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십자는 언제까지 환자 위에서 군림하려는가"
[기고] 녹십자와 에이즈 혈액의 멍에
"녹십자는 언제까지 환자 위에서 군림하려는가"
에이즈 오염 혈액제제가 유통돼 환자들과 시민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는 가운데 혈액제제의 안정성 문제를 추적해온 강건일 전 숙명여자대학교 약학대학 교수가 제조업체 녹십자의 태도에 비판의 칼을 들이댔다.

최근 녹십자는 1990년대 초 녹십자가 제조한 혈액제제 때문에 에이즈에 감염됐다고 주장하는 혈우병 환자들이 제기한 소송에서 패한데 이어, 혈액제제와 에이즈 감염 사이의 연관성 문제를 거론한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조영걸 교수에 대해 제기한 명예훼손 배상 소송에서도 패해 여러 모로 궁지에 몰린 상태다.

강 교수는 "혈액제제의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제조업체의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그 동안 비판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녹십자에 대해 자기성찰을 촉구했다. <편집자>

***녹십자와 에이즈 오염 혈액의 멍에**

녹십자는 10여 년 전인 1990년대 초에 에이즈 오염 혈액이 혈우병 치료제의 원료로 사용됐던 문제의 멍에를 지금도 쓰고 있다. 당시 에이즈에 감염된 혈우병 환자들이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법원이 녹십자의 패소를 결정했고, 울산의대 조영걸 교수를 상대로 한 명예훼손 배상 소송에서도 고등법원은 조 교수의 무죄를 선고했다.

조 교수에 대한 명예훼손 소송은 의외였다. 그는 유전자 분석 방법으로 에이즈에 감염된 혈우병 환자가 국내 에이즈 균주에 감염됐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1994년 조사위원회의 결론은 에이즈 감염이 혈우병 치료제에 의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외국산 또는 국산인지 가릴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조 교수는 국내에서 생산된 녹십자의 제품이 원인일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조 교수의 연구는 에이즈의 전염 경로를 밝히는 연구라는 점에서 학술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생명을 위한 연구다. 제약기업이 지향하는 가치도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것일 게다. 그러니 만일 연구에 문제와 한계가 있다면 과학적 시비를 가리는 논의의 장을 마련하는 것으로 족할 터인데 어떻게 일개 학자에게 15억 원 규모의 명예훼손 배상을 요구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녹십자는 소송에서 패할 경우 스스로 소송의 덫에 걸리리라는 점을 간과한 것 같다. 이번 고등법원 판결은 혈우병 환자가 에이즈에 감염된 원인이 녹십자의 혈우병 치료제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녹십자는 모든 문제를 끝까지 대법원에서 해결할 태세이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가 무어라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염려스러운 것은 지금도 녹십자는 불활성화 공정을 거쳤기 때문에 제품에 에이즈 바이러스가 들어있을 가능성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약의 안전성은 과정으로 판단한다. 혈액제품의 경우 헌혈자 면접, 바이러스 검사, 기록 등 각각의 혈액관리 단계가 중요하며, 제조의 각 단계에서 제조관리(GMP)의 완전성을 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많은 단계는 하나하나가 최종 제품에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설정된 장벽이다. 헌혈에서 최종 제품이 완성되기까지 어느 단계도 과학적인 한계와 인간적 한계 내지 실수로 인하여 100% 완전성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겹겹의 안전망으로 최종 제품의 안전성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의 단계인 바이러스 불활성화 공정만 해도 방법상 최대한의 안전장치를 설정할 수도 있지만 미흡한 것도 있다. 또한 이 공정도 운영의 주체인 인간이 어떻게 운영하는지에 따라 안전성이 결정된다. 단순히 최종적인 불활성화에 의해 바이러스가 파괴된다는 주장은 약의 안전성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적십자사의 혈액관리 문제로 국민은 불안해하고 있다. 지금도 이러한데 1990년대 초에는 혈액관리가 구멍이 숭숭 뚫린 망이나 마찬가지였다고 추리할 수 있다. 우리의 GMP 또한 선진국의 GMP와 비교하면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적십자사나 녹십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감독기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보면 안전에 대한 정신적 태도의 문제다.

안전은 상식적 이해의 범위 안에서 추구돼야 한다. 바이러스에 의해 형성된 항체를 검사하는 효소면역법(ELISA/EIA)은 잠복기, 즉 '검출에 필요한 항체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기간'이 문제가 된다. 헌혈자의 혈액이 에이즈 양성으로 나올 경우에 이 잠복기 단계의 혈액을 폐기하기 위해 일정기간 혈액을 보관해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이 절차가 없었다. 바이러스를 직접 검출하는 핵산검사(NAT)도 오염 여부의 판단을 위한 것이며, 이 목적에 부합되도록 혈장 풀(pooling된 상태)의 사이즈를 되도록 작게 하여 바이러스 검출과 필요시 폐기가 용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녹십자는 모든 것이 미흡했던 1990년대 초의 상황을 직시했으면 한다. 부실한 혈액관리가 이미 안전상 과실인데 100% 완벽하다며 무죄를 주장하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혈우병 환자의 에이즈 감염이 100% 자신의 제품 때문이라고 입증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송의 판결문에도 나와 있듯이 인과관계 추리는 상관계수 1.0에서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

녹십자가 그 동안 공급한 혈액 제품이 국민 건강에 기여한 부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제 글로벌 생명과학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기업이 10여 년 전의 멍에를 쓰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딱히 100% 인과론적 증거가 없다고 믿더라도 안전성 확보에서 부족했던 점을 인정하고 어떤 명분이든 내세워 혈우병 환자에게 보상하고 과거를 털어버렸다면 그게 더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새로운 각오를 해야 할 것인데, 최근 에이즈 혈액으로 제조된 제품을 방출한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이들 제품으로 주사를 맞은 환자의 불안을 의식하지 않고 제약기업이 존재할 수 있을까? 최소한 제품 판매 이전에 조속히 전문가나 감독기관의 정밀 GMP 검사를 받겠다는 생각을 했어야 한다. 이렇게라도 안전성을 확인받아야 환자를 설득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녹십자는 환자 위에 군림하려는 모습으로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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