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면…
[김대중을 생각한다]<19> '선생님'에 관한 작은 이야기들
2011.04.25 08:03:00
그가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면…
먼저 호칭의 문제이다. 나는 생전에 그를, 그의 대통령 재임 시절을 제외하고는, 항상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에게는 이 호칭이 가장 어울릴 것 같아서였다. 나의 소개로 알게 된 외국의 저명한 교수 한 분은 김대중에 관한 개인적인 인상을 이렇게 표현한 일이 있다.

"예술가 같은 섬세함과 강한 지도자다운 권위를 겸비하고 있는 드문 예."

이 말을 그에게 전했더니 관심 있게 듣고 원어로 써달라고 해서 그렇게 하였다. 인간적으로도 김대중은 배울 바가 많은 분이었지만 내가 그를 항상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의 인간적인 면모 때문만은 아니다. 이점 뒤에 다시 언급할 생각이다.

이 글을 쓰면서 그를 어떻게 칭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여러 사람들이 흔히 하는 대로 "DJ"라고 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 같아 그렇게 하기로 한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DJ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도 그에게 이 말을 한 일이 없다.

그를 처음 본 것은 반세기 전 우리 집에서였다. 선친은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이른바 구파에 속하셨고, DJ는 장면 씨 계열인 신파에 몸담고 있었지만 어쩌다가 집에 찾아오는 일이 있었다(필자의 선친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던 라용균 선생으로, 그는 해방 후 4선 국회의원, 장면 내각의 보사부 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편집자). 집에 오는 수많은 손님들 중에 유독 그를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출중한 외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젊은 시절의 DJ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공감하리라 믿는다. 어린 시절이지만 외모만 보아도 이 사람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내가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는 그는 우리 모두의 운명에 중대한 관건이 되어 있었다.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DJ에 관한 생각에 항상 따라오는 문제는 역사의 진행에 있어서 특정한 인물의 역할이다. 역사학자 알란 불록(Alan Bullock)은 세계 2차 대전은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독특한 인물들이 없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사회과학자들이 역사에서 인물의 역할을 등한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을 하는 것은 DJ라는 특이한 인물이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인 시기에 수행한 결정적인 역할 때문이며, 아울러 내가 "선생님"과 특별한 개인적인 관계를 갖게 된 배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손문상)
한동안 나는 우리나라의 정치 발전에 관심을 갖는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로서 DJ의 정치적 행보를 지지하였지만 그와 특별한 관계를 갖는 일은 없었다. 1992년 대선 당시라고 기억되는데 나는 당시 정부의 요직에 있던 최창윤 박사에게서 김영삼 후보의 외교안보 보좌관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일이 있었다. 물론 바로 사양을 하였고 그 분은 좀 더 생각해 달라는 말씀을 남기고 다시 한번 재고 여부를 문의하셨지만 재차 사양한 기억이 있다. 이때에 나는 수많은 DJ 지지자 중 하나이었을 뿐이었고 실은 그가 그 선거에서 이기리라는 확신은 물론 기대도 하지 않았었다. 저명한 정치학자 한 분의 말씀대로 그가 그 선거에서 패배하리라는 것은 단순한 산술의 문제였고, 나의 지지는 말하자면 '실존적인'것에 불과하였는지 모른다. 실상 1997년 대선 당시에도 그의 성공을 점친 사람은 드물었다.

아무튼 DJ는 1992년 선거에서 다시 실패를 했고 약속한 대로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는데 당시 나는 향후 그의 행보가 우리나라의 앞날에 중대한 관건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면담 을 요청했다. 바로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인물의 중요성에 관한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DJ라는 특별한 인물이 없이는 정권 교체는 불가능하고 정권 교체 없이는 한국의 정치 발전은 한동안 정체에 빠질 수박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점은 정권 교체 없이 민주정치의 외형만을 유지하던 일본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되리라고 여긴다. 혹은 대통령이 되지 않더라도 야당에 DJ가 있는 것만으로도 정치적으로 중요하다고 믿었다.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어느 날 저녁 늦게 동교동 자택에서 DJ와 단 둘이 마주 앉았는데, 예상했던 대로 그는 상당히 침울한 모습이었고 대화의 분위기도 무거울 수박에 없었다. 나는 그에게 국내 문제를 떠나 시야를 국외로 돌려서 이 지역의 문제를 생각해보라는 진언을 하였다. 아시아의 가장 큰 문제는 국경을 넘어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정부가 아닌 대중의 차원에서 공감과 지지를 기할 수 있는 지도자가 없다는 점이며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도자는 아시아에서 DJ 밖에 없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는 한동안 외국에 가서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시도록 권하면서 적절한 장소로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을 추천하였다.

