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ㆍ통일 지향하다 철저한 반공군인으로
<인물 탐구> 군인 박창암 <상>
2003.12.10 18:54:00
독립ㆍ통일 지향하다 철저한 반공군인으로
지난 11월 10일 타계한 박창암 장군은 한국현대사에 작지 않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 행적 또한 흥미롭다.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졍병준 교수(목포대 역사문화학부)에 따르면 박창암은 일제가 만든 만주군에 입대했으면서도 한국 독립에 대비한 건국동맹 활동을 했고, 해방 직후에는 남북 통일군대 수립을 위해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실패한 이후 남한으로 돌아와 철저한 반공군인으로 일관했으며, 5.16군사쿠데타에 참여했으나 2년만에 반혁명세력으로 몰려 옥고를 겪기도 했다. 말년에는 월간 <자유> 발행 등을 통해 우익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한 한국사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의 말년 약 10년간 교분을 가졌던 언론인 김유경씨의 글을 통해 인간 박창암의 면모를 되돌아보기로 한다. 이 글은 박창암 장군의 활동시기에 따라 3부로 나누어 연재한다. 편집자

<사진1> 1952년 6.25 한국전 당시 제주도에서 작전중인 박창암 소령 (이하 판권은 박창암)

***독립ㆍ통일 지향하다 철저한 반공군인으로**

한국전 당시 특수부대 지휘관이었고 5.16군사혁명 주체의 일원으로 혁명검찰부장을 지낸 박창암(朴蒼巖,1921-2003) 장군이 2003년 11월 10일 작고했다. 향년 82세로, 최근의 뇌졸중에서 회복되지 못했다.

박장군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6.25 당시 뛰어난 심리전과 게릴라전으로 수많은 실전을 치른 유격전의 대가이며 군사혁명의 민정이양을 끝까지 고집하던 영원한 군인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월남 고딘디엠 대통령의 군사고문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고인이 군인이면서도 국사에 조예가 깊어 이 방면에 매우 의미심장한 활동을 벌인 인물이란 사실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나는 경향신문에 재직하던 1994년 박장군을 처음 만났다. 고인의 군경력은 아무 것도 모르고 월간 <자유>에 여러 번 글이 실린 동양미술사학자 코벨에 대한 문의차 발행인인 박장군을 만나러 갔었다. 이후 그의 한국사에 대한 활동과 군인시절의 여러 가지 비사들을 듣고 기록했다.

고인을 회고하는 몇가지 이야기를 생전에 고인에게서 들은 그대로 옮겨 본다. 오래전 인터뷰라 고인의 사후 부인 이겸희여사와 가족, 군 동료 여러분으로부터 확인작업을 거쳤다. 이 글에서 '나' '우리' 로 표현되는 문장은 모두 박창암 장군의 직접적인 회고담이다.

***1. 군인 박창암**

***건국동맹**

1921년 함경남도 북청태생으로 만주 간도지방 연길에서 사범학교를 나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만주체류는 그의 역사인식의 바탕이 되고 그는 저항정신이 강한 인물이었다.

1943년 滿軍(만주군; 부의의 만주국 군대. 한ㆍ중ㆍ일의 군인이 혼성됐다) 간도 특설대에 입대했다. 처음엔 소만국경의 소련 토치카를 깨는 데 사람이 폭탄을 들고 가서 폭파하는 것이었다. 만군은 모택동의 팔로군과 여러번의 전투를 치렀다. 박창암은 이때 팔로군의 전술을 깊이 있게 관찰했다.

'일본군 지배하의 만주군이 2파로 갈라졌다. 친일본파와 그렇지 않은 파들이다. 만주군 한국인 장교 중심으로 군대 내에 항일조직이 만들어진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사진 2> 1977년 재상봉한 만주 간도특설대의 전우들. 백선엽 이용 박태원 박창암 등이 모였다

세계대세가 돌아가는 사정이 한국장교들이 한꺼번에 모이지 않을 수 없는 기회가 있었다. 항공학교 조종사훈련에 뛰어난 한국군 장교학생이 모이게 됐다. 만주군내에 한국인만으로 된 1개 독립대대가 있어 장교가 40명 있었는데 이는 중요한 전술단위이다. 나도 거기 들어갔다. 리더들이 모이게 됐다. 그것이 항일운동의 기점이었다. 그게 건국동맹이고 전체리더는 박승환(朴昇煥)이었다.

