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의 고리, 곤지왕
[김운회의 '새로 쓰는 한일고대사'] 〈33〉 의문의 고리, 곤지왕 ②
2008.11.19 08:06:00
의문의 고리, 곤지왕
(1) 의문의 고리, 곤지왕

곤지왕자(昆支王子 : ?~477)는 5세기 백제 개로왕의 아들로 동성왕·무령왕의 아버지입니다.4) 곤지왕자는 458년 개로왕의 주선으로 송나라로부터 정로장군 좌현왕(征虜將軍左賢王)에 봉해집니다. 일본측의 사료에서는 곤지왕자를 휘(諱)만 부르는 일은 없고 반드시 뒤에 군(君)이나 왕(王)자를 붙여 부릅니다. 즉 『일본서기』와 『백제신찬』에서는 곤지왕(昆支君), 『신찬성씨록』에서는 곤지왕(琨□王)으로 높여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야마토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천황이라는 말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그는 왜왕(倭王)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말이지요. 오히려 반도부여에서는 곤지를 장군이나 내신좌평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좌현왕이라는 말도 주로 쥬신계의 호칭입니다. 즉 쥬신의 제왕에 이은 제2인자가 받는 호칭이었습니다. 이것은 반도부여가 쥬신의 전통을 고수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는 곤지왕이 개로왕의 동생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다른 사서들 예를 들면, 『송서』, 『양서』등의 기록으로 보면 개로왕의 아들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곤지왕이 개로왕의 아들[子]인지 동생[弟]인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왜왕(倭王) 즉 일본 천황(天皇)의 계보와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여러 사료를 동원하여 이 문제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일단 이 문제는 덮어둡시다(다음 장에서 다시 심층적으로 분석할 것입니다).

앞서 본 대로 『일본서기』에 나타난 개로왕과 곤지왕의 이야기는 황당합니다. 즉 개로왕은 자기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곤지왕에게 주어 함께 일본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요즘의 관점으로는 이해가 안되지요.

그러나 예로부터 군왕무치(君王無恥)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옛말에 이르기를 영웅은 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간흉함과 계략이나 때로는 독기를 품어야하고[奸凶計毒], 군대를 이끌고 전쟁을 할 때는 피아(彼我)를 막론하고 속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兵不厭詐] "임금이 된 자에게는 세상에 부끄러워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이 논리는 매우 위험할 수도 있지만, 종묘사직(宗廟社稷) 즉 국체(國體)를 보중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이 가능하다는 말로 해석이 됩니다. 사실 망국(亡國)이 더 무서운 상황이 아닙니까? 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유태인(Jew)들이 동네북처럼 집단적으로 학살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겠습니까? 모두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케사르(Caesar)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더니 다시 안토니우스(Antonius)를 자기의 침실로 유혹하여 로마의 내전(內戰)을 유도한 클레오파트라(Cleopatra)를 욕하는 이집트 국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두 남자의 인생을 망쳐놓고 그녀가 다시 옥타비아누스(Gaius Octavius Thurinus : 아우구스투스)를 유혹해보려고 했던 시도를 음탕한 행위로 비난할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 곤지왕이 개로왕의 동생이면,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아마도 개로왕의 행위는 형사취수혼(兄死取嫂婚)과도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곤지왕이 개로왕의 아들이라면 형사취수혼과는 큰 상관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두루 대단군과 같이 친어머니를 제외한 아버지의 후궁들을 모두 취할 수 있었던 유목민들의 유제(遺制 : hereditary system)일 수도 있지만, 곤지왕의 경우는 우리가 앞서 본 담로제도와 부여계의 왕통의 유지라는 측면이 더욱 강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서 개로왕이 자기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곤지왕에게 주어 함께 일본으로 보냈다는 것은 왕조의 영속성과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 안전한 조치 가운데 하나라는 말입니다.

왕이나 왕의 직계 혈족들은 항상 암살의 위험 속에서 살게됩니다. 그러니까 개로왕의 행위는 만약 왕통이 끊어질 경우에 대비하여 왕의 혈족들을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여러 지역에서 키움으로서 왕가를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만약 본국의 왕이 서거할 경우, 보다 안전한 지역에서 살아남은 왕족을 중심으로 다시 국가를 부흥시킬 수 있는 강력한 정통성의 징표가 바로 왕족의 분산양육(分散養育)입니다. 특히 부여왕계는 왕권도 상대적으로 강하지 못했고, 만주에서부터 열도에 이르기까지 항상 위태로운 상태였습니다. 개로왕대는 그 위험이 절정기에 이르렀습니다.

