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김용균, 그리고 수탈 떠넘기기를 넘어
[장석준 칼럼] '수탈 떠넘기기 사회', 지속 가능한가?
전태일, 김용균, 그리고 수탈 떠넘기기를 넘어
'태일이’라는 제목으로 전태일 열사의 삶을 그린 애니메이션이 제작된다는 소식이다. 공동 제작자는 전태일 재단과 명필름이고, 제작비의 일정 부분은 시민 모금 운동으로 마련한다고 한다. 모금 운동은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 지금 한창 진행 중이다(바로 가기, 1차 마감 2월 19일).

반가운 기획이다. 덕분에 내년, 그의 50주기가 좀 더 의미 있어질 듯하다. 동시에 이는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2020년대를 맞이하는 한국 사회에서 전태일 열사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단지 50주년이라는 햇수 때문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오늘날 우리는 왜 다시 전태일을 만나고, 대화하고, 되살려야 하는가?

수탈의 외부화 혹은 수탈 떠넘기기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길을 좀 돌아서 가야겠다. 자본주의와 노동운동의 역사적 관계를 한 번 짚어봐야겠다. 역사 속에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단일했던 적이 없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자본이 노동을 ‘착취'한다고 하지만, 그 착취조차 극히 다양한 얼굴로 나타나곤 했다.

K. 마르크스의 <자본> 제1권만 봐도 그렇다. 이 책이 거론하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 양상 가운데는 겉보기에 전혀 ‘착취'같지 않은 상황도 있다.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급상승하는 경우다. 기술 혁신으로 생산성이 상승하고 노동자도 노동조합으로 조직돼 대항력을 갖춘다면, 자본이 막대한 이윤을 챙기더라도 노동자의 실질 임금이 상승할 수 있다. 물론 노동자의 소득이 증대하는 것보다 더 엄청난 규모로 자본 축적이 이뤄져 자본과 노동의 권력 불균형은 (완화되기는커녕) 더 심해질 가능성이 크지만 말이다.

이런 고도한 형태의 착취가 한 쪽 끝에 있다면, 다른 쪽 끝에는 ‘착취'라는 말로도 다 형용이 안 되는 상황이 있다. 자본이 이윤을 뽑아내기 위해 노동자의 생존까지 위협하는 경우다. 단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주는 것만 문제가 아니다. 말 그대로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가며 혹사시키거나 재난에 노출시킬 수도 있다. 이런 경우를 위에 제시한 정반대 극단과 한데 묶어 '착취'라 하기는 너무 억지스럽다. 아마도 '수탈'이란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18세기 말 영국에서 산업 자본주의가 처음 시작된 이후 이에 맞선 노동운동의 역사는 이런 수탈 받는 자의 처지에서 벗어나려는 위대한 도정(道程)이었다. 실제로 빛나는 성과가 있었다. 지난 세기 중반쯤에 자본주의 중심부 나라들에서는 마르크스가 가장 발전된 착취 형태라 여겼던 것이 당연한 상태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적어도 '수탈'이라 불릴 상황은 눈앞에서 사라진 듯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노동운동, 더 정확히 말해 노동조합운동의 커다란 한계가 숨어 있었다. 각국 노동운동은 자신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수탈을 폐지해나갔다. 단체협상을 통해, 국내 입법을 통해 이 과업을 실현해갔다. 하지만 수탈은 종식되지 않았다. 자본은, 높은 기술 경쟁력을 갖춘 자본조차 수탈을 통한 손쉬운 이윤 획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수탈은 다만 노동운동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 바깥으로 떠넘겨졌을 뿐이다. 수탈은 사라지지 않고 단지 외부화되었다.

이런 외부화가 장기간 순조롭게 지속되는 듯 보인 것은 지리정치적 분리와 구획 덕분이었다. 수탈은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의 시민이 일상에서 목격할 수 있는 공간 바깥으로 떠넘겨졌다. 20세기 전반까지는 식민지들, 그 이후는 남반구 국가들이 그런 외부였다. 이런 외부가 존재했기에 자국 자본이 여전히 수탈을 즐긴다는 점이 국내 계급 관계에 긴장을 초래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오직 제국주의 세계 질서를 비판하는 이들만이 괴로워했을 뿐이다.

