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가 미국을 지배했나, 미국이 석유를 지배했나?
[전쟁국가 미국·4강-④] 국제석유체제의 형성과 진화
석유가 미국을 지배했나, 미국이 석유를 지배했나?
이란의 석유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이란과 영국이 갈등하는 가운데 미국 정보기관이 이란 정부를 전복시켰다. 이것이 모사데크 정권 제거의 본질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미국은 다른 국가들 간의 경제 분쟁에 폭력적으로 개입한 것일까? 그 이유는 모사데크의 석유 국유화가 미-영 석유카르텔의 세계 석유 자원 지배에 대한 치명적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란이 영국이란석유회사(AIOC)를 국유화한 지 한 달이 채 안 된 1951년 5월 중순, 미국 석유 메이저의 대표들이 국무부 근동 담당 차관보 조지 매기를 만났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단호하게 이란의 석유 국유화에 반대한다는 뜻을 전했다. '과도한 양보'라는 것이다.

5월 18일 국무부는 성명을 통해 석유 국유화는 이란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한 미국 국민들에 대해 AIOC에서 철수한 영국인 기술자를 대신해 이란 정부에 협조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중소 석유기업의 이란 석유 구매도 금지했다. 이란의 석유산업 운영을 방해하고 석유 판로를 봉쇄한 것이다.

이로써 이란의 석유 국유화는 사실상 실패가 결정됐다. 이후 미국은 애치슨 국무장관이 나서 국유화 대신 수익 배분 증가로 타협할 것을 시도했으나 이는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모사데크가 국유화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은 물론이고 미국 정부와 석유 메이저들이 반대하는 한 이란의 석유 국유화는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미국은 세계 석유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결코 놓으려 하지 않았다.

석유 패권은 군사 패권, 금융 패권과 함께 미국의 세계 지배를 위한 핵심 요소다. 석유는 그 자체로 핵심 전략물자인 데다 달러 패권을 보장하는 원천이다. 석유는 달러로만 거래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석유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이다. 미국이 1991년과 2003년 두 차례에 걸쳐 이라크와 전쟁을 벌인 것도 바로 석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석유 패권은 1920년 말-1930년대 초에 완성됐다. 이른바 국제석유체제(International Oil System)가 그것이다.

당초 미국과 영국의 3대 석유 메이저가 밑그림을 그린 이 체제는 양국 정부의 협조로 완성된다. 2차 대전 후에는 미국이 주도권을 갖게 되면서 영국은 주니어 파트너로 전락한다. 이란의 석유 국유화는 국제석유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적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미국 석유 메이저의 장악력을 강화시킨다. 그 과정을 살펴본다.

석유의 정치경제학

석유는 가장 미국적인 상품이자 산업이다. 미국에서 최초로 발견되고 산업화 됐기 때문이다. 석유산업을 통제하는 시스템도 미국에서 발명됐다. 그 주인공은 존 D. 록펠러와 그가 세운 스탠다드석유회사다. 그는 독점에 의해 미국 석유산업을 장악했고 미국 최고의 부호가 됐다. 이후 극소수의 공급자가 세계 석유시장을 지배해온 전통도 록펠러에 의해 확립됐다고 할 수 있다.

1859년 펜실베이니아주 타이터스빌에서 세계 최초의 대규모 석유 채굴이 성공했다. 당시 석유는 '케로신'으로 불렸으며 주로 야간 조명용으로 사용됐다. 문제는 석유 공급을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것. 이 때문에 수시로 공급 과잉이 일어나고 가격이 폭락했다.

1861년 1월 배럴당 10달러였던 석유 가격이 6월 50센트, 12월에는 10센트로 폭락했다. 이래서는 석유산업이 지속될 수 없었다. 석유 가격의 안정적 유지가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록펠러다. 하지만 그 방법은 협잡과 속임수에 의한 것이었다.

