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쿠니의 어둠'이 일본을 지배하다
[기고]日 극우세력은 왜 야스쿠니 신사에 집착하나
'야스쿠니의 어둠'이 일본을 지배하다
일본에게 미래란 무엇일까? 일본은 여전히 대동아공영권의 미몽을 희망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일본의 역사 가운데 가장 번영을 구가했던 시대이자, 섬을 벗어나 대륙으로 세계로의 이상을 실현했던 시대를 열어준 것은 바로 메이지 일본왕이었고, 일본사람들은 그 이상을 한 마디로 말해 대동아공영권이라고 명명했다. 마치 현대 한국인들이 경제가 어려워지면 경제 도약의 시대에 대한 상징으로 고 박정희 대통령을 그리워하듯 1980년대 이후 극우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던 무렵부터 일본인들은 대동아공영권을 열어준 '신인(神人)'으로서 '천황'을 다시 그리워하고 있는 듯하다.
  
  일반적인 일본인들에게 1868년 창조된 천황은 불경하게 말해서는 안되는 금기어 중 하나이고, 천황을 거부하는 것은 일본인적 정체성을 거부하는 행위로 여겨지곤 한다. 현재까지도 천황의 발밑에서 국회 회의를 하도록 되어 있는 일본을 보면서 과연 일본의 미래가 어디로 갈 것인지가 문득 걱정되곤 한다. 일본 천황제 문제의 연속선상에는 야스쿠니 신사 문제가 있다. 한국사람들에게 야스쿠니 신사 문제는 일본 수상이 8·15때면 참배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정도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의 본질은 무엇인가?
  
▲ 일제시대 제작된 대동아공영권 지도. ⓒ김귀옥

  야스쿠니의 어둠: 야스쿠니·전쟁·빈곤
  
  시민사회에서 야스쿠니 신사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2006년이다. 일본, 한국, 오끼나와, 대만 등의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서울과 동경에서 제1회 행사를 개최했고, 2007년에는 미국에서, 제3회 야스쿠니신사 반대 집회는 동경에서 열렸다. 이번 여름 개인적으로 학회 행사 등이 있어서 방일했던 중에 마침 시간이 맞았고, 서울에서 있었던 1회 행사에 참여했던 인연으로 '야스쿠니 집회'에 참여했다.
  
  야스쿠니 신사 반대 행사는 첫날인 8월 9일에는 미술전시회(8월4일~11일)와 영화 <안녕, 사요나라> 상영회, 미술전과 관련해 '야스쿠니와 표현'이라는 주제의 토론회 등이 진행됐고, 둘째 날에는 '야스쿠니, 전쟁, 빈곤'이라는 주제의 대토론회, 일본, 오끼나와, 대만, 한국 등 야스쿠니 합사자 유족의 증언, 한국 대학생들의 '대학희망', 권해효, 손병휘, 오끼나와 2인조그룹 '수' 등의 평화문화공연으로 이루어졌다.
  
  이날 행사의 백미는 역시 야스쿠니 반대 촛불거리 행진이었지만 한국의 한명숙 전 국무총리, 야스쿠니 신사 문제를 제기해온 일본의 저명한 학자, 기자, 만화가 등이 발언한 '야스쿠니, 전쟁, 빈곤' 대토론회에서는 일본에서 야스쿠니 신사 문제가 왜 극우와 결합돼 나타나는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야스쿠니 신사는 '천왕제'의 산물이고, 천황은 일본이 과거 구가했던 '대동아공영권'의 영광을 가져다준 신인이다. 그런데 1980년대 일본의 경제에서 거품이 빠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1995년 1월, 600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일본 한신대지진과 옴진리교 독가스 사건 등 일본의 비극을 집약한 사건 등에 의해 일본의 위기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에 일본의 신자유주의와 극우주의자들은 위기를 미봉하기 위한 방책으로 평화헌법에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때 마침 위기를 고조시켜준 북한발 사건-1998년 북한의 '광명성' 인공위성 발사사건, 2002년 북일정상회담과 납치자 문제, 북핵 실험 사건 등-등을 악용하여 군국주의를 획책했다.
  