또한 오래 된 진보주의 서사도 한 몫 했다. 이에 따르면,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가장 문명화된 형태를 향해 전진하는 중이었다. 수탈은 어쨌든 과거의 기억일 따름이었다. 아니면 주책없이 명을 이어가는 과거의 잔재일 뿐이었다. 결국은 전 세계 노동계급의 전진에 밀려 사라지고 말 운명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이 거대한 환상이었음을 안다. 수탈의 지리적 외부화는 장기간 지속될 수 없음이 드러났다. 또한 지리적 외부화 자체가 돌이킬 수 없는 역설적 효과들을 낳았다. 수탈의 장소는 머나먼 남반구가 아니라 거기에서 건너 온 이주 노동자의 일터로 갑자기 가까워졌다. 한편 거대한 중국, 인도 노동시장의 개방과 함께 모든 나라에서 예외 없이 자본과 노동의 세력 균형이 자본 쪽으로 확 기울었다. 그러자 자본주의 중심부의 자본-노동 관계에서도 과거의 수탈을 연상시키는 양상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는 노동운동이 실패한 그곳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했다. 노동운동의 실패란 수탈을 종식시키지 못하고 외부로 떠넘기기만 한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승리란 바로 이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허물어뜨린 것이었다.

바로 옆에 수탈 떠넘기기 : 과연 더 지속될 수 있는가?

굳이 장황하게 다른 나라 경험을 이야기한 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등등의 차이가 일종의 신분으로까지 굳어지는 듯한 한국 사회 현실을 곱씹기 위해서다.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노동운동의 본격적 도전에 직면한 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그 후 민주노동조합운동을 통해서였다. 이때부터 대기업과 공공부문에서는 단체협상을 통해 착취의 다양하고 넓은 스펙트럼이 점차 제약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의 자본 역시 수탈을 포기할 의향은 전혀 없었다. 다만 한국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세 중심(서유럽, 미국, 일본)과는 달리 국외에 수탈 기지를 구축할 기회를 잡기 쉽지 않았다. 자본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진입한, 정말 예외적인 성공 사례였기 때문이다.

1997년 외환위기는 바로 이 궁지에 출구를 열어주었다. 외환위기는 한편으로는 한국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세 중심처럼 해외로 확장할 수는 없음을 일깨워주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수탈의 외부화를 추진할 다른 길을 여는 기회가 되었다.

우선 4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정책과 담론, 관행들이 봇물처럼 수입됐다. 여기에 한국 사회만의 다른 조건들이 호응해주었다. 노동조합이 기업별 조직이라 단체협상 적용 범위가 유례없이 좁았고, 또한 노동권 강화 입법을 추진할 좌파-노동자 정당도 없었다. 그래서 수탈에 맞서는 저항 중심 바로 옆에 그 수탈을 떠넘길 '외부'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사유화, 정리해고, 외주하청, 노동 유연화 등등이 그런 외부를 만들어내는 효과적 수단이 되어주었다.

이것은 유례없는 '실험'이기도 했다. 어느 자본주의 국가도 대의 정치가 작동하는 사회적 경계 안에 인위적으로 '외부'를 창출해 수탈을 떠넘긴 적은 없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게다가 대규모로 말이다. 고도 성장 사회 안에 수많은 바깥들이 그것도 풍요의 현장 바로 곁에 존재한다니 그에 따른 첨예한 긴장이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런 '외부'로 내몰린 이들에게 정치적 시민권이 있다면, 정치적 긴장 때문에라도 이 질서는 오래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에는 이런 질서가 수립됐고, 이 질서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버티고 있다. '실험'치고는 지나치게 성공한 셈이다. 이 성공을 위해 한국 자본주의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다 끌어 썼다. 연원이 조선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온갖 전통과 유습, 심성들이 첨단 신자유주의 기제들과 기묘하게 결합된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바로 내 곁에서 수탈이 벌어지는데도 제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니 나와 남을 가르고 저마다에 어울리는 고통의 경중이 다르다는 세계관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돌연 '양반', '천민' 같은 언어들이 부활한 까닭이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성공했다고는 해도 이것은 어디까지나 '잠정적' 성공일 따름이다. 정치적 시민권이라는 무기가 존재하는 한, 이런 질서를 오래도록 묵묵히 받아들이기란 불가능한 법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그 인내의 임계점 언저리에 있다. 곳곳에서 잔뜩 끓어오르고 있다. 최근에는 수탈의 외부화가 그 구체적인 한 양상을 통해 정면 공격받기도 했다. 위험의 외주화, 죽음의 외주화 말이다.

