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에 고종 장례를 재연한다? 우스운 짓!
[장석준 칼럼] 3.1운동에서 기억해야 할 열망, 사회주의
3.1절에 고종 장례를 재연한다? 우스운 짓!

며칠 지나면 백 번째 삼일절이다. 이 뜻깊은 날을 기념한다고 요즘 곳곳이 떠들썩하다. 한데 그 가운데에는 손발이 영 안 맞는 모습도 보인다. 한편에는 3.1운동을 이제 '3.1혁명'이라 부르자는 논의가 있다. 조선왕국 혹은 대한제국이 망한 지 9년만에 3.1운동으로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으니 항일독립운동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혁명으로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이야기다.

그런 와중에 다른 한 쪽에서는 고종 장례식을 다시 치르겠다고 한다.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가 아니라 한갓 이왕(李王)으로 장례를 치렀으니 이제라도 성대히 국장을 하겠단다. 우스운 짓이다. 망국의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진 자가 고종인데 기념할 게 뭐가 있으며, 게다가 3.1'혁명'이라는 논의대로라면 고종이야말로 민주주의 혁명의 타도 대상, '조선판 루이 16세' 아닌가. 무려 100년 전에 첫 민주주의 혁명이 있었다는데도 정책 담당자의 머릿속에는 아직 민주주의가 스며들지 못한 것인가.

사정이 이렇고 보니, 3.1운동을 둘러싼 시끌벅적한 분위기도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3.1운동 탓이 아니다. 100년 전 만세 시위는 분명 혁명적 대사건이었다. 문제는 지금 우리다. 우리는 아직도 이 사건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혁명'이라 하면서도 막상 혁명인 이유는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세대, 3.1운동 세대

한국 현대사에는 유독 뚜렷한 자취를 남긴 세대들이 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4.19 세대(혹은 한글 세대)와 민주화 세대(혹은 86세대)다. 4.19 세대는 대한민국 공교육 과정을 밟으며 성장한 첫 세대이자 젊은 나이에 정부 수립 후 첫 번째 민주주의 혁명인 4월 혁명에 참여한 세대다. 한국어로 된 지식과 정서의 세계는 사실상 4.19 세대를 통해 틀이 잡혔다 할 수 있다.

민주화 세대에 관해서는 긴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것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세대'라는 꼬리를 단 말 중에 긍정적인 맥락에서든 부정적 맥락에서든 가장 자주 이야기된 게 86세대다. 이 세대는 4.19 세대와 비슷한 나이에 1987년 6월 항쟁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무려 30년 뒤의 2016~17년 촛불 항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금도 한국 사회는 민주화 세대의 정신사적 자장(磁場) 안에 있다.

그러나 실은 이 두 세대보다 더 돋보이는 세대가 있다. 바로 3.1운동 세대다. '3.1운동'이 앞에 붙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3.1운동의 지도자급 인물들은 이 세대에 속하지 않는다. '3.1운동 세대'란 실제 거리에서 만세 시위를 벌인 남녀 학생, 청년들을 말한다. 4.19 세대나 민주화 세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4월 혁명으로 정권을 쥔 것은 보수야당 정치인들이고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이끈 것은 재야 운동가들이지만, 이들 사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것은 투쟁 현장에 있던 젊은이들이다.

즉, 3.1운동 세대는 1919년 만세 시위 때 10대~20대였던 이들이다. 그 시절은 지금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어른 구실을 했으니 중학생 연령대(13살 이상)였던 이들까지는 반드시 포함시켜야 한다. 더구나 이때는 20대 후반이면 벌써 지도자 반열에 설 수 있었다. 그렇다면 20대보다는 오히려 10대에 가까울수록 3.1운동 세대의 본류였다 할 수 있다. 탄생 연도로 따지면, 189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중반까지 태어난 이들이다.

이 세대는 항일독립운동의 몸통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가장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은 이들보다 윗세대다. 젊었을 적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경험하고 망국 이후 망명길에 나선 세대이거나 망국 전후하여 일본이나 중국에 유학한 뒤 투쟁에 뛰어든 세대다. 그러나 이름 있는 이들은 이들 세대에 많았어도 항일독립운동을 거대한 대중적 흐름으로 만든 것은 이들 세대가 아니다. 3.1운동 세대다. 중고등학생 나이에 항쟁에 참여한 이 세대의 수많은 이들이 곧바로 국내외 항일 투쟁에 대거 가담해 광복의 그날까지 독립운동의 기둥이 됐다.

예컨대 의열단 단장 약산 김원봉이 1898년 생으로 이 세대에 속한다. 약산의 가장 절친한 동지 윤세주(1901년 생)도 이 세대이고, 의열단에 참여한 이육사 시인(1904년 생)도 마찬가지다. 이 세대 가운데 중국에 망명한 이들이 상해 임시정부의 윗세대와 경쟁하며 새롭게 연 항일 투쟁의 물줄기가 의열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김구의 한인애국단에서 활동한 이봉창 의사도 1902년 생으로 이 세대에 속하고, 1908년에 난 윤봉길 의사도 비슷한 연배다.

