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지루한 기다림, 그 끝은 전무후무한 진전
[김대중을 생각한다]<11> 김대중과 인권
길고 지루한 기다림, 그 끝은 전무후무한 진전
1998년 2월 2일 오전이었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인 김대중과 제법 긴 시간을 두고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지금이나 그때나 인권단체의 실무자였다. 그날은 지금은 고인이 된 김승훈 신부와 이명남 목사, 청화 스님, 최영도 변호사를 모시고 간 자리였다. 김대중 당선자에게는 한국인권단체협의회 대표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김중권 비서실장이 영접했지만, 당선자와의 대화는 배석자 없이 진행되었다. 당선자는 부지런히 메모하며, 인권단체 대표들의 말을 경청했다. 이전에 만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은 논리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펴는 데 능한 사람이었지만, 이날은 달랐다. 대통령 당선 이전과 이후의 차이였을까. 막중한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그는 줄곧 경청했다. 면담은 점심시간을 조금 넘겨 끝났다.

50년만의 정권교체였으니, 인권분야에서도 대통령 당선자에게 요구하거나 기대할 게 너무도 많았다. 국가인권기구의 설립이 절실했고, 안기부, 검찰, 경찰, 법원, 헌법재판소, 교도소 등 개혁이 필요한 기관이 한둘이 아니었다. 국가보안법 등 폐지해야 할 악법도 잔뜩 쌓여 있었다. 무엇보다 양심수 석방이 시급한 과제였다. 수감의 고초를 당하는 수백 명의 양심수를 그대로 두고 새로운 시대를 열 수는 없었다. 이날 만남을 통해 김수환 추기경은 대통령 당선자에게 서한을 전달하였다. 김 추기경은 서한을 통해 "양심수들이 사회에 헌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정권교체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게 해달라"며 양심수 전원 석방을 요청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조심스러웠다. 일단 취임을 해야 양심수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다고 했다. 취임과 동시에 양심수 석방을 하면 좋겠지만, 사면 관련 업무를 법무부가 진행하는 상황이라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과거의 동지들에게 말했다. "검찰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지 않습니까?"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양심수 문제만은 다 해결할 테니 믿어달라고 했다. 그리곤 다른 자리에서도 몇 번 했던 특유의 운동론을 말했다. 종교인들처럼 진리를 탐구하는 일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운동은 철저하게 대중과 함께 가야 한다. 운동가만 혼자서 앞으로 치고 나가선 곤란하다. 다만 반보쯤만 앞서서, 그래도 대중이 따라오지 않으면 기다리기도 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가 인권문제를 바라보는 시각, 인권문제를 푸는 방식은 그의 말처럼 반보쯤만 앞서서, 대중이 따라오기를 기다리는 방식이었다. 인권운동가 입장에서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조심스러운, 그리고 현실주의적 태도가 옳았던 경우가 많았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옥중 사진. ⓒ김대중도서관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직후 진행된 특별사면복권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가 집계한 양심수 478명중에서 74명을 석방하는 데 그쳤다. 그나마 형기의 90%이상을 마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특별사면이 아니라도 가석방으로 진작 나왔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우용각 등 세계적 초장기수들과 조상록 등 군사정권 시기의 간첩사건 관련자들, 박노해, 백태웅 같은 사노맹 사건 관련자들, 김성만, 황대권, 양동화, 강용주 등의 구미유학생 사건 관련자들, 김낙중, 손병선, 안재구 등의 조직사건 관련자 등 대부분의 양심수들이 그대로 감옥에 남아 있게 되었다. 기껏해야 김영삼 정권 때 여러 차례 봐왔던 특별사면 수준이었다. 국민의 정부 법무부장관 박상천은 "사면에서 제외된 사람은 재범의 우려가 있고, 국가체제 전복 활동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이라고 했다. 실망스러웠다. 그건 새로운 정부의 정치인 출신 법무부장관의 말이 아니라, 법무-검찰의 최고 책임자의 말이었다. 김영삼 정부도 출범하자마자 144명의 양심수를 석방했었다. 김대중 정부의 첫 사면은 딱 절반 수준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인권분야에서 김대중 정부가 보여준 첫 번째 성적은 이렇게 초라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단박에 모든 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김종필의 자민련과 손잡고 출범한 연립정권이기에 그 한계는 분명했다. 하지만 대통령 스스로가 수감의 고초를 겪었던 양심수 출신이 아닌가. 다른 문제에 우선해서 양심수 문제를 풀어야 했다. 아쉬웠다.

