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경제위기, '유효수요 창출'만으론 해결 안돼"
[특별기고] "구조적 불균형 해소해야"…경제위기에 다시 읽는 케인스
"현 경제위기, '유효수요 창출'만으론 해결 안돼"
I.

저자인 로버트 스키델스키(Robert Skidelsky)는 영국 워릭 대학(Warwick University)의 명예교수로서 1960년대 말부터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전기를 쓰기로 작정하여 약 30년에 걸쳐서 케인스의 생애를 세 권의 책으로 그려낸 바 있다. 이 3부작은 케인스에 관한 거의 모든 것 (그의 가계, 부모 형제 자매, 교육, 경력, 취미, 교우, 결혼, 가정생활, 사회생활, 경제사상과 그 변천 과정, 당시의 영국 및 유럽의 정세, 1, 2 차 세계대전 시기의 정책 방향, 그리고 그의 저작물 및 문필활동 등)을 엄청나게 상세하게 기술했다. 케인스에 관한 모든 자료를 다 수집 열람하고 케인스를 아는 모든 사람을 만났으며, 케인스에 영향을 미친 시대상 등을 망라하여 종횡으로 평가했다. 그 3부작은 총 2200 페이지에 달하는, 내가 아는 역사상 어떤 전기보다 방대한 전기이다. 그것은 또 19세기 말부터 1960년대까지의 영국 및 유럽의 역사, 사회, 경제의 해설서이기도 하다.

▲ ⓒ프레시안
스키델스키는 다시 이 3부작의 약 40% 분량이 되는 케인스의 단행본 전기 『John Maynard Keynes 1883-1946: Economist, Philosopher, Statesman』 (2003)을 펴냈다.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책이 바로 이 책인데, 고려대학교의 고세훈 교수가 『경제학자 철학자 정치가 존 메이너드 케인스』라는 제호로 완역했다. 고 교수는 이 책을 완역하는 데 약 4년이 걸렸고, 우리말로 총 1600면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두 권으로 나누어서 출간했다. 고 교수는 이 책을 완역함으로써, 우리 학계와 일반인들에게 크게 공헌했고, 아마 그 자신도 많은 것을 배웠으리라 생각한다.

스키델스키의 케인스 전기들은 어느 것을 막론하고 모두 방대하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첫째, 케인스가 살던 시대는 1, 2차 대전을 겪은 격동의 세기였는데, 케인스는 이 격동기의 흐름을 누구보다도 잘 관찰하고, 이해하고, 그 시대정신을 주도하고, 정책 방향을 제시했다. 그의 사상과 생애는 바로 20세기 역사의 주요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짧은 책으로 그것을 요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둘째, 케인스는 아마 어떤 사람보다도 다양한 분야에 대해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다채로운 활동을 펼침으로써 각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그의 활동 하나하나가 자연스럽게 경제, 정치, 역사 및 철학과 관련되어 있어서, 간단한 책으로 그를 묘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 자신도 28년전 로이 해로드 (Roy Harrod)가 쓴 케인스 전기인 『케인스 생애』 (The Life of John Maynard Keynes, 1951)를 읽은 후에, 그의 이론과 업적에 관한 책 (조순,『케인스 - John Maynard Keynes』『經濟學全集(古典篇)』15, 裕豊출판사. 1981)을 낸 적이 있었지만, 그의 수제자 격인 해로드의 전기조차도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 바 있다.

케인스의 전기는 그 밖에도 많다. 『케인스 전집』(The Collected Writings of John Maynard Keynes) 30권을 편집한 D. E. 모그리지 (Moggridge)가 쓴 방대한 『Maynard Keynes - An Economist's Biography』(1992) 도 900페이지에 달하는 전기이다. 그러나 이 책 역시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스키델스키는 보다 완전한 '최종적'인 전기를 내기 위해 이 단행본을 쓴 것으로 보인다.

