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팽겨쳐진 영정 사진, "그날, 삼성 본관에선…"
[현장] 전자산업 산재 사망 노동자 추모제
2011.03.07 08:33:00
내팽겨쳐진 영정 사진, "그날, 삼성 본관에선…"
삼성전자 본관 앞 입구에 서 있던 경비 직원이 멀뚱히 한 무리를 바라보았다. 50대로 보이는 남성 3명과 여성 1명, 30대 후반의 남녀. 태연히 정문 앞까지 걸어 들어온 그들이 들고 있던 영정 사진에 시선이 가는 순간 보안 요원은 입구를 막아섰지만 한 발 늦었다. 우르르 뛰어든 이들은 회전문을 밀고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희 나와라!"를 외치는 찰나에 황급히 달려온 보안 요원들이 그들을 밀어 쓰러뜨렸다.

삼성반도체 피해 노동자의 가족들이 6일 오후 서울시 강남구에 있는 삼성 본관을 항의 방문했다. '삼성 백혈병' 논란의 시작이 된 故 황유미 씨의 네 번째 기일을 맞아 벌인 '깜짝 방문'이다. 예고 없는 방문의 대가는 컸다. 한 사람마다 보안 요원들이 서너 명씩 달라붙어 밖으로 들고 나갔다. 각자 손에 쥔 영정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프레시안(김봉규)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재생불량성 빈혈로 투병 중인 유명화(30) 씨의 아버지 유영종(54) 씨가 10여 분만에 사지가 붙들려 밖으로 나왔다. 그 옆에 정애정(35) 씨의 남편으로 기흥공장 엔지니어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故 황민웅 씨의 영정 사진이 뒤집힌 채 놓여졌다. 입구에서 이들을 촬영하던 한 반올림 회원이 "너희 가족 영정이었어도 이렇게 했겠냐"며 항의했지만 이들은 나머지 유가족들도 하나씩 끌어냈다. 정애정 씨도 남성 직원들에게 사지가 붙들려 밖으로 나왔다.

20여 분만에 쫓겨난 유가족은 부서진 영정과 피켓을 들고 본관 앞에 주저앉았다. 뜯어진 옷가지를 추스르고 숨을 가라앉혔다. 지난 1월 투신해 숨진 삼성LCD 노동자 故 김주현 씨의 부친 김명복(56) 씨의 손에서 피가 주룩 흘렀다. 아들의 영정 사진을 뺏기지 않으려 실랑이를 벌이다 부서진 액자에 손을 찍혔다. 김 씨는 흥분한 채 피를 닦다 가슴에 통증을 느끼고 드러누웠다. 이날 강남 성모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심근경색이 우려된다는 진단을 받고 수술 여부를 결정 중이다.

▲ 6일 삼성 본관을 기습 방문한 피해 노동자 가족들이 끌여나오지 않으려 저항하고 있다. ⓒ프레시안(김봉규)
▲ 삼성 본관을 경비하는 직원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나오고 있는 유영종 씨의 딸 유명화 씨는 삼성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재생불량성 빈혈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이다. ⓒ프레시안(김봉규)
▲ 지난 1월 삼성전자 탕정 기숙사에서 뛰어내려 숨진 LCD 노동자 김주현 씨의 부친 김명복 씨는 아들의 영정이 부서지면서 손을 찔렸다. 이날 김 씨는 심근경색 증세를 보이며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프레시안(김봉규)

뒤늦게 도착한 경찰은 본관 앞에 있는 이들에게 신고하지 않은 집회라며 해산을 통보했다. 유가족들이 "직원들에게 폭행을 당한 사람들이 여기 있는데 조사도 안하는 거냐"고 항의했지만 불법이라는 말만 돌아왔다. 본관 안에 남아있던 피켓을 전달받은 가족들은 자리를 떠 숨진 반도체 노동자들의 추모제가 열리는 서울역 광장으로 향했다.

황상기 씨 "삼성이 오리발을 내밀수록 진실 파헤치려는 마음 더 강해져"

ⓒ프레시안(김봉규)
이날 '기습 방문'을 주도한 황상기(56) 씨는 4년 전 오늘 故 황유미 씨를 떠나보냈다. 속초에서 택시 영업을 하던 황 씨는 병원으로 향하는 택시 뒷좌석에서 딸이 급성 백혈병으로 숨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후 그는 주위의 만류와 삼성의 '경고'에도 언론사와 노동단체를 찾아다니며 진실 규명을 호소했다. '반올림'의 시작이었다.

황 씨는 딸의 기일에 하루 앞선 5일 서울로 향했다. 화장했던 딸의 재가 뿌려진 설악산 울산바위에는 올라가보지 못하고 버스 창문 밖으로 멀리 보이는 풍경만 바라보았단다. "공장에서 화악약품에 오염돼 고통 받았으니 죽어서라도 공기 좋고 맑은 곳에서 살라"고 울산 바위를 택했다고 한다. 하지만 딸이 죽은 원인을 밝히려는 그의 노력은 4년이 지난 지금도 제자리걸음이다.

항의 방문에 앞서 강남역 안에서 다른 유가족들을 기다리고 있던 황 씨는 "삼성 직원들이 내 얼굴을 다 알아봐서 기습 방문할 때까지 나가면 안 된다"고 했다. 4년 동안 '얼굴'을 팔고 다닌 탓이다. 지난해 말에도 삼성 직원들이 황 씨를 찾아 합의를 종용했다. 황 씨는 "삼성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참 날 아끼는 것 같다"며 "산재를 인정하라는 요구에는 침묵하고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걸 보면 대기업인지 사기꾼인지 모르겠지만 정상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 이 일을 시작할 땐 주위에서도 하지 말라고 했고 삼성도 '우릴 상대로 이길 수 있겠냐'고 했다"며 "하지만 지금 피해자가 130명까지 늘어난 걸 보니 잘 한 짓 같다"고 했다. 새롭게 등장하는 피해자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처럼 억울함에 몸을 추스리지 못하는 걸 보면서 새롭게 각오를 다진다. 그는 "삼성은 잘못된 걸 고치려 하지 않고 대들면 돈으로, 대들지 않으면 떨어져 나가게 겁박한다"며 "삼성이 오리발만 내밀수록 진실을 파헤치는 마음은 더 강해진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딸의 기일을 맞아 딸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다른 애들처럼 대학을 보냈어야 했는데. 삼성에서 약품에 찌들어 있는 걸 생전에 몰랐던 게 너무 미안해요. 살아서 자기 또래 애들처럼 놀고 웃고 까불고 하는 게 보고 싶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로 돌아갔다면 옷이랑 맛있는 것도 좀 사주고 싶고. 웃는 게 보고 싶어서…."

이날 저녁 서울역 광장에서는 '제3회 전자산업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주간'을 맞아 반올림이 주최한 추모제가 열렸다. 세 번째 반복되는 풍경에 노동자들의 영정 사진만 늘어났다. 이날 모인 100여 명의 참가자 앞에선 황 씨는 "4년 전에 혼자 억울해서 펄펄 뛰었는데 지금은 여러분들이 있어 고맙다"며 "삼성은 이건희를 보호하려 애쓰지만 노동자가 죽지 않으려는 힘, 병에 걸리지 않으려 하는 힘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프레시안(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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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제3회 전자산업 산재사망 노동자에서 발언하는 황상기 씨 뒤로 故 황유미 씨의 투병 당시 모습이 보인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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