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홍콩에서 얻는 것
[김기협의 퇴각일기] 열아홉 번째 이야기
2019.07.13 10:33:51
중국이 홍콩에서 얻는 것

1990년 여름 계명대학을 떠나고 몇 달 후 중앙일보사 동서문제연구소에 객원연구원으로 이름을 걸어놓으면서 국제관계에 관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교수직에 있는 동안에는 현실문제에 관심이 적었다. '역사학자'의 의미를 좁게 생각하고 지낸 것이다. 그러다 신문사에 이름을 걸고 지내게 되니, 지금 세상 돌아가는 모양에 마음을 쓰게 되었다.

현실문제 중 국제관계로 관심이 먼저 간 것은 내 문명사 공부와 통하는 측면이 많기 때문이었다. 냉전 종식으로 세계정세의 큰 변화가 진행될 때였고, 나 자신은 몇 해 동안 해외여행을 많이 하면서 세상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키우고 있을 때였다.(1984~1990년간 해외 체류 기간을 합산하면 2년가량 되었다.) 냉전 이후의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갈지, 자연스럽게 흥미가 끌렸다.

당시 내가 바라본 세계의 중심에는 미국이 있었다. 소련의 침체와 붕괴로 세계가 2극체제에서 1극체제로 옮겨가는 것처럼 보였다. 승리감에 도취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이야기는 같잖게 들렸지만, 불확실성이 넘쳐나던 당시 상황에서 세계의 변화 방향이 미국의 변화 방향에 따라 일차적으로 정해지기는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 무렵에 쓴 글을 모은 책에 <미국인의 짐>(아이필드 펴냄)이란 제목을 붙이게 되었다.

한편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이야기는 그럴싸하게 들렸다. 이질적 문명 사이의 위화감은 인류 역사의 기본 요소의 하나다. 냉전 시대에도 상부구조(superstructure)는 이념과 진영의 대결로 짜였지만 바닥 흐름(undercurrent)에서는 문명 간 갈등이 큰 몫을 맡고 있었다. 이제 상부구조가 제거되면 바닥 흐름이 크게 드러날 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중국의 향로에 생각을 모으게 되었다. 서양 문명 아닌 문명 전통으로 한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을 꼽을 수 있는데, 이슬람 문명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너무 적었고, 다년간 연구해 온 중국 문명의 오늘과 내일을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중국의 해체 가능성을 생각했다. 개혁개방의 성과도 아직 크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고, 막 천안문 사태(1989)를 겪은 뒤였다. 중국은 19세기 중엽 이래 혼란 상태에 빠져 있었고, 제국을 대신한 '민국(民國)'은 국가의 기본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1949년 출범한 '신중국(新中國)'도 이데올로기의 힘으로 억지로 묶어놓은 상태에 불과한 것으로, '대약진(大躍進)'과 '문화혁명' 같은 극단노선이 그 본질로 보였다. 개혁개방 정책은 그 본질을 포기하는 방향이고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나 페레스트로이카보다 나은 결과를 바라볼 이유가 없어 보였다. 소련 못지않게 이질적 요소를 많이 품고 있던 중국을 묶어놓을 구심력이 이제 모두 소진된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중국이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꾸준히 부강(富强)의 길로 나가는 것을 보며 생각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갈피를 새로 잡기가 무척 힘들었다. 오랫동안 생각을 굴린 끝에 내가 깨달은 것은, 생각의 내용만이 아니라 생각의 방식부터 바꿀 필요였다. 내 공부 방식이 명확한 인과관계만을 추구하는 환원론적 경향에 너무 치우쳤던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공부 자세를 그 과정에서 세우게 되었다.

'중국이 단순히 버티는 정도가 아니라 대단한 발전을 앞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 외부세계에도 큰 영향력을 끼칠 위치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분명해진 것은 1997년 6월의 홍콩 반환을 바라보면서였다. 반환 1주년이 되던 날 나는 이런 글을 썼다.

홍콩, 차이나 1년

반환 1주년을 맞는 오늘 홍콩인들의 표정은 1년 전과 판이하다. 중국 정권을 대표하는 신화사(新華社) 분사(分社)의 초법적 횡포가 심심찮게 눈에 띄는 위에 정청(政廳) 시절에 없던 비리 사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총선에서 65%의 지지를 받은 민주당은 60석의 입법회에서 겨우 16석을 얻은 채 좌절감에 빠져 있다. 선거로 뽑는 의석은 20석뿐이다.