고 교수가 상, 하 두 권으로 완역한 스키델스키의 전기의 내용을 여기서 요약할 수는 없고, 지적할 만한 점도 없다. 케인스에 관한 자세한 것을 알고 싶으면 이 책을 독파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학자 카(E. H. Carr)가 주장한 바와 같이(C. H. Carr, What Is History? chapter 1, The Historian and His Facts) 완전히 객관적인 역사란 있을 수 없다. 케인스의 일생에 관해서도 그것을 관찰하는 사람에 따라, 그의 사상과 행동에 대한 평가는 다를 것이다. 그의 경제관, 세계관, 문명관, 정치관, 사회관 등은 독자에게 각기 다른 많은 교훈과 감동을 줄 것이다. 그래서 이하에서 나는 최근 세계경제에 나타나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변화와 앞으로의 향방에 관해, 독자들의 참고로 제공하고자 한다.

II.

아무리 위대한 인물의 사상도 시공(時空)을 초월할 수는 없다. 케인스의 세계관, 경제관은 그가 살던 시대(19세기말부터 20세기 상반에 이르는 기간)의 영국을 떠나서 논할 수는 없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프레시안
케인스는 에드워드 시대 영국의 상류 지식계층 출신으로 나중에는 귀족이 된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경제관은 당시의 영국의 상류 지성인의 의식을 반영한다. 당시의 영국은 제국의 전성시대(全盛時代)가 지나서 패권(覇權)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낙조(落照)를 보면서 자랐고, 영국이 표방한 자유방임(自由放任) 정책과 영국이 이끌던 금본위제도(金本位制度)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을 다른 학자보다 먼저 감지했다. 케인스는 자본주의 문명의 본질을 못 마땅하게 생각했으나, 에드워드 시대의 영국 지성인의 가치관은 유지돼야 한다고 보고 그의 모든 공사의 활동은 이 가치관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대내 대외(對內 對外)정책을 자유방임의 족쇄로부터 해방시켜서,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을 통해 자본주의를 위기로부터 구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경제학계부터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전간기(戰間期)에 쓴 논문과 소책자를 모은 책의 표제를 『설득논집(說得論集)』(Essays in Persuasion )이라고 한 것이라든지, 1911년 28세 때부터 1946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3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이코노믹 저널(Economic Journal)>의 편집장을 맡은 이유도 그가 경제학계를 설득하기 위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그의『일반이론(一般理論)』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그 책은 이론서이기도 하지만, 순수이론보다는 설득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은 바 있다. 그는 자기의 지성과 설득력에 자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사상가, 경제학자, 그리고 경세가(經世家)로서의 케인스의 특징은 스키델스키 전기의 도처에 잘 나타나 있듯이, 모든 고정관념(固定觀念)으로부터 자유로웠다는 데 있다. 그는 진정한 자유주의자인 동시에 애국자였다.

1차 대전 직후, 대독일 강화조약의 협상 당시, 영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36세의 케인스는 유럽 문명의 기반은 결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견고한 것이 아니고, 연합국이 독일에 대한 가혹한 배상(賠償)요구로 독일경제의 존립을 막는다면, 유럽문명은 죽는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의 비전이 끝내 무시됐을 때, 그는 1919년 6월 파리를 철수하여, 그해 11월『평화의 경제적 귀결』(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 1919)이라는 저서를 냈다. 이 책은 유명한 경구(警句), 명석한 경제분석, 그리고 유럽문명에 대한 그의 천재적인 이해가 번득이는 지금 읽어도 마음이 후련해지는 명저이다.

케인스는 『일반이론』이전부터 이미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부의 경제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는 정책적으로는 1925년에 이미 자유방임은 나쁜 정책이며,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공공투자가 민간부문의 투자부족을 보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금본위제도로의 복귀는 디플레를 가지고 올 뿐, 유익하지 않다고 보고 영국의 복귀를 통렬히 반대했다. 다만 이론상으로 실업의 장기화, 화폐수량설(貨幣數量說)의 결함 등 고전학파의 기본명제의 결함을 증명할 수 없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그 고민은 1936년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의 출간으로 해소되었다.

