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과 혁명검찰 시절
<인물 탐구> 군인 박창암 <중>
2003.12.12 08:42:00
5.16과 혁명검찰 시절
***2. 5'16과 혁명검찰 시절**

朴蒼巖은 1961년 5.16 혁명주체의 한사람이었다.

인사동 다정이라는 음식점에서 박창암 등 대령 몇이 모여 조용히 먹으니 주인이 '매우 점잖다'고 좋아하며 중국요리도 시켜다 주었다. 1961년 5.16군사혁명을 의논하던 중이었다.

<사진 4> 1960년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을 맡은 박창암(오른쪽에서 세번째). 5.16군사혁명 직전의 사진.

'5.16정도라면 철학이 있어야 했다.' 장인 이상오(이상백의 형)와 자주 의논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이던 그는 육군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혁명에 가담했다. 이때 박대령의 요청으로 혁명에 가담하게 된 홍성철중령의 회고가 '창암'지에 실려있다.

국가재건 최고회의의 혁명검찰부장을 맡아 부정축재자 척결 등에 진력했다. 1962년 8월 10일까지가 혁명검찰부장의 정해진 임기였는데 그해 6월 14일자로 임무를 당겨 끝내고 남은 예산을 모두 반납하는 강직한 면모를 보였다. '정부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그 당시 큰 화제가 되었는데 지금 아무리 예산처에 가서 찾아보아도 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고 처남 이공희씨는 매우 서운해한다. 굉장히 많은 금액이었다고 한다.

그는 부를 축적하지도 않았다. 혁명검찰 직원들이 '시유지를 불하받아 집 없는 직원들에게 분양해 달라'는 건의를 했더니 건의한 사람을 당장 붙잡아 영창에 넣어버렸다.

<사진 8. 1961년 기자회견하는 혁명검찰부장 박창암대령

***박창암 혁명검찰부장과 언론; 정광모 전 한국일보 기자의 회고**

박창암 대령이 국가재건 최고회의 기구의 하나인 혁명검찰부장이 되었다. 이 당시를 원로 언론인들은 '살벌했다'고 회고한다. 그때 연합신문 기자로 혁명재판소를 출입하던 정광모씨의 회고는 혁명재판소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기록이다.

1961년 5.16 나고 바로 혁명재판소(혁명검찰)가 만들어졌다. 박창암대령이 혁명검찰부장이 되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체격이 헌출하고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 40세의 군인이었다. 혁명검찰에 서울지검 검사들이 파견되어 그 도움을 받아 운영하는데 일종의 군법재판소였다. 필동에 혁명검찰 건물이 있었다.

혁검엔 일이 많았다. 4.19때 문제있던 사람들을 5.16때 되받아서 들여보내고 내보내고 419 부정선거한 사람들도 다 잡혀 들어왔다.

나는 그때 연합신문 사회부의 재판소 출입기자였다. 혁명검찰에서 매일 재판을 해서 기사가 많이 나왔다. 발포 책임자, 부정선거 책임자가 잡혀와 높은 층에서 푹 떨어져 죽기도 하고 최인규 곽영주 홍진기 최백근 등 피고들이 사형되나 안되나 하는게 기사거리였다.

하루는 박창암 혁명재판소장이 머리를 박박깎고 전투복 같은 것 입고 가슴에 수류탄을 줄줄이 매달고 권총차고 사무실에 나왔다. 그때 무서웠다. 기자들이 막 뛰어들어와 '야 박창암이 완전무장하고 나왔다. 핀만 빼면 수류탄 터진다. 난리 날래나 보다' 수근수근하면서 잘 관찰하고 신문사에 돌아갔다.

그날 연합신문 1면 정치면 박스 가십성 기사난에 혁명재판소의 삼엄한 분위기, 뭐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 삭발의 결의 그런 내용을 기사화했다. 꼬집은건 지 칭찬인지 모호하게 끝맺었는데 그게 정치가십이다.

낮에 신문 나와서 박소장이 그걸 보았다. 보고는 파견 검사에게 그 기사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문인구 부장검사가 정광모 내가 쓴 것 뻔히 아니까 '기사 잘썼는데요, 소장님을 막 치켜올렸네요' 라고 했다. 그러고는 내게 '너는 죽었다. 왜 그런 것 썼냐' 했다.

오후 3,4시 편집국에 '정광모 바꿔라' 전화가 왔다. '어딥니까?' '혁명재판소다' 사람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바꿔줬다. 나도 떨렸다. 원경수 편집국장이 그 전화 바꿔주면서 '야 광모야 잠깐 기다려. 내가 속샤쓰 사올께'-감옥가려면 속내의를 입으니까-했다. 전화로 다짜고짜 '곧 잡아넣을테니 기다려' 했다.