일본군내에서 2.26이란 쿠데타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 관련 장교들을 모두 형 집행해 죽이기는 아까우니 군복을 벗기고 만주군으로 보냈다. 이들이 한국군인들에게 '나는 2.26 사건 관련자다. 너희는 조선 독립운동해라. 이 전쟁은 일본이 이길 수 없다. 대동아 전쟁을 잘못 일으킨 것이다. 너희는 너희나라 조선독립 운동했다가 망하는 우리를 나중에 잘 보아달라.'했다.

일본 관동군 총사령관 전용비행기를 우리 한국군 장교들이 타고 1945년 8월 17일 한국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

나중에 김00라는 사람이 '박정희대통령이 만주군 안에서 건국동맹 리더를 한 사람이라고 증언해 달라'고 세번이나 찾아왔다. 박승환은 나와 함께 평양 군부에 특수공작차 극비파견 됐다가 전사해 살아있지 않았다. 두 번은 좋은 말로 거절하고 세 번째는 큰상을 뒤집어 두들겨 부쉈다. 1991년 신문에 그 기사가 났다.

그런데 한 월간지 기자가 내게 와서 3-4시간 만군시절의 우리 군인 이야기를 취재하고는 우리가 건국, 항일운동 했다는 건 안 쓰고 우리가 박정희의 좌익 맥으로 좌익 운동했다고 왜곡, 사실과 다르게 썼다. 그 당시 박정희는 만주에서 특별조직에 들지도 않았고 좌익 낌새도 없었다. 또 다시 와서 취재하겠다기에 '취재하기 전에 모가지를 꺾어주겠다'고 했다.

***한국전쟁과 특수부대**

<사진 7. 1954년 상무대에서 부인 이겸희씨, 둘째아기 연주와 함께한 가족사진.

광복후 갑종 7기생이 된 박창암은 두 번이나 창설 당시의 북한군을 상대로 특수작전을 행했다. 정치로는 통일이 안돼도 군인끼리 통일을 논의할 수는 있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그는 공산당의 본질에 대한 강한 불신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후 국군 대위로 복귀했다.

6.25가 나고 한강 이후부터 포항근처까지 후퇴했다가 안강에서 반격, 평양까지 진격하는 과정의 격렬한 전투에 동해 유격대장, 육군특수부대장으로 채명신장군과 번갈아 유격대를 통솔했다. 다부동전투, 영천전투, 용문산 전투 등 20여 전투중의 여러 가지 전쟁담은 그와 같이 참전했던 군인들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횡성전투에서 포위되어 동상으로 발가락을 심하게 상했다. 탈출할 때 부하 소재영이 그를 업었다.

박창암은 일찍 육군 특수부대의 창설에 관여했다. 이때 미군의 지원을 받아 장비와 물자를 지원받아야 한다는 의견과 그렇게 하면 미군의 간섭에다 죽을 일은 한국군이 도맡고도 성과는 다 미군에게 돌아가니 안된다 하는 의견이 엇갈렸다. 그는 자신이 주장한대로 한국군만의 독자적인 특수부대를 만들고 지휘했다. 1952년의 사진은 헌 군복차림으로 전장에 임한 지휘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미국에 가서 특수부대 훈련도 받았다. 그러나 '미국식교육은 근본원리에서 핵심에 들어가진 못한다'고 평했다.

