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사와 아리랑; 영화와 노래의 탄생
[김유경 문화산책] <42> 영화 100년 ②
2019.11.13 15:49:04
단성사와 아리랑; 영화와 노래의 탄생
충무로에서 종로 방향에 걸쳐있는 오래된 몇 개의 극장을 본다. 그 중 종로3가, 묘동에 위치한 단성사는 1907년 창설된 한국 최고의 극장이다. 헤이그 회담에 특사가 파견되고 고종이 일본의 협박으로 순종에게 양위하던 해이다. 1971-2005년간 단성사 상무를 지내면서 단성사 100년 기록을 정리한 조상림씨(84)의 회고는 한국 영화 파노라마를 눈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조씨의 회고 일부는 2010년 한국영상자료원이 펴낸 <1960-1970년대 영화관1> 책자로 기록되어 나왔었다. 


▲ 1953년 7월의 단성사. 발성영화 상영에 맞춰 1934년 제5차 건축되어 2005년 6차 건축 때까지 유지된 건물모습이다. ⓒ사진 조상림



"손병희 선생의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신문, 만세보 광무11년(1907년) 6월7일자에 단성사 설립 기사가 났습니다. 지명근·박태일·주수영 등 서울 상인이 노래와 춤 유흥을 즐기려면 기생집에 가서 거액을 들여야 하니 '아예 기생을 불러다가 듣는 자리를 만드는 게 낫겠다'하여 단합해서 이룬다는 단성사란 이름을 짓고 좌포도청 자리에 있던 기와집 건물을 대관한 것입니다."

▲만세보 광무11년(1907년) 6월7일자에 실린 단성사창립기사(붉은 선으로 표시된 부분). ⓒ사진 조상림


좌포청은 경찰청의 전신으로 천주교 포교 초창기 서울에 숨어있던 천주교도, 동학의 최시형 교주가 잡혀와 순교한 터이기도 하다. 갑오경장 때 좌·우포도청이 합쳐 경무국이 되면서 이곳의 조선기와집이 최초의 단성사 공연장으로 대관된 것이다.

영화산업이 일어나고 대중적인 공연장이 요구되는 시대였지만 일제강점기의 침탈이 펼쳐진 암울한 시기였다. 서울에 우미관 · 조선극장 · 단성사 등 10여개의 극장이 생겨났으나 모두 일본인이 해방 때까지 땅과 건물을 소유했다. 경영만 조선인에게 위탁했다. 소설가이자 영화인이던 심훈이 나중에 이런 상황을 매우 한탄하는 글을 남겼다. 1908년에는 하루 대관료 50환의 일세를 물면서 공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918년 단성사 경영권을 인수한 단성사주 박승필은 대단한 흥행사였다. 서울 출신인 그가 조선 전통의 오락인 창과 구극(舊劇) 등을 무대에 올리던 광무대극장 주인이기도 했다는 사실 밖에 밝혀진 것이 없으나 초상사진으로 보아 개화한 근대 문물을 받아들인 신사였으리란 것이 짐작된다. 박승필은 단성사를 무성영화 상영에 적합하게 4차 건축을 하고 미국 유니버설 영화사, 일본 송죽영화사와 협약을 맺어 외국영화를 배급받아 상영했다. 영화전문지 '영화가'를 발행하고 입장권 특별 재사용 등 여러 가지 행사를 만들어 1932년 병사할 때까지 단성사를 서울 장안의 명물로 만들어 놓았다. 

무성영화에서 시작해 말하는 발성영화로 진화하고 연극, 씨름, 권투, 곡마단 공연 등이 잇따랐다. 대궐의 양악대 지휘자이던 백만진을 악단장으로 초치해 구성한 전속 악단에 작곡가이자 영화인 김영환이 있었다. 전속악단원의 구성이 바뀌면 신문기사로 나왔다. 서상호 변사주임 등 명변사 6-7인을 단성사에 소속시켜 최고의 대우를 했다. 변사는 영화 장르별로 구사하는 음색의 리듬과 대중에 전달하는 힘을 가진 목소리를 지닌 이들로 무성영화를 완성하는 구성원, 연기자나 다름없었다. 변사와 음악은 무성영화의 흥행을 좌우하는 절대요소였다. 

건물 2층 베란다에서 나팔수가 영화개봉을 알리는 팡파레를 불었다. "나팔소리는 광화문에서도 들렸다 합니다." 나팔 팡파레는 전통적으로 공연 시작을 알리는 무대과정이다.

