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없었다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17>
2005.07.19 19:14:00
백제는 없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나라 도시는 공주와 부여입니다. 경주는 너무 상업화된 느낌이 있습니다. 물론 국제화 시대엔 그래야겠죠.

제가 대학 다닐 때 대전의 이모님 댁에 놀러 갔다가 그 날 오후에 공주로 홀로 여행을 갔습니다. 특별한 생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당시 제게는 저도 알지 못하는 '역마살(驛馬煞)'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여기저기를 하염없이 돌아다녔습니다.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시골 버스로, 때로는 길 가는 트럭을 빌려 타기도 하고, 때로는 싸구려 완행 기차로 말입니다(요즘 같으면 몽골의 초원이나 다녀왔을 텐데 말입니다. 그땐 해외로 나가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5월의 저녁**

아름다운 곰나루와 철교를 지나고 공주에 도착하니 해거름이 몰려왔습니다. 곰나루의 슬픈 전설을 뒤로 하고 공주교육대학 근처 어떤 카페에 들어갔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창가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창밖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저 앞에는 꿈에나 그리던 풍경들이 펼쳐졌습니다.

넓게 펼쳐진 모래밭,
굽이쳐 흐르는 금강,
달빛으로 반짝이는 모래와 금빛 물결
강물에 흘러가는 달,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오월의 싱그런 바람 …

갑자기 저는 마치 꿈길을 걷듯이 여기저기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들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막걸리 술잔을 기울일수록 그 풍경은 더 이상 정겨울 수가 없었습니다. 제 몸은 꿈 속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마치 제 '마음의 고향(故鄕)'을 찾은 듯 마음은 끝없이 금강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두운 카페 안으로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달무리 지는 창문을 열면 싱그런 바람,
꽃내음 속에 춤추던 여인(女人), 아름다워라,
황홀한 달빛, 꿈에 어리면
다시 또 보이네 축제의 밤"

(송창식ㆍ윤형주 : 축제의 밤)

이 노래가 넘쳐흘러 금강변 위로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이후 저는 이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림 ①] 금강의 아름다운 풍경들

밤이 늦도록 홀로 '공주의 밤'에 흠뻑 취해 있다가 카페가 문을 닫을 즈음 나와서 여관에서 자고 다시 부여로 떠났고, 곧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공주의 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축제의 밤'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공주'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좀 흐른 뒤 다시 공주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카페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 카페를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때 그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다녔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결국 그 카페는 찾지 못하고 그냥 공주 시내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아름다운 '공주의 밤'을 찾아 헤매었지만 다시는 그 카페를 찾지 못했습니다.

'공주의 밤'은 제 가슴 깊은 곳에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꿈으로 남아있습니다.

***(1) 알 수 없는 나라**

한반도와 일본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비밀스럽고 이해하기 힘든 역사가 바로 백제입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백제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마치 암호를 해독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백제는 지난 천 수백 년간 베일에 쌓여있는 수수께끼의 나라입니다. 백제의 비밀을 풀면 일본의 비밀이 풀리고, 일본의 비밀이 풀리면 삼국의 역사의 비밀이 풀리게 됩니다.

지금부터 저와 함께 백제의 비밀을 찾아 기나긴 여행을 떠나보도록 합시다. 천 수백 년 동안 풀지 못한 역사의 수수께끼를 풀어낼 자신은 없지만 저는 다만 쥬신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백제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볼 예정입니다.

먼저 아래의 글을 봅시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고등학교용 국사책에 나온 백제에 관한 서술입니다.

"백제는 한강 유역의 토착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B. C. 18),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유이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한의 군현을 막아내면서 성장하였다.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무렵 백제는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입하는 등 지배체제를 정비하여 중앙집권 국가의 토대를 형성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국사』(교육인적자원부)]"

위의 글은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을 보면 백제의 지배계층을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이라고 하고 있군요. 이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바탕을 두고서 쓴 기록인데, 제가 보기엔 좀 다릅니다. 이 같은 견해로 말미암아 백제의 역사가 더욱 베일에 가려지게 된 것 같군요. 저는 앞으로 여러 장에 걸쳐서 이 점을 규명해갈 것입니다.

이제 조금 수준을 높여 한국에서 유력하게 사용되고 있는 대학 및 일반인용 국사책 안에 들어있는 백제에 대한 내용을 한번 봅시다.

"마한의 한 군장국가인 백제국(百濟國)으로부터 발전하여 기원 전후에 초기국가를 형성한 백제는 3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대국가를 이룩하였다. … 3세기 중엽 고이왕(古爾王 : 234~286) 대에 이르면 대외적으로 정복사업을 활발히 하고 대내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 … 이에 백제는 고이왕 때에 이르러 광대한 정복국가를 이루고 고대국가 체제를 완비하였던 것이다. 『주서(周書)』나 『수서(隋書)』에서 백제의 시조를 구이(仇台)라고 하는데 이 구이는 바로 이 고이(古爾)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이왕대에 백제의 시조적인 발전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변태섭, 『한국사통론』(삼영사 : 2001) 79쪽]."

이 글은 일종의 수험서요 교과서류에 해당하는 것으로 백제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 성과를 모아서 서술한 것입니다. 백제가 3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고대국가를 갖추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3세기 이전까지 백제는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한 채 있다가 고이왕 대에 이르러 전반적인 체제 정비가 일어났군요.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특이한 인물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구이(仇台), 또는 구태(仇台)라는 분입니다. 이 분이 초기 백제의 비밀을 풀어갈 수 있는 열쇠를 쥔 분 같군요.

그런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건국 전후로 그 시조였던 온조왕(?~28)이 백제의 틀을 다 잡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흥미 있는 얘기지만 북한의 경우에는 백제에 대한 부분이 철저히 『삼국사기』의 입장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백제의 건국전설에 의하면 고구려 왕실의 시조인 고주몽의 아들 온조가 10명의 신하를 거느리고 남쪽 마한 땅으로 가서 기원전 18년에 위례성(서울 북한산)에서 백제를 세웠다고 전한다. 이 전설은 고구려의 한 봉건 세력이 남하하여 오늘의 서울지역을 정복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마한왕이 온조에게 100리의 땅을 떼어주었다고 하는 전설도 온조 집단이 군사적으로 마한의 땅을 정복한 과정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 백제는 마한을 정복하였으나 즉시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지 못하였다. 적지 않은 소국들이 영주적 존재로서 분권적 세력을 유지하였다 … 1세기 중엽에 이르러 백제의 국가체제는 일정하게 갖추어졌다[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조선통사(상)』(오월 : 1988) 88쪽 94~95쪽]"

북한의 기록은 사실상 북한 정권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고구려에 대해서는 매우 상세히 기술되어있고 위의 기록만으로 보면 고구려의 일파가 백제를 건국한 듯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유난히 "고구려의 한 일파가 서울 지역을 정복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듯이 느껴지는군요. 마치 한국전쟁(1950) 당시 북한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듯이 말입니다. 상당히 정치적이군요. 어쨌든 백제에 대한 부분은 철저히 『삼국사기』를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 남북한 학자들의 입장은 상당히 통일된 듯이 보입니다.

글쎄요. 저는 백제가 고구려계라고 본다는 것은 백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논리는 주로 『삼국사기』에 따른 것인데요.