▲2008년 8월 10일 '야스쿠니, 전쟁, 빈곤' 대토론회 ⓒ김귀옥

  군국주의는 전쟁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시 경제를 기반으로 극단적인 일본의 경제적 성장을 가져왔던 대동아공영권과도 맥이 닿아 있다. 일본의 극우 정치인들과 언론, 지식인들은 신자유주의에 따른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책을 '대동아 공영권이여, 다시 한번'이라는 정신으로 대치하고 일본 체제의 문제를 평화헌법과 북한, 동북아의 과거사 정리 운동의 문제, 인종주의 문제 등으로 호도해오고 있는 것이다.
  
  실상 일본에서 야스쿠니 신사와 '천황제' 지지 운동의 대열에서 전면에 서 있는 사람들은 기득권층이라기보다 경제적 위기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한국인이나 재일동포를 일본 경제력을 잠식하는 사람들로 인식하여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으며, 그러한 극우주의자들은 흔히 '내셔널리스트'들로 명명되고 있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그야말로 일본배타주의, 천황제주의, 또는 국수주의, 국군주의 등으로 번역함이 자연스럽다.
  
  행사가 진행된 일본교육회관은 야스쿠니 신사와 지척이었다. 회관 주변엔 일본 극우들이 진을 쳤고, 일본 경찰도 차량 몇 대를 대동하여 에워쌌다. 거리 곳곳에는 "조센진은 떠나라," "독도가 아니라 다케시마(竹島)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또한 그들은 무서운 목소리로 "조선을 일본이 해방시키지 않았으면,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다"고 외치며 대동아공영권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 일장기를 든 일본 극우들이 거리시위를 하고 있다. (위), 한 극우단체의 표어 "독도가 아니라 다케시마다." (아래)ⓒ김귀옥

  대동아공영권의 추억
  
  추억은 기억 속에만 있지 않고 사물을 통해 관습화된다. 일본인들은 일본왕, 즉 '천황'의 상징으로 '야스쿠니(靖國) 신사'를 떠올린다. 일반적으로 일본 역사에서 신사는 토속신앙과 불교의 결합의 산물이다. 신사(일본어: 神社 じんじゃ)는 일본의 신토신앙에 근거해 만들어진 종교시설로 일본 전역, 마을마다 공동체마다 마을 사람들이 추렴하여 건립되었다. 일본제국주의 시대 일제는 점령했던 지역이면 모든 곳에 신궁이나 신사를 세우고 조선인이건, 대만인, 중국인, 필리핀인들이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일제 강점기 서울의 학생들은 남산 위에 있던 '조선신궁'을 참배했던 기억을 떠올리곤 했다. 경성농업학교(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자리)를 다녔던 이OO씨는 일본인 교사에게 왜 조선신궁 참배를 해야 하는지를 질문하였다가 "야 그것도 질문이냐. 이런 건방진 노무 자식"이라는 거친 말과 함께 주먹찜질을 당했던 아픈 추억을 떠올렸다.
  
  그 신사의 한가운데 야스쿠니 신사가 있으나, 야스쿠니 신사는 일반 신사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야스쿠니 신사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위해 목숨을 바친 3,588명을 제사지내기 위해 1869년 도쿄 초혼사[東京招魂社]로서 창건되어, 출발부터 철저하게 메이지 일본왕에 대한 충성을 상징하고 있다. 그 이름을 야스쿠니로 개칭한 것은 1879년 국가를 위해 순국한 자를 기념하기 위해서 였다.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는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되어 있다. 1945년 8·15 이후 미군정하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A급 전범으로 28명이 기소되었으며, 수감 중 사망한 3명을 제외한 25명에게 유죄가 선고되었다. 이 선고로 도조 히데키 등 전직 총리 2명을 포함한 7명이 교수형에 처해졌고, 16명은 종신금고형, 2명은 유기 금고형을 받았다. 이들 중 처형된 7명과 복역 중 사망한 7명의 이름이 1978년 후쿠다 내각때 야스쿠니 신사의 명부에 올려져 비밀리에 합사됐다.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8·15 공식참배를 한 이래로 일본 경제가 어려워지던 1996년 이후 간헐적으로 8·15 참배를 해왔으며 고이즈미 수상때는 한국이나 중국 등의 반발에도 계속 참배했다. 야스쿠니 신사의 부속물인 유슈칸 전쟁박물관은 과거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을 미화, 찬양하고 있다.
  