아리랑의 여주인공 신일선씨는 회고에서 조선극장에서 부는 나팔소리가 그토록 들뜨게 하더니 결국 '무대 일을 하는 게 나의 옳은 일'이란 선택을 했다고 전했다. 외국에서는 전통 깊은 극장들이 지금도 나팔 팡파레로 무대 시작을 알린다. 2000년 러시아의 제일 오래된 페테르브르그 알렌스키 극장에서는 오페라·발레·음악회 등 모든 공연에 발코니 석에서 제복을 입은 두 사람이 트럼펫을 불면 바깥 홀에 모여있던 관객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가 착석했다고 피아니스트 박은성씨가 말했다. 2002년 독일 바이로이트 바그너극장에서도 건물밖에 돌출한 발코니에서 트럼펫을 불었다. 몇 백년 된 극장이라 조그맣고 삐거덕거리고 의자도 딱딱한 일자형 이지만 그것부터가 공연시작이었다. 단성사의 나팔 팡파레는 1939년 단성사가 일본인의 대륙극장으로 바뀌면서 사라졌다. 

박승필은 영화의 기본 장비인 활동사진 촬영기부터 사왔다. 그때 촬영기는 조선에 단 3대가 있어 한 대는 총독부에, 한 대는 일본기생 출신의 명동 모자상인인 요도 도라조(淀虎藏)가 설립한 영화사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한 대는 박승필의 단성사에 있었다. 조상림씨가 설명했다.

"박승필은 5천원을 들여 사들인 촬영기를 영화인들한테 빌려 주면서 조건으로 단성사에서 개봉할 것을 내세워 문제작들이 계속 단성사에서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한국영화의 기원이 된 1919년 '의리적 구토' 촬영은 박승필의 이같은 결단으로 이뤄진 것입니다. 촬영은 변사 김덕경이 일본에서 데려온 일본인 기사가 했는데, 촬영비가 3,000원이 들어간 거사였습니다. 촬영기사는 1920년대에 들어가며 이필우 · 이명우같은 인물이 나오게 됩니다."


▲서울 시가지 풍경을 활동사진으로 보여준다는 설명과 함께 연쇄극(드라마처럼 몇 부로 나누어 공연하는 형식) '의리적 구토'를 공연한다는 1919년 10월 매일신보 광고



일본인의 영화사와 박승필의 단성사는 라이벌이 되었다. 일본영화사가 '춘향전'을 제작하니 박승필은 촬영의 이필우, 감독 김영환 등 순 한국인 인력으로 단성사 영화부에 세트장을 만들어 '장화홍련전'을 제작 상영했다. 1924년의 일이다. 
      

▲1918-1932년간 단성사 경영권을 맡아 운영한 박승필.

▲나운규. 1926년도 아리랑 영화의 주제가 작사자이기도 하다.

▲단성사에서 1926년 상영된 아리랑의 주제가 작곡가 서정 김영환. 사진 한겨레음악대사전


 1926년에 나운규 각본, 감독, 주연의 무성영화 '아리랑'이 단성사에서 상영되었다. 이는 한국 영화사에 획을 그은 사건이 되었다. 조상림씨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운규의 주도아래 일본인의 조선키네마 영화사가 자금을 대어 제작하게 됩니다. 고대앞 안암골에서 촬영해 1926년 10월 닷새 동안 단성사에서 처음 상영했습니다.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서 수백회 줄기차게 상영되며 강점기 최고의 영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영화상영 때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 생겨납니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하는, 바로 나운규 작사 · 김영환 작곡의 아리랑 노래의 탄생입니다."

나운규가 1937년 1월 인문잡지 <삼천리>에서 '아리랑의 주제가를 누가 지었어요?' 묻는 기자 질문에 답하는 내용이 한국영화감독협회 기획, 김종욱 편저 <나운규영화 전작집>에 인용되었다(2002년, 서울, 국학자료원 발행). 

"내가 지었소이다. 내가 어린 학생 때 회령·청진 간 철도 놓는데서 노동자들이 '아리랑 아리랑' 부르던 노래 소리가 어쩐지 가슴에 충동을 주어서 길 가다가도 그 노래 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한참 들었어요. 그리고는 애련하고 아름답게 넘어가는 그 멜로디를 혼자 외워 보았답니다.

그러다가 서울 와서 이 '아리랑'노래를 찾았지요. 그때는 민요로는 겨우 강원도 아리랑이 들릴 뿐으로 도무지 찾아들을 길이 없더군요. 기생들도 별로 아는 이 없고 명창들도 즐겨 부르지 않고, 그래서 내가 예전에 듣던 그 멜로디를 생각하여 가사를 짓고 곡보(曲譜)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지요."
    
조상림씨의 설명이 이어진다.

"그 당시 작곡가이자 영화인이던 김영환이 단성사 음악부에서 활동했습니다. 바이올린 연주자인 그와 음악부원들이 무성영화를 뒷받침하는 음악반주를 했습니다. 단성사 무대에 10여명이 앉아 연주할 음악부 자리도 있었어요. 1926년 나운규의 아리랑 주제곡은 3박자 7음계의 서양화된 작곡으로,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같은 전통의 5음계 아리랑과는 다른 리듬입니다."