『삼국사기』는 어떨까요? 딴 부분은 제쳐두고 백제 부분만을 한번 살펴봅시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왕의 아버지는 주몽이시며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로 왔는데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라 둘째 딸을 그에게 주어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 분들 사이에 자손이 바로 비류와 온조라는 것이죠. 온조는 후일 주몽이 북부여에서 낳은 아들인 유리가 오자 남하하여 오늘날 한강 유역에 자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온조왕은 나라를 세운 후 동명왕 사당을 건립합니다. 온조왕은 말갈병들의 침입을 물리치고 동으로는 춘천, 북으로는 예성강, 서로는 황해, 남으로는 안성까지 국토를 확장하고 마한을 멸망시켰다고 합니다.

이상이 『삼국사기』「백제본기」온조왕편의 대체적인 내용입니다. 그런데 잘 이해가 안 되지요?

온조왕은 요동, 또는 만주 지역에서 이동해온 사람들일 텐데 오자마자 이 나라, 저 나라를 정복하고 당시 강력한 세력이었던 마한(馬韓) 세력을 멸망시켰다는 것이 말입니다. 무슨 항공모함에 폭격기나 탱크가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같은 책 『삼국사기』에 보면 근초고왕(?~375)은 무려 3백년 후의 임금인데 그의 업적에는 또 마한의 소국(小國)들을 점령하여 현재의 전라남도 해안 지방까지 영역을 넓혔다고 합니다. 그러면 온조왕이 멸망시킨 마한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뿐만 아니라 진수의『삼국지』(「동이전」)에는 마한의 54개국 가운데 백제국(伯濟國)이 보이는데 이 백제는 마한연맹의 일원으로 그저 평범한 작은 나라에 불과합니다. 요즘 개념으로 치면 거의 도시국가 수준이죠. 당시 마한 연맹의 맹주국은 목지국(目支國)이었으므로 백제란 그저 그 연맹에 속하는 작은 50여개의 국가 가운데 하나인 평범한 나라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작은 나라가 오자마자 맹주국을 멸망시켰다니 사리에 맞지 않지요. 그러면 도대체 온조 임금은 무엇을 멸망시킨 것인지 알 수가 없군요.

이와 같이 『삼국사기』에 나타난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삼국 기록들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를 않고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346~375) 이전까지의 내용들이 뒤죽박죽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의 경우에도 역사가 20여 년이 도망가고 없습니다. 즉 『삼국사기』의 백제 본기를 보면 근초고왕은 왕 2년 기록이 있고 바로 왕 21년이 나타납니다. 즉 19년이 어디로 가버린 것이죠. 재미있는 것은 이 때 왜왕이 신라에 결혼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도처에 나옵니다. 이 시기의 백제의 역사는 기록에 없지요.

그런데 이 시기 일본에서는 매우 활발한 정복전쟁이 시작됩니다. 즉 4세기에서 7세기 초까지의 시대를 고고학상으로는 고분시대(古墳時代)라 부르고, 문헌학상으로는 야마토(大和)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대에는 이상하게도 세토나이까이(瀨戶內海) 내의 각 지역에 고분이 출현하고 그것은 이후 전국적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르지요. 이상하죠?

백제의 역사, 정말 알 수 없군요.

***(2) 『삼국사기』퍼즐놀이**

『삼국사기』에 나타난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삼국 기록들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를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초기 백제는 만주에서 내려온 작은 세력이 한강 유역에 정착했다가 그 주변의 일부 땅을 차지한 정도인 것 같습니다. 군사장비면에서는 주변 세력에 비하여 월등히 우세했을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현재의 전라북도나 충청북도까지 확장되어 당시 마한의 맹주세력들을 격파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실제 그러했다면 이것을 증명할 다른 기록이 있어야 하고 그 이후의 전개도 이에 따라야할 텐데 그런 근거는 없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나타나는 이상한 기록들을 중요한 것만 한번 모아 봅시다.

①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처음부터 등장하여 백제와 대등하게 여러 가지를 겨루는 장면들이 자주 나타납니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뽑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신라(新羅)는 사로·서라벌·계림 등으로 불리어지다가 307년 신라 15대 기림왕 때에 이르러 신라를 국호로 삼기 시작했으며 신라가 국호로 확정된 것은 지증왕 4년(503년)의 일입니다.

3세기 후반 편찬된 『삼국지』에도 신라는 없습니다. 『삼국지』의 진한(辰韓) 부분에서는 "처음에는 여섯 나라가 있었고 차츰 나눠 12개 나라가 되었다."고 하고 변진(弁辰)부분에서는 "변진 또한 12 나라가 있으며 도성 이외에 작은 읍이 있고 큰 나라는 신지(臣智)라고 하였다. 변한·진한을 합하면 24개국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많은 소국들 가운데 하나가 사로국(斯盧國), 즉 후에 신라입니다. 그런데 큰 나라는 4천~5천호, 작은 나라는 6백~7백호라고 합니다. 설령 신라가 큰 나라라고 해도 4천~5천호로 최대로 잡아도 인구는 4만~5만을 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3세기 초까지도 초기 신라는 실체도 없는 미미한 수준의 촌락공동체 수준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라가 지나치게 일찍부터 대국처럼 묘사되어 백제를 공격하는 장면들이 여러 부분에서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신라는 경주 부근에 있는 일개 촌락, 또는 잘해야 도시국가에 불과한데 한강 유역에 있는 백제라는 소국과 다투려 하면 얼마나 많은 소국을 통과해야 하겠습니까? 말이 안 되지요.

② 백제의 온조왕 10년 겨울 10월에 말갈이 북쪽경계를 침범하여 노략질을 하니 왕은 군사 2백 명을 보내어 곤미천(昆彌川)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도 알기 어렵지요. 온조왕 10년이면 『삼국사기』대로 하자면 B. C. 8년경으로 예수님이 탄생하신 시기에 해당되는데 이 때는 말갈이라는 말이 없었거든요.

말갈은 물길·숙신 등에서 나온 말이죠. 즉 숙신이라는 명칭은 554년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었고 물길(勿吉)이라는 명칭은 572년까지 사용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563년부터 말갈(靺鞨)이라는 명칭이 나타납니다.[북한 사회과학원, 『발해국과 말갈족』(중심 : 2001)]. 대체로 5세기 경 물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종족이 사서에 나타나고 숙신은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물길과 말갈로 불려집니다. 그런데 도대체 기원전(B. C.)에 나타난 말갈의 실체는 누구입니까?

그런데도 당시 백제의 신하는 "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 자주 강토를 침략한다(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侵軼彊境 :「百濟本紀」 第一)"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갈은 현재의 황해도 지역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낙랑이 동쪽에 있다면 전혀 이해가 안 됩니다. 백제를 한강 유역이라고 본다면 낙랑이 현재의 강원도 춘천이나 원주에 있다는 말입니까? 이럴 경우 백제는 만주에 있지 않고는 가능한 말이 아니지요.

저는 말갈에 대해서 이미 고구려의 지방민과 요동·만주·한반도 중북부에 광범위하게 거주한 민족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쥬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지요. 그렇게 보면 이 기사도 이해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말갈이라는 말이 이 시기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문제지요.

③ 백제의 초고왕(166~214) 2년, 즉 168년에 신라왕이 일길찬 흥선(興宣)을 보내어 군사 2만 명으로 백제의 성을 침범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당시 2만 명을 동원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됩니다. 더구나 기록에는 "신라왕도 정예기병(精騎) 8천명을 거느리고 한수로 달려왔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위나라의 침공에 대해 고구려가 총동원한 병력이 겨우 2만여 명이 됩니다. 이 때가 서기 246년경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 보다 1백 년 전에 인구 4만도 채 안 될 미미한 촌락공동체 수준에서 2만 명을 동원합니까? 더구나 기병 8천 명이라는 것은 엄청난 수치입니다. 일반적으로 병력이 수십만에 달해도 기병은 겨우 5천 필에서 1만 필 이하인데 허약한 시골 군대가 8천여 정예기병과 2만 명의 군대를 동원했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죠(김운회,『삼국지 바로읽기』상 '전쟁의 발견' 참고).