꽤 오랜 시간 한반도와 세계정세 일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야기가 끝날 무렵 그는 상당히 밝은 표정이 되었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을 고할 때에는 웃으면서, "이제는 내 명함에 '아시아의 지도자'라고 새겨야 하겠네" 하는 농담까지 건네었다. DJ는 정계 은퇴의 약속을 지키면서 새로운 공적 활동의 전망과 공간을 확보한 셈이고 내가 바랐던 점도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연락해서 그가 객원 교수로 초청을 받도록 요청하는 한편 그 학교의 몇몇 인사와 교류를 할 수 있도록 주선을 하였다. 케임브리지에 머무는 몇 개월 사이 그는 종종 나를 그곳에 오도록 하였는데 논의의 초점은 주로 한반도와 주변의 정세와 전망이었다. 이때에 이미 그는 후일 햇볕정책으로 알려진 대북 정책의 근간을 완성하고 있었다. 케임브리지에서 DJ는 금방 몇몇 학자들과 좋은 관계를 이룩하였다. 지금도 몇몇 교수들의 연구실에는 그가 써준 서예가 걸려 있다. 귀국 후 DJ는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고 아시아의 민주화와 평화를 위한 국제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후일 그의 정치적 활동의 기지가 된 셈이다. 내가 희망했던 정도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DJ는 한국의 정치인들 중에 국제적인 지명도는 물론 지지도도 가장 높은 사람이어서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이 필요로 하는 지도자로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DJ는 멀리서보다 가까이에서 볼수록 더욱 관심을 끄는 인물이었다. 그는 지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소양과 함께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흔치 않은 정치인이었다. 매우 바쁜 일정 중에도, 지식인들과 지적인 주제에 관하여 몇 시간씩 대화를 이어가는 일들이 인상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식인들이 갖추기 어려운 현실적인 통찰력도 뛰어났다. 어떤 좌담 중 학자 한 분이, 경제적 지표 등을 열거하면서 일본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에 앞서는 세력이 되리라는 전망을 하였는데, DJ는 그 자리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을 하였다. 그는 미국은 일본과 달리 공개적인 사회로서의 이점과 세계의 1류급 대학을 많이 갖고 있는 나라여서 근본적으로 폐쇄적인 일본이 미국을 대체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전망하였는데, 이것은 멀지 않아 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DJ는 영화 문학 등 문화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어떤 때는 엉뚱한 질문으로 주변을 당황하게 만든 일도 있다. 지지자들이 마련한 음악회가 끝난 후에, 그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연주자들과 별개로 혼자만 몸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도 지휘자를 보면서 연주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는 말을 진지하게 하였다. 짧은 상식으로 조심스럽게 지휘자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훌륭한 정치지도자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아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더니 그제서야 겨우 이해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또 동성애 같은 주제에 관하여서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을 가끔 하였다.

한 가지 조금 민망한 느낌으로 기억하는 일도 있다. 1996년 총선 당시라고 기억하는데, 큰 아드님의 출마 문제로 당내에서 작은 불협화음이 있었던 일이 있다. 총재의 측근을 포함하여 당내에서, 다음 해의 대사(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아드님의 출마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이점에 관하여서는 DJ가 매우 언짢아 했던 것 같다. 당신께서는 자신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은 아드님의 정계 진출 희망을 당내에서 잘 이해 못하는 것이 서운할 뿐만 아니라 야속하게도 느껴졌으리라. 실상 탄압과 박해를 당하는 과정에서 가족들만큼 당신과 어려움을 함께 한 사람들도 없지 않았겠는가. 이런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서운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인가 집회에를 갔다가 함께 차를 타고 오는 길에 이런 말씀을 드렸다.