사진 10. 1952년 전장에서의 육군 8사단 수색대 장병.
앞줄 왼쪽부터 조광식 박창암 이명혁 김석환

***이데올로기라는 것**

실전에 있어 우리 특수부대사람들은 아주 날쌔다. 국군과 북한군은 아무리 변장을 해도 한눈에 알아챈다. 우리 수색대가 북진중 단양에 왔을 때 영감인 척 지나가는 남자를 보았다.

'저 영감 두들겨 패. 빨갱이다'

북한 인민군 군관 대위였다.

'선무공작차 남하하다가 겁나서 변복하고 후퇴중이다.' 고 말했다.

'너는 우리 군에 들어와서 우리 부대를 도와라. 그럼 살려주겠다. 선택해라. 제네바협정에 따라 1. 김일성 따르겠나 2. 국군 따르겠나 3. 숨어 기다리겠는가'

그가 내 다리를 끌어안으며 '솔직한 심정이 내 가족을 찾고 싶으나 이 난리에 어떻게 그러겠나. 나를 살려 너희 부대에서 써달라'

군관은 그 후 우리 부대에서 일했다. 세월이 지났다. 군부대에서 무슨 특강을 했는데 한 키 큰 대위가 내게로 와서 '제가 그 군관 동생입니다'고 인사했다.

***공비토벌작전-경상ㆍ전라ㆍ제주도에서**

한국전 기간중 박창암 소령은 공비토벌작전에서 특수부대를 지휘했다.

'내가 경상 전라 제주도 공비 토벌했다. 나는 총 안쏘고 공비들을 토벌했다.'

이 당시 박창암장군에 의해 살아난 사람들이 '박소령이 그때 참 사람을 많이 살렸다'고 말한다. 박장군을 그 기념일에 초대하려 애쓴 사람들도 있다(김지하 회고록 146회 참조).

'이 때의 공비토벌한 이야기를(심리전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고 생전의 그는 여러 번 말했었다. 심리첩보전을 최대한 활용한 이 당시의 전술은 육군전사에서 연구해야 될 것이라고 박창암 휘하의 노성린 전 무지개부대 중대장은 쓰고 있다. 지난 11월 24일 고인을 추모하는 재에 백영기 이용택 민승기 최필규 이청림 고인수 박재중 김응엽 안승봉 등 6.25 참전 장성들이 모였는데 여기서도 박창암의 유격전술이 기록, 보전되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박장군과의 1999년 2월 인터뷰 내용을 가감없이 고인의 말투 그대로 옮겨본다.

경상도는 고사지내는 것으로 시작했다. 사람들이 죽은 마당에 누가 정보를 주겠는가. 그러나 정보없이는 일을 못한다. 동네 산소에 가서 묘비를 다 읽었다. 개척자 등이 있었고 신식집은 개화되고 오랜 집은 학자집안이었다. 김초시 집을 찾아갔다. 군인이라면 겁내니까 부대장이랑 같이 부지런히 방문했다. 노인은 고전부터 시작해야 얘기가 된다. 둘 사이에 말이 통했다. 그제서야 우리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향교를 우리 군이 써야 할 텐데요'

'써라'

향교를 물로 깨끗이 청소하고 노인에게 가서

'경의를 표할테니 제사 절차를 가르쳐 주시오'

'그건 왜?'

'우린 동방예의지국이니 제사부터 지내는게 옳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향교에 금줄 치고 포고문을 써붙였는데 위압적인 내용은 없고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등 싱거운 것으로 주민들에게 긴장감을 주지 않았다. 청년들이 보고 '시시하다'고 했다. 노인은 '뉘집 자식인지 참 본보기다'라고 했다. 내가 물었다.

'막걸리는 누가 잘 빚소?'

'왜, 금주령 어겼다고 잡아가게?'

'아니, 강에 가면 하백이 있고 산에 가면 산신령이 계시니 그분들께 향교 여기를 쓴다고 고사지내야지 안되겠습니까. 그런데 아무 술이나 쓸 수는 없고 정결하게 빚은 술을 올려야지.'

노인이 '옳다. 그렇게 하자.' 하고 고사축문을 지어 읽었다.

