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벌, '특허괴물' 욕할 자격 있나
[IT 일상다반사] '특허괴물'에는 떨면서, 중소기업 특허는 무시
2010.08.17 10:14:00
한국 재벌, '특허괴물' 욕할 자격 있나
진보적이거나, 진취적인 이들은 특허 제도에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그럴 만하다. 특허를 포함한 지적재산권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의 등장을 가로막는 예는 흔하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인용할 때마다 돈을 내야 했다면, 인류의 수학 지식이 중학교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었겠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또 제약회사가 갖고 있는 특허권은, 약이 꼭 필요한 환자에게 때때로 절망을 안겨준다. 특허 유효 동안 일종의 독점 체제가 되므로 약값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가난한 환자에게 이런 약은 '그림의 떡'이다. 지적재산권자의 허락 없이 특허를 쓸 수 있게끔 하는 '강제실시권' 제도가 있지만, 잘 쓰이지 않는다. 특허를 얻기 위해 막대한 개발비를 투자한 기업의 입김 때문이다.

카피레프트 운동(지적재산권에 반대해 지적 창작물에 대한 권리를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도록 하자는 운동)이 주로 진보 진영에서 호응을 얻었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세계 곳곳에서 '특허 알박기'…특허괴물이 온다

그런데 묘한 일이 생겼다. 한국 정부와 재벌이 특허의 폐해를 성토하고 나선 게다. 이들이 갑자기 진보, 좌파로 전향한 걸까. 그렇지는 않다. 전 세계 정보기술(IT)업계의 화두로 떠오른 '특허괴물(Patent Troll)'의 사냥감이 하필,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이기 때문이다.

'특허괴물'은 '알박기'를 일삼는 부동산 투기꾼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부동산 대신 '돈이 될 만한 특허'에 알박기를 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가장 많은 특허가 쏟아지는 분야가 IT 산업이다. 소프트웨어, 콘텐츠와 맞물려 있는 까닭에 지적재산권 분쟁이 잦은 분야이기도 하다. '특허괴물'이 주로 IT 분야에서 활동하는 것도 그래서다. '특허괴물'이라는 표현을 만들어 낸 것 역시 인텔 소속 변호사였다. 인텔에 특허 소송을 건 테크서치라는 회사를 향해 처음 사용한 표현이다.

가장 대표적인 '특허괴물'은, 마이크로소프트·구글·인텔·애플 등 세계적인 IT업체가 공동출자해서 설립한 IV(인텔렉추얼벤처스)다. 전(前) 마이크로소프트 CTO(최고기술책임자)가 경영을 맡고 있다. 이 회사가 일하는 방식은 이지효 전(前) 베인앤컴퍼니 이사가 쓴 <한국경제, 기회는 어디에 있는가?>에 잘 묘사돼 있다.

"이들은 기술업계나 학계의 저명한 인사들을 모아 미래를 예측하는 사교모임을 연다. 그리고 미래에 어떤 생활이 이뤄질 것이고, 우리가 사는 집은 어떻게 바뀔 것이며, 의료는 어떤 식으로 이뤄질 것인지 자유롭게 논의하도록 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게이츠는 '내가 가본 모임 중에서 IV의 모임이 가장 창의적이고 재미있었다'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IV는 여기서 나온 여러 가지 상상을 가져와 구체화시킨다. 예를 들어 '10년 뒤에는 종이처럼 둘둘 마는 디스플레이가 일반화될 거다'라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해보자. IV는 이 상상을 들고 소재, 전자산업과 관련된 학회나 전문가를 찾아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어떤 기술이 발전되어야 하는지를 먼저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그 기술에 대한 구체적인 발명을 할 사람을 찾는다. 전 세계에 깔린 지사망을 통해서 중국이나 러시아의 대학교수를 접촉하여 약간의 연구비를 지원하고 결과물이 나오면 특허를 출원한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서 삼성전자나 소니 같은 기업이 비슷한 상품을 출시하는 것을 기다린다."