록펠러가 택한 방법은 정유 단계부터 공급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즉 정유와 유통 단계를 장악해 공급을 줄이는 것이다. 공급을 줄이려면 공급을 독점해야 한다. 1865년 클리블랜드에 정유소를 설립한 그는 1871년 열차회사와 담합으로 석유 화물 요금을 할인받았고, 이를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정유공장을 비밀리에 사들였다. 그는 단기간에 클리블랜드(당시 석유산업의 중심)의 정유소 26개 중 20개를 합병했고 1875년에는 미국 전체 정유 능력의 95%를 장악했다. 불과 10년 만에 독점을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1882년 스탠다드 트러스트를 설립했다. 1872년 석유는 미국의 4번째 수출품이었고 공산품 중 최대 품목이었다. 스탠다드는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 대리인을 두고 세계시장을 장악한 데 이어 1870년대 후반부터 대폭 가격을 인상해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유럽에서도 대규모 유전 개발이 시작됐다. 석유 사업은 막대한 초기 시설 투자 때문에 거대 자본만이 할 수 있다. 1870년대 후반 다이너마이트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노벨 가문의 로버트 노벨이 러시아 아제르바이잔에서 유전 개발을 시작했고 1883년 세계 최대의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파리 지부가 투자에 참여했다. 여기에 동아시아 유통망을 가진 영국 상인 마커스 사무엘, 동인도제도(수마트라)에서 유전을 개발하던 로열더치 등이 가세해 1907년 로열더치셸이 출범한다.

즉 네덜란드의 로열더치가 원유 공급, 영국 상인 마커스 사무엘의 셸이 유통, 프랑스의 로스차일드가 자본을 대는 유럽계 거대 석유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스탠다드가 정유와 유통만을 담당하는 반면, 로열더치셸은 원유 채굴에서 정제, 유통까지를 아우르는 최초의 통합석유회사이자 스탠다드에 맞서는 최초의 라이벌이었다.

여기에 영국 정부가 1913년 영국페르시아석유회사(APOC)의 주식 51%를 인수하면서 국제 석유 업계의 빅3 체제가 완성된다. 주목할 부분은 영국 정부의 석유산업 진출이 전략적 고려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영국 해군은 1882년부터 기존 석탄 연료 전함보다 석유 연료 전함의 전투능력이 탁월하다는 데 주목했다.

석유 전함은 연기를 전혀 내지 않아 적에게 들킬 염려가 없었다. 반면 석탄 전함은 연기가 10킬로미터(km) 밖에서도 보였다. 또한 석유 전함은 연료 저장 공간, 운용 인원도 훨씬 적었다. 전함 한 척에 석유를 채우려면 12명이 12시간 작업하면 됐지만 석탄의 경우에는 500명이 닷새간 작업해야 했다. 게다가 석유는 해상에서도 연료 공급이 가능했지만 석탄은 반드시 항구에 들어와 연료를 채워야 했다. 또한 석유 전함의 행동반경은 석탄 선박의 4배나 됐다.

결국 영국은 1912년 해군장관 처칠의 주도로 해군 전함을 석유 위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쟁 물자인 석유의 공급을 외국 기업(스탠다드)에 의존할 수는 없었다. 1913년 APOC를 국영화 한 것은 바로 이런 전략적 고려 때문이었다. 이 역시 처칠이 주도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스탠다드의 독점행위에 대한 비판 여론이 끓어올랐다. 미국에서 독점은 가장 중대한 경제범죄였다. 이에 따라 일련의 반독점법이 제정됐고 1890년 오하이오 주정부가 스탠다드에 대한 독점 조사를 시작했다. 스탠다드는 1892년 본사를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에서 뉴저지로 이전함으로써 법적 제재를 피해갔다.

그러나 시어도어 루스벨트 행정부 때인 1904년 탐사언론인 아이다 타벨의 기념비적 저서 <스탠다드석유회사의 역사>가 나오면서 1905년 미 연방정부는 스탠다드에 대한 독점 조사를 시작해 1911년 스탠다드를 34개 회사로 분할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뉴저지스탠다드(엑슨)가 주력 회사가 됐다. 이 회사는 뉴욕스탠다드(모빌)과 합병해 현재의 엑슨모빌이 됐다.