이처럼 치열하게 항일 투쟁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이후 남한에서 지도자로 부상하는 이들도 여럿 있다. 윤보선(1897년), 박순천(1898년), 장면(1899년), 유진산(1905년), 유진오(1906년) 등이 그들이다. 한국 개신교의 이름 난 인물들도 이 세대에 몰려 있다. 김재준, 김교신, 함석헌, 이용도(이상 1901년), 한경직(1902년)이 다 이 세대다. 또한 한국 현대 문학을 정초한 이들도 이 세대에서 나왔다. 염상섭(1897년)부터 김동인, 현진건(이상 1900년), 김소월, 정지용, 채만식(이상 1902년)까지 말이다.

그러나 이걸로 다가 아니다. 아니, 나는 아직 3.1운동 세대의 절반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세대 가운데 1919년 봄에 시위대의 한 사람이었다가 이후 항일독립운동에 이름을 남긴 이들의 압도적 다수는 오랫동안 남한에서 이름이 지워진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이다.

좀 알려진 이름만 열거해도 이렇다.


한위건(1896년), 정칠성(1897년), 김성숙, 조봉암, 차금봉(이상 1898년), 김단야(1899년), 박헌영(1900년), 주세죽(1901년), 허정숙, 이관술(이상 1902년), 고명자(1904년), 이재유, 이주하, 이현상, 장지락(필명 '김산')(이상 1905년), 현준혁, 이강국(1906년), 김명시(1907년).

3.1운동 세대가 항일독립운동의 몸통이었다면 그 몸통의 대부분을 채운 것은 사회주의 계열 항일혁명가들이었다. 이 점에서 3.1운동 세대는 이 땅의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 1세대이기도 했다. 이 사실을 시야에서 지우고 3.1운동을 돌아보는 한, 우리는 결코 그 전모를, 아니 그 핵심을 파악했다고 할 수 없다.

3.1운동 세대의 정신사 : 김사국의 경우

왜 3.1운동 세대의 많은 이들은 사회주의자가 됐는가? 그 사연을 절절히 전하는 책으로는 장지락(김산)이 님 웨일즈와 함께 쓴 회고록 <아리랑>(송영인 옮김, 동녘, 2005)이 있지만, 다른 항일혁명가들의 고된 여정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김사국(金思國)의 생애가 그러하다.

김사국은 1892년 생이니 3.1운동 세대라 하기는 연배가 조금 위다. 그러나 3.1운동 와중에 보인 그의 극적인 의식 변화는 3.1운동 세대의 강렬한 공통 경험을 선명히 증명한다. 만세 시위 중에 감옥에서 그를 만난 김성숙(<아리랑>에 김산의 막역한 동지 '김충창'이라 나오는 인물)이 증언하듯이 3.1운동 당시만 하더라도 그는 열혈 민족주의자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어렵사리 학업을 마친 그는 교편을 잡기도 하고 만주를 방랑하기도 하며 3.1운동 직전의 엄혹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1919년 4월, 그의 이름이 역사의 한 복판에 등장한다. 서울에서 처음 만세 시위가 있고 나서 한 달 뒤에 인천에서 비밀회의가 열렸다. 여전히 전국 곳곳에서는 시위가 계속되는 중이었다. 비밀회의에 모인 이들은 만세 시위가 한창인 지금이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라고 뜻을 모았다. 이 자리에 김사국도 있었다.

실제로 4월 23일 서울 종로 봉춘관에 13도 대표가 모여 조선국민대회를 열고 대조선공화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때 선포된 임시정부는 상해와 연해주의 임시정부들과 구별해 '한성 임시정부'라 불린다. 한성 임시정부는 3.1운동이 벌어지던 현장에서 국내 민중 대표들이 모여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무릇 고전적 민주주의 혁명은 민중을 대표할 새 의회의 수립으로 절정에 이른다. 한성 임시정부는 이 길을 그대로 따랐다. 이런 한성 임시정부가 상해에 대표(대한제국 법관이었던 홍진)를 파견한 덕분에 상해 임시정부는 정통성을 제고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시도의 행동 대장 격이 김사국이었다. 그와 동지들은 1919년 봄에 이렇게 고전적 민주주의 혁명의 장면을 기획하고 이를 뜨겁게 체험했다. 물론 일제 당국은 국민대회에 참석한 이들을 곧바로 체포했다. 김사국도 구속돼 1920년 가을에야 풀려났다.