'천상천하 제일 좋은 곳으로 이곳을 점지해 살다가 살 만하니 큰아들은 공비 둘째아들은 토벌대 셋째는 난리 피해서 산에 가 얼어죽게 되니 천지신명 굽어살피사---'

유세차 어쩌구 유식하게 하면 못 알아듣지만 고사로 하여 축문을 읽으면 모두 알아듣는다. 이튿날 한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소청이 있다. 어제 고사에서 제문을 들으니 꼭 우리집을 두고 말하는 것 같아 할머니랑 밤새 울었다. 우리 큰아들이 공비고 작은 아들은 토벌대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이 동네에 공비 아닌 집이 거의 없다. 도와달라'

'내가 그런 일 도우려 왔다'

그 집 큰아들이 '늙은이를 앞세워 제 아들 잡으려 한다'면서 나에게 이를 갈았다. 그 아버지는 '네 마누라와 늙은이를 걱정해라. 이 부대장을 나무라지 말라. 뜻이 있는 사람이다.'

큰아들이 귀순했다. 환영잔치를 열었다. 동네여자들이 그 잔치집 일을 도와주러 왔다. 딴 집 여자가 그걸 보면서 자기 가족 생각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노인이 또 나를 찾아왔다. '소청이 또 있소' 그래서 30여 공비가족이 다 내려와 귀순했다.

조재천 경찰청장에게 내가 '경찰은 이 일에 절대 간섭말라. 만일 간섭한다면 이들은 경찰 목을 따고 도로 공비가 되어 산에 간다'고 했다.

우리가 임무를 주었다. 공비들을 다 데리고 서울 올라가 남산에 가서 '저기가 중앙청이다' 하고 보여줬다. 그들은 김일성이가 서울을 다 점령한 줄로 알고 부정하였다. 내가 '어디 공비가 있나 한번 봐라'하고 '이들이 맘붙이고 살게 해라'

4.19 나고서 백골데모가 열려 '우린 억울하게 공비로 몰려 죽었다'고 호소했는데 내가 가있던 그 동네 운문산 청도는 그런 소리가 없었다.

전라도는 닭 1마리 가져가서 일을 시작했다. 어느 날 장성군에서 내 차가 닭을 1마리 치었다. 부하한테 새로 한 마리 사와라 시켰다. 그때 군인들 지나가며 민간에 별 짓 다했을 때다. 그런데 내가 소령복 입고 가서 절을 하면서 '내가 닭 1마리를 변상조로 사왔다. 당신네 죽은 닭은 기른 정이 있겠으나 그런 것까지는 변상이 안되니 그건 술안주나 해라.'

명주옷 입은 주인은 아주 오만한 사람이었다. 그 영감이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나가서 3, 4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내 60평생 닭 변상하는 사람도 처음보고 기른 정은 변상 못하니 술이나 먹고 치워달라는 군인 처음 본다. 우리 같이 먹자.'

이 사람들이 동네 방송국이 됐다. 나의 행동은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6개월후 쯤 내가 임무 완성하고 '영감님 안녕히 계쇼. 난 여기 근무 끝나고 이제 딴 부대로 간다. 앞으로는 공비가 와서 영감 죽이고 창자 꺼내 목 졸라 나무에 걸겠지. 당신은 그것도 모르냐.'

그 영감이 '어떻게 하면 좋아.'

내가 '방법이 있다' 하고 공비의 본질, 작전요령, 민심 끌어오는 법 등을 말해주고 '여기를 근거지로 못 삼으면 공비는 딴 데로 간다.'고 했다. 그래도 불안한 영감이 작전국장한테 가서 '여기가 공비 소탕되어 좋아질 만한데 이 사람을 왜 딴 데로 보내느냐' 하니 얼마후 '귀하(박창암)는 공비사항에 관계없이 그 자리에서 임무수행하라'는 전문이 왔다. 닭 1마리에서 시작해 맺은 결말이었다.