당시 스탠다드는 미 연방정부보다 강력한 초국가적 존재(Superstate)였다. 그대로 방치하다면 미국마저 삼킬 것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1차 대전과 석유, 그리고 중동


1차 대전은 석유의 전략적 중요성을 드러낸 결정적 계기였다. 석유가 1차 대전의 승패를 갈랐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석유 생산지로서 중동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1918년 8월 영국이 러시아의 바쿠유전을 장악하고 3개월 후 독일은 패배했다. 반면 연합국에게는 영국의 이란 유전 외에 세계 최대 산유국인 미국이 있었다. 연합국 석유의 80%를 미국이 공급했다.

전쟁이 끝난 후 커즌 영국 외무장관은 "연합국은 석유를 쏟아 부어 승리의 길로 나아갔다"고 회고했다. 프랑스 상원의원이자 전시 석유위원장이었던 앙리 베랑제는 석유가 '승리의 피'였다며 "독일은 철과 석탄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과신한 나머지 석유에 대한 우리의 우위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영국 전함의 40%가 석유 동력으로 바뀌어 있었다. 1914년 프랑스 군대는 트럭 110대, 비행기 132대를 보유했지만 1918년에는 트럭 7만 대, 비행기 1만 2000대로 몇 백 배 증가했다.

영국은 일찍부터 석유의 중요성, 석유 매장지로서 중동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있었다. 20세기 초까지 중동은 유럽에 쓸모없는 땅이었다. 중동(Middle East)이란 말 자체가 19세기 말 미국의 군사전략가 알프레드 메이한이 만들어낸 말이다. 근동(Near East)과 극동(Far East) 사이의 지역이란 뜻이다. 그러나 1908년 이란에서 석유가 발견되면서 중동은 주목받기 시작한다. 당시 이란은 페르시아, 이라크는 메소포타미아로 불렸는데 메소포타미아도 석유 매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었다.

1916년 5월 영국은 프랑스와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을 맺어 중동 지역을 분할 장악했다. 영국은 1916년 말부터 중동 공략을 시작해 1918년 이후 중동 전역에 100만 명 이상의 병사들을 주둔시켰다. 1919년이 되면 페르시아만은 '영국의 호수'가 된다. 영국군의 중동 점령은 중동의 석유를 독식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1920년 4월 영국은 산레모협정을 통해 중동지역의 석유 이권을 장악한다. 당초 독일이 갖고 있던 이라크 석유회사(IPC)의 지분 25%만을 프랑스에 떼어주었을 뿐, 나머지는 영국 차지였다. 미국을 배제한 것이다.

윌슨행정부는 '문호개방'을 내세워 석유 개발 참여를 요구했으나 거부당한다. 영국은 당시 미국이 세계 산유량의 70%나 차지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영국은 단지 에너지 자립을 추구할 뿐이라고 항변했다. 미국이 중동 석유 개발에 참여한 것은 1928년부터다.

이란과 이라크의 석유를 장악한 영국의 해군장관 월터 흄은 1921년 10월 "우리가 세계 석유의 공급을 장악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미영 석유카르텔의 형성

한편 1890년대 자동차가 보급되면서 자동차 연료인 가솔린의 수요가 늘어난다. 1910년이 되면 조명용 케로신 수요를 추월하고, 특히 1차 대전 후에는 폭발적으로 수요가 증가한다. 미국의 등록 자동차는 1914년 200만대에서 1928년 2800만대로 14년 만에 14배 늘어난다. 영국도 1920년 18만 7000대에서 1932년 192만 5000대로 10배 이상 늘어난다. 이에 따라 가솔린 소비는 1918년 7450만 배럴에서 1925년 2억 2390만 배럴로 약 3배 늘어나는데 90%가 자동차 연료였다.

