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약청, '무늬만 개혁'을 넘어서려면…"
[기고] 식약청 조직개편이 놓치고 있는 것들
"식약청, '무늬만 개혁'을 넘어서려면…"
지난 9월 말 식품의약품안전청은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FDA)을 본 딴 이번 조직 개편은 2004년 PPA 감기약 파동부터 최근의 에이즈 오염 혈액제제 유통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해 온 데 대한 내부 쇄신의 의미가 크다. 이런 식약청의 조직 개편에 대해서 미국 피츠버그 의과대학 이형기 교수가 의견을 보내왔다.

FDA와 식약청을 비교하며 식약청의 변화를 주문한 <FDA vs 식약청>(청년의사, 2005)을 펴내기도 했던 이형기 교수는 "지금 식약청에 필요한 것은 조직 개편이 아니라 약 또는 제품 중심에서 환자 중심에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고수한 채 조직만 개편하는 것은 '무늬만 개혁'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이형기 교수는 식약청의 혁신을 가로막는 중요한 요인으로 '약대 출신이 식약청의 주도하고 있는 현실'을 언급하고 있어 논란이 일 전망이다. 이 교수는 식약청이 변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의사 및 의학 단체들의 리더십의 도입'을 제안하고 있다. <프레시안>은 이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도 기대한다. <편집자>

***식약청 조직 개편이 놓치고 있는 것들**

식약청이 최근 대대적인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의약품 허가 및 안전성 관리의 행정을 맡던 의약품안전국과 심의를 담당하던 평가부가 통합돼 의약품본부로 바뀌는 등, 식약청 전반에 걸쳐 6개의 본부로 체제가 일신됐다. 이는 물론 FDA를 본 뜬 시도이며 식약청의 주장대로 조직의 근간을 바꾸는 조치라 할 만하다.

특히 2004년 뇌졸중을 유발할 위험이 있는 페닐프로판올아민(PPA) 성분이 든 감기약이 시중에 유통된 이른바 'PPA 감기약 파동'으로부터 최근 발생한 에이즈에 감염된 혈액제제 유통 사건에 이르기까지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의약품 안전성 관리 때문에 질타를 받아 온 식약청이니 만큼 이번 조직 개편에 거는 식약청 내부와 국민들의 기대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식약청이 조직을 개편함으로써 의약품의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누가 이를 반대할까? 그러나 정작 식약청은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의 본질이 운영이 아니라 '철학' 또는 '패러다임'의 전환에 관한 것임을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식약청이 지금과 같은 약 또는 제품 중심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하루 속히 환자 중심으로 생각과 조직, 그리고 업무 시스템을 전환해야만 제대로 된 의약품 허가와 안전성 관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들은 잊고 있다. 여기에서 환자 중심의 패러다임이라 함은 약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약 자체가 아니라 환자에게 유익을 가져오기 위함이라는 아주 평범한 원칙을 잊지 않는 것을 뜻한다.

환자 중심의 사고가 가능하려면 의약품 허가나 안전성 조치와 같은 대(對)집단적 규제 행위가 개개인의 환자에게 미칠 영향을 예상하고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만일 이 약을 허가하면(허가하지 않으면) 또는 시장에서 퇴출시키면(그대로 존속시키면)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가상의 환자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임상적, 의학적으로 면밀히 따져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환자 중심적 사고는 하루아침에 그냥 얻어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들여 끊임없이 반복하고, 일정한 기간 동안 훈련을 받는 것이 환자 중심적 사고를 배양하는 방법이다. 여기에 다른 지름길은 없다. 의료인들이 짧게는 몇 달에서 길게는 몇 년간에 걸쳐 직업 훈련을 받는 것은 모두 환자 중심적 사고를 배양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보건의료를 담당하는 여러 전문 분야 중 약학은 유일하게 환자나 사람이 아닌 약, 즉 제품 중심적 학문이다. 다시 말해 약학은 환자에게 제공된 서비스 대신 약이라는 '제품'을 판매한 수익을 통해 대가를 보상 받는 유일한 보건 분야다. 문제는 좋든 싫든 현재 식약청에서 중요한 의사 결정자의 위치에 있는 공직자들이 대부분 약 또는 제품 중심적으로 사고하도록 훈련 받았다는 데 있다.

이러한 식약청의 약 또는 제품 중심적 사고는 '불활화 공정을 거쳤기 때문에 에이즈에 감염된 혈액을 사용한 혈액제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강변하는 데서 그대로 드러난다. 혈액제제에 대한 제조ㆍ품질관리기준(GMP)이 제도로 정립돼 있지 않았고, 식약청이 실사를 통해 실제로 GMP가 해당 생산업체에서 엄격히 준수되고 있는지 2001년 이후로는 한번도 확인하지 못했던 것을 염두에 두면 '비록 불활화 공정을 거쳤다고 해도 해당 혈액제제를 유통시키지 못하도록 조치하는 것'이 환자 중심적 의약품 안전 관리의 패러다임이다.

이는 마치 FDA가 의약품의 임상시험관리기준이 정립돼 있지 않은 국가나 병원에서 실시한 임상시험의 결과를 허가 자료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비록 결과에 문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제도와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은 환경에서 얻어진 자료를 이용해 환자의 건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중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는 신중함이 바로 환자 중심적 의약품 안전관리의 요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식약청에서 조직 개편보다 더 시급한 과제는 지금처럼 약 중심으로 돼 있는 조직, 업무, 문화를 철저히 환자 중심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를 팀으로 바꾸고, 나누어 하던 일들을 한 곳에서 처리하고, A라는 과정을 거쳐 하던 일을 B 또는 C라는 과정으로 바꾸는 것처럼 식약청은 아직도 운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결국 이대로는 식약청이 의약품의 안전성을 확보해 국민의 건강을 보호한다는 사명을 달성하기 어렵다.

더 나아가 약 중심에서 환자 중심으로 철학과 패러다임의 변화를 주도하고 구현할 수 있는 리더십의 확보가 문제해결의 관건이다. 사실 이것이 1990년대 초 유사한 위기에 직면했던 FDA가 문제를 풀어 나갔던 방법이기도 하다. 더 구체적으로 의약품 허가와 안전성 관리에 제일 중요한 의학 및 임상 자료를 제대로 검토하고 평가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을 리더십 차원에서 확보하는 것이 식약청이 추진하는 조직 개편의 골자가 돼야 한다.

일전에 국내 모 병원에서 개최된 심포지엄에 연자로 참석한 필자에게 식약청의 한 중견 관리자가 "왜 모두 식약청이 FDA처럼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나타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번 조직 개편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FDA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항상 식약청 내부에서 나왔다. 물론 FDA를 모델로 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진짜 문제는 FDA가 지금의 명성을 얻기까지 부단히 환자 중심으로 의약품 허가와 안전성 관리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켜 온 배경과 이를 주도한 의사 및 의학 단체들의 리더십을 식약청이 애써 외면한 채 여전히 무늬와 겉모습만의 모방에 그칠 조직 개편에 열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론을 내리자. 조직 개편을 통해서라도 전문기관의 위상을 확립하겠다는 식약청의 심중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환자 중심으로 의약품 행정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이를 주도할 리더십을 확보하는 데 게을리 한다면 국민건강을 담보로 한 줄타기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식약청도 이제 좀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면 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tyio@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