김대중 정부가 양심수 문제를 전향적으로 풀기 시작한 것은 정권 출범 이후 첫 번째 맞은 8.15때였다. 이때 정부는 '사상전향'이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지적이 많다며, '준법서약'을 받겠다고 했다. 이게 걸림돌이 되었다. 대부분의 인권단체와 양심수들은 준법서약이 변형된 사상전향이라고 반발했다. 당시 나는 실용적 입장을 취했다. 준법서약이 사상전향과 다를 바 없는 건 맞지만, 밖에 있는 인권단체들이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면서 양심수들의 양심의 자유를 역으로 제한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양심수들의 불필요한 고초를 하루 빨리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법무부는 완고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래도 사노맹 사건의 박노해, 백태웅, 남진현, 중부지역당 사건의 김낙중, 손병선, 황인오, 황인욱, 구미유학생 사건의 김성만, 양동화, 황대권, 조작간첩 사건의 함주명이 석방되었다. 외국인 최초의 사형수였던 파키스탄 사람 무함마드 아자즈와 아미르 자밀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렇지만, 안재구, 정수일, 류낙진 등과 41년째 복역 중인 우용각 등의 비전향 장기수 17명, 그리고 구미유학생 사건의 강용주는 사면에서 제외되었다. 강용주 등은 준법서약서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면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같은 해 3월의 특별사면 때보다는 나아졌지만, 굴레와 고약한 제약은 여전했다.

우용각 등의 비전향 장기수 17명과 강용주가 석방된 건, 김대중 대통령 취임 1주년을 기념해 진행한 1999년 2월의 특별사면 때였다. 파키스탄 사형수들도 이때 석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갔다. 준법서약 요구를 사실상 거둬들인 것이다. 그렇지만, 장기수들의 석방기준은 복역기간 27년이었다. 20년, 30년 등 꺾어지는 햇수가 아니라, 27년이 기준이 된 것은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넬슨 만델라의 수감 기간이 26년이었기 때문이다. '만델라보다 더 오랜 구금'이란 비난을 피하려는 꼼수였다. 27년이 안 되는 사람들은 석방될 때까지 다시 6개월을 더 기다려야 했다.

1999년 8월 15일, 안재구, 류낙진, 최호경 등 조직 사건 관련자와 손성모 등의 장기수들이 모두 석방되었다. 이로써 양심수 석방 문제가 대체로 마무리되었다. 양심수 석방에 1년 6개월이 걸릴 만큼 김대중 대통령은 신중했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당선자 시절의 약속은 지켰다.

▲ 미국 망명을 끝내고 귀국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를 맞는 시민들. ⓒ김대중도서관

2001년 11월 한국에도 국가인권기구가 설립되었다.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은 오랜 민주화 운동이 거둔 중요한 결실이었다. 비록 이명박 정부 들어 거의 파산 지경에 이르긴 하였지만, 그동안의 활약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국가와 정부는 주로 인권가해자의 역할을 수행했는데, 국가가 나서 인권을 보장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새로운 것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유엔 차원의 국제적 인권규준의 국내적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해왔다. 인권의 지평을 넓히고, 구체적인 인권피해자들을 찾아 실효성 있는 구제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과정은 길고 지루하기만 했다. 정부와 인권단체의 이견은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가장 큰 쟁점은 국가인권기구의 위상 문제였다. 법무부는 법무부 소속의 특수법인을 고집했고, 인권단체는 입법·사법·행정 등 어디에도 속하는 않는 독립기구로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권기구의 감시대상이 되어야 할 법무부는 끈질겼다. 인권단체도 굽히지 않았다. 법무부와 인권단체의 싸움은 3년이나 계속되었다. 상임위원 수를 몇 명으로 하고, 어떤 직급으로 할지, 인권기구의 규모는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권한은 어떻게 할지가 모두 쟁점이었다.

길고 지루한 싸움이 계속될 때도 김대중 대통령은 예의 신중한 태도로 일관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새로 출범하는 국가인권기구가 유엔 등 국제사회와 인권단체가 인정할만한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적 입장만 강조했다. 그리곤 법무부와 인권단체의 견해 차이가 좁혀지길 기다렸다. 그는 기다리는 데 능했다. 인권단체도 숱한 인권당사자들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림의 결과 인권단체들도 80점쯤은 된다고 평가하는 새로운 국가인권기구가 출범할 수 있었다.

