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를 읽다
[이종범의 사림열전] 남효온: 방랑, 기억을 향한 투쟁 ⑤
2007.10.08 10:10:00
국토를 읽다
고독의 빛깔
  
  남효온의 친구들은 점차 곤란한 처지에 빠지고 떠나갔다. 성종 16년(1485) 여름 「나를 읊는다」제7수에서
  
  덕우는 장형을 당하여 살점이 없고 德優杖下無完肉
  효백은 양식이 떨어져 목숨이 위태롭네 孝伯粮化身命危

  
  하였다. 덕우(德優)는 자주 어울린 신영희인데 태형을 당하여 몸이 부셔졌다. 성종 14년(1483)의 성균관 유생의 도첩제 반대 운동의 배후로 몰려 호된 곤욕을 당한 것이다. 효백(孝伯)은 누구인가 분명하지 않지만 가난으로 세상에 나설 수 없는 처지가 되었던 모양이다. 더구나 남아 있는 친구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모두 열다섯 수였던「나를 읊는다」뒤에 덧붙인 '또 한 수[又一首]'가 이렇게 되어 있다.
  
  안생은 이미 죽어 말 통할 사람 없어지고 安生已去知音斷
  홍자는 남쪽으로 돌아갔으니 우리 도가 궁하구나 洪子南歸吾道窮
  대유(大猷)가 있다지만 추구하는 바가 고달프니 縱有大猷趨向苦
  마음속 회포를 농서공(隴西公)과 풀어볼까 胸懷說與隴西公

  
  안생은 안응세, 홍자는 홍유손이다. 안응세는 이미 죽었고 홍유손은 학문과 문장이 높아 한때 향역을 면제받았지만 '세상을 비웃는다'고 하여 다시 남양의 향리로 복귀하였다. 이들을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들만이 아니었다.
  
  먼저 대유(大猷) 즉 김굉필도 만나기 쉽지 않았다. 훗날 유자광은 '추구하는 바가 고달프다'는 구절을 '과거 준비에 바빴다'고 해석하였지만, 실은 『소학』의 보급과 교육활동으로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효온은 재주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불만이 가득하여 농서 출신 이백(李白)에 견주어 친구들이 농서공(隴西公)이라고 불렀던 이윤종(李允宗)이라도 만나고 싶었다. 실제 이윤종은 세상과 융화하지 못하였다. 언젠가 한명회의 압구정에서 휴식할 때 지은 시가 전하는데, 말미가 "정자는 있으나 돌아가지 않았으니, 인간이 참으로 갓 쓴 원숭이로다"로 되어 있다. 강호로 은퇴한다면서 왕실의 동향과 도성의 소식을 금방 알 수 있는 곳에 정자를 지어놓고 전혀 그럴 뜻이 없었던 한명회를 '원숭이[沐猴]'에 빗댄 것이다. 남효온도 『추강냉화』에 '너무 뜻이 드러나 좋지 않다'고 할 만큼 노골적이었다.
  
