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민, 드라마는 비극으로 끝났다!
[배지헌의 그린라이트] 황금세대 선두주자의 안타까운 죽음
2013.01.07 15:00:00
조성민, 드라마는 비극으로 끝났다!
조성민 전 두산 베어스 코치가 영욕으로 가득했던 삶을 마감했다.

조성민은 6일 오전 허리띠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유서도 없었다. 어머니와 지인에게 남긴 "미안하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가 전부다. 경찰은 정확한 사인을 조사하기 위해 7일 오전 부검을 실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향년 40세.

▲조성민은 한국 야구의 황금 세대로 알려진 '전설의 92학번'의 선두주자였다. 지난 1998년 일본 도쿄돔에서 요미우리 소속으로 요코하마 타선을 상대로 역투하는 조성민. ⓒ연합뉴스

황금 세대의 적자로 떠올라 쓸쓸히 내려오다

조성민은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체육인 출신인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운동에 소질을 보였다. 용마초교에서 처음 야구부 생활을 시작해 이후 둔촌초와 신일중, 신일고를 거치며 활약했다. 194cm의 건장한 체구에서 나오는 시속 150킬로미터(km/h) 강속구에 귀공자풍의 수려한 외모로 초고교급 스타로 각광받았다. 신일고 3학년 때인 1991년에는 투타에서 맹활약하며 팀을 황금사자기, 봉황대기 우승으로 이끌었다.

1992년에는 프로행 대신 고려대학교 진학을 선택, 한국 야구의 황금 세대로 불리는 '92학번'의 일원이 됐다. 조성민을 비롯해 손혁(고려대), 임선동, 박재홍(이상 연세대), 박찬호(한양대), 정민철(대전고), 염종석(부산고) 등이 같은 해 고교를 졸업한 선수들이다. 이들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좋은 라이벌이자 친구로 한국 야구의 한 시대를 풍미했다.

대학 졸업 후인 1996년에는 일본 프로야구의 최고 명문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계약금 1억 5000만 엔, 연봉 1200만 엔으로 일본 야구 역대 신인 최고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조성민의 일본 진출은 동기생인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이 자극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교 시절만 해도 박찬호는 조성민, 임선동, 손경수 등 '빅3'에 비해 한 수 아래의 선수로 평가받았다. 한 야구 관계자는 "미국에 진출하면 박찬호에 이은 '2호 진출' 선수가 되지만, 일본으로 가면 '최초의 일본 야구 직행' 선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조성민의 진출 이후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 정민철, 정민태, 이승엽 등 프로야구 스타들의 일본 진출이 줄을 이었다.

조성민은 일본 진출 첫해에는 2군에만 머물렀다. 대학 시절 당한 어깨 부상이 원인이었다. 1년 반을 재활에만 매달린 끝에, 2년차인 1997년 7월에 처음 1군 마운드를 밟았다. 첫 보직은 마무리였다. 22경기에서 1승 2패 11세이브에 2.89의 평균자책을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듬해인 1998년에는 선발 로테이션에 진입했다. 전반기에만 7승 6패에 2.75의 평균자책을 기록했다. 7승 가운데 3승이 완봉승이었다. 에이스급 활약과 팬들의 인기를 바탕으로 올스타에도 선발됐다.

하지만 팔꿈치 통증을 안고 무리하게 올스타전에 출전한 게 화근이 됐다. 이번에는 팔꿈치 인대가 끊어지는 시련을 맞이했다. 또다시 수술과 재활의 긴 터널이 이어졌다. 결국 재기에 실패하며 2002년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다. 전 요미우리 감독인 호리우치 츠네오는 6일 <요미우리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조성민은 키도 크고 공의 각도와 콘트롤도 좋은 투수였다. 부상만 아니었다면 요미우리의 중심 선수가 됐을 것"이라며 애도를 표했다.

짧은 영광의 시절 뒤에는 긴 내리막이 기다렸다. 한국으로 돌아온 조성민은 사업가로 변신했다. 일본에 살면서 눈여겨본 슈크림빵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시장 형성이 덜 이루어진 초창기였던 탓에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2003년과 2004년에는 한국 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에 참가해 선수로서 재기를 노렸다. 그러나 어느 구단의 부름도 받지 못했다. 2005년 김인식 감독의 배려로 한화 유니폼을 입는 데 성공했지만, 3년간 3승 4패에 평균자책 5.09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이후 조성민은 방송 해설과 개인사업 등을 병행하다 2011년 두산 베어스 2군 재활코치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선수 시절 부상과 재활로 고생했던 경험을 살려 2년 동안 후배들을 지도했다. 코치로서 평가는 나쁘지 않았지만 올 시즌을 앞두고 재계약이 불발됐다. 구단에서 해외 지도자 연수를 제안했지만, 본인이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2월에는 술자리에서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구설에 올랐다. 조성민 측이 피해자인 것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방송 해설가 복귀를 모색하던 중 벌어진 불상사라서 더 아쉬움이 남았다.

비극으로 이어진 '세기의 커플'

조성민은 2000년 12월 톱스타 최진실과 결혼하며 화제를 모았다. 당대 최고 여배우와 스포츠 스타의 만남은 '세기의 커플'로 불리며 모든 이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계속해서 불화설이 불거졌다. 2002년 12월 조성민은 기자회견을 통해 파경을 선언했다. 최진실은 둘째 자녀의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은 별거에 들어갔다. 2004년 8월에는 조성민이 최진실의 집에서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체포되어 큰 물의를 빚었다. 결국 한 달 뒤인 2004년 9월 두 사람은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최진실은 2005년 KBS 드라마 <장밋빛 인생>을 통해 재기에 성공했다. 암으로 사망하는 주부 역을 맡아 시청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2008년에도 MBC 드라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이 큰 인기를 끌며 전성기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방송에서도 항상 밝고 당당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못했다. 최진실은 계속해서 우울증에 시달렸고, 탤런트 안재환의 사망 이후에는 사채 루머로 고통 받았다. 결국 최진실은 2008년 10월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년 반 뒤에는 동생 최진영마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최진실의 사망 이후 조성민은 세간의 비난에 시달렸다. 비극의 원인 제공자로 지목되어 비난의 화살을 맞았다. 그가 두 자녀의 친권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유산을 차지하려는 목적이 아니냐"는 의혹의 목소리도 나왔다. 사회적 논란이 커지자 결국 조성민은 친권과 양육권을 모두 포기했다. 이는 이혼한 배우자가 사망하면 이전 배우자가 자동으로 친권을 갖는 것을 방지하는 법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사람들의 비난에 조성민 본인도 고통을 겪었다. 그는 2009년 한 방송에서 당시 논란에 대해 심경을 털어놓았다. 그는 "사람들이 너무 그쪽으로 몰아가니까 '유서라도 써놓고 죽어야 진심을 알아줄까' 하는 생각도 했다"며 "애들 재산과 유산을 탐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단 더 많은 사람이 진심을 알고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버텼다"고 했다. 한 매체와 한 인터뷰에서는 "세상 사람들의 지탄도 내 몫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죽기 직전 그의 SNS 인사말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조성민의 빈소는 모교인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홍원기, 정민철 등 동기들과 야구 선후배들이 빈소를 찾았다. 39년의 짧은 기간 동안 최고의 영광과 최악의 추락을 모두 맛본 조성민의 마지막 모습은 '야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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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비극으로 끝났다. 6일 오후 빈소가 마련된 서울 성북구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에 고인의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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