1936년까지의 그의 생애는 『일반이론』에서 언급했듯이, 고전학파의 잘못된 이론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긴 투쟁'(a long struggle to escape)의 과정이었다. 그는 끝내 그 투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자기의 시대를 열었다. 그 투쟁과정에서 심지어 자기 스스로의 일생의 노작(勞作) 중의 하나인 『화폐론』(A Treatise on Money, 1930)이 출간되자마자, 자신의 생각이 부족함을 감지하고, 하이예크(F. A. Hayek)에게, '나는 이미 그 책의 내용을 믿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2차대전후의 세계경제질서의 확립을 위한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 협상에서 그의 새로운 '국제통화'로서의 방코르(bancor) 구상이 미국대표 해리 화이트(Harry White)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그에게는 그것이 심리적으로 견디기 어려웠으나, 그는 끝까지 잘 참아냈다. 실망을 안고 귀국했지만 오히려 미국의 입장을 변호했다. 그의 애국심이 그렇게 시킨 것으로 보인다.

III.

케인스 이론은 단기 이론이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세계경제에는 인플레의 만연과 성장 동력의 침체 등이 나타나면서, 케인스 이론은 보수파의 격렬한 공격을 받아 빛을 잃었다. 사실, 임금의 하향경직성이 있는 제도 하에서 정부투자로 완전고용을 달성하자는 케인스 정책은 인플레를 유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기본 약점이고, 케인스 이론의 약점이기도 했다.

케인스 이론이 물러난 후로, 1980년대 초부터 미국과 영국에는 다시 자유방임주의가 경제정책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케인스를 포기하고 강한 영국과 미국을 표방한 '신자유주의'로 알려진 이 사상과 정책은, 두 나라 지도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소련이 붕괴한 후로, 미영 양국은 자유방임의 원칙을 금융부문에까지 확대하여 '자유화. 개방화, 민영화 및 작은 정부'의 이념을 전 세계에 전파했다. 90년대에는 이 정책으로 인해, 세계는 상당한 활기를 거두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 활기는 거품의 활기였다. 케인스가 1925년에 천명한 대로 자유방임은 영미 양국의 패러다임을 침몰시키고 말았다. 특히 금융부분의 자유방임은 많은 '파괴적인 이노베이션(destructive innovation)'을 불러옴으로써 자유방임의 폐해를 드러냈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계기로 케인스에 대한 관심이 다시 대두되기 시작했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신(新) 뉴딜'로 알려진 금융재정의 확대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금리를 0%로 내리고, 직접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하는 통화정책, 그리고 부실금융자산 매입을 위해, 1조 달러를 푸는 재정정책을 펴고 있다. 동시에 미국정부는 유럽에 대해, 재정적자가 GDP의 2%에 달할 정도의 재정확대정책의 채택을 권고했다.

이러한 '신(新) 케인스 주의'의 정책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런 정책이 단기적으로는 금융부문의 활성화를 달성할 수 있겠지만, 합리적인 실물부문의 부활을 가져오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 이번의 위기는 유효수요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경제의 거의 모든 부문에 깔려 있는 '불균형' 때문이었다. 유효수요는 돈을 뿌림으로써 완화되지만, 구조의 불균형은 돈을 뿌린다고 해소될 수는 없다.

어떤 불균형을 말하는가.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으나, 그 몇 가지를 든다면, 거시적으로는, 금융부문의 과잉비대와 실물부문의 과잉수척(瘦瘠), 과다소비와 과소저축, 경상수지와 정부수지의 적자 누적 등을 들 수 있다. 미시적으로는 공공부문의 약화와 제조업의 경쟁력 상실, 부와 소득분배의 양극화를 들 수 있다. 기업차원에서는 CEO 및 고소득자에 대한 과잉 보수, 주가(株價)지상주의 기업경영 등의 폐해를 들 수 있다. 이 모든 불합리와 불균형을 시정하자면, 정부가 유능하다고 해도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실물부문의 고용확대가 이루어지자면, 산업보호가 강화되어야 하며, 산업보호가 강화되자면, 글로벌 경제의 이념이 완화되어야 한다. 자유방임과 고용확대, 자유방임과 분배의 양극화축소는 양립하기 어려운 목표이다. 이것이 글로벌경제의 딜레마이다.