  그런데 '마음속 회포를 풀어볼까' 하였던 이윤종도 가슴 터놓고 만나기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사우명행록』에 '이윤종의 가장 좋아하는 벗은 강응정·정여창·이심원·권안(權晏)이었다'고 한 것으로 보면, 이윤종의 친한 벗은 자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 이달선 비각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소재. 광산 이씨 이달선의 가문은 호남의 명가였다. 김종직이 전라감사로 와서, 이형원의 중형 이조원(李調元)을 방문하고 "원자 항렬 오 형제는 실로 거족인데/ 일원이 숨었으니 그 뜻이 가상하다/ 학문을 숭상하고 살면서/ 좋은 소식 멀리하지 않기를 바랄 뿐" 하였다. 당시 세간에서는 '원(元)자 항렬' 오형제를 '오원가(五元家)'로 불렀다. 이들의 다음 세대 즉 이달선 대에는 문과 급제자가 8인이나 되어 '팔선(八善)'을 더하여 '오원팔선가(五元八善家)'라 하였다. 이달선은 연산군이 즉위 후 훈구대신과 정면 대결하다가 남평 만적동(萬積洞) 즉 나주시 삼포면 등수리에 낙향하여, '날마다 술잔을 즐거움으로 알고 집사람에게 살림이 어떠한가를 묻지 않고 살다가,' 연산군 2년(1506) 타계하였다. 이달선의 비문은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윤선도의 증조부인 윤구(尹衢)가 지었는데, 오래도록 세우지 못하다가 선조 9년(1576), 손자인 이중호(李仲虎)가 전라감사를 지내면서 이이(李珥)에게 비석의 내력을 적은 비음기(碑陰記)를 받고 이산해(李山海)의 글씨를 받아 세웠다. 당대 최고 명사의 솜씨가 어우러진 보기 드문 비석이다. 처음에는 사진에 보이는 비각의 뒷산에 있는 이달선의 묘소 앞에 세웠다가 지금의 오현당(五賢堂) 옆으로 옮겼다. ⓒ프레시안

  이즈음 남효온은 처음부터 무척 친밀하였던 정여창·김굉필과도 소원해졌다. 남효온의 비분강개와 거리낌 없는 금기 들춤이 못내 걱정스러운 두 사람이 여러 번 충고하였지만 남효온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점차 사이가 틀어진 것이다. 남효온의 외손인 임보신(任輔臣)이 명종 치세에 꾸민 야사에 나온다.
  
  남효온은 위언격론(危言激論)을 가리지 아니하고 금기라도 거리낌이 없이 털어놓자 성리학에 밝고 『소학』으로 행동을 가다듬었던 김굉필과 정여창이 말렸는데 끝내 듣지 않았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금강산의 흔적
  
  남효온은 먹빛 같은 고독에 빠져들었다. 강산의 맑은 기운에 젖고 싶었을까? 자신을 휘감고 있는 앙금을 떨치고 싶었을까? 홀연히 금강산을 찾았다. 성종 16년(1485) 4월 보름날이었다. 금화·철원을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큰 봉우리 서른여섯, 작은 봉우리 일만 삼천, 험한 고개를 넘고 깊은 계곡을 건너며 시원한 폭포를 보았다. 천혜의 비경에 감탄하며 암자에서 쉬었고 장안사·유점사 등에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동해로 나와 고성·양양을 거쳐 설악산의 낙산사와 오색약수에 들렀으며, 원통·인제·홍천·양근을 거쳐 윤(閏)사월 열아흐레에 한양으로 돌아왔다. 거의 한 달에 걸쳐 하루 오십 리 이상을 걷는 강행군이었다.
  
  남효온은 돌아온 다음 날 틈틈이 써둔 일기를 엮었으니 「금강산유산기」였다. 각처에 남아 있는 설화와 사적 그리고 근세의 일화를 빠뜨리지 않고 적었다.
  
  비로봉 북쪽의 한 봉우리가 발령(髮嶺)이 된 것은 '고려 태조가 와서 비로봉에 무수히 절하면서 머리를 깎아 나무에 걸어두며 출가할 뜻을 가졌다'고 하는 유래가 있었다. 만 갈래 폭포가 어우러진 만폭동(萬瀑洞)의 보덕굴(普德窟) 앞에서 물에 빠져 죽은 중국사람 이야기도 적었다. '참으로 불경(佛境)이니 원컨대 여기서 죽어 조선 사람으로 태어나서 부처의 세계를 보련다.'
  
  보덕암 건너편 수건암(手巾庵)을 찾았을 기문(記文)을 보았다. 이런 구절이 있었다. '보덕이란 관음화신(觀音化身)의 이름인데 관음이 변해서 아름다운 계집이 되어 수건을 이 바위에서 씻다가 중 회정(懷靜)에게 쫓겨서 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지은이가 김시습이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보덕암(普德庵)」에 풀었다.
  