아리랑의 당시 선전문은 이러하다. 

'눈물의 아리랑 · 웃음의 아리랑 · 막걸리 아리랑 · 북구(北丘)의 아리랑 · 춤추며 아리랑 · 보내며 아리랑 · 떠나며 아리랑'

조상림씨가 해설을 더 붙였다. 그는 나운규와 같은 고향 회령출신에 조선말기 유력한 역관을 배출한 집안의 인물이다. 

"여기서 북구, 북쪽의 언덕이란 무슨 소리인가, 그 당시엔 사람들이 모두 알아들었을 텐데요. 아리랑의 어원을 두고 나온 연구가 많습니다. 몽고 말로는 북쪽을 '아리'라고 하는데 아리랑고개는 도읍의 북쪽에 있는 고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압록강을 '아리나레' 강이라고 부르고 한강도 '아리수'란 이름이 아리랑의 아리와 서로 맥이 통한다고 보는 겁니다."

나운규 연구는 북한에서도 활발해서 1999년 평양에서 출판된 최창호·홍강성 지음 <라운규와 수난기 영화> 책에 나오는 아리랑 노래의 탄생배경이 김종욱의 연구로 <나운규영화 전작집>에 처음 인용되었다. 

'라운규는 아련하면서도 정서가 있고 흥겨운 감정도 안겨들면서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통속적인 아리랑이 필요하다 하여 당시 진보적 연극단체인 단성사 음악부에다 새로운 가락을 만들어 줄 것을 의뢰하였다. 그리하여 새롭게 편작된 가곡이 신 아리랑이다. 신 아리랑은 그 당시 단성사의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청년 김영환의 편작이다.'

아리랑의 작곡자 서정(曙汀) 김영환(金永煥;1898-1936)은 휘문학교를 나와 신생 매체인 영화에 관심을 가지고 영화계에 뛰어들어 38세 나이에 작고하기 까지 작곡가, 바이올린 연주자, 장화홍련전의 감독이자 작가, 변사 등 종횡무진 활동을 하면서 업적을 남겼다. 동시대에 피아니스트이자 연희전문교수 등으로 활동한 평양출신 음악가 김영환(金永煥, 1898-1976)과는 동명이인이다. 김영환의 작곡가로서의 재능은 '강남 달' 노래로도 전해진다. 1927년 미국 유니버살 필라드 촬영기를 새로 사서 박승필이 총력을 기울여 만든 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가로 작곡된 것이다. '강남 달이 밝아서 님의 놀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하는 인기가요로 지금까지 불린다. 

일본의 검열 때문에 있는 그대로 솔직하고 대담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주인공을 미친 사람으로 설정하고, 감독도 표면상 일인 이름을 넣고, 직접적인 항일 메시지 한마디 없이 하면서 줄거리를 살려 당시의 민족현실을 녹여낸 나운규의 진보성과 천재성이 드러나는 영화라는 것이 수많은 평가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자본도, 촬영기재도 소유하지 못했고 배우나 스텦 인력조차도 조달하기 힘든 때, 일제의 검열은 필름을 뭉텅뭉텅 가위질해 버리는 최악의 여건이었다. 아리랑에 나오는 '나그네'의 대사 하나는 이러하다.

"싸워야 한다, 애원할 것이 아니라 싸워야 한다. 싸워서 승리하는 데서만 생명을 구원받을 수 있다 ..." 영화사 연구가인 김종욱은 이 구절을 두고 "이 말은 나운규가 하고 싶었던 피울음의 절규였다"고 표현했다.  

"조선영화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만들 수 있는 데까지 만들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1926년의 영화 아리랑의 선전지에 나온 한 장면. 영진 역의 나운규가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는 장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 아리랑 노래는 극중 여러 장면에서 되풀이해 불리는데 그때마다 후렴가사는 다르다. 아리랑의 주제가를 육성으로 부른 가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도 많다. 가수도 여럿 등장하고 음악밴드가 없는 극장에서는 변사까지 포함, 여러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불렀으리라고 한다. 김종욱은 아리랑을 부른 가수 이야기도 언급했다.

'아리랑이 나올 당시 서울의 명창들 중 이 아리랑의 가락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영화 주제곡임에 틀림없다. 아리랑이 상영될 때 단성사 악단의 반주에 맞춰 육성으로 아리랑을 부른 가수는 김연실(연극배우)과 이정숙(이구영 감독의 누이동생)이었다.'

