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국제표준어, 진보정치의 방향
[장석준 칼럼] '세상의 큰 흐름'에 주목하는 진보정치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국제표준어, 진보정치의 방향

올해는 벚꽃을 보며 유독 2004년 이맘때를 떠올렸다. 그 해 4월에도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은 벚꽃이 만발했다. 당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이자 중앙선거운동본부 책임자였던 노회찬은 어깨띠 하나 두르고 당직자들과 함께 점심시간에 맞춰 거리 유세를 나갔다. 의사당 옆 윤중로는 마침 식사를 마치고 산보를 하거나 벚꽃 축제에 나들이 나온 시민으로 가득했다.

이때 처음 보는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마치 유명 연예인이라도 본 듯 노회찬 후보 앞에 멈춰서고 환호성을 지르며 에워쌌다. 먼저 악수를 청하는가 하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진보정당에게는 전에 없던 경험이었다. TV 토론회에서 노회찬 후보가 일으킨 바람이 실감됐고, 대중정치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때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 8번이던 노회찬이 당선될 줄은 미처 몰랐다.

벌써 15년 전 일이다. 그런데도 그때 장면이 생생하다. 아마도 그가 없는 채 맞이하는 첫 번째 봄이라 그럴 것이다.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의 계승 발전'부터 '판갈이'까지

지금은 다들 그 해 총선을 기억하며 민주노동당의 '승리'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니, 실은 이 선거도 한국 사회에서 진보정당이 돌파해야 했던 다른 선거처럼 힘든 시험으로만 다가왔다.

물론 반가운 조짐도 없지 않았다. 우선 2002년 지방선거에 이어 2004년 국회의원 선거에도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도입될 예정이었다. 진보정당 국회의원이 적어도 한 명 이상은 나오리라는 기대가 일었다. 게다가 2002년 광역의회선거 정당투표에서 전국에 걸쳐 약 8%를 득표한 덕분에 민주노동당은 TV 토론회 초청 대상이 됐다. 이들 토론회에 노회찬 후보가 출연하면서 비로소 사람들은 그의 정치 언어와 만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태풍이 2004년 총선을 뒤흔들었다. 총선 한 달 앞두고 한나라당이 다수 의석을 점한 국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다수 국민의 여론은 곧바로 탄핵 반대로 쏠렸다. 그러면서 총선 지형은 노무현 대통령을 지키자는 열린우리당과, 불리한 여론을 딛고 어떻게든 생존해보려는 한나라당의 치열한 양당 구도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 사이에서 민주노동당은 자칫 존재조차 눈에 안 띌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지역구에서 두 명을 당선시키고 최초의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 13% 넘게 득표하며 여덟 명을 당선시켰다. 애초에는 당 안에서조차 한 명이라도 국회에 진출하면 성과라고 했었다. 그런데 실제 당선자는 무려 10명이었다. 13%라는 정당 득표율에 민주노동당 스스로 놀랐다. 격렬한 양당 대립 속에서도 제3의 개혁 대안을 찾는 열망 역시 그만큼 치열했던 것이다. 2004년의 민주노동당은 바로 이 열망에 형체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럼 민주노동당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돌아보면, 총선을 앞두고 나름 치밀한 노력이 있었다. 2003년에 민주노동당은 1년 뒤 국회 진출을 대비해 정치 노선을 재정비하려 했다. 이때 고 이재영 정책실장은 강령 속 한 문구를 끄집어내 정치 노선의 대원칙으로 제시했다. 그것은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문구였다.

이미 강령에 있는 문구임에도 이를 새삼 강조하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많았다. 격론이 오갔고, 대의원대회도 전에 없이 뜨거워졌다. 결국 이 문구를 첫 머리에 단 정치 노선 안건은 불과 몇 표 차이로 대의원대회를 통과했다.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이라니 너무 생경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지나치게 추상적이기도 하다. 그때도 이를 그대로 구호로 삼자는 취지는 아니었다. 주된 고민은 집권당인 리버럴정당 열린우리당과 구별되는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의 입각점과 지향을 분명히 하자는 데 있었다.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말에는 이른바 '민주' 세력이 끌어안지 못하는 착취, 수탈과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이 정신을 좀 더 대중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작업이었다. 이재영 실장이 중심이 된 정책팀은 그 답으로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을 내놓았고, 이것이 민주노동당의 2004년 총선 구호가 됐다. 지금은 이 구호를 놓고 말들이 많다. 가령 부유층만 세금 부담을 늘려서는 복지를 확대할 수 없다는 반론이 있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이 구호의 핵심 메시지는 "세금 대 복지"가 아니었다. "부자 대 서민"이었다. '서민'을 정치의 주역으로 불러내려는 것이었다.

이런 비전은 마지막으로 노회찬 후보의 입을 거치며 더욱 구체화됐다. "수십 년 묵은 불판 갑시다"라는 TV 토론회 발언은 열린우리당-한나라당 구도를 넘어서는 정치적 지향을 선명히 제시했다. 대중은 이 말을 단박에 이해했고, 거기에서 자신의 열망을 (재)발견했다. 2004년에 일단 확인된 이 열망의 크기가 정당 득표율 13%였다. 2004년 민주노동당의 약진에는 이러한 실험, 논쟁, 분투의 과정이 있었다.

전 지구적인 '민주적 사회주의' 흐름에 주목하자

그러고 보면 그때 민주노동당 사정과 지금 정의당 사정이 그리 많이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촛불 항쟁 직후에는 이렇지 않았다. 촛불 직후 상황은 한국 정치에서 대단히 예외적인 국면이었다. 양당 구도가 아닌 다당 구도이면서 여러 정당 사이에 개혁연합이 구축될 수 있는 국면이었다. 양당 구도와는 다르게 자유한국당을 고립시킬 수 있는 국면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대신할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것 같다.