더욱 답답한 것은 경제 사정이다. 반환 당시 1만5000대를 넘보던 항성지수가 지금은 8000대에서 맴돌고 있다. 홍콩화와 달러화와의 연계체제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인다. 홍콩의 번영을 찾아 중국인들이 너무 몰려들 것을 걱정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일거리를 찾아 중국으로 가는 홍콩인들이 늘고 있다.

1년 전 온 세계의 이목을 모았던 축제 분위기는 이제 홍콩에서 찾아볼 수 없다. 1주년 기념식도 외교사절 외에는 바깥손님 부르지 않고 조촐하게 치른다고 한다. 그러나 홍콩인들의 표정이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지난날의 영화(榮華)는 빛이 바랬지만, 중국 내에서 홍콩의 장래 위상에는 큰 위험을 예상하지 않는 것이다. 찬바람이 불어야 송백(松栢)의 푸르름이 드러난다고 했던가, 경제적 역경 속에서 홍콩의 가치가 투철하게 확인된 셈이다.

홍콩을 끌어안은 중국의 표정도 여전히 느긋하다. 재작년 봄 대만 총통선거를 앞두고 군사훈련을 벌였던 것과 같은 긴장된 태도는 다시 보일 것 같지 않다. 홍콩을 가지고 1국2체제의 타당성을 입증한 만큼 대만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가지게 된 덕분일 것이다.

9년 전 천안문사태를 바라보며 많은 사람들은 중국의 붕괴를 예측했다. 의지해 온 공산권이 무너지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마저 퇴색한 뒤에 그 낙후된 경제를 끌고 거대한 나라를 지탱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그런데 중국은 미국의 경제제재 속에서도 뜻밖의 착실한 경제성장을 이룩하고 홍콩까지 무난히 접수한 것이다. 이질적인 체제의 홍콩을 포용한 데서 중국의 장래는 더더욱 세계인의 신뢰를 얻고 있다.

베트남 통일은 군사적 정복이었고 독일 통일은 경제적 정복이었다. 정복당한 쪽의 옛 체제는 새 통일체제의 부담이었고 파괴의 대상이었다. 그에 비해 중국과 홍콩은 두 체제의 미래 진로에서 공통점을 찾아내 접합시킨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체제가 짐이 되기보다 자산이 된 것이다. "버리면 쓰레기, 모으면 자원"은 통일의 과제에도 요긴한 교훈이다.

▲ 1846년 홍콩 부둣가. ⓒ위키피디아


모든 도시가 역사의 산물이지만, 홍콩은 특히 근대사의 산물이라는 특징을 가진 도시다. 지금 750만 인구가 사는 1000여 평방킬로미터 홍콩 영역의 200년 전 인구는 불과 몇만 명으로 추정된다. 청(淸)나라 신안현(新安縣) 한 모퉁이, 작은 농촌과 어촌이 여기저기 널려 있던 곳이었다. 아편전쟁(1839~42) 때 영국이 점거했다가 청나라로부터 할양받아 식민지로 경영하면서 새로운 역사에 들어선 곳이다.


홍콩은 공간적 관점에서 중국의 일부가 아닐 수 없다. 시간적 관점에서도 길게 보면 중국의 일부일지 모르지만, 1839~1997년의 158년 기간 동안 중국에서 떨어져 있었고 도시의 실체는 그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1980년대 초 영국과의 홍콩 반환 협상 때 중국이 제안한 '일국양제(一國兩制)' 원리는 시간적 관점과 공간적 관점 사이의 이 모순을 흡수하기 위한 것이다.

일국양제는 타협적인 원리다. 타협적인 원리에는 흑백이 분명하지 못한 영역이 있기 마련이다. 외교와 방위 등 대외관계는 중국 정부가 맡고 홍콩 내정은 자치로 한다고 했는데, 이번에 문제가 된 범죄인인도 협정에는 내정과 대외관계의 두 측면이 맞물려 있다. 어느 측면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홍콩 시민 대다수가 이 문제의 내정 측면을 중시하는 것은 중국의 정치체제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정치체제에 사람들이 적응하기 어렵고 반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홍콩 반환을 앞두고 중국이 홍콩의 정치체제와 홍콩인의 생활 방식을 50년간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적응의 시간을 가지겠다는 뜻이었다. 158년 동안 형성된 모순을 50년 동안에 해소하겠다는 것이었다.

▲ 1930년대 홍콩 중심가. ⓒ위키피디아


나는 20년 전의, 윗글에서 중국과 홍콩이 "두 체제의 미래 진로에서 공통점을" 찾아내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홍콩도 변화를 겪을 것이지만, 중국 또한 변화를 겪어나갈 것이었다. 홍콩은 하나의 도시일 뿐이지만 근현대사 속의 그 경험이 매우 특이한 것이어서 중국 쪽에서 오히려 배울 의미가 작지 않을 것으로 나는 생각했다. 중국과 홍콩의 접근 과정에서 홍콩이 일방적으로 중국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홍콩을 따라가는 점도 있을 것을 내다봤다.