가수 유경이(劉慶伊) 또한 무대에서 아리랑을 불렀다고 최근의 연구는 전한다. 가수 소개와 함께 1929년 단성사 발행 '조선영화소곡집'에 나온 아리랑 악보와 가사 끝머리에는 '이 노래는 나운규씨 작품 아리랑의 노래입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아리랑 영화에 대한 검열은 노래 가사에 까지 미쳤다. 조상림씨의 자료가 제시되었다. 

"그 단성사 아리랑의 5절이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 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일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제가 '내용이 불온하다. 공안을 방해한다'며 선전지 1만장을 모두 압수해 갔다고 매일신보 1926년 10월3일자 신문기사로 나왔습니다." 

이 5절 노래가사는 1926년 10월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단성사 광고에서 유일하게 확인되는데 선전지를 모두 뺏기는 검열 이후 매일신보 10월3일자 광고에는 5절 가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는 '근사(謹謝) 초일 대만원' 하는 문구로 대체돼서 나온다. 

▲1926년 10월1일자 아리랑의 조선일보 광고.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 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일인가' 하는 아리랑 노래구절이 실렸다. ⓒ사진 조상림

▲아리랑의 노래가사가 불온하고 공안을 해친다며 선전지를 모두 압수해 갔다고 기록한 1926년 10월3일자 매일신보기사. ⓒ사진 조상림


1929년에는 토월회를 운영하던 연극인 박승희(朴勝喜)가 쓴 희곡 '아리랑고개'가 조선극장에서 박진 연출로 공연될 때 극중에서 일본인 돈놀이꾼에게 전답과 집을 다 뺏긴 주인공이 북간도로 떠나는 이별 장면에 마을사람들이 '아리랑' 노래를 불렀다. 그때마다 관객석도 울음바다가 됐다고 했다. 아리랑은 레코드로도 취입되고 그렇게 대중들에게 전파되었던 듯하다. 

아리랑 영화의 성공으로 제작사인 조선키네마는 수입을 모두 챙겼지만 막상 배우들에겐 돌아온 것도 없었다. 그 흥행권을 중간에 배급업자 임수호가 샀는데 아리랑이 계속 좋은 흥행을 이어가면서 그는 영화 배급업계의 실력자가 되었다. 

▲아리랑은 1926년 12월22일 부터는 '애상... 순박...' 이라는 선전문구와 함께 일본에서도 상영되었다. 원래 분량인 8권을 7권으로 줄여서 야마니 양행이 일본에서 배급한 조선영화 아리랑의 선전지.


▲영화 아리랑의 출연진과 스테프들. 1926년. 맨 앞줄 소년을 안고있는 사람이 최영진 역의 나운규, 오른쪽 옆 중절모차림이 일제에 아부하는 오기호 역의 주인규, 그 옆 학생복 차림이 영희를 사랑하는 윤현구 역의 남궁운(김태진), 촬영기 바로 왼쪽의 소녀가 '한국 농촌의 정령' 여주인공 영희 역의 신일선이다. 사진 속 두 인물은 조선키네마 로고가 박힌 메가폰을 머리에 얹고 있다. 영화촬영은 고대 앞 안암골 한적한 산골동네에서 했다. C 홍기영자료사진, 눈빛출판사제공


아리랑 영화 이후 성공과 좌절을 거듭하면서 나운규는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도 출연하고 아리랑의 속편인 '아리랑 그 후 이야기', 말하는 발성영화 '아리랑 3편'도 감독·출연했다. 그는 늘 책을 많이 읽어 영화적 소양을 고취했다. 생활은 무절제했다 하는데 폐병이 악화되어가도 "일을 하면 다 낫는다"며 몸을 돌보지 않았다. 그를 돌보던 의사 이순원씨가 옆에 붙어있어야 하는 상황에도 성북동으로 소설가 이태준을 찾아가 받아온 단편소설을 각색한 '오몽녀' 감독을 마지막으로 총 27편의 영화를 만들고 얼마 안 돼 1937년 8월9일 35세로 사망했다. 임종 때까지도 그는 다음에 만들 영화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한국영화의 초석, 새로운 아리랑 노래의 상징이 되리란 것을 알지 못했을지 모른다. 최초의 영화인장으로 단성사에서 영결식이 치러진 그의 영구가 홍제원 고개를 넘어 화장터로 갈 때 장례행렬의 음악대가 그의 아리랑 노래를 불렀다고 그의 오랜 친구 윤봉춘(영화감독, 배우)씨가 회고했다. 

1993년 그에게 건국훈장이 주어졌다. "짙은 함경도 회령 사투리를 쓰던 나운규가 영화에 대해 말하는 육성 녹음이 있어 들어봤었는데 지금 어디 소장되어 있는지 확인되질 않습니다." 고 조상림씨가 전한다. <계속>

▲단성사 100년사를 말해주는 조상림 전 단성사 상무 ⓒ김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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