  그러한 야스쿠니에 2만 2000 여명에 이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족과 남한이나 북한 정부의 동의도 없이 강제로 합사되어 있다. 현재 야스쿠니 신사의 군신으로 포함되어 있는 조선인 징병자의 딸인 이희자 씨는 아버지의 이름을 야스쿠니 신사로부터 분사(分社)시키기 위하여 일본정부와 투쟁중이다.
  
  이희자 씨가 야스쿠니 신사를 항의 방문할 때마다 대동아공영권의 몽상에 빠져 있는 일본 극우 단체들은 이희자 씨 앞에서 소리를 질러댄다. "조센진은 우리 나라(일본)를 떠나라." 이희자 씨는 극우들의 주장에 "조센진", 즉 "한국인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은 어째서 우리 아버지를 놓아주지 않으려 하는가?"라고 말하며 통곡했다. 아직도 야스쿠니 신사에 군신으로 합사된 한국인들에게는 일제 식민시대는 끝나지 않았고, 해방되지도 못했다.
  
▲ 야스쿠니에 합사된 조선인 영령을 그린 홍성담 화백의 그림. '야스쿠니 미술 전시회'에서 촬영. ⓒ김귀옥

  과거사 청산하지 못한 일본으로부터의 교훈
  
  야스쿠니 신사에는 현재 일본의 모순이 총집결되어 있다. 야스쿠니 신사는 '정교 분리의 원칙'위에 수립되어 있는 일본 헌법 27조를 위배하여, 일개 신교를 국교화하고 있다. 더 나아가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를 일본 수상이나 정치인들이 참배하는 것은 결국 일본 평화헌법 9조를 정면 위배하며 군국주의 부활을 획책하려는 기도를 깔고 있다. 나아가 일본은 야스쿠니 문제 등을 빙자하여 인종주의, 민족차별주의를 조장하고 있다.
  
  일반 일본 학생들은 한국이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무식을 가장한 무관심의 전형을 표출하는 것이다. 어떤 일본인은 '겨울연가'의 배용준은 일본사람인 줄 알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말 더빙을 했기 때문에 몰랐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한류'의 미몽에 빠져있지만 실상 한류는 화해의 언어가 아니라, 대중매체가 조작한 산물에 불과하다. 오히려 혐(嫌)한류의 역풍으로 그 진상이 나타났음을 깨달아야 한다.
  
  많은 일본 지식인들은 여전히 일본은 서구의 일원이라고 인식하는 탈아론(脫亞論)에 빠져 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대동아공영권을 낭만적으로 여기며, 일본의 침략을 '해방'으로 호도하는 주장이 높아지고 있다. 그들은 1945년 8월 6일과 9일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폭의 경험을 통하여, 태평양전시 수백 만명 학살에 대한 가해의 역사를 피해의 역사로 호도하기도 한다. 심지어 700여만 명의 조선인을 강제징용했던 문제나 8만~20만여 명의 조선인 처녀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화시켰던 문제를 사과하는 일본 지식인들을 두고 '자학사관'에 빠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특수를 통하여 경제 대국이 되었고 일본이 가진 수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세계인으로부터 진정으로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 앞에 겸손함, 진실을 모르는 채 1945년 8·15 패망 이후 한 번도 제대로 과거사 청산을 하지 못하고 한반도 식민과 수탈의 역사를 '서구로부터의 해방'과 '근대화'로 호도하고 있는 지식인과 정치인이 있는 한 일본에는 미래가 없다. 이러한 일본으로부터 한국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이 글은 <민족화해> 2008년 9·10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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