1952년 8월부터 제주도에 민심 살피러 시장에 나갔다. 군복 입은 사람이 나타나니까 갑자기 조용해졌다. 고구마와 한라산 모르면 제주도 사람 아니니 상대도 안했다. 민심이 왜 이런가 했다. 그 전에 토벌대가 천지연 정방폭포에 세워놓고 하루 20-30명 토벌했다고 했다. 빨갱이는 있어도 양민도 있었다. 그 끝을 내가 마무리 하러 갔다. 나는 장교 30명 사병 50여명, 참모장 군의관을 데리고 가서 정리 기록을 시켰다.

나의 작전계획은 공비 토벌대 다음의 어려운 수습을 맡아하기로 한 것이었다. 여군(귀순한 여자공비를 여군이라고 위장했다-민승기대령의 증언)을 보냈다. '공비로 토벌된 사람네 제삿날 가서 억지로라도 울어라. 군가를 부르느니 울어주는게 좋겠다. 상주는 그럼 혼자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열심히 대민봉사도 하여 민심이 안정되면서 양민과 공비가 분명히 구별되고 우리 특수부대가 아주 무시무시하고 날랜 사람들이란걸 전해들은 공비들이 놀라 모두 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특수부대는 산에 가서 공비처럼 산짐승을 잡아먹고 산사람으로 살며 공비를 추적했다. '밤눈이 밝아져서 밤에도 보이고 냄새나 발자국 흔적을 추적하는데 짐승처럼 예민해졌다. 공비보다 우리 부대원들이 더 날랬다. 공비들이 방향을 잡지 못했다. 너댓달 동안의 그 작전 중 마을엔 한번도 내려오지 않았다. 이들은 결국 103명이 모두 귀순했다. 우리 부대원들은 단 한명의 인명피해도 없이 전원 무사했다.'고 김응엽씨는 회고했다. 4.3사건으로 시작된 제주도 공비토벌의 마지막 단계였다.)

***박창암의 심리전 전술**

내가 만군에서 모택동 군대와 전투했다. 그때 모택동이 원근거지에서 장개석에게 쫓겨나면서 적이 쳐들어오면 물러나고 가면 쳐들어가고 하는 유격전을 겪어 알게 됐다.

장개석군이 노래를 퍼뜨려 '모택동 팔로군은 헌모자 헌옷 헌장비 실탄없는 빈총 거꾸로 맨 엉터리' 하니까 모택동이 '거꾸로 하자' 했다. 아이들 많은 동네에 공작원 1을 보내 우물가에 가서 물사발 얻어먹다가 일부러 깼다. 주민이 '이놈아 남의 사발을 깨다니' 욕했다. 공작원이 얼른 깨뜨린 물사발을 크게 보상했다. 주민은 모택동군이 사발 깬 것은 괘씸하나 변상하는 그 행동이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됐다.

공작원 2는 새벽녘 어느 집 대문간에 가서 누웠다. 주인이 깜짝 놀란다. 군인을 집에 들여 재워주지 않으면 군부대가 와서 작살을 내니까. 그러나 공작원이 '미안하다. 지나가다 눈 잠깐 붙인게 그렇게 됐다. 우리 아버지도 요 아래서 농사짓는다'고 순하게 나왔다.

사람들이 '그 군인들 헌옷은 입었는데 참 착하다. 그놈들 팔로군이란다.' 선전이 전파되었다. '그런 군대만 보면 좋겠다' 일본군에 약탈강도 그런 것들에 시달리던 주민들은 동네에 거지부대 팔로군이 행군해 가는 걸 보면 '그 착한 군인이구나' 했다. 팔로군은 주민에게 '우리 군부대 인원이 몇 백명인데 돼지가 몇근 필요하다. 그 값으로 돈 얼마 주겠다' 하였다. 그 행동이 일본군이나 장개석군과 다르다 하여 주민들은 팔로군을 법이 선 군대로 선전하게 됐다.