그러나 석유 공급은 훨씬 빠른 속도로 수요 증가를 앞질렀다. 1920년대 후반부터 공급 과잉이 시작됐다. 1926년 배럴당 1.88달러였던 원유 가격은 1927년 1.30달러로 약 30% 하락한다(생산량은 17% 증가).

1922년 베네수엘라, 1927년 이라크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된 탓이다. 모두 원유가 자연 분출되는 유전(flush field)으로 베네수엘라 유전에서는 하루 10만 배럴, 이라크에서는 5-10만 배럴의 원유가 뿜어져 나왔다. 이라크의 경우 최초의 유전 발견이다.

1920년대 들어 캘리포니아, 오클라호마 등 미국에서도 대규모 유전이 개발됐다. 오클라호마의 경우 1926년 11월 10만 배럴에서 1927년에는 최대 50만 배럴까지 생산됐다. 1927년 당시 세계 원유 생산량이 126만 배럴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양이다.

게다가 혁명의 혼란기를 벗어난 소련의 원유가 국제시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스탠다드, 로열더치셸, APOC 등 빅3는 각자 비밀리에 소련 원유를 사들여 가격 전쟁을 벌였다. 또한 일단의 석유 투기세력이 등장해 빅3보다 약간 싼 값에 석유를 공급하면서 석유 메이저의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베네수엘라와 이라크의 새 유전은 각기 영국계 석유 메이저인 로열더치셸과 이라크석유회사(IPC)가 개발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영국도 미국 석유기업들과 가격전쟁을 벌일 만했다. 그러나 세계 최대의 석유기업들이 가격전쟁을 벌인다면 그 결과는 공멸일 뿐이었다.

결국 뉴저지스탠다드, 로열더치셸, APOC 등 빅3는 1928년 8월 석유 가격 안정을 위한 비밀협약을 맺는다. 아크나캐리 협정이 그것이다. 현상 유지(As-is)협정으로도 알려진 이 합의는 뉴저지스탠다드의 월터 티글, 로열더치셸의 헨리 디터딩, APOC의 존 캐드먼 등 빅3의 총수들이 꿩 사냥을 핑계로 스코틀랜드 아크나캐리의 고성에 모여 체결됐다.

석유 생산량의 현 수준 동결, 잉여 원유는 약정 가격에 협정 참여자에게만 판매, 제3자로부터의 원유 구매 금지, 석유 운반선과 정유공장 등 석유 관련 시설의 공동 사용 등 7개항에 합의한다. 실상 이 합의에는 빅3 외에 미국의 뉴욕스탠다드와 걸프도 참여했다. 5개 석유 메이저의 이 합의는 1973년 1차 석유파동 때까지 유지된다. 미영 석유 카르텔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 합의는 미국의 반독점법이 금지하는 담합 행위였다. 즉 불법 행위인 것이다. 뉴저지스탠다드의 월터 티글은 1929년 초 석유수출협회(Export Petroleum Association)를 결성해 미국 석유기업의 석유 생산을 동결하고 해외 수출을 제한하려 했다.