삼성전자, 특허괴물 공격 1순위…특허 침해에 엄격한 미국

실제로 삼성전자가 이런 회사에게 많이 당했다. 미국 특허 관련 단체인 페턴트프리덤이 조사한 결과를 보면, 지난 2004년부터 5년 동안 특허괴물로부터 가장 많은 소송을 당한 회사가 바로 삼성전자였다.

소송비용도 천문학적이지만, 패소의 결과는 더 끔찍하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미국은 '발명가의 나라'다. 굳이 '발명왕 에디슨'을 떠올릴 필요도 없다. 건국의 아버지인 '벤자민 프렝클린'부터가 발명가였다. 중국 CCTV가 만든 다큐멘터리 '대국굴기'도 미국이 최강대국이 된 이유를 발명을 장려하는 제도, 즉 강력한 특허권에서 찾았다. 이는 특허를 침해했을 때 치러야 할 비용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는 아무리 작은 규모라도 특허 침해가 인정되면 10년 동안 영업이 금지된다. 세계 최대 규모 시장에서 장사를 접어야 한다는 뜻이다. 블랙베리 스마트폰을 개발한 리서치인모션(Research-In-Motion, RIM)은 6억 달러가 넘는 돈을 물어주고서야 특허괴물과의 소송을 끝낼 수 있었다. 우리 돈으로 7000억 원이 넘는 비용을 치렀지만, 영업정지보다는 낫다고 본 것이다.

역시 미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삼성전자가 긴장하는 게 당연하다. LG전자 등 다른 IT업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한국 대기업은 특허괴물의 공격 앞에서 특히 취약하다. 삼성전자가 피소율 1위를 기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원천기술 없는 성장, 지금까지는 성공적이었지만…"

원천기술 없이 성장했다는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경쟁력은 효율적인 공정에서 나온다. 남들보다 먼저 만든 제품은 없지만, 품질에 비해 값이 싼 제품은 많다. 반도체의 경우, 외국 경쟁업체는 도저히 이윤을 낼 수 없는 가격으로 판매한다. 협력업체의 납품단가를 쥐어짜고 노동자에게 돌아갈 몫을 줄이는 게 한 축이고, 파격적인 설비 투자로 제조단가를 낮춘 게 다른 한 축이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경영 복귀 직후 메모리 반도체와 액정표시장치(LCD) 설비에만 총 16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지금까지의 성공방정식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개별 기업의 경영전략 측면에서만 보면, 이런 방식도 나쁘지 않다. 이지효 전(前) 이사는 "한국기업들은 위험이 높은 초기단계는 기술력을 갖춘 미국과 일본 기업들의 노력을 지켜보다가 시장이 본격적으로 성장해가는 시점에서 기존 기업들의 허를 찌르는 대규모 투자를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시장을 장악해버리는 전략을 기가 막힐 정도로 절묘하게 구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미국·일본 기업이 바보라서 위험을 무릅쓰고 초기 투자를 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들 기업은 원천기술을 갖고 있다는 점을 지렛대로 삼는 전략을 구사한다. 자신의 기득권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이다. 그 중 하나가 특허 공격이다. 삼성전자가 특허괴물로부터 가장 많은 공격을 당한 이유다.

생산활동 없이 오로지 소송만 하는 기업, 한국의 대책은?

▲ 김현종 삼성전자 해외법무 담당 사장(전 통상교섭본부장). ⓒ연합뉴스
삼성의 경우, 김현종 해외법무담당 사장이 특허괴물과의 싸움을 지휘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내며 한미FTA를 추진했던, 바로 그 김현종이다. 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고위 공직자들이 대개 '사람 소개' 정도만 하면서 느슨하게 일하는 것과 달리, 김 사장은 의욕적으로 실무를 챙겼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김 사장이 이끄는 해외법무팀은 최근 정밀경영진단을 받았다. 잇따른 특허 분쟁에서 삼성이 거둔 성적표가 썩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삼성전자만의 고민이 아니다. 제조업 분야 한국 대기업의 성공방정식은 대부분 삼성전자와 비슷하다. 이는 다른 대기업 역시 특허괴물의 공격에 취약하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삼성전자가 유난히 많은 공격을 당한 것은, 다른 기업보다 만만하기 때문이 아니다. 매출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뜯어먹을 살점이 많다는 뜻이다.