④ 책계왕(責稽王 : 286~298) 13년, 즉 서기 299년에 한(漢)나라와 맥인(貊人)들이 함께 내습하여 침범하였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한나라가 멸망한 지도 오래되었는데 한나라가 나오고 있죠. 그렇다면 한(漢)이라는 말을 중국인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했더라도 문제지요. 왜냐하면 중국인들이 나타나려면 고구려를 지나와야 하고 그 길이 얼마나 멉니까? 설령 한족이 낙랑이라든가 일부 중국인을 의미한다 해도 맥인의 정체가 또 문제입니다. 이 맥인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지요. 그리고 통상 맥인이라면 주로 고구려 지방의 사람들을 부를 수도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백제의 영역이 반도에 있지 않았다는 말이 되겠지요.

어떤가요? 도무지 정신이 없지요. 오히려 백제가 만주에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만 들게 합니다. 만주에 백제가 있었다(?)는 부분은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일단은 넘어갑시다.

그렇다면 백제와 연계된 신라의 기록들은 어떨까요?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 초기 신라사(新羅史)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을 일단 간단하게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① 박혁거세 19년(B. C. 38년)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들어 항복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신라라는 나라도 제대로 없는 상태에 가야의 제국들이 누구에게 항복을 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지요.

② 탈해이사금 20년(77년) 9월에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쳐 와산성(蛙山城)을 도로 빼앗고 백제에서 그 동안 와서 살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와산성이 충북 보은(報恩)입니다. 경주 부근의 촌락에 가까운 소국이 충청도까지 갔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왜냐하면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경주 주변에 있는 압독국(押督국 : 현재의 경산)이 파사(婆娑)이사금 23년(103년)에 항복했다는 말이 있고 파사이사금 29년(109년)에 다벌국(多伐國 : 대구로 추정)이 신라에 병합되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리고 조분(助賁) 이사금 6년(237년) 골벌국(骨伐國 : 현재의 영천)이 신라에 항복합니다.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기록입니다.

[그림 ②] 요동지역과 한반도 지역의 당시 지도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이 사건이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그대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결코 사실일 수가 없는 기록이 「백제본기」「신라본기」에 같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③ 벌휴(伐休) 이사금 5년(189년) 백제가 모산성(母山城 : 충북 진천의 대모산성인듯)을 침입하자 왕이 파진찬 구도(仇道)를 보내어 이를 막게 하였고 다음해 구양(狗壤 : 충북 옥천)에서 백제군을 격파하고 5백여 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이것도 이상합니다. 앞서 본 대로 신라는 영천 지방까지도 진출을 못하고 있는데 말이죠.

④ 내해(奈解) 이사금 27년(223년) 이벌찬 충훤(忠萱)이 우두주(牛頭州)에 침입한 백제군을 막다가 대패하여 단기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우두주가 현재의 강원도 춘천입니다. 영천도 못 간 나라가 어찌 강원도까지 가겠습니까? 더욱이 유례(儒禮) 이사금 14년(298년)에는 이서고국(伊西古國 : 청도)이 금성 (金城 : 경주)을 공격해왔다고 합니다. 이 청도는 영천의 남쪽이고 경주의 바로 옆 서쪽에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도 기림(基臨) 이사금 3년(300년) 3월에는 우두주(강원도 춘천)에 이르렀고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 황해도, 또는 요동)이 항복하였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군요.

이와 같이 『삼국사기』는 단순히 기록의 실수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부분에서 기록이 이상합니다. 특히 흘해(訖解) 이사금 21년(331년)에는 "처음으로 벽골지(碧骨池 : 전북 김제)를 뚫어 열었다(『三國史記』「신라본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차라리 「백제본기」에 들어갈 내용이라고 봐야 할 정도입니다. 한 마디로 뒤죽박죽입니다.

제가 보기에 여기에는 ① 촌락공동체 수준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서술하는 과정에서 뒤섞이거나 ② 있지도 않은 역사를 "신라를 중심으로" 침소봉대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해프닝이거나 ③ 후일 신라 영역이 된 지역과 후일 백제 영역이 된 지역의 일부가 싸운 일을 백제와 신라의 교전(交戰)으로 묘사하는 식으로 과장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삼국사기』는 기록이 상당한 부분에서 왜곡, 또는 재구성되었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는 왜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을까요? 만약 『삼국사기』의 편찬자가 역사 자체를 왜곡하려 했다면 신라사를 짜 맞추는 과정에서 백제사나 고구려사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김부식은 신라를 다소 과장되게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신라가 고구려보다 더 빨리 건국되었다고 믿을 바보는 없지요. 이것은 당시 중국 사서들의 기록과 대조하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면 의도적으로 조작, 또는 왜곡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중간 중간에 나타나는 역사인식이라는 것이 상당히 자주적이어서 아마 사료를 지나치게 국내의 고대 기록에 의존한 결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백제 자체가 왜곡한 기록을 『삼국사기』에서 다시 짜맞추다 보니 역사가 왜곡되거나 조작되었을 수가 있습니다. 백제는 유이민들이 통치했고 그 지배계층도 매우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그런데도 백제 역사에 나타난 왕위계승은 별 탈 없이 수백 년을 지속합니다. 이상하죠?

그러나 이런 식으로 역사가 전부 조작 왜곡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인 듯합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기록을 하되, 고구려ㆍ백제ㆍ신라 부분만을 기록하고 나머지 수십, 수백의 나라들에 대한 기록을 빼버리고 작은 촌락공동체, 또는 읍락국가의 역사를 거대한 국가의 역사처럼 묘사한다는 것이죠. 『삼국사기』에 나타난 백제의 역사는 아무래도 마한 연맹의 일원이었던 소국 백제의 역사를 마치 대국의 역사처럼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죠. 즉 후일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정립(鼎立)한 상태의 영토를 기준으로 신라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모두 그 사건의 주체를 신라로 묶고, 백제 지역의 역사는 그 사건 주체를 백제로 묶었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경우에는 만주 지역에 존재했을 같은 종류의 국가의 역사의 일부가 섞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니 뒤죽박죽일 수밖에요.

일반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삼국사기』의 문제점은 초기 기사에 관한 부분입니다. 특히 『삼국사기』의 연표(年表)에 대한 의문은 이전부터 논란의 대상이었죠. 즉 믿기 힘든 기록들이 자주 나오므로 『삼국사기』초기 기사를 불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체를 3백년 뒤로 미뤄야 된다는 말도 나옵니다.

그러나 저는 일률적으로 시기를 이동시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기록도 있지만 주변의 소국의 기록과 만주, 또는 요동에 있던 기록들이 혼재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죠. 즉 반도에 있는 소국의 역사들이 과장되기는 했지만 전혀 없었던 이야기는 아닐 수 있다는 말이지요.

왜냐고요?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초기 부분은 대단히 엉성하고 촌락공동체적인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 오히려 사실적입니다만 백제에 관한 기록은 시조인 온조왕 때부터 대단히 세련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김부식을 위시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이 그 내용을 모두 조작할 수는 없는 일이니 백제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원 사료들의 내용을 중심으로 편찬했을 것으로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이 백제의 사료들이 요동과 만주 등지에서 복잡하게 뒤섞인 부여계의 왕위 계승과정을 매우 일관성 있게 만들려고 하다 보니 오히려 왜곡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김부식을 위시한 『삼국사기』편찬자들의 책임이 아니라 백제사를 편찬했던 백제의 사가(史家)들의 책임이겠죠?