개로왕이 즉위한 해인 455년에 고구려의 침공이 시작되었는데, 연민수 교수는 이것이 백제왕위 교체기의 허점을 노린 기습공격이었다고 합니다.5) 이후 고구려의 공격이 집요하게 전개되면서 461년에는 개로왕은 곤지왕을 일본에 보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반도부여(백제)는 472년에는 북위에 국서를 보내 고구려에 대한 응징을 호소하지만6) 성공하지 못합니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에는 "개로왕 을묘년 겨울 박(狛)의 대군이 와서 큰 성을 공략한 지 7일 만에 왕성이 함락하여 드디어 위례를 잃었다. 국왕 및 태후, 왕자 등이 다 적의 손에 죽었다."7)라고 합니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짐작이 가는 내용입니다. 이 시기에 문주왕을 도와 남으로 내려갔던 모꾸만치[목만치(木滿致) 또는 목협만치(木劦滿致)]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8)

그러니까 부여의 중흥을 절실히 꿈꾸었던 개로왕의 이 같은 조치(곤지왕자 파견)는 부여의 왕통과 정체성[또는 정통성]을 보호·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본대로 아내를 하사하는 대상은 절대적으로 신임하거나 총애하는 대상이 아니면 안 되지요. 경우에 따라서 이렇게 하사된 아내와 실제적인 성관계를 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또 야마토 지역에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는 부여계에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반도 부여왕의 신임이 절대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개로왕은 견고한 열도부여의 건설을 위해 자신의 아들(임신중)과 자신의 동생(또는 아들)인 곤지왕을 보낸 것으로 판단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곤지왕은 반도 부여왕으로부터 야마토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위임받아 간 것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곤지왕은 형수(또는 계모)와 함께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카가라노시마[각라도(各羅島)]에서 형수(또는 계모)가 몸을 풀고 아들이 태어나는데 그가 바로 백제 무령왕이라고 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무령왕의 휘인 사마 즉 '섬에서 난 아기'라는 것인데 이것은 이후 무령왕릉의 발굴로 입증이 되었습니다.9) 사정이 어떠하든 무령왕은 곤지왕의 아들로 성장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 [그림 ②] 무령왕릉

그런데 일부에서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직계 자손이 아니라고 합니다. 무령왕의 출생에 관해서 이기동 교수는 "무령왕은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장남으로 출생한 것이 확실하며,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뒤에 정치적인 목적에 의하여 꾸며진 한낱 계보적인 의제(擬制)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0) 즉 무령왕은 개로왕의 직계가 아니라 조카인데 후일 왕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개로왕의 자손으로 위장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분석도 일부 타당합니다.

앞으로 보시겠지만 그 동안 제 연구의 결과, 곤지왕은 개로왕의 아들이지만 직계 장자는 아니고 열도의 부여건설에 큰 역할을 한 분입니다. 곤지왕은 반도부여의 멸망(475) 당시 열도부여의 건설과 반도부여의 재건이라는 두 가지 무거운 임무를 맡은 상태이기 때문에 자기 아들인 무령왕을 반도로 보낼 때는 개로왕 직계손임을 강조할 필요가 절실했을 수가 있습니다(반도의 사학계에서는 개로왕을 평가절하하여 난봉꾼, 폭군의 대명사 쯤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실제는 조금 다릅니다. 이 부분은 '개로왕을 위한 만사'에서 다시 다룰 것입니다. 앞으로 보시겠지만 이후 일본 천황가는 바로 개로왕의 계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개로왕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다시 해야 합니다. 제가 분석해본 결과 개로왕의 죽음은 부여계의 각성을 초래한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특히 『일본서기』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편찬된 사서이므로 시조급의 인물들에 대해 중요한 역사적인 왜곡이 있었습니다. 진구황후의 경우가 대표적인 것이지만, 유라쿠 천황, 게이타이 천황, 킨메이 천황, 텐무 천황 등의 부분의 기록들을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야마토에 이르지 못하고 무령왕이 출생하자 이를 다시 백제로 보낸 문제를 생각해 보면, 개로왕은 반드시 자신의 시앗을 야마토에서 출생시켜서 야마토를 지배할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정황이 야마토는 부여계의 직계 왕손들이 지배해야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던 것 같고, 그 부여계는 그저 이식된 것이 아니라 열도 내에서 토착화된 사람들에 의해 재건되어야 할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일부에서는 당시 일본의 천황들이 부여계가 아니라는 견해들을 강하게 제기합니다. 즉 한제이 천황(反正 天皇 : 5세기 전반)은 고구려계이고 인교 천황(允恭 天皇 : 5세기 중반)은 신라계라고 하는데11) 이 견해는 일본 사학계 일부의 지지를 받기도 합니다[당시 천황을 순서대로 열거하면, 한제이(反正) - 인교오(允恭) - 안코오(安康) - 유라쿠(雄略) 등의 순서입니다]. 이 말은 그 만큼 부여계가 그때까지도 열도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고 토착화된 고구려계와 신라계의 세력이 아직도 강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생각됩니다.