그런데 출소한 그는 더 이상 단순한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김사국은 사회주의자로 운동에 복귀했다. 동생 김사민(金思民)과 함께 노동자 조직 결성에 나섰고, 3.1운동의 세례를 받은 젊은이들을 청년회로 모았으며, 사회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그는 당시에 가장 큰 청년조직이었던 서울청년회를 발판으로 코민테른의 혁명 노선을 따르는 비합법 정당, 즉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려 했다. 이런 활동을 통해 김사국은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의 큰 줄기 중 하나인 서울파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출옥 후 김사국의 생각이 어떠했는지는 그가 쓴 글로 확인할 수 있다. 1921년 조선청년회연합회 기관지 <아성(我聲)>에 발표한 논설("사회 생활을 대상으로 한 신도덕의 수립")에서 그는 민주주의 혁명의 기반인 자유민권사상의 한계를 짚었다. 자유민권사상의 밑바탕에 있는 개인주의가 개인의 권리를 확대하기도 하지만 극단적 경쟁을 초래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회 여러 방면의 진보를 통해 이러한 개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안은 개인주의를 폐지하는 게 아니라 사회화함으로써 '사회화된 개인'을 확립하는 것이었다.(전명혁, <1920년대 한국 사회주의 운동 연구 : 서울파 사회주의 그룹의 노선과 활동>, 선인, 2007. 444쪽)

비록 짧은 글이지만, 논리가 정연하다. '사회화된 개인'이란 말이 언뜻 추상적으로 들리기는 한다. 하지만 김사국이 이 개념에 도달하게 만든 계기를 생각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그 계기란 결국 3.1운동이다.

1919년 봄의 전국적 만세 시위는 드디어 '민족'의 실체를 보여주었다. 과거에는 특정 지역의 민란은 있었어도 온 나라 민중을 잇는 공동의 정치 행동은 없었다. 갑오년 농민혁명은 호남이 중심이었고 다른 지역은 열기가 그만 못했다. 만민공동회는 서울이나 평양 같은 몇몇 도시에서만 열렸다. 그러나 3.1운동은 달랐다. 처음으로 전국의 대중이 함께 일어났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민족'을 실감하게 됐다.

'민족'만 발견한 게 아니었다. 또한 '평등'을 체험했다. 독립 만세만 외친다면 누구든 새 나라의 주인이었다. 어린 학생도 주인이고, 농민도 주인이고, 여성도 주인이었다.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가 시위의 중심에 서고 기생 같이 천대 받던 집단이 적극 참여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함께 만세를 외치며 그들은 서로가 평등한 존재임을 확인했다.

이런 집단적 깨달음의 과정 속에서 김사국 같은 이들은 '사회화된 개인'의 단초를 보았고 미래의 그 완성을 꿈꾸었다. 모두가 함께 함으로써 평등했던 1919년의 봄날을 그들은 실패한 독립 선언 시도로만 기억할 수 없었다. 그때 열렸던 세상을 되살리려는 일념으로 수많은 '김사국'들, 3.1운동 세대의 많은 이들이 새 길을 선택했다. 철저하게 대중적이었던 민주주의 혁명의 경험이 그들을 사회주의자로 만들었다.

'사회주의'를 지우고 3.1운동 세대를 기억할 수는 없다

김사국의 남은 삶은 비극적이었다. 그는 코민테른과 교섭하려고 연해주에 갔다 얻은 폐병으로 1926년 불과 35년의 짧은 삶을 마쳤다. 동생 김사민도 일제의 탄압에 폐인이 됐고, 부인이자 동지인 박원희(朴元熙)도 2년 뒤 병사했다(김사국의 삶에 관해서는 다음 책을 더 참고할 수 있다. 최백순, <조선공산당 평전>, 서해문집, 2017).

시간의 선후만 있었지 3.1운동 세대의 많은 이들이 이렇게 20세기의 비극에 이야기 하나씩을 보태며 쓰러져갔다. 김사국, 박원희처럼 해방 전에 사망한 사회주의자들은 그나마 뒤늦게 독립운동 유공자 서훈이라도 받았지만, 해방 이후에 분단과 전쟁에 휘말린 이들은 아직도 남, 북 양쪽에서 망각의 대상이 돼 있다.

허망한 세대였을까?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 더는 허망하게 놔둬선 안 된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원점이 정녕 3.1운동이라면 말이다.

20세기 초 독일의 혁명사상가 구스타프 란다우어는 "모든 혁명은 정신을 남긴다"고 말했다. 많은 혁명이 미완이나 실패로 끝나더라도 끊임없이 새 혁명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이었다. 란다우어는 혁명이 남긴 한 시대의 정신 덕분에 지금껏 인류가 그 인간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진단했다.

3.1운동 세대, 사회주의 운동 1세대는 다름 아니라 3.1운동/혁명이 남긴 정신을 대변했다. 물론 21세기에 그때 그들이 생각한 사회주의를 그 내용 그대로 이어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주의'란 말 속에 생동하던 정신을 지우고 3.1운동을 기억하거나 기념할 수도 없다. 우리 시대를 새롭게 할 정신을 잉태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100년 전 봄날을 바로 그 뜨거운 열망과 함께, 반드시 그것과 함께 기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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