보세요.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신하가 말하기를) ㉠ 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 자주 강토를 침략합니다. … ㉡ 제가 어제 나가 한수의 남쪽을 이리저리 다녀보니 토지가 기름져서 마땅히 그 곳에 도읍을 정하셔서 길이 안전한 계책을 도모해야 하겠사옵니다.(㉠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侵軼彊境 … ㉡ 予昨巡觀漢水之南 土壤膏腴 宜都於彼 以圖久安之謀計 : 『三國史記』「百濟本紀」 第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은 백제가 요동에 있어야 성립하는 말이고 ㉡은 백제가 반도에 있어야 성립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기록은 아예 틀린 말일 수도 있고 만약 이 기록이 정확하다면 요동의 부여와 반도의 백제의 역사가 뒤섞여있는 상태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동에서 낙랑과 말갈에 의해 심히 시달리므로 한강유역으로 옮겨 가자고 한 말이 이 같이 기록되었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이 말은 동시에 한 신하가 한 말로 기록되어있는데 이 때는 이미 한강 유역에 백제가 터전을 잡고 난 뒤의 이야기죠.

중국의 사서들은 반도 남부에서는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가 등장할 수준이 아니라 소국들이 연맹 형식으로 난립한 수준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이것은 타당한 설명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중국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마차나 수레도 없는 낙후한 문명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지요.

그리스를 보세요 ! 이들은 여러 개의 도시국가로 나눠져 있고 거대한 중앙집권적 국가는 만들지 못하지만 고도의 문명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중개무역으로 강성해진 소위 무역대국들이므로 굳이 하나의 나라로 만들 필요도 없었던 것이지요. 당시의 한반도 남부의 가야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형태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목민들 자체가 중개무역상입니다. 쥬신의 본래 직업이 바로 중개무역상에 대장장이이지요.

그런데 이 같은 의문은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일본의 황실 도서관의 자료들을 모두 공개하면 다 알 수 있을 것으로도 봅니다. 한반도에 국한시켜 본다면 반도 쥬신과 관련된 고대사의 비밀은 사실상 일본이 쥐고 있지요. 그런데 그것들을 모두 공개할 여건이 안 되므로 공개를 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한국의 경우에는 수많은 전란의 피해로 많은 자료들이 소실되었지만 일본은 그 특성상 상당히 많은 자료를 아직도 가지고 있으리라고 봅니다. 특히 근초고왕 때 고흥(高興 : ?~?)이 『서기(書記)』를 편찬했다고 하는데 이 같은 고기록(古記錄)들이 일본에는 분명히 남아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일본서기』가 고흥의 『서기(書記)』와 관련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봅시다. 고구려의 역사서는 『유기(留記)』이고 신라의 역사서는 『국사(國史)』입니다. 그리고 백제의 사서는 그냥 『서기(書記)』입니다. 그런데 유독 일본의 사서만은 『일본서기(日本書記)』라고 합니다.

이 『일본서기』는 두 가지 뉘앙스를 풍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① '일본'이라는 말을 굳이 붙인 것은 오히려 일본의 토착민들이 스스로 편찬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 ② '서기'라는 말로 봐서 백제의 『서기(書記)』와의 관련성이 있다는 점이지요. 즉 고흥의 『서기』가 『일본서기』의 모체가 될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기록과 문서를 중시하는 일본의 특성으로 볼 때 문제의 고흥(高興)의 『서기(書記)』가 일본 황실의 도서관에 분명히 있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보존해야 할 중요한 자료는 여러 본 필사(筆寫)를 해서 보관하며 문서화되지 못하는 자료에 대해서는 사람을 지정하여 외우게 하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일본 황실 측에서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삼국사기』에 자주 나오는 고기(古記), 즉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사용한 원사료(原史料)들은 이병도에 따르면 당시까지 전하던 『해동고기(海東古記)』,『삼한고기(三韓古記)』,『신라고기(新羅古記)』,『신라고서(新羅古書)』등이라고 합니다[이병도 주 『삼국사기』(을유문화사 : 2001) 1쪽]. 그리고 『일본서기』의 주(註)에 나타난 백제의 사료는 『백제기(百濟記)』,『백제신찬(百濟新撰)』,『백제본기(百濟本紀)』등이 있습니다. 아마 이 책들도 김부식이 참고로 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백제 관련 사료들은 일본에는 거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만약 『삼국사기』가 왜곡되었는데도 그것이 김부식의 책임이 아니라고 한다면 원사료 자체가 부족하거나, 왜곡되었겠지요. 『신라고기(新羅古記)』,『신라고서(新羅古書)』등은 이 책들이 지금 전하지 않으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승리자의 기록으로 신라 측에 과장된 기록들이겠지요. 그러나저러나 이런 기록들을 취사선택한 것은 결국 편찬 책임자인 김부식의 책임입니다.

여기서 앞서 인용한 백제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즉 "3세기 중엽 고이왕(古爾王 : 234~286) 대에 … 백제의 시조를 구이(仇台)라고 하는데 이 구이는 바로 이 고이(古爾)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인용문에서 보면 고이왕이 건국시조처럼 묘사가 되어있습니다.

[그림 ③] 백제의 왕과 왕비의 모습

위에서 백제의 시조는 구이(仇台)인데 이 구이는 구태로 읽을 수도 있겠고 일반적으로 이 분을 고이왕으로 보고 있습니다. 구태라는 분은 요동(遼東)의 역사에서는 매우 유명한 분이죠. 그러면 온조와 비류는 또 누구입니까?

백제의 역사,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백제사(百濟史)를 보면 볼수록 의문만 쌓여갑니다. 그러나 이 백제의 역사에는 쥬신 역사의 여러 가지 비밀들이 숨겨져 있을 수 있습니다. 안개 속의 백제 속으로 이제 한번 빠져봅시다.

***(3) 구태, 백제의 시조**

백제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할 만한 견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백제에 대한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두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백제는 산동반도의 제수(濟水)에서 유래하였다는 견해입니다. 중국의 역사학자인 허광악(許光岳)은 『동이원류사』에서 백제는 제수(濟水)로부터 유래했다고 합니다. 이 제수는 산동성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백제의 원류가 중국의 동부 해안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견해는 앞에서 본 예맥의 이동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둘째, 백제(百濟)라는 말의 명칭은 부여와 같은 의미로'태양이 비치는 곳(나라)'이라는 일반적인 대쥬신의 명칭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명칭은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東明王)의 의미와 같죠. 즉'동명'이란 '동쪽의 (해뜨는) 밝은 나라'라는 뜻이니까요.

박시인 선생은 백제가 '밝내(陽州 : 밝은 동네, 또는 태양이 비치는 동네)'를 의미하는 말로 이것은 비류와 온조(溫祚)와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즉 불류(沸流)는 붉[陽], 밝[明]이라는 의미이고 '온'이란 우리말의 백(百)을 의미하는데 이 말의 한자음을 따서 백이라고 부른 것이죠. 그리고 조(祚)는 백제의 제(濟)라는 말을 대신했거나 왕이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것은 패수(浿水), 열수(列水), 백하(白河), 평주(平州) 등과도 같은 의미라고 하는데 이 지역은 대체로 북경 지역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박시인, 『알타이 신화』(청노루 : 1994)].