"큰 아드님의 출마에 관하여 여러 가지 말들이 있지만 이 문제에 관하여 총재의 아들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민주화 투쟁의 과정에서 '동지'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습니까"

DJ는 '동지'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늘 하는 습관대로 바로 수첩을 꺼내어 메모를 하시고는 공개 장소에서 같은 발언을 하였다. 그런데 다음 날 어떤 신문이 DJ가 귀가하여서 아드님과 서로 "어이 김동지" "김동지" 하고 부르는 모습을 만화로 내보냈다. 나는 슬기롭지 못한 조언을 드린 것 같아 한동안 미안한 마음이었다.

DJ와 나눈 개인적인 대화의 주제들 중에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여러 가지로 박해를 받았던 이야기들이었다. 특히 여러 차례 사선을 넘나든 경험과 사형수로 감옥에 갇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던 때의 이야기는 여러 차례 들어도 정치를 떠나 인간적인 공감을 항상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이런 이야기 끝에 그가 좋아하는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사형 집행 직전에 황제의 사면으로 살아난 후 극한적인 경험으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는 고사를 소개했더니 매우 관심을 보이던 기억이 있다.

한번은 그가 자신도 전에 한 말을 뒤집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일도 있다는 반성 같은 말씀을 하기에,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지만 결정적인 계기에 결정적인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말을 하며, 예를 들어 당신께서 사형이 확정된 상태에서 온갖 유혹에도 지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한 일 같은 것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씀 드린 일이 있다. 이 말 끝에 나폴레옹이 탈레랑에 대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항상 거짓말을 한다면 문제다."라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웃으시던 기억도 있다.

▲ 노벨 평화상을 받는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의심할 바 없이 DJ는 대통령직에 대한 집념이 강했고 노벨상에 대한 집착도 강하였다.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대통령 병"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그런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이러한 집념과 집착의 어느 만큼이 그저 개인적인 '욕심'에 불과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공적인 사명감과 그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 때문이었는지. 그런 비판은 문제의 본질을 벗어난 비판이다. 중요한 것은 DJ가 그 당시 역사적인 상황에서 자기가 수행하여야 하는 정치적인 사명에 관하여 확실한 소신을 갖고 있었고 적어도 큰 줄기에 관한 한 그 소신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 일이 없으며,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그는 근본적으로 지적인 지성인이면서도 사람 사는 사회에서의 정치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가 말을 바꾼 일이나 당내에서의 권위주의적인 처신 등을 들어 그를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알기에 그는 원칙의 영역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주어진 현실에서 책임 있는 행동을 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대통령 취임식이 있던 날 아침, 조간신문에 나는 농담 같은 칼럼을 기고한 일이 있다. 내용은 그날 아침 DJ가 자신이 선거에서 다시 실패를 하고 이제 고령으로 또 다시 5년 후 선거에 나가야하는 것을 괴로워하는 꿈을 꾸는 이야기였다. 악몽에 시달리는데 영부인께서 취임식에 나갈 준비를 하여야 하니 그만 일어나시라고 깨운다는 내용이었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대개 이것을 그저 농담처럼 생각하고 웃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한 일도 있다. 만약 그가 1997년 선거에서 실패하였다면 어떻게 하였을까? 그가 다시 대통령직에 도전하였을 것인가 하는 것은 물론 불필요한 질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적어도 내가 아는 '선생님'은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정치적인 과업을 위해 노력을 그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권교체, 평화통일, 사형제 폐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장애인에 대한 배려, … 등등.

* 필자 라종일은 1940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2년부터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했으며 1998년 DJ의 대통령 당선 이후 인수위원회 행정실장, 국가정보원 1차장(해외 및 북한 담당), 그리고 영국 대사를 맡았다. 이후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 일본 대사를 역임했으며 지난 3월까지 우석대학교 총장으로 일했다.

* <프레시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한 독자 여러분의 글을 널리 구합니다.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 중 우리가 계승해야 할 것, 극복해야 할 과제 등에 관한 진솔한 생각을 담아 webmaster@pressian.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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