1930년대의 케인스주의는 봉쇄경제와 어느 정도의 산업보호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케인스가 『일반이론』에서 고용을 위해서는 고전학파보다는 중상주의가 더 났다는 것을 강조한 점에 유념해야 한다. 케인스는 자기와 같은 지성을 가진 엘리트가 경제를 관리해야 한다고 마음 속으로 믿고 있었다. 그는 자기와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지성의 힘을 믿었다. 그는 자기의 지성을 과신했다고 나는 보지만, 어쨌든 그는 지성주의자였다.

케인스는 달러를 세계금융제도의 기축통화로 할 것이 아니라, 방코르(bancor)를 결제단위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인스가 살아 있다면, 지금의 달러본위제도는 1차대전 후의 금본위제도와 같이 그 유용성이 사라졌다고 볼 것이다. 지난 날 미국경제는 달러본위 제도로 많은 덕을 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미국인의 절제의 상실을 촉진했고 끝내는 국제수지의 만성적인 적자를 장기화함으로써, 경제운영을 파탄에 몰아넣었다.

IV.

▲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 ⓒ연합
나는 1980년대의 어느 날 서울에서 만난 하이예크에게, '케인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하이예크는 '케인스는 천재였지만, 경제학은 잘 몰랐다'고 대답했다. 나는 케인스와 하이예크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하이예크의 이 대답에 전혀 놀라지는 않았다.

사실 케인스는 하이예크만큼 경제이론을 공부하지 않았을 것이고, 보통 경제학자들만큼 경제학을 중요시하지도 않았으며, 대부분의 경제학자에 대해 높은 존경심을 표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우리 손자 시대의 경제문제』(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1930)라는 글(J. M. Keynes, Essays in Persuasion. 1930에 수록)에서, '세계경제는 지금부터 100년 후(2030년)에는 먹고 사는 문제를 대부분 해결할 것이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은 그들이 하는 학문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으며, 따라서 먹고 사는 문제보다는 좀 더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라'고 충고했다.

그는 스승인 마셜 (Alfred Marshall)이 『경제학원리』를 쓰는 데 20년이 걸린 사실에 대해, '좀 덜 완벽한 것일지라도 빨리 내놔야 했을 것이며, 경제학에서 불후의 명저는 하나만 있으면 족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케인스는 그의 『인물평전』(Essays in Biography)의 「마셜 傳」에서 경제학자에 필요한 자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J. M. Keynes, Essays in Biography. Chapter 14. Alfred Marshall.)

'경제학의 연구는 아주 높은 전문적 자질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적 관점에서는, 철학이나 순수과학처럼 보다 높은 부문과 비교하면, 오히려 쉬운 분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경제학자는, 아니 유능한 경제학자조차도, 대단히 드물다. 쉬운데도 불구하고 뛰어난 학자가 대단히 드문 학문! 이 역설(逆說)에 대한 설명은 , 아마도 경제학의 거장(巨匠)은 여러 가지 재능의 드물게 보는 결합(結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데 있다. 경제학자는 어느 정도까지는 수학자이고, 역사학자이고, 정치가이고, 철학자여야 한다. -(中略)- 그는 미래의 목적을 위해,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연구해야 한다. 인간성이나 제도의 어떤 부분도, 그의 관심 밖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는 목적의식이 풍부해야 하며, 공평무사(公平無私)해야 하며, 예술가처럼 높이 날 수 있는 동시에, 때로는 정치가처럼 땅과 접근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셜의 다양한 능력을 두고 한 말이지만, 그 자신에 요구되는 자질의 평가이기도 할 것이다. 확실히 케인스는 그 누구보다도 이런 자질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무엇이 산 경제를 움직이는가를 알고자 했지, 경제학을 잘 알려고 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노력이 성공해서 그는 20세기를 움직였다. 앞으로도 그의 영향력은 계속될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inkyu@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