백제의 건국시조에 대한 사료로는 『삼국사기』(권23, 「백제본기 1」, 시조 온조왕 즉위조), 『삼국유사』(권2, 기이 2, 남부여조),『북사(北史)』(94권 「백제」), 『주서(周書)』(권49, 열전 41, 異域 上, 백제전), 『수서(隋書)』(「백제」)『속일본기(續日本記)』(권40, 환무 천황 9년 가을 7월조)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나라 초기(太宗~高宗)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25사라고 부르는 중국의 정사(正史)들이 대거 편찬되는데 이 때 나온 책들이 『양서(梁書)』『주서(周書)』『수서(隋書)』『남사(南史)』『북사(北史)』등입니다. 이들 가운데서 백제의 건국과 관련된 장소를 기록한 것은 『수서』『북사』입니다. 특히 제가 보기엔 이 『북사』의 기록이 비교적 그 시대에 가깝고 여러 사서의 내용을 좀 더 상세하게 결집하고 있기 때문에 초기 백제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북사(北史)』에는 백제의 건국을 다음과 같이 애기합니다.

"색리(索離)라는 나라의 왕이 지방에 나간 사이에 궁중에 남겨진 시녀가 임신을 하였다. 왕이 돌아와서 그 시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가 말하기를 '왕께서 아니 계시는 동안 달걀만한 양기(陽氣)가 내려와 제 입으로 들어와 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왕은 수상하게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시녀를 살려두기로 했다. 후에 시녀가 아이를 낳자 돼지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입김을 불어 얼어 죽지 않았고, 말 우리에 버리니 말도 입김을 불어 죽지 않았다. 왕은 이 아기가 아마 신이 보낸 것 같다고 여겨 주워 기르고 그 이름을 동명(東明)이라고 하였다. 동명은 자라서 활의 명수가 되었다. 왕은 동명을 두려워하여 다시 죽이려 하자 동명은 남쪽으로 몸을 피하고 도중에 엄체수(淹滯水)라는 강에 이르러 활로 강물을 때리니 물속에서 고기 떼, 자라 떼가 떠올라서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은 그 다리를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북사(北史)』94권 「백제」]."

이상의 기록은 부여ㆍ고구려와 대동소이합니다. 즉 백제의 건국신화가 부여ㆍ고구려ㆍ몽골 등과 일치합니다. 따라서 백제는 쥬신의 전통을 계승한 나라지요. 그런데 그 다음 내용이 다른 경우와는 좀 다릅니다. 계속 봅시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질고 신의가 깊어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 대방(帶方) 땅에 나라를 세우고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얻어 동이들 가운데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처음에 백(百) 집의 사람을 거느리고 강을 건넌[濟] 까닭에 백제(百濟)라고 한다. 동쪽에는 신라와 고구려가 있고 서쪽에는 바다가 있다(『북사(北史)』94권 「백제」)."

그리고 『수서(隋書)』에도 보면 구태는 부여의 시조인 동명의 후손으로 어질고 신망이 두터워 처음으로 대방 땅에 나라를 세운 사람이라고 합니다(『수서(隋書)』「백제」). 『북사』의 내용과 일치합니다.

이들 기록에서는 백제가 구태에 의해 건국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서기 2세기말~3세기 초기인데 말이죠. 이 기록은 앞으로 볼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전체 내용과는 좀 다르다는 점을 일단 알아 둡시다(『삼국사기』에서 백제의 건국 시기는 B. C. 18년이라고 하죠?) 건국 시기가 2백년 이상 차이가 나는군요.

그리고 위의 내용에서 특이한 인물이 나타납니다. 공손도(公孫度 : ? ~ 204)는 나관중『삼국지』에 나오는 공손강(公孫康)의 아버지요, 공손연(公孫淵 : ?~238)의 할아버지인 사람입니다. 공손도의 아버지는 공손연(公孫延)이므로 공손도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아버지와 손자의 이름이 많이 유사합니다. 여러분도 혼동하지 않도록 유의하셔야 합니다.

공손도의 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공손연(公孫延) … ② 공손도(公孫度 : ?~204) … ③ 공손강(公孫康) … 공손공(公孫恭) … ④ 공손연(公孫淵 : ?~238)

즉 기록대로라면 구태는 공손강과는 처남-매부 사이입니다. 공손강은 잘 아시다시피 요동반도를 당시 중국의 중앙정부로부터 사실상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지배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연(燕)나라지요. 이 연나라는 순수한 의미에서 한족(漢族) 정권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일반적으로 공손씨를 한족(漢族) 계열로 보고 있으므로 이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삼국사기』와 『후한서(後漢書)』에는 납득하기 힘든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시죠.

"(태조대왕 69년 : 121년) 왕이 마한과 예맥의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왕의 아들 위구태(尉仇台)가 군사 2만을 이끌고 한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고구려가 대패하였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大祖大王 )."

『후한서』의 기록을 보시죠.

"(118년) 고구려 왕이 마한과 예맥 등의 기병을 이끌고 현도성을 포위하자 부여왕은 왕자 위구태(尉仇台)를 보내어 후한(後漢)의 주군의 군사들과 함께 고구려 군을 격퇴하였다(『後漢書』115권)."

이 때 위구태라는 분이 공손도의 따님과 결혼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공손도(公孫度)가 구태의 장인(丈人)이라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태가 활약한 시기(120~130년 전후)를 고려하면 공손도의 사망연도(204)와는 맞지 않죠. 구태의 장인은 공손도가 아니라 아마 공손도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삼국지』에서 공손도의 아버지는 공손연(公孫延)인데 세력가(勢力家)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공손연(公孫延)은 어떤 일로 연루되어 도망자의 신세였습니다.

따라서 공손도라는 기록은 분명히 잘못되었고 구태왕의 장인은 공손역(公孫역)이라고 봐야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위구태에게 공손역이 딸을 주었다는 말이 없군요. 그러면 다시 미궁에 빠집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현도성을 포위하자 당시의 현도태수였던 공손역은 위기의 상황에서 부여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당시에 강성했던 부여가 원군을 보냈으니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어쨌든 부여와 공손씨의 관계는 상당히 돈독했을 수도 있겠군요. 제가 보기엔 이 시기 이후 부여의 구태세력(구태부여, 또는 요동부여, 또는 남부여)이 요동지방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그림 ②]참고).

공손연(公孫延)의 가계가 요동을 어떻게 장악했을까요? 해답은 공손역과 공손연이 종씨(宗氏)라는 데 있습니다. 공손역의 아들의 이름은 공손표(公孫豹)로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공손도(公孫度)의 어릴 때 이름이 공손표(公孫豹)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공손역은 공손도를 자기 아들처럼 사랑합니다(『三國志』「魏書」公孫度傳). 즉 공손도는 공손역의 양아들인 셈이죠. 공손도는 공손역의 후광으로 높은 벼슬에 오르고 후일에 요동태수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공손도가 요동태수가 되는 시기는 동탁(董卓 : ?~192)의 집권 시기입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190년 전후이지요. 이후 공손도(公孫度)는 요동반도를 장악합니다. 『삼국지』의 영웅이자 위(魏)나라 무제(武帝) 조조(曹操)는 그를 무위장군(武威將軍)에 임명합니다. 그런데 요동반도는 중국과 너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사실상 독립정부에 가까운 상태였습니다.

공손도는 이 구태와 함께 요동에서 큰 위세를 떨치게 됩니다. 『삼국지』에 따르면 "공손도는 동으로는 고구려를 치고 서로는 오환을 공격하여 그 위세가 밖으로 뻗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사(北史)』에서는 당시 구태의 위세를 "동이들 가운데 큰 세력을 떨쳤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90년경에 이르러 공손도는 "중원의 한나라의 운명이 끝나려 하므로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왕업(王業)을 취하기로 결정하였소(『三國志』「魏書」公孫度傳)."라고 합니다. 즉 중원을 정벌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죠. 이 때가 동탁의 집권시기입니다.