내가 재판소 같이 출입하는 신 기자에게 '너도 동행하자'했다. 옛 중앙도서관 자리의 연합신문사앞에 직-하면서 찦차가 와닿고 군인이 오더니 척 경례를 붙이면서 차문 열어주는데 박창암이 뒷자리에 앉아있다가 '타!'했다. 편집국 모든 기자들이 다 나와 배웅했다.

차가 소리내며 돌더니 명동 시공관 옆 골목의 明石이란 일식집에 갔다.

'올라가!'

이층에 방을 잡아놨다. 우리 둘이는 얼굴이 노래져 가지고 앉아있는데 박창암은 이것저것 다 풀어놓고 무장해제 하더니 '먹읍시다!'하는 것이었다. 그가 알아챘다.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는데 많은 사람들이 좋은 기사라니까 믿기로 했어!' 그러니 마음놓고 먹으라고. 난 먹는 것 고만두고 석방이나 시켜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집 오뎅이 아주 맛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배나 채우자.

다 먹고나니 차에 타라하더니 또 왱하고 갔다. 연합신문 앞이었다. '들어가쇼!' 돌아가는 자동차 뒤에다 대고 내가 절했다.

기자실에서는 '정광모가 이젠 떼들어간다, 아니다.' 별 소문이 다 났다. 다음날 내가 어깨를 재고 들어가니 문인구 부장검사가 '너 죽었다 살아났지?' 물었다. '왜, 네가 알아봤어?'

내가 박창암 소장 방에 들어가 '어제 잘 먹었습니다' 그랬다. 그후 그 방에 들어가면 얘기가 나오는데 연대, 사람, 사건, 고사를 망라한 역사 얘기, 삼국지 얘기가 굉장했다. 내가 박창암에게 치도곤 안 맞았다는 것 증명할 겸 그 방을 자주 드나드니 특종도 많이 나왔다. 다른 기자들이 시샘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후(1961년) 바로 한국일보 정치부로 옮겼다. 사회부에 계속 있었으면 혁검과 계속 일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들은 얘기중에는 그가 6.25 전후해서 이북 가 특수공작한 얘기, 게릴라전으로 발가락이 다 상했단 얘기 등이 있었다. 공산당에 대한 증오와 빨갱이 소탕한 일들을 많이 들었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그는 기가 막힌 투사였고 실제로 6.25 한국전에 제일 많이 전투를 치른 군인이었다. 그는 혁명주체세력이면서 누구처럼 부를 모으지도 않았다. 화랑무공훈장은 주어졌지만 그런 사람에게 예편후 군인 연금이 나오지 않았고 아무 보상도 없었다. 내가 보고 들은 군인치고 박창암 장군같이 그렇게 대단한 군인은 없다. 그는 철저하고 목숨을 건 게릴라전의 상징이었다. 그는 전투 안 해 본 군인은 군인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한국일보 정치부에서 비행장에서 내리는 반혁명사건 관련자들을 헌병들이 잡아 집어넣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내 특종기사였다. 박정희가 잡아넣은 김동하 이주일 박창암- 나는 반혁명자체가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고 있다. 혁명 주체세력들을 많이 제거해야 되니 박창암을 그렇게 쳐버린 것이었다.

그 후 자신이 발행한 월간 <자유>에 권두언과 여러가지 비판기사를 쓰고 있었다. 그 책이 잘 나갈 리도 없는데 그 돈을 어떻게 대나 걱정스러웠다. 최근에 그와 다시 연락이 되어 점심을 함께 하기로 했는데 이루지 못하고 가버렸다.

<사진 6. 1963년 5월 반혁명사건의 공판정에서 반혁명혐의를 부인하는 박창암.

***박창암의 회고 1. 신문사 사장과 변호사**

5.16이 나고 한 신문사 사장이 혁명 재판에 회부됐다. 그 재판때 변호사가 의뢰인인 신문사 사장에게 '당신 인격에 감복돼 판사도 판결 못 내린다. 검사도 말못할 것이고 거기에 변호사인 내 말까지 덧붙여지면 당신은 사형이 아니라 무기 아니면 20년까지 받을 수 있다' 고 했다.

내가 그 변호사가 하는 말을 비밀리에 들었다. 어이가 없어 내가 그 변호사를 불러 '당신 의뢰인한테 공갈하는거냐. 변호사가 이래도 되나. 당장 출입금지 시키겠으니 시말서 써라'했다. 그랬더니 그 변호사가 곧 시말서를 쓰는데 그 꼴이 하도 비루하여 내가 '이놈아 쓰랜다고 쓰는 변호사가 어디 있냐-' 하고 그 가 쓴 시말서를 찢어버렸다.

