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특집] 3·1운동 정신의 뿌리는 동학혁명
민족중심 ‘독립의 눈’에서 자유와 평등 염원한 ‘민중의 눈’으로 확장돼야
2019.03.14 19:04:02
[3·1운동 100주년 특집] 3·1운동 정신의 뿌리는 동학혁명
▲충북 청주시 우암산 자락의 3·1공원 전경.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흥식, 신석구 등 충북출신 민족대표 인의 동상이 서있다    ⓒ프레시안(김종혁 기자)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그동안 3·1운동 정신에 대해 민족 중심의 ‘독립의 눈’으로 바라보던 관점에서 자유와 평등을 염원하는 ‘민중의 눈’으로 확장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충북학을 연구해 온 김양식 충북연구원 박사는 지난달 28일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 종합학술대회에서 ‘충북 31운동, 그 기억과 기념’을 주제로 충북지역 3·1운동이 동학혁명에서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표했다.

김 박사는 “19~20세기 근현대 한국은 동서 문명이 대충돌을 겪으면서 평등·자유·민주·자주독립의 길로 나아가는 피나는 여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 역사는 동학혁명 이후 독립협회운동, 의병투쟁을 거쳐 식민지공간에서 3‧1운동이라는 혁명을 거치면서 새로운 근대사회로 진일보했다”고 밝혔다.

이어 “동학혁명에서 3‧1운동에 이르는 거족적인 혁명적 사건이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중세 신분사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던 민의 주체적 자각과 실천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한 개인으로서의 주체성을 자각한 민중들은 평등과 자유를 쟁취하고자 투쟁했고, 그들이 국가와 민족으로 통합되면서 근대 국민으로 재탄생했다”며 “주체적 국민으로서 등장한 민중은 그들의 평등과 자유를 공적인 국가 영역으로 확대해 민주주의와 자주독립을 실현하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김 박사는 그러한 민중 운동을 흐름이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의병운동으로 이어졌고 3‧1운동으로 전개됐다는 것이며 ‘대한독립만세’에는 외형적 나라의 독립 외에 자유와 정의, 평화의 목소리가 담겨있다는 설명이다.

즉 3·1운동은 일반대중이 참여한 비폭력평화운동이며 식민지에서 해방되고자하는 한 민족독립운동이며 민중 하나하나의 평등과 자유를 쟁취하려는 인권운동이자 민주화운동이라는 평이다.

김 박사는 “특히 충북지역은 ‘동학혁명은 충북에서 시작해 충북에서 끝났다’고 할 정도로 동학혁명이 활발하게 전개된 곳이다”며 “그 전통을 이어받아 민족대표 33인중 충북출신이 6명이며 그중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이 동학의 정통을 잇는 천도교 대표다”고 강조했다.

1860년 수운 최제우에 의해 창도된 동학은 1880년대 충북지역에 전파되면서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등 지역의 지도자급 인물들이 동학혁명기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동학 지도부는 1893년 충북 보은 장내리에서 ‘보은취회’를 가졌고 전국 각지에서 3만 명이 넘는 교도가 모여 이듬해 동학혁명의 기초를 마련했다.

특히 손병희는 1892년 삼례·공주집회, 광화문 복합 상소와 같은 동학운동 때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1894년 동학혁명 때는 동학교단 소속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전봉준부대와 연합해 공주 우금치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손병희는 1897년 37세 때 동학의 3대 교주가 됐다.
 
▲청주3·1공원의 항일독립운동기념탑   ⓒ프레시안(김종혁 기자)

김 박사는 “이처럼 충북지역에서 활발히 전개된 동학혁명의 지도자였던 손병희와 권동진, 권병덕 등은 이후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며 3·1운동에 불을 지핀 장본인 들이었다”며 “그러므로 1894년 피어오른 동학의 불꽃이 1919년 3·1운동으로 다시 피어올랐음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학혁명 이후 사회변혁과 민족운동에 참여한 지역 내의 변혁과 저항흐름이 3·1운동으로 모아졌다”며 “특히 충북은 동학혁명 당시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이들이 다시 3·1운동의 주체가 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김 박사는 충북 만세운동의 특징 중의 하나로 많은 청년층이 참여한 점을 들었다.

충북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에 피체된 139명을 살펴보면 농업 103명(74%), 학생 10명(7.2%) 등이며 연령별로는 20대가 61명(44%), 30대가 41명(29%), 40대가 19명(13.7%), 10대가 11명(8%) 순이었다. 

따라서 충북의 만세운동은 주로 20~30대의 젊은 청년 농민층에 의해 주도됐다고 볼 수 있으며 사회변혁을 위해 청년 운동을 펼쳤던 동학사상이 그 중심이 있었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다.

김 박사는 “동학혁명이 조선의 폐해를 청산하고 평등과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를 이루고자 했으며 3·1운동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다”며 “만세운동을 벌인 민중의 가슴속에는 인간으로서 누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 사람이 하늘인 인권 존중의식이 동력이 돼 비폭력 만세운동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라고 정의했다.

아울러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의 눈’으로 바라보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좀 더 자유롭게 자유와 평등을 갈망하는 인간의 눈으로 그때 그들의 함성에 귀 기울여야 한다”며 “새로운 100년을 행해가는 오늘은 사람이 하늘인 세상, 사람 하나하나가 존중 받는 사회, 사회 원칙과 정의가 살아 숨 쉬는 대동사회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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