그 동안 제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시기를 지나서 6세기 이후에는 부여계가 확고히 열도를 장악했다는 사실입니다(이 부분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분석할 것입니다). 이 시기는 부여계에 의한 열도의 통일 시기와도 대체로 일치합니다. 시기적으로는 유라쿠 천황 이후의 일본은 확실히 부여계의 나라라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근초고왕 당시에 일본을 공략하여 조공을 받았다고 하지만 실효적(實效的) 지배를 하지는 못한 듯하고 유화정책으로 토착세력들과의 융합을 도모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고구려의 남하가 계속되자 열도를 보다 실질적으로 지배하지 않으면 안되는 절박감이 부여계의 지배자들에게 있었고, 이것이 개로왕의 아들을 직접 파견하게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니까 토착화된 많은 반부여계 세력의 대대적인 숙청이 필요했겠고, 그 임무를 곤지에게 맡긴 것이죠.

어쨌든 참으로 복잡합니다. 개로왕 - 곤지왕 - 동성왕 - 무령왕 등 일련의 비밀의 고리를 풀어내는 것은 힘든 여정입니다. 하지만 그 끝이 보일 때까지 추적하고 또 추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천년을 내려오는 한일 고대사의 질곡들을 풀어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 주

(4)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성왕은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이다".라고 한다(『삼국사기』「백제본기」동성왕). 그런데 문주왕이 개로왕의 아들이므로 곤지는 개로왕의 아들이 된다.
(5) 연민수 「五世紀後半 百濟와 倭國-昆支의 행적과 東城王의 즉위사정을 중심으로-」『고대한일관계사』(혜안 : 1998) 414쪽.
(6) 『三國史記』「百濟本紀」 蓋鹵王18年條, 『魏書』「百濟傳」
(7) 『日本書紀』「雄略紀」20年冬에 인용이 된 『百濟記』
(8) 여기서 말하는 박(狛)이란 고구려를 말하는 것으로 한자로 보면 늑대이지만 쥬신의 말로 보면, 태양을 의미하는 밝, 맑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말은 한자로는 발(發), 맥(貊), 백(白) 등으로 표현되어 왔다. 그리고 『일본서기』오우진 천황 25년에서 인용하고 있는 『百濟記』에 따르면, 모꾸만치(목만치)는 모꾸라곤시(목라근자)가 신라를 정벌할 때 얻은 부인에게서 난 자식으로 모꾸라곤시의 공으로 그 아들인 목만치가 임나 일을 전체적으로 관장하였다고 한다.
(9) 반도의 사학계에서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 혹은 동생인 곤지왕의 아들이라고 되어있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오랫동안 신뢰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려왕의 지석(誌石)에서 사마왕(斯痲王, 무령왕)이 523년 5월 7일 임진(壬辰)에 향년 62세로 붕어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무령왕은 461년(또는 462년)에 출생한 것이고 이 시기에 곤지왕이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이 확실하다. 이 기록은 『일본서기』에서 인용하고 있는 『백제신찬』의 기록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10) 이기동 『백제의 역사』(주류성 : 2006) 122쪽.
(11) 文定昌 『日本上古史』(柏文堂 : 1970) 312~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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