***2. 김용식 검사**

내가 있던 중학동 하숙집은 60넘은 깨끗한 할머니가 운영했다. 하루는 내가 야근하고 아침에 들어오는데 식모가 밥상을 차려들고 마당을 건너가다가 나를 보고는 놀라 떨어뜨릴뻔했다. '뭐냐?'하니 '할아버지 진지상이요' 하였다. '이 집에 할아버지가 없는데 무슨 소리냐?' 내가 하숙집 할머니를 내 방에 오래서 불러 신문하니 민주당 특검부장 김용식이었다. 할머니가 '이실직고 하나이다' 하고 말하는데 내가 하숙하던 바로 그 방에 전 정권 민주당의 특검부장이 하숙하였었다. 혁명검찰부장인 나 몰래 병보석으로 나왔는데 식사를 이 집에서 대주고 있었다.

내가 할머니한테 '그 사람을 사랑하냐?' 물으니 '아니다.' 고 했다. '그럼 왜 그렇게 헌신적인가?'

'그 사람은 대구에서 고법 원장하면서 자유당 올빼미 표를 적발한 사람이다. 아들은 군의관인데 과로로 죽고 23살난 며느리는 아이를 데리고 수절하고 있어 그래서 고결한 집안이라 헌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국장을 대동하고 김용식을 찾았다. '죄목이 왜 공금횡령이냐?' 물었다. '돈을 왜 혼자서 400-500 만원이나 갖다 썼냐? '

김용식검사 답하기를 '낮에는 특검검사, 밤에는 변호사'로 같은 또래가 와서 뭐 조사해 주게 하면 이 사람 혼자 여기 저기 다니며 일하고 있었다. 검사가 그 정도로 열심이니까 경리도 자리에 붙어있지 않고 돌아다니며 돈을 구해왔다.

'왜 영수증이 없냐?' 했더니 '영수증을 할 수가 없었다. 점잖은 사람한테 영수증 쓰라면 정보원하라는 증거물로 여겨질테니.' 라고 했다. '일 끝난 뒤 어쩔 수 없이 내가 책임질 각오로 했다'고 말했다.

내가 박정희한테 가서 '불기소 처분합시다. 곧은 사람을 처분하면 인정의 씨를 말립니다'고 주장했다.

그랬는데 그 영감이 자결했다. '굴비'라는 영화를 보고 난 그 영감이 회중시계를 꺼내 '이거 처분해 장례 치러달라' 했단다. 남을 도와주는 것도 철학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그때 기밀비 몇백만원씩 쓸 수 있었는데 내가 머리가 나뻐 손을 못썼다. 그를 살렸으면 좋았을걸.

***3. 한일회담 전야**

한일회담에 앞서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1억5천만불 차관준다는 걸 박정희가 결제했다. 그 기안은 나와 동경대학 나온 이종민이 같이 해서 박정희의 허가를 얻었다. 그당시 백만불 수출도 못할 때였다. 그 차관은 원양어업해서 현지 가공한 식품을 팔아 3년 안에 갚기로 했다. 그때 김종필은 외유중이었다.

1961년도 아시아 연감에 적신호가 나와 '한국, 프랑스, 이태리 3국동맹 때문에 일본이 망했다'고 아우성이었다. 외유갔던 김종필이 들어오면서 오히라 메모를 제시했다. 거기서 일이 깨지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이태리에 압력을 넣어 '계약고를 반으로 줄이자 - 얼마후 다시 반의 반으로 줄이자' 하니 프랑스와 이태리가 화가 나서 '없던 걸로 하자.'고 해버렸다.

***4. 반혁명사건**

내가 박정희에게 민정이양하고 원대복귀하자고 주장한 것 때문에 박정희와 등지게 되고 김종필과도 사이가 나뻐 사면초가의 입장이 되었다. 그후 반혁명 모의했다고 잡혀갔다. 1963년 1월 23일, 이태리 프랑스대사와 파티를 하던 날이었다. 대사관 사람들이 '증언해 주겠다'고 했다.

난 촌놈이지만 자존심은 있었다. 그들에게 '난 금방 죽을거지만 이건 국가문제이니 우리끼리 하겠다' 하니 대사들이 감동했다. 12년형을 받았는데 1년 후 실형이 면제됐다.

(3공화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63년 3월 김동하 해병대중장, 박임항 중장, 박준호 대령등 등 주로 함경도 출신 장군 19명과 함께 박창암대령도 반혁명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런데 정부가 이들이 모여 반혁명을 모의했다고 발표한 날짜에 모이지도 않은 사람들을 상대로 '도저히 재판을 진행 할 수가 없다'고 재판장이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이용택 당시 중정 수사국장은 지난 11월 24일 '내가 이들을 모두 다 알았다. 이들이 들어가 있는 교도소에 일일이 찾아가 만나서 협상을 했다. 박정희의 체면을 봐서 일단 재판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바로 사면한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재판을 열 수 있었다. 그래서 협상재판이라는 별명이 나왔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3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된 선거가 끝난 뒤 약속대로 형이 면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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