내가 전라 경상 제주도에 가서 한 작전은 모택동의 팔로군 전술을 배워 쓴 것이고 부대원들에게 민폐는 결코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철저한 법으로 삼게 했다.

***공비토벌 그 이후**

지금도 못 박히는 것은 마음 좀 여유있게 썼으면 살릴 수도 있었는 사람 못 살렸다는 것이다. 전라도 유지 집에 내 동생들이 하숙했는데 그 집 딸이 공비두목 이북 책임자의 짝이었다. 그 남자는 사형 집행되고 그 여자는 5. 16후 다시 수감됐다. 가족이 내게 구명운동을 했다. 그걸 내가 해결해 주었어야 하는데 내가 나서기가 적당치 않았다. 그 아버지가 딸 때문에 충격받아 죽었다. 여자의 남동생이 찾아와 '우리 기대를 저버렸다' 고 원망했다. 인명은 정해진 게 있나 보다.

***예쁜 여자가 결혼해 낳은 아이가 커서 자기 아버지한테서 얼마전 들은 얘기중에 내 얘기가 있었다**

6.25 전투중에 한 부대에서 '박창암 동생 잡았다. 그 여동생이 이북에 있다' 해서 가보니 여자가 있는데 분명 내 동생은 아니었다. 잡힌 그 여자가 '우리 오빠가 국군 박창암이다' 해서 내게 연락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6.25 직전 작전상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그때의 간호원이었다. '잡힌 그 여자에게 우리 부대를 간호하게 하면 어떠냐' 해서 살렸다. 그때 잡힌 여자는 우리보고 '몸 다치지 말고 제발 곱게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렇게 했다.

그후 그 아들이 성심여대 재직했는데 나를 만나 그 어머니 얘기를 전한 것이었다. 그들은 나를 하늘에서 솟아난 존재로 알았다. 그 어려운 시대의 얘기를 그 여성은 자기 시어머니에게도 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은 우리 장모도 나를 믿었다. 내가 그래도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다.

***미인계**

특수부대 일에 관여하는 미국인 고문관 달래는 방법이 미인계 밖에 없었다. 대구 시내의 양식집에 가서 학생 노는 아가씨들 몇을 소개받았다. 그들이 나보고

'아저씨 왜 우릴 점심은 사주면서 따로 만나자고는 말 안 하는 거야'

'사실 내가 말 못했다. 이런 저런 (고문관을 달래는 게) 목적인데 너희들 팔자를 망칠까봐서 말못하고 있는거다'

그 아가씨들이 말하길 '기왕 버린 몸인데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

내가 그 아가씨들에게 20만원 주면서 '이것 밖에 보답할 수 있는게 없다' 했다. 그 아가씨들이 하루는 나보고 '놀러와라' 했다. 그 말에 내가 정색을 하고

'내가 남자고 너희들 심정 모르는 바 아니나 이런 일 하는데 내가 그런 생각하거나 너희들 정신자세가 그러면 안됐다. 작은 일이라도 김빠지는 일이 있으면 안된다'

처가는 대구 부자(전 체육인이고 학자인 이상백의 조카 이겸희여사가 박창암의 아내이다)로서 피난중 그 집 사랑채에 군이 전부 묵고 있었다. 집안에 고문관을 위한 잔치를 준비했다. 한복도 만들어 '당신 한국 왔으면 한복도 입어봐야 한국것 알지'하고 갈아 입혔다. 1주일 후 그렇게 한 효과가 나서 미군이 부대에 가했던 제재가 풀렸다.

그후 고문관이 김창룡 등 정보관계자가 다 모인데서 '박창암 멋있다' 내 얘기만 하니 그들이 나보고 '당신 어떻게 그 미국인 고문관 삶았소?' 궁금해 물었다.

어느 날 처가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는데 미국 공군과 같이 오던 여성이 나를 보고 반가와했다. 그녀는 같이 가는 미 공군에게 '나 이화여대 다닐 때 교수님이다' 하니 미 공군이 '아이고 장인어른-' 하면서 반색하고 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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