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의 시대, 인권은 '무기력한 동반자'?
[휴먼 라이츠 브리핑] ④ 인권과 경제적 불평등
불평등의 시대, 인권은 '무기력한 동반자'?

지난해 전 세계 억만장자들의 부가 하루 25억 달러씩 느는 동안, 하위 50%에 해당하는 38억 명의 재산은 11% 감소하였다. 국제개발단체 옥스팜의 '2019 불평등 보고서' 내용이다. 한국 역시 불평등이 외환위기 이후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왔다. OECD 통계를 보면, 상위 10%가 국내 전체 소득의 40% 이상을 점유하는 상황으로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소득불평등이 제일 심한 나라에 속한다. 이같이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불평등이 심각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경제불평등은 인권 문제인가 질문을 던져보자. 자유와 더불어 평등이 인권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임을 떠올리면, 경제불평등이 인권에 정면으로 반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대 이래 전세계적으로 인권담론과 운동이 눈에 띄게 확장되어 온 시기는 경제불평등이 급격히 증가하게 된 시기,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와 겹친다.


이에 대해 인권사학자 새뮤얼 모인(『인권이란 무엇인가(The Last Utopia: Human Rights in History)』, 『아직 충분하지 않다? 불평등한 세계에서의 인권(Not Enough: Human Rights in an Unequal World)』의 저자)은 "인권은 불평등 상태에서도 완벽하게 실현될 수 있다"라거나 "인권은 불평등에 대해 말할 게 없다"는 도발적인 진단을 내린다. (☞ 관련 글 보기


이에 대해 국제인권법 학자이자 극빈과 인권에 대한 유엔특별보고관으로 활동하는 필립 앨스턴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받아친다. (☞ 관련 글 보기


모인도 인권이 폭력과 억압에 대항하는 운동의 언어이자 권력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규범으로서 작동해 온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인권 규범과 운동은 국가폭력과 억압의 비인간성을 폭로하고 견제하는 데 효과적인 힘을 발휘해 온 반면,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권은 시장 절대주의에 대해 "무기력한 동반자"로 같은 시대를 공유해 왔다고 설명한다. 


앨스턴도 현재의 심각한 불평등 상황에 대해 국제인권운동의 반성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세계은행, IMF, WTO와 같은 경제 관련 국제기구들이 인권을 회피해 왔다면, 주요 인권단체들은 경제적 측면의 인권 문제를 다루는 것을 기피해 왔다고 지적한다. 1980년대 이후 급격히 성장한 인권운동, 특히 메이저 국제인권단체들이 고문, 가혹 행위, 사형제, 부당한 체포나 구속, 강제실종, 언론 탄압과 같이 국가폭력 문제에만 거의 집중적으로 힘을 쏟은 것이 사실이다. 


이 문제를 두고 2004-2005년에 인권 분야 국제학술지인 휴먼라이츠쿼터리(Human Rights Quarterly)에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작점은 대표적인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 사무총장 케네스 로스의 글이었다. 휴먼라이츠워치 같은 인권단체들은 구체적인 침해 행위와 가해자를 밝혀내고 비판하는 방법론(Naming and Shaming)을 통해 인권을 개선하는 데 강점이 있는데 "단순한 분배정의" 문제는 이러한 방법론으로 잘 다룰 수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전임 휴먼라이츠워치 사무총장 아레 나이어(Aryeh Neier)처럼 사회권의 인권적 성격을 아예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로스의 글은 사회권에 소극적인 메이저 인권단체들의 현 상황을 옹호하는 것처럼 비추어졌다. 매리 로빈슨 전임 유엔인권최고대표(1997-2002)를 포함한 인권옹호자, 학자들이 논쟁에 동참하여 인권기구와 단체들이 사회권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다. 1990년대부터 일찌감치 사회권 실현을 위해 정책연구를 하고 운동방법론을 개발해 온 센터 포 이코노믹 엔 소셜 라이츠(Center for Economic and Social Rights) 같은 국제인권단체도 있지만, 매우 드문 경우이다. 휴먼라이츠워치와 함께 메이저 인권운동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국제앰네스티가 사회권으로 활동을 확장한 것은 불과 십여 년 전이다. 2007년 "나는 존엄하다" 캠페인(영문명: Demand Dignity Campaign)이 그 시작이었다.

하지만 모인은 일자리, 임금·노동시간·작업환경 등 정당한 노동조건이나 주거·의료·교육·사회보장을 인권으로 옹호하는 활동이 있다 해도, 최소수준을 보장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 불평등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사회권의 인권적 지위를 인정하는 흐름이 있다 해도, 여기에서 인권의 역할은 빈곤 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최소주의적 접근에 그친다. 집에 비유한다면, 인권은 인간다운 삶의 최소기준으로 바닥을 설정하고 그 아래 지하에 사람들이 살지 않도록 하는 데 초점이 있지, 천장의 높이에 제한을 두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인권법과 인권사상이 예정하고 있는 당연한 귀결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보통 알려진 것과 달리, 세계인권선언 채택 때까지만 해도 유엔인권위원회 안에서 사회권에 대한 이견은 없었다. 당시 유엔인권위에서의 세계인권선언 성안 논의를 보면 국가권력과 함께 시장권력에 대한 통제도 인권의 당연한 역할로 여기는 것이 지배적 의견이었다. 


