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또다시 '빼앗긴' 정권교체
[아시아 생각] 부정선거로 얼룩진 5.5 총선에 통곡한다
2013.06.14 07:18:00
말레이시아, 또다시 '빼앗긴' 정권교체
광주에서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5.18 민주화 항쟁을 기념하는지를 보면서 나는 말레이시아의 5.13 사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광주 민주화 항쟁이 일어나기 11년 전인 1969년에 일어났다.

광주에서 흘린 피는 한국을 민주화의 길로 나아가게 했고, 18년 후에는 군부정권의 후신 정당이 민주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로 이어졌다.

반면 쿠알라룸푸르에서 흘린 피는 39년 동안 말레시아를 괴롭힌 유산이 되었다. 공동체 내의 폭력이 준 상흔은 2008년 '정치 쓰나미'에 의해 아물기 시작했다.

말레이시아는 영국 식민지였던 세 지역의 연합체다: 말라야(현 말레이시아 반도) 그리고 보르네오 섬에 있는 두 개의 주인 사바와 사라왁이다.

말라야는 1957년 먼저 독립했고, 6년 뒤 사바와 사라왁 그리고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탈식민지화됐다.

다시 2년이 지난 뒤 싱가포르는 연방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던 말라야의 집권 연합에 싱가포르의 집권당이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말레이시아에서 분리됐다.
▲ 지난 5월5일 말레이시아 총선이 투표 조작과 매표 등 각종 부정행위로 얼룩졌다면서 야권과 지지자들이 항의 집회를 열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60년 가까이 지속된 일당지배체제

지난 5월 5일, 말레이시아는 말라야 독립 이후 13번째 총선을 치렀다. 말레이시아는 1955년 통일말레이국민조직(United Malays National Organisation, UMNO)과 소수 정당들이 집권 연정을 구성한 후 정권 교체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리고 거의 60년의 세월 동안 UMNO가 주축이 된 연정 국민전선(Barisan Nasional, BN)의 일당지배가 지속되면서 부패와 권력남용과 오만이 극에 달했다.

이번 총선에 많은 말레이시아 인들은 투표를 통한 정권교체를 기대했다. 가장 널리 퍼진 슬로건은 "Ini Kalilah"(이제 때가왔다!)였다.

수천명의 해외 거주 말레이시아 인들이 투표를 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편 투표제도를 사용할 수 없었고 또한 해외의 많은 유권자들은 이 제도를 신뢰하지 않았다. 수백만 명의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투표를 하기 위해 도시를 떠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투표율은 85%에 육박하며 역대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였다.

단순히 투표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정당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일반 말레이시아 대중들은 선거 감시단, 개표인단, 그리고 심지어는 야당 캠페인단이나 환경보호와 같은 사회 이슈를 홍보하는 캠페인단으로 자원해서 활동했다.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1969년 사태 이후 이번처럼 정치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득표율 소수 정당이 다수당, 어떻게?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소선구제의 노골적인 게리멘더링(자신에게 유리하게 선거구를 정하는 것)과 불균형한 의원 할당 덕분에 BN은 47%의 지지를 얻고도 60%의 의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는 1969년 첫 번째 패배 이후 집권 여당연합이 일반 투표율에서 진 두 번째 패배였다.

더 끔찍한 것은 아무도 BN이 실제 몇 표를 얻었는지를 알 수 없었고 아마 그 수는 47%보다 훨씬 낮을 것으로 보인다.

단지 BN이 모든 주류 언론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전략적으로 유권자 그룹에게 공공 기금을 배당하고 연회를 베풀며 무료 음악회를 열어 표를 샀으며 몇몇 지방에서는 현금을 나눠주기도 했다. 투표와 개표 과정에서는 조작이 난무했다.