정부 역시 긴장했다. 그래서 내놓은 대책은 맞불 놓기. 정부 주도로 '특허괴물'과 유사한 회사(특허관리회사)를 세우는 것이다. 유망한 특허에 '알박기'를 한다는 점에서는 특허괴물과 마찬가지다. 다만, 이렇게 사들인 특허를 이용해 기업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허괴물과 다르다. '특허괴물'이 손을 쓰기 전에, 한국 기업이 필요한 특허를 사두는 게 목적이다. 정부가 지난 3월 산업은행캐피탈 자금을 종자돈으로 삼아 세운 '아이피큐브파트너스'가 바로 이런 회사다. 대표적인 특허괴물인 IV에서 일했던 민승욱 씨가 대표를 맡았다.

이런 시도가 얼마나 성공적일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소수의 과학자와 변호사들로만 구성된 회사가 아무런 생산 활동도 하지 않으면서 수십만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의 발목을 잡는 행태에 대한 반감만큼은 국내 재계에 충분히 확산돼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지난해 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회원사 가운데 90%가 특허괴물의 공격을 이미 받았거나 앞으로 받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특허괴물에 떠는 재벌, 국내에선 특허 약탈자 노릇

여기까지만 보면, 한국 재벌과 정부는 특허권 남용의 피해자인 듯싶다. 그런데 눈길을 나라 안으로 돌리면, 다시 판단이 바뀐다.

나라 밖에서는 아무런 생산 활동도 하지 않는 특허괴물에게 벌벌 떨던 한국 대기업들이 국내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특허 약탈자 노릇을 한다. 나라 밖을 향해서는 엄격한 특허권의 폐해를 성토하면서, 국내에서는 느슨한 특허권이 주는 혜택을 즐긴다.

중소기업인 서오텔레콤이 대기업인 LG텔레콤과 벌인 지루한 법정 공방이 이런 사례다. 특허 침해가 쟁점이다. 서오텔레콤은 휴대폰으로 긴급구조를 요청할 수 있는 이른바 '이머전시 콜' 관련 특허를 갖고 있다. 이 기술을 상용화하기위해 LG텔레콤과 접촉했는데, 이 과정에서 기술 자료를 보여줘야 했다. 그리고 얼마 뒤인 2004년 초, LG텔레콤는 서오텔레콤 측에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은 채 이 기술을 이용한 서비스를 출시했다. 서오텔레콤 측은 기술을 뺏기고 특허를 침해당했다고 판단했고, LG텔레콤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소송에서 서오텔레콤은 최종 승소했다. 1·2심에서는 패소했지만, 대법원은 서오텔레콤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서오텔레콤에게 돌아온 보상은 없었다. 막대한 기술 개발 비용, 소송비용은 공중에 날아갔다.

특허권이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게 보장되는 미국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현재 서오텔레콤은 앞서의 법원 판결을 기초로 LG텔레콤과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설령 이 소송에서 서오텔레콤이 승소하더라도, 피해액 전액을 보상받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변호사들의 전망이다. 역시 미국과 대조적인 대목이다. 특허 침해로 입은 피해액보다 훨씬 많은 액수(보통 3배)를 보상하게끔 돼 있는 게 미국식 법체계다.

한국에서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을 약탈하는 일은 워낙 흔한 사례다. 심지어 이런 약탈을 공식적으로 허용하도록 계약서에 명시하는 경우도 있다. 대기업과 거래를 트는데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중소기업의 처지를 악용하는 것이다.