새 국면은 아직 안개에 싸여 있다. 다만 이를 촛불 이전 국면과 닮게 만들려는 강력한 힘이 작동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촛불 이전 국면, 즉 범민주당과 범새누리당의 양당 중심 정치 말이다.

자유한국당은 처음부터 이런 상황이 열리기만을 바라며 농성 정치를 계속해왔고, 선거제도 개혁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 다른 한편 더불어민주당은 문재인 정부를 향한 실망감 탓에 자유한국당 지지율이 오르고 촛불 항쟁의 효력이 소진하는 것처럼 보일수록 이에 위기감을 느끼는 이들의 표심을 여당 지지로 끌어 모으려 한다. 이미 이게 총선 대응 제1전략이 된 듯싶다. 이렇게 두 당 모두 2020년 총선에서 양당 대결 정치를 부활시키려 한다.

그렇다면 내년 총선도 진보정당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시험이 될 것이다. 즉, 지금 정의당의 처지는 2004년 민주노동당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때 민주노동당은 원외정당이었고 정의당은 원내정당이니 나아진 점도 있지만, 양당 구도의 구심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결코 만만치 않다. 이 상황에서 진보정당은 무엇을 준비하고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가?

나는 우선 세상의 큰 흐름에 주목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지금 자본주의 중심부 국가들에서는 전에 없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적 사회주의'가 현실 정치의 화제로 급부상하는 중이다. 버니 샌더스가 다시 출마를 선언한 미국 민주당 대통령후보 예비경선이 그러하고, 제러미 코빈 대표가 이끄는 영국 노동당이 그러하다.

미국은 오랫동안 '사회주의'가 금기어였던 나라이고, 영국 노동당이 당헌 제4조에서 이념이라 밝히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오랫동안 아무 내용도 없는 말로 방치돼왔다. 한데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심각한 사회 위기를 겪고 난 뒤에 상황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 다수는 샌더스 상원의원이나 '미국 민주사회주의자(DSA)' 조직이 주창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에서 대안을 찾는다. 영국 노동당 새 집행부는 야심 찬 탈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잇달아 발표하며 '민주적 사회주의'의 내용을 채우고 있다.

어떤 내용들인가?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시기를 거치며 파괴된 복지국가를 되살리겠다고 한다. 사실상 긴축 재정을 강요해 복지 확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균형 재정 이데올로기를 넘어서겠다고 한다. 신자유주의 지구화-금융화로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금융 자본을 손보겠다고 한다. 노동조합 같은 대중 조직들이 다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만들겠다고 한다. 공공부문을 확대하되 노동자와 지역 사회가 적극 참여하는 새로운 실험을 펼치겠다고 한다.

에너지 전환이나 기후 변화 대응, 교육 개혁처럼 시급한 과제들을 공공 투자로 해결함으로써 오히려 좋은 일자리를 늘리는 기회로 삼겠다고 한다. 기본소득이나 일자리보장제 같은 새로운 아이디어에 귀를 열겠다고 한다. 극우 포퓰리즘에 맞서 여성과 성 소수자, 이주민의 권리를 옹호하겠다고 한다.

한 마디로 신자유주의 시기에 구축된 자본주의 질서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지금의 질서와는 정반대되는 세상을 만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요즘 이러한 지향이 '민주적 사회주의'라 불리고 있다.

바로 여기에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말 자체야 쓸 수도 있고, 안 쓸 수도 있다. 괜히 무슨 주의가 옳으냐는 논쟁에 빠질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국제 표준어에 단긴 지향이다. 지금의 이 자본주의 질서를 극복해야만 인류에게 미래가 있다는 메시지, 하루라도 더 빨리 그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메시지 말이다.

이 지향을 명확히 한다면, 그 다음에는 마치 15년 전에 그랬듯이 한국적 상황에 맞게 변주하는 작업이 뒤따를 수 있을 것이다. 균형 재정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는 재정 기조를 합의할 수 있을 것이고, 기본소득제와 일자리보장제, 참여소득제를 놓고 토론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정당의 부동산이나 교육 정책을 시대에 맞게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고, 리버럴 세력의 경제 민주화론과 구별되는 경제 민주주의 비전을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을 더 생생한 입말로 설파할 차세대 정치가들에게 우리 시대에 맞는 무기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큰 방향이 선명해야 세밀한 대안도 나올 수 있다

요즘 이런 질문들을 자주 듣는다. 한국 진보정당운동에는 왜 버니 샌더스 같은 인물이 없는가? 한국의 젊은 세대는 왜 미국 밀레니얼 세대와 달리 '보수적'으로 보이는가? 노회찬이 떠난 지금, 우리는 과연 제2, 제3의 노회찬을 키워낼 수 있는가?

하나같이 다 깊은 고민을 거듭해야 답할 수 있는 물음이다. 하지만 이 물음들에 답하기 위해서도 우선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 시대에 진보정당운동이 밀고 나아가야 할 큰 방향이다. 그 방향이 뚜렷해야만 각각의 물음에 대한 세밀한 답도 낼 수 있다.

양당 구도 회귀에 겁먹거나 그런 구도 속에서 살아남을 묘책에 머리를 싸매봐야 소용없다. 큰 방향부터 확인하자. 갈 곳이 분명한 세력만이 담대해질 수 있고, 난관을 난관으로만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때에만 한국 진보정당운동은 또 다른 찬란한 봄을 맞이할 수 있다.


▲ 2004년 총선 당시 개표방송을 보는 민주노동당 관계자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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