처음에는 선거위원회가 여론의 압력에 못 이겨 이중 투표를 방지할 수 있는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사용하기로 했다. 선거위원회는 잉크가 5일은 지속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알고보니 일반 세제로 쉽게 지워질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먼저 투표한 사람들이 나중에 다른 사람인 것처럼 위장해 다시 투표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선거가 있기 며칠 전, 항공사 내부고발자들은 총리실이 투표에 참가하라며 사바와 사라왁에 있는 약 4만명의 이주 노동자들을 본토로 보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그들은 습관적으로 무효표를 던지거나 투표소에 일찍 나타나지 않은 유권자들을 대신해 투표하도록 지시 받았고 이를 위해 정부가 제공한 신분증을 받았다.

이러한 의혹은 대규모의 이주 노동자들이 공항에서 군사 기지나 이주민 수용소로 옮겨지는 것이 목격되면서 더욱 짙어졌다.

BN은 그러한 의혹을 전적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당초 이런 의혹이 불거졌을 때 한 각료는 전세기가 동원된 사실은 인정했으나 해당 이주노동자들은 "BN의 친구들"에 의해 고향에서 투표할 수 있도록 지원받은 적법한 유권자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왜 해당 유권자들이 자신들의 집이 아니라 "집단수용소"에 보내졌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의혹이 불거지면서 대부분의 이주 노동자들이 투표를 하지 못하게 됐겠지만, 일부 선거구 투표소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목격되었다.

조작과 부정행위는 개표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일부 선거구에서 야당의 개표원들은 투표수를 집계한 용지를 볼 수 없었다.

심지어 일부 개표소에서는 갑자기 정전이 발생했다. 전기가 다시 들어왔을 때 투표수 기입용지가 개봉된 상태였다는 사례도 보고됐다.

야당연합, 51% 득표율에도 정권교체 실패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 전 부총리가 이끄는 야당 연합 파카탄 라키아트(Pakatan Rakyat. PR)은 51%의 득표율에도 불구하고 연방의석 중 40%만 얻었다.

이 때문에 안와르 이브라힘은 BN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선거 개혁 운동을 벌이는 베르시 2.0(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를 위한 연합) 또한 BN 정부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집회가 수도 쿠알라룸푸르 일대와 각 주의 수도에서 10여 차례 열렸다. 이들 집회에는 약 2만 명에서 12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시민들이 검은 옷을 입고 모여 지난 5월 5일로 민주주의가 죽었다고 애도했다.

선거일을 뜻한 '505'와 의심스러운 정전 사고를 가리키는 '정전'을 새긴 검은색 티셔츠는 불티나게 팔렸다.

유례를 찾기 힘든 부정선거에 대해, 국민통합을 외치던 BN의 나집 라작 의장은 대응은 인종차별적 발언이었다.

그는 "중국계 쓰나미"라는 표현으로 UMNO와 BN에 반대표를 던진 유권자들은 중국계들 뿐이며, 이들 때문에 UMNO의 친중국 인사들이 거의 모두 낙선했다고 비난했다.

나집는 전체 유권자의 29%를 차지하는 소수 중국계들 중 80~90%가 PR을 지지하고, 전체 유권자의 60%를 차지하는 말레이-무슬림들 중 반 정도만 PR을 지지한다는 것을 근거로 내세웠다.

그의 주장은 말레이-무슬림들이 PR 지지층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소수 인종에 의해 장악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무시한 것이다.

도시지역에는 야당 지지세 뚜렷

독립적인 분석가들은 이번 선거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중국계 쓰나미"가 아니라 "도시 쓰나미"라고 해석했다.

BN이 지배하는 언론에 휘둘리지 않는 도시 지역에서는 BN이 압도적인 다수당의 지위를 상실한 반면, 정보 격차가 큰 농촌 지역에서는 여전히 BN의 독주가 지속됐다는 것이다.

PR을 지지하는 중국계 유권자 대다수가 도시 거주자이고, 도시에 거주하는 말레이-무슬림들 중 BN에 반대표를 던진 유권자들이 적지 않았다.