문제는 이러한 생산 통제, 즉 불공정 거래에 대한 미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티글은 그 자신이 한때 석유 사업가이기도 했던 허버트 후버 대통령에게 로비 활동을 펼쳤으나 실패했다. 후버 역시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법률 검토 결과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929년 10월 대공황이 시작되고 1930년 10월 3일을 기점으로 동부 텍사스 전역에서 엄청난 규모의 유전이 잇달아 발견된다. 당시까지 미국 최대 규모의 유전 발견이다. 1931년 4월이 되면 하루 34만 배럴이, 한때 최대 100만 배럴까지 생산됐다. 당시 미국 소비량의 절반이다. 1시간 마다 새로운 유정이 생길 정도였다. 석유 가격은 1930년 1.19달러에서 1931년 65센트로 폭락한다. 당시 미국의 석유사업가들 사이에는 '하나님이 미국 석유산업을 망치시려는 건가'라는 한탄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동부 텍사스 유전은 미국 석유산업에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된 것이다. 국내 석유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시장 통제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우선 1932년 6월부터 수입 석유에 대해 배럴당 21센트의 관세가 부과됐다. 또한 각 주별로 생산량 할당제도(쿼터)가 시행됐다. 또한 석유 메이저들은 석유의 수출 가격을 미국 가격에 연동시켰다. 이른바 '걸프 플러스'가 그것이다. 석유의 원산지가 어디이든 멕시코만 연안(동부텍사스)에서의 가격에 운임을 더한 가격을 국제 가격으로 한다는 것이다. 즉 중동에서 값싸게 생산된 석유라도 가공의 운임을 더해 '걸프 플러스' 가격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장 통제에 의해 세계 최대 석유 소비국인 미국의 국내 시장과 해외 시장은 관세 장벽에 의해 엄격하게 분리됐다. 또한 국내 중소 석유사업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수입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미국의 석유 가격은 인위적으로 높게 유지됐다. 나아가 쿼터제를 통해 생산량이 통제됐다. 그리고 석유 메이저들은 해외 시장에서도 '걸프 플러스' 가격을 적용해 높은 판매 가격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은 셈이다. 반면 소비자들은 높은 유가를 부담해야 했다.

1932년 이후 빅5는 해외 시장을 몇 개 권역으로 나눠 각 지역에서의 회원사별 생산량을 할당하고 유가를 결정했다. 또한 추가 증산은 수요 증가가 있을 때만 허용하기로 했다. 빅5의 최고 경영진은 매달 영국 런던의 사무실에 모여 각 회사가 할당된 생산량을 준수했는지 실적을 점검하고 향후 계획을 세웠다. 또한 카르텔 회원사 간에는 석유를 할인 가격에 장기 공급하는 계약도 맺었다.

나아가 원유 매장지역을 공동으로 사들였다. 이는 당장의 석유 생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잠재적 경쟁자가 석유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막기 위한 예방적 조치였다. 새로운 경쟁자의 출현은 공급 증가, 곧 유가의 하락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장 통제는 1972년까지 유지된다. 1870년대 이후 1900년대 초까지 스탠다드가 미국 및 세계 석유시장을 '혼자 해먹었다'면 이후 20여년은 빅3의 각축 시대였고, 1930년대 이후는 극소수의 석유메이저가 '우리끼리 해먹은' 셈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등장과 세븐 시스터스

1930년대 이후 빅5 체제였던 미영 석유카르텔은 2차 대전 이후 빅7, 즉 세븐시스터스로 확대된다. 1938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원유가 발견되고 이것이 1947년 세계 최대의 석유기업 아라비아미국석유회사, 즉 아람코(ARAMCO)의 설립으로 이어지면서 생긴 결과다.

아람코 설립과 이에 따른 세븐 시스터스 체제의 형성은 레드라인 협정(Red Line Agreement)에서 비롯됐다. 아크나캐리 협정 직전인 1928년 7월에 맺어진 이 합의 역시 석유 메이저 간의 담합이었다. 요지는 이란과 쿠웨이트를 제외한 중동지역에서의 신규 유전 개발은 이라크석유회사(IPC)에 참여한 석유 메이저들의 공동 개발, 즉 컨소시엄 형태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개별 회사의 중동 석유 개발을 금지한 것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원래 이라크 지역의 석유 개발은 독일이 시작했다. 독일은 1902년 오스만제국과 베를린-바그다드 철도를 건설하면서 철도 양측 20킬로미터 지역에 대한 석유개발권을 따냈다. 1차 대전 발발 직전 모술 부근에서 석유가 발견됐고 이에 따라 영국과 독일 자본이 터키석유회사(TPC)를 설립했다(AIOC 50%, 로열더치셸 25%, 독일 은행들 25%).

