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에게 하고 싶은 한마디, 돈 많다고 죄 짓지 말라!"
[인터뷰] '만 3살'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
2010.12.27 08:38:00
"삼성에게 하고 싶은 한마디, 돈 많다고 죄 짓지 말라!"
3년 전 어느 날 한 중년 남성이 경기 수원 민주노총 경기본부 사무실을 찾았다. 딸을 백혈병으로 잃은 그는 본부 법률원에서 일하던 노무사를 붙들고 딸의 죽음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 싸워서 드러내야 한다고 했다. '삼성 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 대책위원회가 꾸려졌고, 이듬해 '반올림'이라는 짧은 이름을 얻었다.

22일 오전 경기본부 사무실에서 만난 이종란(35) 노무사의 전화기가 바빴다. 지난달 시작된 행정소송의 2차 공판이 27일 열리기 때문이다. 올해 초 근로복지공단이 삼성반도체 피해노동자들의 산재 신청을 승인하지 않으면서 제기한 행정소송이다. 하지만 반올림이 법정에서 마주칠 '적'은 공단이 아니라 소송참가인으로 참여한 삼성에서 보낸 유명 로펌의 변호사들이다. 그들의 변론에 맞서기 위해 피해 노동자와 가족, 동료들에게 하나하나 증언을 확인하느라 연말 분위기는 뒷전이다.

경기본부 법률원 소속의 노무사인 그지만 이제 반올림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피해자들을 만나 사정을 듣고 산재 신청을 준비하다 피해 노동자들이 빛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걸 지켜본 세월이 3년이다. 처음부터 쉽게 끝낼 싸움이 아니라는 걸 알고 시작했지만 피해자의 고통이 그의 마음에도 전달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단다. 유난히 이슈가 많았던 2010년, '삼성 백혈병'이란 주제가 빠질 수 없다. 그에게서 다사다난했던 반올림의 1년을 들었다. <편집자>


▲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 ⓒ프레시안(김봉규)

"반도체 산업,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프레시안: 노무사 일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이종란: 대학(95학번)에 들어가 경영학을 전공했는데 학회에서 노사관계분과를 만들어 활동했다. IMF 사태 당시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그리고 취업난이 커지는 걸 체감하면서 '운동권'도 현실에 맞게 변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여겼다. 분과 활동을 하면서 노동법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알았다.

졸업 후에 아는 분의 권유로 노무사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엔 뭐하는 직업인지 잘 몰랐는데 직무를 보니 노조에서도 활동할 수 있는 게 특이했다.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이 노동이란 생각이 있어서 해보고 싶었다. 지역 일반노조에서 일하다 2003년부터 민주노총 경기본부로 왔다.

프레시안: 그곳에서 삼성 반도체 노동자 이야기를 접했나.

이종란: 2007년 7월경에 황유미 씨가 숨지고 부친 황상기 씨가 본부를 찾아왔다. 유미 씨가 숨지기 직전에 그들을 취재했던 기자들에게 산재 인정을 위해 싸울 수 있는 곳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미 보도나 다산인권센터 등 활동가들을 통해 사연은 잘 알고 있었다. 아버님께 '저희 믿고 열심히 하자'고 했다.

프레시안: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나.

이종란: 故 황유미, 이숙영, 황민웅 씨 등 이미 피해자가 3명이나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자문을 구한 의사들 중에는 발병하기까지 잠복기가 너무 짧다는 의견이 많아 '혹시 우연이 겹친 걸까'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지금은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장이 밝혔듯 잠복기라는 게 꼭 일정하지는 않다는 게 알려졌다. 그런데 당시 난 산재 절차에 대해 잘 몰랐다(웃음). 법률원에서 일하다보면 산재 쪽은 잘 다루지 않게 된다. 단지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당장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더라도 일단 파악하는 작업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다행인 셈이다.

프레시안: 극한의 상황에 처한 피해자들과 함께 오면서 부담이 된 적은 없었나.

이종란: 비극적인 사연들이지만 막상 접하니 지치거나 하지는 않더라. 처음 대책위는 한시적인지 장기적인지 판단하지 않은 채 꾸려졌지만 각오를 새롭게 하게 됐다. 한 순간이 집중해서 활동하고 끝낼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정말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시안: 반올림 활동에서 크게 힘들었던 기억은.

이종란: 반도체 산업이라는 대상 자체가 너무 생소했다. 관련 자료도 별로 없고. 처음에는 디퓨전 같은 공정 이름도 말만 들어서는 잘 이해가 안 갔다. 그런 것을 알아가면서 반도체 산업이 깨끗한 산업이라는 환상이 겉모습에 불과했다는 걸 알게 됐다. 만나는 피해 노동자들마다 실제 작업환경은 보이는 것과 다르다는 말을 했다. 황유미, 이숙영같은 사례가 나올 수 있다고 짐작하게 된 이유다.

개인적으로는 박지연 씨가 숨진 게 가장 힘들었고, 가끔씩 피해자 분들과 오해가 생길 때도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들이 반올림을 믿었던 건 아니다. 만나면서 소통하고, 한 가족처럼 느껴지는 과정에서 신뢰가 싹트고 함께 활동할 수 있었던 거다. '또 하나의 가족'을 표방하는 삼성이 정말 '가족'을 하나 만들었다고나 할까?(웃음)

ⓒ프레시안(최형락)

"삼성, 기본 태도는 바뀌지 않은 채 더 치밀해졌다"

프레시안: 반올림 활동이 3년을 훌쩍 넘겼다. 올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긍정적인 변화가 있다면.