  덕이 높은 청한자는 나의 벗이며 스승으로 飽德淸寒我友師
  일생 해온 일이 글과 시에 있었는데 一生行業在書詩
  어찌하여 불교의 교리를 팔아서 如何賣擧浮圖說
  오히려 인륜을 오랑캐 경지로 끌고 가는지 反使人倫化入夷

  
  겉으로는 승려 행색이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다고 믿으며 스승이자 벗으로 삼아 존중하고 따랐는데, 아아 이토록 불법에 깊이 물들어 있었단 말인가? 서운하였다. 무척이나 불교와 불사를 싫어하였기에 이 점에서만은 김시습과 융화하지 못하였다.
  
  그랬음일까? 금강산을 나와 바닷가로 나가 양양부사 유자한(柳自漢)을 만나고 그의 연회에 참석하여 질펀하게 하루를 보내면서도 김시습을 찾지 않았다. 아니 소식도 묻지 않았다. 유자한은 관동에서 김시습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김시습도 그 자제의 공부를 돌봐 준 적이 있었다.
  
  금강산을 다녀온 그해 가을 남효온은 이총·이정은·우선언 등과 송도 유람을 떠났다. 서로 태극음양설과 이기설을 토론하며 활발하게 지냈다. 그러나 잠깐이었다. 벽란도에 갔을 때다. 자신이 배고파 우는 늙은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늙은 말이 뙤약볕 아래 배고파 울부짖네 老馬飢嘶日欲嚑
  소금 친 조밥에 반찬이란 부추 뿌리가 고작이라 一鹽粟飯劈菁根
  우리 살고 죽음도 들고 나는 바닷물과 같아라 潮來潮去猶生死
  살다가 피고 지는 것이 모두 뜬구름 아니겠나 在世榮枯惣似雲

  
  우리 인생이 파도처럼 사라지고 뜬구름 같은 것이 아닌가 하며 시대와 처지에 대한 비분강개함이 솟구치며 갑자기 허무해졌다.「송경록(松京錄)」에 나온다.
  
  소원과 해원
  
  남효온은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성종 17년(1486)부터 한없이 떠돌았다. 호서지방을 돌다가 공주 국선암(國仙庵)에서 새해를 맞고 호남으로 발길을 옮겨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고 경상도로 가서 김일손과 같이 청도의 운문산을 찾았다.
  
  성종 20년(1489)에는 평안도를 두루 돌다가 상원군의 동굴을 탐사하였다. 조상이 물려준 전장이 있었던 경상도 의령의 사굴산 아래에서 한때를 보낸 적도 있었다. 성종 22년(1491) 한 해는 거의 삼남에서 보냈다. 떠났다가 돌아오고 다시 떠나곤 하는 세월이었다. 그동안 적지 않는 관찰과 체험의 기록을 남겼으니 「지리산일과」「천왕봉유산기」「가수굴유람기」등이었다. 역사와 국토의 발견이었다.
  
  남효온의 방랑은 소원(訴願)의 길이었다. 다음은 평양에서 지은 「단군묘를 알현하다」이다.
  
  단군이 우리를 낳으시니 우리 강산에 사람이 많지 않나 檀君生我靑丘衆
  패수에서 윤리도덕을 가르치시고 敎我彛倫浿水邊
  약초를 찾고 형벌을 내린 지 만세가 되어도 採藥呵斯今萬世
  지금까지 사람들은 무진년을 기억한다네 至今人記戊辰年

  
  우리 터전에 교화와 민생의 공덕을 펼쳤던 단군에 대한 찬미였다. 넷째 행 '무진(戊辰)'은 기원전 2333년으로 단군이 나라를 세운 해다. 그런데 단군을 약초를 찾아 질병을 치료하였다고 묘사한 구절이 이채롭다. 태고의 인간은 질병과 상처를 춤[巫]으로 빌었고 나중에 술[酒]을 찾았는데, 문명이 발달하면서 마침내 약(藥)을 얻었다. 약(藥)은 글자 풀이대로 하면 즐거움[樂]을 주는 풀이다. 사람의 고통을 고치는 행위의 문자가 처음에 '의(毉)'였다가 '의(醫)'가 되고 나중 문명 단계에 접어들어 '의약(醫藥)'이라고 하였던 궤적을 생각하면 남효온의 기억하는 단군은 분명 문명의 성군이었다. 세상의 고통스런 삶을 고쳐줄 임금을 바라는 마음의 발로였을 것이다.
  