그러나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패하면서 독일 측 지분은 프랑스에 넘어갔고(산 레모협정), 회사 이름도 이라크석유회사(IPC)로 바뀌었다. 오스만제국의 영토가 이라크라는 이름의 영국 보호령으로 바뀐 결과다. 이후 1927년 키르쿠크에서 대규모 유전이 최초로 발견되면서 미국 석유 기업이 IPC에 참여하게 된다. 1928년 뉴저지스탠다드(엑슨), 소코니(뉴욕스탠다드, 후에 모빌), 걸프, 애틀랜틱, 멕시칸 등 5개 기업이 지분 23.75%를 획득한 것이다.

미국 기업이 중동 석유 개발에 참여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이라크는 중동에서 1908년 이란에 이어 두 번째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된 지역이다. 하지만 개별 회사가 유전 개발에 나설 경우 공급 과잉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그래서 레드라인 협정, 즉 중동 석유의 공동 개발이라는 해법이 나온 것이다. 여기에는 아크나캐리 협정 당사자인 빅5가 모두 포함돼 있다.

그런데 이때부터 미영 석유카르텔, 즉 아크나캐리와 레드라인 협정의 당사자가 아닌 미국 석유기업들이 중동 석유 개발에 뛰어든다. 당시 중동을 장악했던 영국 정부는 미국 기업의 중동 진출을 한사코 막으려 했으나 1928년 IPC에 대한 미국 기업의 참여를 허용한 이후에는 그것이 쉽지 않았다.

대표적인 기업이 캘리포니아스탠다드(SOCAL)다. 당시 카르텔 멤버가 아니었던 SOCAL은 1928년 바레인의 유전 개발권을 따낸 뒤 1932년 유전을 발견했다. 바레인 유전 개발은 당초 카르텔 멤버인 뉴저지스탠다드와 걸프에 제시됐었다. 하지만 뉴저지는 공급 과잉을 우려해 스스로 포기했고, 걸프는 개발 의사가 있었지만 카르텔의 반대로 무산됐다.

반면 SOCAL은 거침이 없었다. 사우디왕국 건국 다음 해인 1933년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 국왕과 계약을 맺었고 1938년 사우디 동부에서 대규모 유전을 발견했다. 이에 앞서 1936년, 해외 석유 유통망이 취약했던 SOCAL은 바레인 유전 개발 지분을 텍사코와 50 대 50으로 나눈다. 텍사코의 동아시아 유통망과 바레인 유전 개발 지분을 맞바꾼 것이다. 이 계약은 사우디에도 적용됐다.

1938년 SOCAL과 텍사코는 캘리포니아아라비아스탠다드석유회사(CASOC)를 설립한다.

사우디 유전은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사우디의 원유 생산 능력은 1939년에 이미 하루 50만 배럴, 1940년에는 5백만 배럴로 늘어났다. 그러나 1939년 5월 처음으로 소량의 원유가 수출된 이후 사우디 유전의 탐사 및 개발은 답보 상태였다. 2차 대전의 영향 탓이다.

전쟁 기간 미국 정부는 저명한 석유 석유지질학자인 E. L. 드골리에를 사우디에 보내 탐사하도록 했다. 그의 결론은 "석유 생산의 중심이 중동, 특히 페르시아만 지역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중동 석유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횡재가 될 것(the greatest single prize in all history)"이라고 단언했다. 당시 그는 사우디의 원유 매장량을 50억 배럴로 평가했는데 이는 매우 보수적인 평가였다. 세계 석유 자원의 65%가 묻혀 있는 중동 지역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SOCAL이 사우디에서 대박을 터뜨렸지만 중대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판로 확보의 문제였다. 어마어마한 양의 사우디 석유를 국제 석유시장에 내놓는다면 유가 폭락은 피할 수 없을 터였다. 나아가 미영 석유 카르텔과 파괴적인 가격 전쟁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카르텔 멤버가 아닌 이들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SOCAL과 텍사코의 대안은 사우디 석유를 저가에 장기 계약으로 미국 정부에 판매하는 것이었다. 영국이란석유회사(AIOC)가 영국 정부에 독점 납품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에 대해 당시 미국 정부의 에너지 문제 책임자였던 해롤드 이케스 내무장관은 CASOC의 지분 100%를 정부가 매입하겠다는 깜짝 제안을 내놓는다. 2차 대전의 와중에서 석유의 전략적 중요성을 절감한 미국 정부의 과감한 제안이었다.