이종란: 지난 3월 31일 박지연 씨가 백혈병으로 숨지면서 언론에 많이 보도가 됐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동네 사람 중에 삼성에서 일하다 희귀병에 걸린 이가 있다는 제보들이 나타났다. 현혈증 기부 등 피해 노동자를 돕기 위한 손길이 이어졌다. 딸만 셋 키우는 분이 남의 일 같지 않다며 찾아와 자원 활동도 하고 있다. 참여연대 등 다른 시민사회단체도 이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가장 놀란 건 지역 차원에서 '삼성 백혈병' 문제를 알리는 시민운동이 자발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대구‧부산‧울산‧전주 등에서 거리 선전전을 진행하며 피해자들이 추가로 밝혀졌다. 박 씨가 숨지면서 촉발된 변화다. 하지만 3년 전 대책위가 꾸려진 후 첫 제보자였던 박 씨의 투병과정을 죽 지켜봤던 나로선 동시에 상처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환경이 우호적으로 변했다지만 동시에 변하지 않는 점도 있을 것 같다.

이종란: 삼성의 태도다. 근로복지공단도 마찬가지다. 올해 국정감사 때 공단이 법정 소송에 삼성을 끌어당긴 사실이 나왔다. 이런 문제로 3년째 국감장을 시끄럽게 해야겠느냐는 의원들의 질타에 신영철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이 3년만에 처음으로 우리를 만나보는 '변화'가 있었지만 그건 걸로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활동가들이야 짐작한 일이었지만 피해자들은 그렇지 않다. 한혜경 씨 모친 김시녀 씨 같은 경우에는 이사장을 만나고 나서 너무 허탈하다고 했다. 피해자들 입장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 위치의 사람이었는데 그럼에도 해결하기 어렵다는 말을 들으니 얼마나 안타까웠겠나.

삼성은 기본 태도가 바뀌지 않은 대신 더 치밀해졌다. 변화의 제스처는 취하지만 변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언론 등을 통해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한다는 이미지를 준다. 반면에 반올림은 피해자들을 만나기 더욱 힘들어졌다. 올해 발병한 노동자들도 있는데 예전보다 접근이 힘들다. 사측이 피해자 가족들과 미리 합의하고 우리와의 접촉을 막는 것으로 보인다. 반올림 온라인 카페에 적힌 제보글이 삭제되는 일도 있었다.

"사회가 공정하고 정직한 눈 키워 나가야"

프레시안: 산재 불승인에 따른 행정소송이 시작됐다. 지금까지 '삼성 백혈병' 논란에 있어왔던 논리들이 총 동원될텐데.

ⓒ프레시안(김봉규)
이종란:
온양공장 피해 노동자 송창호, 김옥이 씨가 온전히 살아있어서 재판정 안에 들어가 삼성 변호인단이 준비한 현장 작업 동영상을 봤다. 동영상에는 화학물질이 밀폐용기 안에 있어서 단추를 누르면 부분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지켜본 그들은 일할 당시 그 물질을 큰 통에 담아놓고 작은 그릇으로 직접 퍼담아 썼다고 한다.

(1차 공판에서) 삼성측 변호인단의 핵심 논리는 '발암물질이 없었다'였다. 있다고 해도 밀폐 용기에 담겨 있어 노출될 리가 없다는 거다. 환기도 완벽해 황유미‧이숙영 씨가 일했던 일명 '퐁당퐁당 설비'(습식식각공정에서 사용하는 수조)에서 가스가 노출돼도 코까지 닿을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하지만 피해 노동자들은 실제 작업환경과 맞지 않는 주장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쉽게 비유하면 삼겹살 구울 때 환풍장치가 있다고 냄새가 안 나겠느냐는 거다. 심지어 누가 방귀를 뀌어도 냄새가 퍼졌다고 한다. 특히 구형 설비가 있는 1~3라인일수록 환기 시스템이 취약할 수 있다.

과거에 후진적인 방식으로 일해왔던 걸 설명하지 않고 바뀐 설비를 보여주고 발암물질이 없다는 말을 한 시간 이상 반복하더라. 참다못한 황유미 씨 부친이 손을 번쩍 들고 '다 거짓말'이라고 외칠 정도였다. 삼성이 판사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 정도 자료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보였다. 적어도 사실에 근접한 반박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프레시안: 새해에 반올림이 정부와 삼성, 사회 여론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이종란: 삼성에겐 한마디로…'죄를 짓지 말라'? 사람은 다 소중하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법을 쉽게 어겨선 안 되고 돈이 많다고 해서 모든 걸 해결할 순 없다. 정부는 소신을 가지고 책임을 졌으면 한다. 노동자를 생각하는 정책이 없다. 언론도 피해 노동자를 배려하는 공정한 기사를 써줬으면 한다. 특히 보수 언론들은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삼성은 끊임없이 여론을 형성하려 한다. 삼성이 어떤 여론을 형성하고 싶은지 여론 스스로가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반올림이 만 3년을 채워가며 활동을 해왔지만 삼성이 만들어낸 여론의 부피와 넓이에 밀려 여전히 '뜬소문' 취급을 받을 때도 있다. 공정하고 정직하게 볼 수 있는 눈을 사회가 키워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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