한 변리사는 자신이 직접 본 중소기업의 납품계약서에 대해 이야기했다. 중소기업이 특허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대기업과 거래하는 계약서다. 독소조항은 더 있다. 이 중소기업은 다른 대기업과 협상조차 할 수 없게 돼 있다. 이런 사실이 드러나면, 자동적으로 거래가 끊기고 해당 기술은 대기업 소유가 된다. 또 연구개발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은 대기업이 기술을 실제로 개발한 중소기업과 특허를 공동 소유한 사례도 있다. 반면, 대기업은 중소기업과 거래하면서 이미 기한이 만료된 특허에 대해서도 특허 사용료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쯤 되면, 정상적인 자본주의라고 보기 어렵다.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가 소유권이기 때문이다. 지적 재산권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 및 특허를 탈취하는 사례에 대해 조사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이다.

안에서 새는 쪽박, 밖에서도 샌다…특허괴물 두렵다면, 중소기업 특허도 보호해야

특허 제도에 대한 비판은 타당한 면이 있다. 그래서 사소한 특허 및 지적 재산권 침해를 빌미로 거액을 뜯어내는 '특허괴물'의 행태는 지지받기 힘들다. 또 뒤늦게라도 '특허괴물'에 대한 방어책을 도입해야 한다는 정부와 대기업의 목소리 역시 타당하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런 방어책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국내 중소기업의 특허는 마음껏 침해하던 국내 대기업이, 해외에서는 특허괴물의 눈치를 보느라 사소한 특허 침해에 대해서도 조심하겠다는 것인데, 그게 잘 될까 싶은 의문이다. 국내에서 길들여진 버릇이 해외라고해서 저절로 사라질 리는 없다는 것. 안에서 새는 쪽박은 밖에서도 샌다는 이야기다.

- 특허로 흥한 나라, 특허로 망한다?

조금 역설적이지만, '특허로 흥한 나라' 미국에서도 지나치게 엄격한 특허 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온다. 마이클 헬러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법학 교수가 쓴 <소유의 역습, 그리드락>이라는 책에 이런 생각이 잘 담겨 있다. 그리드락(Gridlock)이란 교차점에서 발생하는 교통정체, 즉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을 일컫는 말인데, 마이클 헬러 교수는 지나치게 파편화된 소유권이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는 상황을 여기에 빗댔다. 기존 특허를 피할 궁리하느라 새로운 연구를 할 겨를이 없어졌다는 게 이 책의 내용이다.

이런 주장은 논란을 낳는다. 특허괴물처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상당수 미국 기업은 이미 확보해둔 특허로 얻는 이익이, 새로운 연구가 방해받아서 생기는 피해보다 더 크다. 특허 기득권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다는 뜻이다. 제약업계가 대체로 이런 쪽이다. 반면, 상당수 IT업체는 너무 엄격한 특허권을 불편해한다. 한편으론 특허괴물에 돈을 대고, 다른 한편으론 특허 기득권을 탓하는 행태가 모순적이지만, 현실이 그렇다.

이런 논란 속에서 미국 하원이 지난 2007년 9월 특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은 과거 지나치게 엄격했던 미국 특허권을 다소 완화하는 내용이다. 예컨대 과거에는 휴대폰 부품이 특허를 침해했을 때, 전체 휴대폰 가격을 기초로 피해액을 산정했다. 하지만 개정 특허법은 해당 부품이 전체 휴대폰 매출에 기여한 비율을 기초로 피해액을 산정하게끔 했다. 앞서의 논란에서 후자가 이긴 셈이다. 특허 기득권에 지나치게 연연하는 게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의견이 더 우세했다.

개정안이 상·하원에서 최종 승인돼 효력을 발휘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만약 그렇게 되면, 특허괴물의 공격을 받았을 때 물어줘야 할 금액은 줄어든다. 삼성전자 등 국내 대기업은 한시름 놓게 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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