이케스의 제안은 영국이 AIOC를 국유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가 사우디의 석유 자원을 독점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상업적 이득을 위해서가 아닌 전략적 고려에 따른 것이었다. 열렬한 뉴딜주의자였던 이케스는 정부의 석유산업 진출이라는 과감한 제안을 내놓았으나 이는 미국에서는 실현되기 불가능한 제안이었다. '기업 활동은 전적으로 민간 몫'이라는 미국 사회의 확고한 컨센서스 때문이었다.

이케스의 제안에 대해 SOCAL과 텍사코는 정부의 100% 매입 대신 SOCAL, 텍사코, 미국 정부가 각자 3분의 1씩 지분을 보유하자고 역제안했다. 이케스 장관은 해군부, 전쟁부와 논의를 거쳐 미국 정부가 4000만 달러에 지분 3분의 1을 매입하는 대신 평화 시 사우디 석유의 51%, 전시에는 100%를 우선 매입할 권리와 국가 안보 침해세력으로 간주되는 제3자에 대한 석유 판매를 반대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성사될 것처럼 보였던 미국 정부의 사우디 석유 국유화 계획은 1943년 10월 15일 극적으로 무산된다. 이날 오전 소코니(뉴욕스탠다드, 빅5의 일원)의 존 브라운 회장이 이케스 장관을 만나 미국 석유메이저들의 반대 의사를 통보한 것이다. 이날 오후 이케스 장관은 일방적으로 계약 포기를 선언했다.

이날 이케스 장관을 만나려 했던 텍사코의 로저스 회장은 "내 일생에 이런 거래는 처음이다. 오전 11시까지는 (미 정부의 CASOC 매입) 계약이 완료되는 줄 알았는데, 오후 2시가 되니 아무런 사전 통보 없이 계약이 무산되다니"라고 망연자실했다.

미국 최대의 석유기업인 뉴저지스탠다드와 소코니는 석유 산업은 민간기업이 해야 한다는 이유로 강력 반대했다. 텍사스 등의 중소 석유기업들도 반대였다. 정부가 석유 사업에 손을 대면 값싼 외국 석유가 들어온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미국에서는 국가안보보다도 민간기업의 이익이 우선이었던 셈이다.

이케스는 미 정부의 사우디 석유 국유화가 기존 석유카르텔에 대한 강력한 대항세력을 만든다는 점, 즉 석유메이저들에 대한 중대한 이익 침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미영 정부의 석유시장 통제 좌절

한편 영국 정부도 사우디 석유의 향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사우디 석유가 시장에 대거 유통된다면 유가는 폭락할 것이고 이에 따라 영국의 최대 외화 수입원인 AIOC의 수입이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는 1943년 말부터 미국에 대해 전후 국제석유체제에 대한 논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4년 2월 주미 영국대사를 백악관으로 불러 손수 중동 지도를 그려 보이며 "이란 석유는 영국이 갖고,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는 공유하며, 사우디 석유는 미국이 갖는다'고 제안했다.

이후 1944년 8월 8일 양국 정부는 영미석유협정(Anglo-American Petroleum Agreement)을 맺는다. 국제 석유시장의 수급 안정을 위해 미영 양측이 4명씩, 8명으로 국제석유위원회(International Petroleum Commission)를 만들어 각국의 석유 생산 및 수요 정도를 평가하고 이를 바탕으로 각 산유국의 생산량 및 석유 가격을 결정하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미국 석유업계의 거센 반대에 직면한다. 중소 석유사업자는 값싼 수입석유에 의한 석유 가격의 하락을, 석유 메이저는 반독점법 위반을 우려해 강력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당초 루스벨트 행정부는 이 협정에 대한 상원 비준을 받아 조약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석유업계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1945년 1월 상원 회부를 보류한다. 이로써 미영 정부에 의한 국제석유시장 통제는 사실상 무산되고 만다.