이제 구태 집안과 그 후손들 즉 남부여(南夫餘), 또는 요동부여(遼東夫餘)는 단순히 부여의 분국 수준을 넘어서 공손도와 함께 중원 땅을 정벌할 꿈을 꾸게 됩니다. 『삼국지』에 따르면 당시 구태의 후손 가운데 권력자는 울구태(蔚仇台)라고 합니다. 부여왕의 계보가 매우 혼란스럽고 실체를 알기 어렵지만 『삼국지』(부여전)나 『후한서』(부여전), 『삼국사기』(고구려본기)를 토대로 보면 부여왕은 위구태(尉仇台) - 부태(夫台) - 울구태(蔚仇台) 등의 순서로 왕위를 승계한 듯이 보입니다. 이름들이 비슷하여 매우 혼란스럽지요. 특히 울(蔚)이나 위(尉)는 중국식으로 하면 발음도 같습니다.

『후한서』(부여전)에는 후한(後漢) 헌제(獻帝 : 190~219) 때 부여왕이 요동에 속하기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록은 그대로 『삼국지』(부여전)에 나타납니다. 기록을 좀 볼까요?

"부여왕 울구태는 다시 요동군에 복속되었고 당시 구려(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했는데 공손도는 부여가 두 적 가운데 위치하므로 종실(宗室)의 딸을 울구태에게 시집보냈다(『三國志』「魏書」東夷傳)."

결국 백제의 시조라는 분이 바로 부여왕 울구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백제의 시조를 찾기 위해 먼 길을 걸어왔군요. 이제 좀 빛이 보이는 듯도 하는군요.

백제의 시조가 부여왕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백제의 시조가 부여의 현직 왕이라니오? 현직 왕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이유가 있을 리 있습니까? 이 말은 결국 분국(分國), 또는 임시 내각, 또는 그림자 내각(새도우 캐비넷)과 같은 종류라고 봐야죠.

그러면 왜 부여는 이렇게 여러 개의 분국이 필요했을까요? 고구려나 선비 등이 강성해지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남부여(요동부여), 동부여(285) 등을 만들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부여의 역사는 어떤 의미에서 분국을 만들어 가는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다시 합시다.

그러니까 『북사(北史)』에서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라는 말은 울구태(蔚仇台)를 의미하겠지만 "대방(帶方) 땅에 나라를 세우고" 라는 부분은 위구태(尉仇台)와 울구태(蔚仇台)의 합작품이며 "공손도(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얻어 동이들 가운데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는 사람은 '울구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울구태는 부여왕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방 땅에 세운 나라를 남부여(南夫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남부여라는 말이 이 시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후일 백제가 남부여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부여인 들이 요동 지역의 부여를 남부여라고 보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남부여와 같은 말로 요동부여(요동에 있던 부여)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참고로 송화강 지역의 원래 부여 지역에 있는 부여는 북부여(北夫餘), 또는 구부여(舊夫餘)·원부여(原夫餘)라는 말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대방(帶方)은 정황적으로 보았을 때 요동에 가까운 곳으로 봐야할 것 같습니다.

즉 "부여가 고구려와 선비 등의 두 적(敵) 사이에 위치한다(『三國志』부여전)"는 말이나 "태조 94년(146년) 왕이 한(漢)나라 요동부(遼東部)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三國史記』高句麗本紀)"라는 기록이나 "한(漢)나라의 질제(質帝)와 환제(桓帝) 사이에 다시 요동의 서안평을 침입하여 대방현령을 죽였다(質桓之間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 : 『後漢書』卷85)"라는 기록이나 "건안 연간(후한 헌제 때) 공손강이 남쪽 지방 거친 땅을 대방군이라고 하였다(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 『三國志』卷30)"라거나 "부여는 본래 현도(玄免)에 속하였는데 헌제(189~220) 때 부여왕이 요동(遼東)에 속하기를 청하였다(『後漢書』「夫餘傳」)"는 등 수많은 기록들이 대방의 위치가 요동의 지역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공손도가 중원을 정벌하기 위해 새 나라를 건국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대역무도(大逆無道)한 일로 용서받을 수 없죠. 그렇지만 그 당시 황건 농민 봉기로 인하여 한(漢)나라 조정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전국이 심하게 분열되고 있는 상황에서 요동지역을 견고히 장악하고 있었으니 이 같은 생각이 반드시 무리라고만 할 수는 없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부여왕(울구태)은 공손도-공손강-공손연에 이르는 연나라 세력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혈맹 관계가 되고 말았지요. 만약 공손연이 대역무도한 죄로 몰락하게 되면 울구태의 세력도 성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적어도 요동지역으로 확장된 부여세력(요동부여, 또는 남부여)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고 만 셈이지요.

결국 역사적 사실로 보면, 백제의 건국주체는 바로 부여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애초에 우리가 알던 그 백제는 없었던 셈이지요. 부여왕 울구태는 공손도의 따님과 결혼함으로써 요동 지방에서 큰 세력이 되고 이 세력을 바탕으로 백제도 건국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백제 건국의 바탕이 되는 곳은 바로 요동 땅과 부여라는 말인데요. 그러면 우리가 알던 바와는 많이 다르게 됩니다. 다시 백제의 역사가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온조와 비류는 또 누구란 말입니까?

***(4) 백제, 부여로 다시 태어나다**

백제의 건국과 관련하여 먼저 『삼국사기』를 봅시다. 건국신화는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아들이라는 것도 있고, 비류와 온조가 우태(울구태 : 부여왕)의 아들이라는 것도 있으나, 후자가 백제의 시조가 울구태라고 하기 때문에 그것을 중심으로 보지요.

"우태는 해부루의 후손으로 북부여에서 졸본으로 와 연타발(공손도)의 따님인 소서노(召西奴)와 결혼하여 불류와 온조를 낳았다. 우태가 세상을 떠나 과부가 되었는데 부여에서 주몽이 졸본으로 와서 소서노와 결혼하였다. 소서노는 주몽을 도와 새 나라인 고구려를 세우는 데 공이 컸으므로 주몽은 아내인 소서노를 매우 사랑함은 물론이요 우태의 후손인 불류와 온조도 극진히 사랑하였다. 그런데 주몽임금이 부여에 계실 때 낳은 유류(儒留 : 유리)가 찾아오자 불류와 온조는 많은 무리를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백제를 세웠다.(『三國史記』「百濟本紀 」)"

공손도의 따님이 바로 소서노(召西奴)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죽고 주몽이 부여에서 쫓겨 내려오자 그와 재혼(再婚)하여 고구려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 후 주몽의 친자(親子)인 유리가 내려오자 신변의 불안을 느껴 소서노 - 울구태의 사이의 자손들은 한반도의 남부로 내려가 백제를 건국했다는 것이지요. 위의 신화를 보면 우태는 분명히 3세기에 활약한 울구태(蔚仇台)인데 온조와 비류는 기원전(B. C.18)에 나타난 사람들이므로 "할아버지가 손자의 아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온조와 비류가 구태의 아들로 둔갑한 것이죠.

이 때부터 백제는 전혀 새로운 나라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작은 소국들이 보다 큰 민족적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 즉 소국들이 위대한 부여왕 울구태의 아들로 다시 태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로 "백제가 부여(남부여)로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좀 더 분석해봅시다. 제가 보기엔 온조(溫祚)와 비류(沸流)는 신화의 내용으로 봐서 고구려에 대해 부정적인 세력일 가능성이 크죠.