홍콩의 특이한 역사적 경험이 모두 중국과의 관계에서 유래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이 참고할 필요가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애초에 영국이 그 황벽(荒僻)한 장소에 해군기지를 만들 필요도 당시 중국의 상황 때문이었다. 그 해군기지가 중요한 무역항으로 자라난 것도 중국의 혼란으로 광저우(廣州) 항의 기능에 장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중국 침략과 뒤이은 국공내전(國共內戰) 때문에 많은 인력과 자본이 홍콩으로 유입되었다. 그 후에는 중국의 고립 기간에 (상하이 등 중국 도시들의 경쟁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세계적 경제중심지의 하나로 성장한 것이 오늘날 홍콩의 모습이다. 식민지 홍콩의 150년 역사는 그 기간 중국 역사와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크기가 다른 주체들이 합쳐져 하나의 체제를 이룰 때 작은 주체가 오히려 변화를 선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조선과 명(明)나라의 조공 관계 형성 과정에서 읽는다. 원(元)나라 천하가 무너질 때 명나라와 조선이 일어섰다. 조선 측은 유교 원리에 입각한 긴밀한 조공 관계를 맺고자 했으나 명나라 홍무제(洪武帝)에게 거부당하다가 영락제(永樂帝)에게 수용되어 200여 년간 안정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천하 형세의 변화를 살피는 데 작은 주체가 더 예민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 반환을 앞둔 1988년의 홍콩. 가운데 건설 중인 큰 건물이 홍콩과 중국 사이의 주요 경제 통로가 될 홍콩중국은행(BOCHK)이다. ⓒ위키피디아


홍콩 반환 후 20여 년간 홍콩이 중국을 따라간 변화가 더 클까? 반대로, 중국이 홍콩을 따라간 변화가 더 클까? 잘라 말하기 힘든 일이다. 중국은 홍콩의 정치체제와 홍콩인의 생활방식을 50년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내 보기에 지금까지 홍콩의 정치체제가 중국을 따라 변한 것보다 중국인의 생활 방식이 홍콩을 따라 변한 것이 더 크다. 반환 전까지 경제 발전에 앞섰던 홍콩의 경험에 지금 단계에서 세상의 변화 방향을 더 예민하게 비춰볼 수 있는 측면이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혁개방 시작 단계였던 1980년대 초에 홍콩 반환을 의논하는 과정에서 '일국양제'론이 나온 데도 큰 의미가 있다. 그에 앞선 문화혁명 기간은 온 중국에서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한 시대였고, 개혁개방의 기본 과제가 다양성의 회복에 있었다. ‘일국양제’는 다양성의 유기적 통합이라는 의미에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원리를 바라보는 자세다. 개혁개방의 시대에 중국이 필요로 하는 화이부동의 원리로 나아갈 열쇠를 홍콩과의 관계에서 찾은 것은 600년 전 명나라가 천하체제 구축의 열쇠를 조선과의 관계에서 찾은 것과 같은 이치로 보인다.

범죄인 인도 협정에 반대하는 홍콩 시민들 중에 '영국 식민지로 돌아가자'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국의 체제에 일방적으로 흡수되지 말고 홍콩의 더 좋은 미래를 독자적으로 열어가자는 의지가 사람들을 길거리로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의지가 홍콩의 더 좋은 미래만이 아니라 중국의 더 좋은 미래를 위해서도 효과를 일으키기 바란다. <맹자> '양혜왕편'에 "큰 것이 작은 것을 섬김은 하늘을 기쁘게 하는 일이고,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김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일이니, 하늘을 기쁘게 하면 천하를 지킬 것이요, 하늘을 두려워하면 나라를 지킬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 당국이 하늘을 기쁘게 하는 길을 찾기 바란다.


▲ 2019년 7월 홍콩 시민들이 '홍콩 독립'이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송환법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AP=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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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소개
40세 나이에 교수직을 그만둔 후 20여 년간 독학으로 문명교섭사를 공부해 온 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이공계 수석 입학 뒤 사학과로 전과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프레시안 장기 연재를 바탕으로 <해방일기>, <뉴라이트 비판>, <페리스코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등의 책을 썼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거시적 관점에서 역사와 한국 사회를 조망하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역사 앞에서>의 저자 김성칠 교수가 부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