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불명의 北 "체제 안전보장"이란 조어
[정욱식 칼럼] 동맹에도 없는 체제 보장을 북한에?
정체불명의 北 "체제 안전보장"이란 조어
25일(현지 시각)에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있었다. 이와 관련해 국내 대다수 언론은 푸틴이 기자회견에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서는 "북한의 체제안전보장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과연 그럴까? 크렘린의 공식적인 영어 번역본에 따르면 "체제안전보장"이란 말은 찾아볼 수 없다. 푸틴이 사용한 표현은 "북한은 안보와 주권에 대한 보장을 필요로 한다"거나 "국가안전보장이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상당수 언론들은 안전보장이라는 말 앞에 "체제"라는 표현을 습관적으로 쓰고 있다. 그것도 직접 인용 표시를 사용하면서 말이다. 상당수 전문가들과 심지어 정부 당국자들도 "체제안전보장"이라는 표현을 즐겨 써왔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크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북한이 공식적으로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북한 관리가 사석에서 이 표현을 사용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짚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불필요한 반감과 혼선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의 체제안전보장"이 말이 안 되는 이유

실제로 워싱턴포스트는 북러 정상회담을 다룬 25일 자 서울발 기사에서 "미국이 김정은 체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약속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고 진단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이 외부의 공격뿐만 아니라 내부의 불안에 대비한 보장이라면, 그 누구도 그러한 보장은 제공할 수 없는 것"이라는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이다.

"체제안전보장"이라는 표현이 자초한 혼선은 바로 이 지점에 닿아 있다. 6.12 싱가포르 북미 공동성명이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의 이른바 '노 딜' 직후 리용호 외무상이 사용한 표현은 "안전 담보", 즉 "안전 보장"이다. 푸틴 역시 국제법적인 구속력을 갖춘 다자간 안전보장의 필요성을 언급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앞에 "체제"라는 수식어를 달면 '도대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혼란과 함께 '북한이 비핵화를 하지 않게 위해 미국이 도저히 충족시켜줄 수 없는 요구를 하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오게 된다. 심지어 '북한의 독재체제의 안전을 왜 미국이 보장해줘야 하느냐'는 반감마저 일으키고 있다.

이와 관련해 2005년 4월 6일에 있었던 평화네트워크 초청 토론회의 한 대목을 소개하고자 한다. 초청에 응한 크리스토퍼 힐 주한미국 대사는 "6자회담 재개와 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북한의 체제안전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한 참석자의 주장에 대해 "북한의 체제가 수세기 동안 이어질 수 있는 보장을 해달라는 것 같은데 그런 보장은 북한 주민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응수한 바 있다.

"체제안전보장"이 상식 밖의 표현이라는 것은 한미동맹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다. 그런데 박정희와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군사독재체제를 만들었을 때에도 미국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체제를 보장해주지 않았다. 반면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회복한 주체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 국민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비롯한 어떠한 동맹 조약에도 "상대방의 체제안전을 보장해준다"는 표현은 없다. 가장 높은 안전보장 제도인 동맹에서도 체제안전보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동맹도 아니고 체제도 상이한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 체제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보장해줘야 한다는 취지나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현은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지적 리더십의 궁핍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국내 언론과 전문가들, 심지어 정부 관료들조차 "북한의 체제안전보장"이라는 정체불명의 표현을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사용해온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불필요한 오해와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지적인 리더십을 궁핍화시키고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하드 파워', 즉 물리적인 힘을 통해 상대방의 언행을 바꿀 수 있는 지렛대가 부족한 한국에게 외교의 원천은 '소프트 파워'에 있다. 어떤 나라보다도 한반도 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하고는 타자들이 경청할 만한 지식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을 비롯한 타자들도 잘 쓰지 않는 "체제안전보장"을 한국이 앞장서서 쓰고 있다. 이러한 습관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러시아나 중국 이상으로 대북 안전보장 방안을 비핵화와 조응해 공론화할 수 있어야 한다. 타자들이 한국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말이다.

일반적으로 적대 관계에 있는 쌍방의 안전을 보장하는다는 것은 크게 네 가지 과제를 요한다. 하나는 불가침 약속이다. 국제법적 구속력을 확보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한반도에선 평화협정이나 평화조약이 이에 해당된다. 둘째는 군축 조치이다. 군사적 태세를 낮추고 병력과 무기와 장비를 줄이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셋째는 외교적 조치로 주권 존중과 내정 불간섭의 취지를 담는 국교 수립이다. 북미·북일 수교가 이에 해당된다. 넷째는 경제 제재를 해제해 발전권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북한이 미국 주도의 제재를 "제도전복"을 노리는 "적대시 정책"으로 간주하고 미국 내 일각에서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제재 문제 해결도 필수적이다.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와 병행해서 추진되어야 할 대북 안전보장도 이러한 네 가지 틀에서 마련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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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