이런 폭발 일보직전 상황에서 선택은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수탈을 끊지 못하는 체제 자체를 공격하고 변화시키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수탈을 떠넘길 또 다른 바깥을 찾는 길이다. 가령 한국 자본주의도 이제는 말 그대로 지리적인 '외부'에 수탈을 떠넘길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요즘 이 나라 리버럴 정치인들이 경제 이야기만 나오면 늘 되뇌는 '북방'(혹은 '남방')은 그래서 결코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전태일의 '완전에 가까운 결단', 우리의 윤리적 결단

반세기를 넘어 다시 전태일과 대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70년 11월의 죽음을 석 달 전에 미리 결단하며 그가 남긴 저 유명한 일기를 다시 읽어야 할 시간이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 1970년 8월 9일 일기 (조영래, <전태일 평전>, 아름다운전태일, 2011. 237쪽)

이 일기에서 우리는 새삼 깨닫는다.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먼저 생각한 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의 임금, 자기의 권리가 아니었다. 그때 그의 마음에 떠오른 것은 다른 이들이었다. "불쌍한 내 형제",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나약한 생명체들"이었다.

전태일은 재단사였다. 당시 봉제 작업장에서 재단사는 주로 남성이 맡는 숙련기술직이었다. '시다'라 불리던 10대 여성 노동자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처우가 나았고, 때로 이들을 감독하는 중간 관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 노동 현장에 견줘보면, 전태일은 비정규직보다는 정규직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런 그가 봉제 작업장 노동권을 지키는 데 나섰고, 급기야 자기 목숨까지 던졌다.

왜 그랬을까? 그의 맑은 눈이 바라본 세상에는 자신의 고통을 떠넘길 바깥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쌍한 내 형제",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나약한 생명체들"은 눈 감으면 잊을 수 있는 남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동정할 대상도 아니었다. 전태일에게 그들은 "나의 또 다른 나들"(1969년 일기, <전태일 평전> 219쪽)이었다. "나의 또 다른 나들"이니 고통을 떠넘기는 일 따위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우리는 함께 해방될 수 있을 뿐이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불꽃같은 외침 속에서 재단사인 자기와 시다인 "나의 또 다른 나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이 결의를 그는 "완전에 가까운 결단"이라 했다. "나의 또 다른 나들"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영원히 "내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결단. 여기가 시작이었다. 우리 노동운동의 출발에 이 결단이 있었다. 하나의 윤리적 결단이 있었다.

어쩌면 이 출발점이야말로 우리가 잊은, 하지만 반드시 되불러내야 할 단 하나의 진리일 것이다. 이 원점은 속류 유물론이나 경제주의 따위로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기야말로 지금 노동운동이 돌아가야 할 자리다. 자본이 노동에게서 예측할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더 많은 임금을 바라는 존재라는 점도, 더 편한 일자리를 원하는 존재라는 점도 아니라 윤리적 존재, 즉 어떤 윤리적 결단을 내릴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잊었던 출발점 안에서, 지금 노동운동 내 양 극단이 각각 자기만의 전유물인 양 여기는 '반자본주의'와 '사회연대전략'이 하나로 만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반드시 그래야 한다. 수탈을 끊지 못하는 체제는 종식돼야 한다는 것, 그 변화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삶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것, 이제 이 두 진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청년 노동자 고 김용균 님이 지난 9일 전태일 열사 곁에 묻혔다. 남은 우리 역시 "나의 또 다른 나들" 곁으로, 우리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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