47%의 득표에 그친 나집 라작 총리의 의중을 받아 UMNO의 기관지 격인 <우투산 말레이시아(Utusan Malaysia)> 신문은 말레이-무슬림들의 불안감을 부추기는 기사로 한달에 걸쳐 지속적으로 내보냈다. 선거 이틀 뒤 "중국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도발적인 제목 기사가 신호탄이었다.

UMNO의 전위조직들은 반중 캠페인에 동원되고, 무슬림 소비자 연맹은 중국제품 불매운동에 나섰다. 한 전직 판사는 교육, 고용에서 지분 소유권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공적 영역에서 다수 인종에게 67%를 의무적으로 할당하는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말레이인으로 저가 항공사 에어아시아 X의 최고경영자 아즈란 오스만 라니(Azlan Osman-Rani)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나는 말레이시아 사람이다. 나는 인종차별에 반대한다. 나는 우투산의 논조에 역겨움을 느낀다"고 썼다가, 우투산과 동조세력으로부터 말레이인들에 대한 반역자라는 등 심한 공격을 받았고, 이들은 심지어 이 항공사에 대한 보이콧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정부 기관들도 반정부 인사들을 노렸다. 검은 옷을 입고 모인 집회에서 발언한 사람들과 집회를 조직한 사람들은 선동과 집시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새로 취임한 내무장관은 말레이시아의 소선구제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이 나라를 떠나라고 요구했다.

이민국 사무총장은 외국에서 말레이시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말레이시아인들은 여권을 말소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내무장관과 인터넷 규제당국은 BN이 주도하는 언론을 무력화시킨 인터넷의 힘에 놀라 네티즌들에 대한 감시도 강화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민주화, 넘어야할 난관 많아

나집은 정치적 지지가 도시 지역과 청년층 중심으로 약화되자 BN을 연정체제에서 단일 체제로 전환시킬 것을 검토하고 있다. 또한 그는 검은옷을 입고 모인 집회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선거위원회를 감시하는 특별위원회를 의회에 설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선거위원회는 "BN보다 더 BN스럽다"고 불릴 정도로 당파적인 성향으로 악명이 높았다. 나집는 두 명의 시민단체 지도자들을 내각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위 '개혁 조치'들이 의미있는 성과를 거둘 가능성은 거의 없다. UMNO은 일당지배의 전성기가 종식되고 양당 체제 시대가 이미 와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인정하게 될 때까지, 민주적인 경쟁으로는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UMNO는 선거 조작과 매표는 물론 인종 차별적 선동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패배를 막으려할 것이다.

말레시아가 민주화로 나가는 길은 일견 어두워 보인다. 야권이 UMNO-BN의 지배체제를 종식시키려고 1990년과 1998년에 애를 썼으나 실패했다. 2013년에 다시 도전했으나 또 실패하고 말았다.

말레이시아 야권은 정권교체를 해낼 수 있을까? 올해 말 새로운 선거구 획정이 예정돼 있는 가운데, UMNO가 의원수 할당과 게리맨더링을 자기들에 더 유리하게 관철한다면, PR은 55%의 표를 얻더라도 UMNO를 꺾지 못할 수 있다. UMNO-BN이 농촌 지역에서 강세를 보이는 현실도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낙담하기에는 이르다. 말레이시아는 다양한 인종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사회다.

민주주의가 정착되려면 문화적인 균질성이 요구된다는 것이 상식이다. 1957년 말레이시아의 영국 식민시대가 끝났을 때 인종 갈등을 막기 위해 다인종으로 구성된 정당체제를 만들도록 했으나, 정권교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당시 영국의 집권당이었던 노동당은 UMNO가 이끄는 연정에 맞서는 또다른 다인종 정당이 들어서도록 준비하거나 지원하지 않았다.