  이총과 같이 간 백제의 마지막 도읍 부여에서는 한바탕 해원(解寃) 의식을 치렀다. 먼저 소정방(蘇定方)이 상륙한 조룡대(釣龍臺)에서 "성난 물결이 조룡대를 치고 오르네" 하였다. 나라 망한 원통함에 대한 백마강의 노여움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성충 같은 충신의 갈망, 장렬한 계백의 산화 등이 안타까운 혼백이 되어 떠돌고 있음을 읊었다. 눈물을 흘리며 술을 올렸다. 연작시 「부여를 회고하다」는 차라리 제문(祭文)이었다. 그중 하나다.
  
  깊은 강물 아래 쌓인 여자의 원망이 水府深深女怨多
  고운 자태로 되어 봄에 강에 핀 꽃이 되었을까 艶容化作春江花
  온조대왕 위업은 물길 따라 사라졌는데 溫王家業隨流盡
  술에 취하여 들으니 어디선가 궁녀의 노래 아닌가 醉裏如聞玉樹歌

  
  백마강에 몸을 던진 여인의 혼백이 아름다운 꽃이 되어 강물처럼 사라졌던 온조의 왕업을 붙잡는다, 하는 듯하다. 이총의 거문고 가락에 더욱 슬펐으리라.
  
  남효온은 눈물이 많았다. 고려의 고도 개성을 찾았을 때에도「송악의 옛 궁궐에 오르다」에서 "주인 없는 옛 도읍이라 안개가 엷어도 어둑한가, 과객은 오르며 눈물을 흘린다네" 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멸망이 아쉬워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니었다. 한때 유교를 숭상하고 인재를 뽑았던 과거제도가 덧없이 무너진 것이 더욱 안타까웠다.
  
  남효온은 고려가 불교를 지나치게 신봉하였기 때문에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였다. 신돈이 나와 왕실의 맥을 끊은 것도 불교 때문이었다. 강원도 간성(杆城)에 있는 공양왕의 무덤을 본 감회를 「간성릉을 지나며」에 담았는데 이런 구절이 있다.
  
  주나라 여불위가 제위를 바꿔쳐서 奏家不韋移神器
  함곡관 천하를 자영에게 주었지 函谷山川付子嬰

  
  신돈의 자손이 고려의 거짓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여불위(呂不韋)가 자기 아이를 밴 애첩을 진왕(秦王) 자초(子楚)에게 넘겼고 그 아들 자영(自嬰)이 진시황(秦始皇)이 되었다는 고사에 견준 것이다. 그런데 무슨 오해가 있었을까? 우왕을 자영이라고 하면 모를까, '여불위가 신돈이며 자영은 정창군(定昌君)이다'고 주를 적었다.
  
  이성계와 정몽주 등이 신씨(辛氏)를 쫓아내고 왕씨(王氏)를 세운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명분으로 창왕(昌王)을 몰아내고 정창군(定昌君)을 공양왕으로 세웠다는 것이 『고려사』등 사책에 엄연한데 남효온은 정창군까지 신돈의 내림으로 취급한 것이다. 혹여 '고려의 정통은 공민왕 23년(1374)에 끊겼다'는 『동국통감』의 새로운 사론에 따라 공민왕 이후의 고려는 국가가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창군을 자영에 비유한 것은 분명 착각이었다. 유랑에 지쳤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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