1997년 12월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은 많은 사람을 설레게 했다. 인권단체들은 양심수 석방, 국가인권기구 설립은 물론, 국가보안법 폐지, 한총련 등 수배자 문제 해결, 전교조, 민주노총의 합법화, 과거 청산, 사회보장 제도의 실질화 등 사회권의 전면적 보장과 확대를 요구했다. 전자주민카드 추진 포기와 경찰, 검찰, 안기부, 교정기관의 개혁도 빠질 수 없는 개혁과제였다. 인권의 진전을 위해 챙겨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기다려야 했다. 김영삼 정부의 '하나회 청산'처럼 단박에 해결된 숙제는 아무 것도 없었다. 김대중 정부는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고, 이해 당사자들의 갈등을 조정하고 가급적 합의를 도출하려고 했다.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인권 개혁의 과제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과거청산작업도 비슷했다.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의문의 죽음을 추적하고, 진상을 규명하는 역할을 수행한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는 2000년 10월 출범했다. 의문사위는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등의 진상을 밝혀냈다. 의문사위는 노무현 정부에서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로 이어졌다. 하지만 의문사위 설립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 유족들은 여의도 국회 앞에서 무려 422일이나 농성을 진행했어야 했다. 쉬운 일은 없었다.

길고 지루한 과정이 필요했지만, 인권분야에서의 확실한 변화가 하나둘씩 가시화되었다. 경찰은 어느 날 갑자기 최루탄 사용을 중단했다. 이전에도 '무석무탄(無石無彈)'이니 '무탄무석(無彈無石)'이니 하는 논쟁이 오갔지만, 1987년 이한열 열사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최루탄 사용이 계속되던 터였다. 비록 2002년 서울지검 고문치사 사건으로 빛이 바래기는 했지만, 수사기관의 고문 관행도 크게 개선되었다. 노골적인 구타는 대부분 사라졌다. 교정기관의 변화는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구제금융사태로 급증한 재소자 숫자를 줄여야 교정교화가 가능하다고 주문했다. 한국 교정시설의 가장 큰 문제가 과밀수용에 있다는 것도 정확히 짚어냈다. 검사장 급의 검사가 임명되던 법무부 교정국장에는 처음으로 교도관 출신이 임명되었다. 수갑을 채우는 것도 모자라, 포승에 족쇄까지 채우던 관행도 개선했다. 최소한 발에 채우는 족쇄는 없어졌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재소자 입장에서는 혁명적인 변화였다. 머리도 자유롭게 기를 수 있게 되었다. 검열제도는 남아 있었지만, 재소자들은 종이와 볼펜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엔 특별한 허가를 받은 소수만 누리던 특권이었다.

▲ 1987년 서울 보라매 공원에서 대선 유세를 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도서관

김대중 정부는 인권문제에 관한 한 전무후무한 진전을 이뤄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민주화운동에 대한 평가와 보상이 진행되었고,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한 제주 4.3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작업이 진행되었다. 여성부가 출범하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제정으로 복지가 보편적 인권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적은 지면에 일일이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성과가 이어졌다. 민주노총과 전교조가 합법화되었고, 집회와 시위의 자유도 예전보다 많이 개선되었다. 언론의 자유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보장받았다.

1998년 3월 법무부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은 경제대통령이나 통일대통령보다는 인권대통령으로 역사에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경제나 통일은 수단에 불과하지만, 인권은 수단이면서도 동시에 목적(가치)이기도 하다. 김대중 대통령의 인식은 정확했다. 다만 그가 현실 정치인이라는 점, 그가 속한 정당의 구성원들이 대통령에 한참 못 미칠 정도로 인권의식이 부족했다는 점, 1961년의 군사쿠데타 세력도 참여한 연립정권이라는 한계, 그리고 조·중·동 등 수구언론의 집요한 저항 등의 한계적 조건들은 내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였을까, 김대중은 그가 평소 즐겨했던 말처럼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잔뜩 쌓인 인권문제를 하나씩 해결해나갔다. 여러 가지로 부족했지만, 적어도 현실에서는 김대중, 그가 인권대통령에 가장 가까운 모습이었다.

김대중 정권 당시에 활동했던 인권운동가 입장에서 돌아보면, 길고 지루한 싸움의 시간들이었다. 그렇지만 인간 김대중의 끈기와 가버넌스 형 갈등해결 노력 때문에 한국은 인권후진국에서 벗어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두 명의 대통령을 만난 지금에 와서 보면, 김대중 대통령이 인권분야에서 이룬 성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 수 있다. 현실 정치의 한계 속에서 고군분투했던 그가 고맙다.

* 필자 오창익은 인권연대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인권운동가다. 늘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활동을 거듭하면서, 형사사법절차와 관련된 인권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에 대해 지속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몇 개의 단체에서 경험을 쌓은 다음, 1999년부터 인권연대에서 일하고 있으며, 저서로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과 <검찰공화국, 대한민국>(공저)이 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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