『삼국사기』에서 온조 부분의 신화에서는 온조가 분명히 고구려 계열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유리가 옴으로써 중앙권력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남하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온조의 경우에는 고구려의 확장과정에서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반감을 품은 세력일 수가 있습니다. 온조가 한강 유역에 내려가 세운 나라를 십제(十濟)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백제 지역(현재의 서울지역)에 먼저 자리를 잡지요. 이 세력은 비류세력과 합치면서 백제로 거듭나지요. 즉 그 전에는 촌락 수준에 불과했던 십제(十濟)가 백제(百濟 : 사실은 伯濟國)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규모가 더 크진 것이지요.

그러면 이 비류 세력은 뭘까요?

『삼국사기』「백제본기」에 나오는 또 다른 백제 신화에서는 비류가 분명히 북부여계라고 합니다. 즉 비류의 아버지는 북부여 왕자인 우태(憂台)이고 어머니가 소서노(공손도의 따님)라고 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서는 흥미 있는 기록이 있지요.

즉 주몽이 비류국을 정벌하는 과정을 보면 비류국왕(沸流國王 : 송양)과 주몽의 갈등이 나타나고 주몽이 활쏘기 시범을 보임으로써 비류국왕이 항복합니다. 처음에는 오히려 비류국왕이 주몽에게 항복을 요구합니다. 일단 비류국왕이 항복함으로써 사건을 일단락되지만 그 이면에는 상당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 비류라는 것은 이들 세력의 일부가 아닌가 합니다. 고구려가 확장되는 시기에 반고구려계(친부여계)가 지속적으로 내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시기는 좀 다르지만 이 같은 사정을 짐작할만한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지』에는 "환제(147~167)와 영제(168~189) 말년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였기 때문에 한(漢)나라 조정은 군현을 제대로 다스릴 수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韓國)으로 흘러들어갔다(桓靈之末韓濊彊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 : 『三國志』卷30)"라는 말이 있죠.

이와 같이 온조나 비류는 고구려가 정벌한 지역의 사람들이거나 정벌과정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세력, 또는 부여계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온조와 비류의 결합으로 백제국이 소규모이지만 도시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한강유역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나 이 백제는 우리가 아는 백제는 분명히 아닙니다. 극히 작은 나라로 수십 개의 소국(小國) 가운데 하나일 뿐이죠. 결국 초기 백제라는 것은 고구려 마이너(비주류) 그룹과 부여계의 연합세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백제는 3세기에 접어들면서 엄청난 정치적 변화를 겪게 됩니다. 즉 부여세력들이 한반도로 많이 밀려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백제가 태동하는 계기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삼국지』에 따르면, 조조(曹操)의 군대에 대패한 원소(袁紹)의 아들 원희(袁熹)와 원상(袁尙)이 공손강에게로 피신하여 도움을 청하자 공손강은 오히려 그들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후일 계승자인 공손연은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 : 179~251)의 공격을 받아서 멸망하고 참수 당합니다. 당시 위나라는 고구려의 위협보다는 공손연의 연나라를 더 성가시게 생각한 듯합니다. 그러니 일단 연나라를 정벌하고 다음으로 고구려를 노린 것이죠. 당시의 중국의 사정을 나타낸 것이 [그림 ④]

[그림 ④] 위나라의 요동 정벌 당시 연나라

공손연이 조조의 군대에 궤멸당하고 그의 가계(家系)가 모두 주살 당하였다고 한다면 부여왕 울구태가 영도하는 요동 세력(남부여)도 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즉 요동지역의 부여 세력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 일부는 북부여(부여본국)로 쫓겨 갔을 것이고, 또 일부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겠죠.

그런데 이들이 북부여 쪽으로 가기는 상대적으로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위나라 군대의 기세로 봐서는 북부여방면으로 갔을 경우에는 계속 공격해 들어갔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요동의 위기가 고조되는 210년경부터(원상과 원희의 죽음이 207년)는 이들 요동부여(남부여) 세력이 지속적으로 한반도 쪽으로 이동해 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로 이런 점들이 부여계가 바닷길이나 육로(陸路)를 통해 한반도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배경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고구려가 압록강 하구까지 제대로 진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하하는 데 큰 지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그림 ②]참고).

그래서 제가 볼 때는 반도의 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백제는 작은 나라로 그 시조가 온조(또는 비류)일 수는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대국 백제는 온조왕의 백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그것은 요동지역의 부여가 지속적으로 남하하다가 요동 부여세력이 궤멸된 후 잔존세력들이 한반도로 합류한 상태가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百濟)라는 것이지요. 즉 이름 없는 백제가 강력한 부여(백제)로 다시 태어난 것이죠.

이것을 방증하는 것이 요동에서 심각할 정도로 부여세력이 궤멸된 후 오히려 한반도의 백제 세력이 강화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한번 봅시다.

***(4) 다시 안개 속으로**

우리는 앞에서 고이왕을 일반적으로 구태라고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왕의 계보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록대로라면 백제왕들은 일목요연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이 계승이 되어 백제 전문가인 이도학교수의 말처럼 마치 일본식의 만세일계(萬世一繼)라는 느낌을 줍니다. 즉 고구려나 신라는 박씨 - 석씨 - 김씨에 이르는 왕실교체가 있었고 고구려도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실이 교체되었는데 유독 백제만은 아무 탈이 없이 왕에서 왕으로 이어졌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백제처럼 불안한 국가가 없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백제는 그 시조만 해도 ① 울구태, ② 온조, ③ 비류 등으로 3개의 왕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나라가 혼란하거나 여러 개의 정권으로 나눠져 있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볼 때 백제 왕실의 계보는 여러 면에서 석연치가 않습니다. ① 온조왕 - ② 다루왕 - ③ 기루왕 - ④ 개루왕(128~166) - ⑤ 초고왕(166~ 214) - ⑥ 구수왕 - ⑦ 사반왕 까지가 모두 직계 자손에 의해 왕위계승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맏아들입니다. 당시로 보면 장자상속제가 정착된 것 같지도 않는데 너무 일목요연하게 왕위계승이 아무 탈 없이 이뤄진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⑧ 고이왕(236~286)의 경우는 전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고이왕은 사반왕의 아들이 아니고 전혀 엉뚱하게 ④ 개루왕(128~166)의 둘째 아들이자 초고왕166~214)의 아우로 한참 올라가 버립니다. 그러면 나이가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고이왕의 수명이 거의 1백 50살은 되어야 될 것 같지요. 무언가 심각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이왕은 개루왕의 아들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을 빌려왔을 수도 있죠. 왜 있잖습니까?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이 와서 "나는 너의 고조부의 둘째 아들이라"는 식 말이죠. 고조부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도 둘째 아들이라니 더욱 모르지요. 어쨌거나 친척인 것은 분명한 것도 같은데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대목은 바로 고이왕의 즉위 이전 20여 년간이 요동의 위기가 극대화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고이왕의 즉위를 전후로 요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울구태의 처가(妻家)인 공손씨가 사마의와 관구검에 의해 몰살당하는 시기입니다.

