냉철히 직시했다. 독일공산당 창당대회에서 그는 독일 혁명이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됐다고 진단했다. 도시의 대중은 각성하기 시작했지만, 농촌 대중은 그렇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하듯이 이런 문장으로 연설을 끝마쳤다.

"역사의 진보는 부르주아 혁명을 수행하듯이 그렇게 쉽게 이뤄지지는 않습니다. 부르주아 혁명은 하나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두어 명 혹은 수십 명의 새로운 얼굴을 대체시키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무결한 역사의 진보를 추구해야 하며, 우리가 수행해야 할 혁명의 성격과 목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질서의 본질을 포괄하는 대중적인 길을 따라야 합니다.

이런 과정은 여러분이 그때그때 느끼기보다는 훨씬 더 오래 걸려서 달성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혁명을 달성하려면 혁명이 갖고 있는 고난과 어려움을 충분히 명확하게 깨닫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 저는 감히 여러분께 그와 같은 과정이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인지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중 누가 과연 혁명의 그날이 오기까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로자 룩셈부르그의 사상과 실천>(파울 프뢸리히 지음, 최민영 옮김, 석탑 펴냄, 1984년) 328~329쪽에서 재인용)

20세기로부터 넘겨받은 숙제 –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그 날로부터 100년 뒤인 지금,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죽음이 사회주의 운동의 여러 흐름에 던진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 시대의 숙제로 남아 있다. 21세기 좌파 역시 탈신자유주의 개혁은 얼마나 혁명적이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으며, 지구화-금융화에 대한 불만을 극우 포퓰리즘 지지로 토해내는 성난 대중과 마주하고 있다.

100년 전 1월 15일이 폭력적으로 앗아간 기회를 21세기의 우리는 과연, 지난 세기보다는 더 성숙해진 도전으로 만회해낼 수 있을까? 룩셈부르크의 저 유명한 촉구,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에 21세기는 어떤 답을 던지게 될까?

"우리들 중 누가 과연 그날이 오기까지 살 수 있겠냐"던 그의 마음을 떠올리며 문득 겸허해지지만, 그래도 부질없이 다짐해본다. 이번에는 반드시 야만의 반대쪽 대안이 승리'해야만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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