UMNO 내의 귀족적 엘리트들과 중국계, 인도계 자본가들의 동맹체제에 대항하는 대안세력이 있으면, 좌파 성향을 띨 가능성이 있다. 당시 냉전 시기에 영국은 이런 대안세력이 공산주의로 이어질 것을 크게 우려했던 것이다.

1969년 집권 연정이 말레이와 중국계를 기반으로 한 야권에 사실상 패배 했을 때 UMNO는 2013년 총선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계가 말레이의 지배에 반대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곧바로 중국계와 말레이 간 충돌이 쿠알라룸푸르에서 발생해 계엄통치와 정당 쿠데타로 이어졌다. 당시 나집 라작의 아버지이자 부총리였던 압둘 라작 후세인과 강경파 지지자들은 초대 총리 툰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았다.

1969년부터 1971년까지 계속된 계엄통치 기간에 압둘 라작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말레이시아를 UMNO가 지배하는 일당지배 체제로 바꿔놓았다.

분열 조장과 폭력의 공포 정치

일당지배 체제를 떠받치는 두 기둥은 분열 조장과 폭력이 주는 공포였다. 계급 갈등을 조장하고 말레이 무슬림 우대정책을 도입하면서 압둘 라작은 말레이-무슬림들을 UMNO의 안정적 지지자로 바꿔놓았다.

압둘 라작은 민주적 참여가 인종 긴장과 갈등만을 불어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하며 의도적으로 말레이시아를 비정치화 시켰다.

라작은 "인종 갈등이 곳곳에서 분출되고 있는 오늘날 말레이시아 사회에서 어떠한 정치운동도 인종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분열을 가속화 시킬 뿐"이라고 주장했다.

1959년 5.13 폭동은 이후 거의 모든 선거에 있어서 "평화를 원한다면 BN을 선택하라"는 공포의 메시지를 이용됐다. 특히 중국계들의 집회 참여는 금기시됐다.

압둘 라작의 유산은 지난 2008년 야권이 의회의 3분의 2를 장악해오던 BN의 아성을 깨고 5개 주정부의 다수당을 차지하면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폭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야권의 정당들은 주 정부 차원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서로 더욱 긴밀하게 협력하고, 공산주의와도 거리를 두는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

우투산 말레이시아와 UMNO은 2013년 총선 뒤 인종 갈등을 부추기려는 노력이 어떠한 긴장도 조성하지 못하자 낙담했다.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젊은이들이 마치 길거리 축제에 참가하는 것처럼 검은옷을 입고 집회에 몰려들었다. 오히려 의혹이 무성한 선거 이후 공동체 내의 결속이 강해졌다.

말레이 학생 지도자 아담 아드리(Adam Adli)가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중국계 지역에 위치한 경찰서에 수감되자, 많은 지역 주민들이 나흘간에 걸친 저녁집회에 참여했다. 지지자 중 18명이 체포되기도 했는데, 그중 15명은 중국계인 것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 인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에 나가야하지만, 자유를 얻는 그 날이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어두운 과거사도 정리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한국인들이 5.18 항쟁이라는 사건을 소중한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우리 말레시아인들도 5.13를 포함한 비극적인 정치적 사건들로부터 진실과 화해를 찾으려 노력할 날이 올 것이다.

*한국은 아시아에 속합니다. 따라서 한국의 이슈는 곧 아시아의 이슈이고 아시아의 이슈는 곧 한국의 이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에게 아시아는 아직도 멀게 느껴집니다. 매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시아를 여행하지만 아시아의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낯설기만 합니다.

아시아를 적극적으로 알고 재인식하는 과정은 우리들의 사고방식의 전환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또한 아시아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아시아에 속한 한 국가로서 한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참여연대 국제연대위원회는 2007년부터 <프레시안>과 함께 '아시아 생각' 칼럼을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필자들이 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문화, 경제,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인권, 민주주의, 개발과 관련된 대안적 시각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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