즉 236년부터 위나라 황제 조예는 공손연의 토벌을 명합니다. 그래서 237년 위나라 명장 관구검(毌丘儉 : ? ~255)은 요동 입구인 요수로 출병했다가 가을장마 때문에 부득이 철군합니다. 238년 사마의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서 공손연을 토벌하고 공손연의 남은 가족과 고위 인사 또는 장수들을 색출하여 70여 명을 참형에 처합니다. 이로써 요동부여(남부여)도 거의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남부 지역의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위나라 황제 조예(조조의 손자)는 북방을 공격했는데 당시 부여 세력들은 상당수가 남하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요동에서는 어느 한 시점에서 전격적으로 전쟁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관도대전(200) - 원소의 몰락(206) - 원희․원상의 죽음(207) 등의 과정에서 요동에서는 위기가 극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울구태의 남부여와 사돈관계인 공손연은 오히려 강남의 오나라(손권)와 접촉을 하는 등 위나라에게 자극을 가하게 됩니다. 그러자 위나라가 공손연을 공격하게 되는데 이 때에도 공손연은 연나라 왕을 칭하는 등 위나라에 패배했을 경우에는 도저히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 돌입하게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위나라의 침공에 대해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울구태의 남부여 (요동부여)세력들은 미래를 대비하여 상당한 세력이 20년 이상을 반도 쪽으로 내려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이것은 일본의 야마도 정권의 수립의 경우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리고 이 때만 해도 압록강 하구를 고구려가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하(南下)에는 지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고이왕대(236~286)에는 여러 가지 제도의 정비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 것도 있겠지만 남부여에서 시행되던 많은 제도들이 반도부여에 그대로 이식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이왕 이전에 한반도 안에 존재했던 백제라는 나라는 거의 고려할 만한 수준이 못 되는 소국(小國)에 불과하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즉 3세기 후반에 씌어진 『삼국지』에서는 마한의 54개국 가운데 백제국(伯濟國)이 나타나고 있는데 당시 마한의 맹주는 목지국(目支國)이었으므로 한반도에 소재한 백제라는 나라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그림 ⑤] 초기 백제의 수도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서울 천호대교 옆)
(붉은 선은 토성의 성벽)

그러나 요동지역에 있던 울구태의 남부여 세력들이 사마의의 토벌로 인하여 대거 남하하자 이 세력들로 인하여 반도부여(백제)는 힘이 매우 강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연이은 고구려 - 위나라와의 전쟁으로 인하여 고구려가 큰 타격을 입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강유역과 한반도 중북부 지역에서는 남부여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막을만한 세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기회에 소국 백제는 남부여(南夫餘)로 거듭 태어나고 강성해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제가 드리는 말씀은 우리가 알고 있던 백제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백제는 사실은 부여의 분국(分國), 남부여라는 것입니다. 다만 겉보기로 백제라는 국호를 사용했지만 사실은 부여를 계승한 정권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은 다음 장에서 상세히 보겠지만 일단 간략하게 한번 보고 넘어갑시다.

무엇보다도 백제왕들은 일관되게 부여의 시조이신 동명왕에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개로왕(蓋鹵王 : 455~475)이 북위의 황제에게 보낸 국서(473)에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그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대에는 옛 정의를 돈독히 존중하였습니다(臣與高句麗 源出夫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 『三國史記』「百濟本紀」蓋鹵王 )"라는 말이 나옵니다.

『구당서(舊唐書)』에도 "백제는 부여의 별종(別種 : 부여 종족 가운데 하나)이다. 동북쪽은 신라이고, 서쪽은 바다를 건너서 월주(越州)에 이르며, 남쪽은 바다를 건너서 왜국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이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남부여(南扶餘)와 전백제(前百濟)'라고 하나의 항목으로 처리하여 '백제 = 남부여'라고 보고 있지요.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동으로는 낙랑이 있고 북으로는 말갈이 있어 자주 강토를 침략한다(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侵軼彊境 :「百濟本紀」 第一)"는 말을 보세요. 이 말은 백제가 반도에 존재하는 상황이 아니지요.

더욱 중요한 점은 북위의 사서인 『위서(魏書)』이전의 중국의 역사서 예를 들면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진서(晋書)』『삼국지(三國志)』등의 동이전(東夷傳)에 보면 백제(百濟)가 나오지 않고 부여(夫餘)라고만 나오고 있죠.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봅시다.

중국의 여러 역사서들 가운데 백제와 동시대에 가까운 기록들인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진서(晋書)』등에는 백제(百濟)라는 말이 없습니다. 동시대 기록인데도 백제를 기록하고 있지 않다니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중국사서들 가운데 백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사서가 바로 남북조 시대 『송서(宋書)』입니다. 송나라(420~478)는 사마씨의 동진(東晋)을 이은 한족의 왕조입니다. 그리고 이 『송서(宋書)』를 포함하여 『남제서(南齊書)』『위서(魏書)』등에는 백제가 등장하지요.

따라서 적어도 5세기 중엽까지도 백제보다는 부여로 인식했다는 말이지요(아니면 백제가 현실적으로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미한 소국이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6세기에는 바로 남부여(538 : 성왕 16년)로 바뀌고 말지요.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시기에 중국 측에서는 이미 역사학이나 사관의 기록 체제가 많이 발달해 있는 상태인데도 (『삼국사기』에 의거한다면), B. C. 18년에 건국하여 무려 3백~4백년 건재한 나라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특히 『후한서』는 남북조 시대에 편찬되었고 『진서(晋書)』는 당나라 때 편찬되었으니 백제의 건국 기점으로 본다면 무려 8백년이 지나서 편찬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백제는 없고 부여만 있죠? 그 말은 무얼 의미할까요?

제가 보기엔 백제를 건국했다는 말보다는 부여의 분국이 끊임없이 만들어져서 원래의 부여가 멸망하더라도 그 부여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서들에서 백제를 건국한 지역을 대방 지역, 즉 울구태의 남부여를 지목하고 있는 것이죠. 『북사(北史)』에는 "백제는 처음으로 그 나라를 대방의 옛 땅에 세웠다(『北史』「百濟傳」: 始立國于帶方故地)"고 하고 『수서(隋書)』(『隋書』「百濟傳」 : 始立其國帶方故地)에도 이 기록은 그대로 있습니다.

동부여(285)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즉 모용선비의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아서 두만강 쪽으로 피난하여 일종의 임시정부를 만들어 두었지만 중국의 정사에서는 이를 두고 동부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의 정부청사가 광화문에도 있고, 과천에도 있고 대전에도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지금도 한반도가 준전시상황(휴전)이기 때문입니다. 부여의 경우도 선비와 고구려의 침입으로 사실상 거의 준전시상태(準戰時狀態)였다고 봐야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정치적 격변에 따라 요동으로 한반도로 분국을 만들었다는 얘기지요. 쉽게 말해서 일종의 부여 체인점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도 울구태라고 새롭게 볼 필요도 없고 그저 동명(東明)이지요.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는 한 가지는 백제의 모든 왕들이 하나같이 시조이신 동명왕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부여의 시조와 백제의 시조가 완전히 같다는 말이지요. 다만 그 중시조는 울구태이며 반도에 일찍 남하했던 무리들이 온조와 비류라는 것이지요. 이들은 후일 요동과 만주지역의 부여세력과 연합하여 부여계의 국가로 다시 태어나는데 그 이름이 백제였다는 말이지요. 아마도 만주나 요동 지역으로부터 이주하는 사람들과 토착민 사이의 관계를 원활히 하고 덕업(德業 : 왕업)을 일신한다는 의미에서 백제(伯濟)라는 말을 사용하되 좀 변경된 이름인 백제(百濟)를 사용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 국호도 남부여(538)로 다시 바뀌어 원래로 돌아가지요.

그래서 저는 굳이 백제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성이 없고 반도부여(백제)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베일에 싸인 백제의 건국에 대한 이야기를 분석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 가운데는 이렇게 말씀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에이, 아무리 우리가 알고 있던 백제는 처음부터 없었다고는 해도 백제가 부여의 분국이라니 좀 심하군."

그것이 심하다고요. 일본도 부여의 분국인데요. 다음 장에 왜나 백제가 왜 부여의 분국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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