1940년대 미국에서는 루즈벨트 대통령 하에서 사회권을 헌법화하는 논의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졌었다. 좋은 일자리, 충분한 소득, 부당한 독점과 경쟁 없이 경제활동할 수 있는 권리, 적절한 주거·식량·의료·교육에 대한 권리,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가 그 내용을 이루었다. 미국에서 사회권을 담은 제2권리장전 구상은 결실을 맺지 못 했다.

  

하지만 유엔은 자유권과 함께 사회권을 동등하게 인권으로서 인정하는 세계인권선언을 1948년 채택하였다. 서유럽 많은 국가들에서 사회권은 단순한 수사나 최소 수준의 보장에만 머물지 않았다. 사회학자 T.H. 마샬은 『시민권과 사회계급』(1950)에서 괜찮은 일자리, 교육·의료·주거 같은 필수적 재화와 서비스, 소득상실의 위험에 대한 보호가 보편적으로 보장되면서 전체 사회불평등의 패턴이 바뀌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마샬에 따르면, 한 사회구성원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권리로서 사회권 보장은 "사회라는 건축물의 바닥을 높이는 데에만 머물지 않고", "전체 건물을 재설계하기 시작했다". 사회계급은 여전히 존재하되,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통적 가치를 인식하고 연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하였다고 평가되는 윌리엄 베버리지의 보고서(1942)를 토대로 노동당 정부가 한창 고용과 복지정책에 박차를 가하던 영국 사회에 대한 서술이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완전고용과 보편적 복지를 추구했던 상당수 서유럽 국가들에서 사회권이 불평등의 완화와 사회연대의 형성에 어떠한 의미를 지녔는지에 대한 진술로도 유효하다. 적어도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화되기 전인 1970년대 후반까지는 그러하다.


유럽과 북미를 제외한 다른 지역들에서는 사회권의 최저선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IMF와 세계은행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불평등을 악화시킨 대신 극심한 빈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social safety net)을 두게 하는 은혜를 베풀었다. 극빈은 기업 활동이나 자유무역에도 위험요소이기 때문이다. 유럽과 북미 많은 국가들에서는 2007-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계기로 강력한 긴축정책과 함께 복지가 후퇴한 반면, 같은 시기 상위계층의 부는 오히려 늘어났다. 전세계적으로 이제 불평등이 최대의 사회적 위협으로 떠올랐고,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글로벌 의제로 2015년 채택된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는 불평등 완화를 총괄 기조이자 독립적인 목표로 설정하기에 이르렀다.


인권이 이같은 불평등의 시대에 "무기력한 동반자"에 머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국가폭력과 억압에 대항하고 견제하는 역할만으로도 인권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불평등 심화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소수자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는 차별과 증오 정치에 땔감을 제공함으로써 시민정치적 권리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인권의 지평을 사회권으로 넓히고, 최저선의 보장을 넘어 평등하게 인간다운 삶을 향유하는 것으로 인권의 비전을 복원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길이다.


하지만 이를 현실로 만들어내는 것은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인권 침해를 가하는 행위자와 피해자가 명징하게 드러나 보일 때 인권은 가장 효과적으로 힘을 발휘해 왔다. 하지만 소득 격차가 삶의 격차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 인권 사회의 건설은 다른 방식의 인권 이론과 실천을 요구한다. 불평등을 양산하는 사회제도와 정책을 변화시키는 과정은 인권침해 행위자를 밝히고 비판하고 압박하는 것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모두에게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서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권리뿐 아니라, 각자 부와 소득에 따라 필요한 재정을 분담하는 책임에 대해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게 요구된다. 


또한 불평등을 해소하고 모두가 존엄한 삶을 누리기 위한 현 시대의 과제는 한 국가 내 완전고용과 시민들 사이 재정분담을 전제로 하였던 20세기 복지국가의 기획으로는 한계가 있다. 자본과 노동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글로벌 사회에서 다국적 자본에게 어떻게 세금을 물릴 것인가,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이주민들이 권리를 동등하게 누리게 할 수 있는 제도와 문화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성별, 인종 등과 교차하며 나타나는 불평등과 국가 간 불평등 문제를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 과연 이러한 것들이 인권의 역할이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는 것이 인권의 기본 가치이기 때문이다.


한국인권학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한 <휴먼 라이츠 브리핑>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인권과 관련 있는 여러 학문의 최신 동향과 연구자들의 성찰을 독자들과 나누려 합니다. 그것을 통해 한국 사회의 인권담론이 풍부해지고, 인권현안을 깊은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는 시각이 늘어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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