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 점심
[‘바이크 보헤미안’ 최광철의 수상한 여행 3] ㉒성숙한 동행
체리 점심

1월 20일 미들마치의 아침, 비 그치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저만치 보이는 산꼭대기에 눈이 쌓였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휴게실에서 블랙커피를 한 대접씩 마셨다.
“빵을 더 사가야겠어요.” 추니가 말했다.
“점심은 푸케랑이(Pukerangi)에 가서 맛나게 먹읍시다." 만능 키가 말했다.
“기차역이니까 주변에 식당이 있겠지요?”
“그럼요. 명색이 기차역인데.”
“여기서 푸케랑이까지 21킬로미터 거리인데 시간이 많이 남을 것 같아요.”
"거기 가서 점심 먹고, 놀아도 거기 가서 놀자고요."
“거기서 몇 시에 기차가 더니든으로 출발하죠?”
“오후 4시 45분에요. 시간 충분해요.”
캠핑장을 떠나기 전에 이렇게 여유롭게 짐을 싸보기는 처음이다. 비로 인해 이틀 동안 묵으며 휴대폰 건전지도 완전히 충전했다. 보조 건전지를 세 개씩이나 가져갔지만 휴대폰을 구입한 지 오래돼서 그런지 건전지 소모가 많아 휴게실에서, 취사장에서 미리 충전하느라 늘 전전긍긍했다.

 

ⓒ최광철 여행작가·방송인

 

ⓒ최광철 여행작가·방송인


“이쪽으로 날 따라오세요.” 만능 키가 미들마치 캠핑장 정문을 나오자마자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플을 보고 가야 할 방향을 미리 알아놓은 듯했다.
"자, 이젠 좌측으로 들어갈게요.” 2킬로미터 정도 달려 비포장도로로 일행을 이끌었다,
“잠깐만요.” 만능 키가 갑자기 멈추더니 스마트폰을 터치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그 길이 아니에요.” 인천 총각이 뒤에서 소리쳤다.
“아니 맞는데 이상하네요.” 만능 키가 중얼거렸다.
“지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요. 날 따라오세요.” 인천 총각의 언성이 다소 높았다.
인천 총각은 자전거를 돌려 보란 듯이 반대 방향으로 질주해 나아갔다.

“직진요, 직진.” 뒤따르는 만능 키가 스마트폰을 보면서 앞에 달려가는 인천 총각을 향해 소리쳤다. 아까 실수한 걸 만회라도 하려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인천 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좌회전했다. 나는 인천 총각을 따라 500미터 정도 더 가니 만능 키가 일러준 직진 길과 다시 만났다. 아침부터 분위기가 썰렁했다.

푸케랑이 가는 길은 가파른 비포장 고갯길을 넘느라 연신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올라갔다. 정오, 푸케랑이 역에 도착했는데 역사 출입문이 닫혀있고, 기대했던 먹자골목도 없었다. 배고프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어서 그런가보다.

 

ⓒ최광철 여행작가·방송인


그런데 이상한 광경이 목격됐다. 오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역사 뒤 작은 공터에 할머니 여남은 명이 좌판을 깔고 앉아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관광객도 없는데.’
잠시 후 기차 한 대가 능선 아래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알고 보니 더니든(Dunedin) 항구에서 크루즈 관광객을 싣고 종점인 이곳 푸케랑이까지 온 것이었다.

기차에서 내린 백여 명의 손님들은 사진도 찍고 기념품점에 찾아들었다. 액세서리, 체리, 목도리, 사탕, 목조 공예품이 다 고만고만하다. 30분 정도 멈춘 후 승객들은 다시 기차를 탔고, 기념품 팔던 할머니들도 동시에 좌판을 접고 어디론가 떠났다.

나는 체리 한 봉지를 사들고 추위도 피할 겸 역사 창고에 들어갔다. 천장은 높고 구석엔 청소 비품들이 놓여있었다. 만능 키가 버너를 꺼내 커피를 끓였다. 빈 창고에 금방 훈기가 돌았다. 점심으로 체리 한 봉지를 나눠 먹었다.

4시 반, 우리 일행이 기다리던 기차가 도착했다. 역무원이 기차에서 내려 예약한 이름을 확인한 후에 자전거와 가방을 화물칸에 싣기 시작했다. 일행들도 함께 거들었다. 이 기차엔 호주 시드니에서 크루즈를 타고 더니든 항으로 온 관광객들이 타고 있었다.

 

ⓒ최광철 여행작가·방송인

 
푸케랑이에서 더니든까지 달리는 타이에리 협곡 열차(Taieri Gorge Railtail)는 험준한 바위산 58킬로미터 구간에 터널 12개와 높은 철교를 두 시간 동안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오후 6시 반. 100년 전 문을 연 스코틀랜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더니든 기차역에 도착해 인포메이션 센터를 찾아가니 퇴근 시간이 지나 문이 잠겼다.

“시내 캠핑장 어디 있어요?” 만능 키가 지나가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200미터 직진해서 우회전….”
“홀리데이 파크 어디 있어요?” 동시에 인천 총각도 지나는 이에게 물었다.
“좌회전해서 계속 직진하면….”

“자, 저를 따라오세요.” 만능 키가 중앙 광장을 가로질러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 이쪽이에요.” 인천 총각이 광장 왼쪽을 가리켰다.
“이 길이 맞아요. 글쎄.”
“아니 저쪽으로 가야 한다니까요.”
“따라 오시라니까요.”
“그쪽이 아닌데.”
만능 키는 인천 총각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냥 혼자서 질주해 나아갔다.
나는 추니와 인천 총각과 함께 어디론가 달려가는 만능 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최광철 여행작가·방송인


잠시 후 만능 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되돌아왔다.
"거봐요 참, 그쪽이 아니라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인천 총각이 나무랐다. 조금 언성이 높았다.
"허참, 이상하네." 만능 키의 얼굴이 붉어졌다.

일행은 아무 말 없이 인천 총각을 뒤따랐다.
“이 길로 직진하면 홀리데이 파크가 나옵니까?” 한참 달리다가 말고 인천 총각이 재차 확인하느라 지나가는 청년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저 고개를 넘어서….” 청년은 방향을 수정해줬다.
“아까 갔던 길이 분명 맞는데 말이야.” 만능 키가 혼잣말을 했다.
“한국에서 오셨어요?”
“네. 홀리데이 파크를 찾고 있어요.”
“저를 따라오세요.” 때마침 오클랜드에서 여행 왔다는 한국인이 우리가 우왕좌왕하는 걸 눈치채고 앞장섰다. 아침에 미들마치를 출발할 때 길 찾느라 옥신각신했는데 저녁에 또다시 더니든 한복판에서 갈팡질팡했다.

   

ckchoul@naver.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