한편 1945년 2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얄타회담을 마치고 귀국 길에 압둘 아지즈 이븐 사우드 국왕과 만나 정상회담을 갖는다. 회담은 구체적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미국이 사우디에 정치군사적 보호를 제공하는 대신 사우디는 자국 석유에 대한 미국의 독점적 개발권을 보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미국과 사우디의 특별한 동맹관계가 형성됐으며 이 관계는 이후 70년 이상 지속된다.

그렇다면 이 골치 아픈 문제는 어떻게 해결됐을까? 엄청난 양의 사우디 석유를 국제 석유시장의 교란 없이, 기존 석유카르텔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소화할 방안은 무엇인가? 그것은 강력한 라이벌을 동지로 만드는 것이다. 즉 외부 세력인 SOCAL과 텍사코를 기존 석유카르텔에 끌어들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1946년 10월 뉴저지와 소코니는 영국 정부에 대해 레드라인 협정의 파기를 요청했다. 사실 아크나캐리 협정과 레드라인 협정을 주도한 것은 영국 정부였다. 따라서 뉴저지와 소코니는 영국 측에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레드라인 협정을 무효화 시키고 자신들이 사우디 석유 개발에 참여한 것이다.

그 대가란 뉴저지와 소코니가 영국이란석유회사(AIOC)의 원유를 장기 구매 해주는 것이었다. 20년간 각각 8억 배럴, 5억 배럴씩 매입해 주기로 했다. AIOC는 영국 정부 외에는 이렇다 할 판로가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장기 구매 계약은 대단한 특혜였다.

1947년 3월 12일 드디어 아람코가 탄생했다. SOCAL, 텍사코, 뉴저지가 각 30%, 소코니가 10% 지분을 가진 미국 석유메이저들의 공동 소유 형태였다. 이는 이라크석유회사(IPC)와 같은 구조였다. 즉 여러 석유 메이저들이 공동 소유, 정보 교환, 장기 계획을 통해 석유시장을 통제하는 형태였다. 차이가 있다면 IPC에는 영국과 미국 기업이 참여한 반면 아람코는 미국 기업 일색이었다.

영국계인 AIOC와 로열더치셸, 그리고 미국의 뉴저지스탠다드, 소코니, 걸프, 캘리포니아스탠다드, 텍사코 등이 바로 세븐 시스터스다. 뉴저지는 1972년 엑슨으로, 소코니는 1966년 모빌로 이름을 바꿨고 1999년 합병되면서 엑슨모빌이 됐다. 캘리포니아스탠다드는 1984년 걸프를 인수하면서 셰브론으로 개칭했고 2001년 텍사코를 합병했다.

사우디 석유 개발을 주도한 셰브론(소칼)의 오토 밀러 회장은 1976년 상원 외교위 다국적기업소위에서 "아람코는 미국 역사상 미국 시민이 개발해낸 가장 중요하고 값진 해외 경제 자산"이라고 밝혔는데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창립 이후 아람코는 세계 최대 최강의 석유기업으로 군림해 온 것이다.

미국이 아람코를 통해 확보한 것은 단순한 상업적 이익 이상이었다. 미국이 영국을 제치고 중동의 석유자원을 장악하는 디딤돌이 된 것이다. 나아가 중동 석유자원 통제의 교두보가 됨으로써 미국의 세계 패권을 지탱하는 전략적 자산이 됐다.

1952년 미 공정거래위원회(FTC)가 작성해 상원에 제출한 보고서 '국제 석유 카르텔(The International Petroleum Cartel)'에 따르면 당시 미영 석유카르텔, 즉 세븐 시스터스는 중동 석유의 98%, 동반구 94%, 서반구 45%를 통제하고 있었다. 이들은 또한 정유, 수송, 유통까지 국제 석유산업의 거의 모든 부문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inkyu@pressian.com 다른 글 보기
▶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