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직원이 술자리 분위기 띄워야!" '블루스' 제안에 그녀는…
[프레시안 books] 이은의의 <삼성을 살다>
2011.11.04 18:05:00
"여직원이 술자리 분위기 띄워야!" '블루스' 제안에 그녀는…
오만 가지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이 많아진 적도 참 오랜만이다.

미술대학원생한테서 받은 디자인을 유명한 디자이너 카렌 리틀의 작품으로 둔갑시켰다가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패소한 삼성에 관한 이야기, 국가인권위원회에 성희롱 피해 구제 신청을 넣었다는 이유로 부당 해고를 당한 현대자동차 사내 하청 노동자, 그리고 민영화 이후 3년 동안 40여 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KT까지, 주로는 '골리앗 대 다윗의 싸움'처럼 복잡하고 무거운 사건들이 떠오른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한 데로 모아진다.

'내가 이은의였다면 그렇게 싸울 수 있었을까?'

에세이의 주인공에 독자를 이입시킬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은 대단하다. 하지만 직장 생활 경험이 있는 사람, 특히 그 중에서도 여성이라면 이 책 <삼성을 살다>(사회평론 펴냄)를 읽는 순간 누구나 자신이 주인공 이은의가 되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은의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은의는 1998년에 삼성에 입사했다. 그녀 역시 여느 직장인처럼 인정받는 프로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나 상사의 성희롱을 문제 제기했다는 이유로 강제 발령을 당하고 경계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꿋꿋이 회사를 다니면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고 회사를 형사 고발했으며 민사 소송을 진행했다. 5년간의 소송 끝에 그녀는 이겼고 보란 듯이 회사를 나왔다. 이 책은 이은의가 겪은 12년 9개월간의 이야기를 기록한 에세이다.

"여사원으로서 해줘야 하는 의전이 부족한 거 아나? 아침에 상냥하게 모닝콜도 해주고 술자리 분위기도 좀 잘 맞추고 해야지 말이야…."

술자리에서 P팀장의 블루스 제안을 거절한 것이 이유였다. (178쪽)


▲ <삼성을 살다>(이은의 지음, 사회평론 펴냄). ⓒ사회평론

직장 여성은 누구나 상사로부터 블루스 제안을 받나 보다. 나뿐만이 아니다. 그런 경험을 이야기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중의 상당수는 마지못해 블루스에 응했고, 그 중의 상당수는 어렵게 거절했다. 나는 거절했지만 이은의처럼 더는 문제 제기를 하지 못했다.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어차피 문제 제기를 해 봤자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조용히 끝내는 것이 결과적으로 나를 위해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결국 내가 이은의였다면 그렇게 싸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직장 여성이 이은의처럼 싸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를 두고 비겁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실태 조사 결과는 비난의 화살을 다른 데로 맞춘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실시한 '여성 노동자 직장 내 성희롱 실태 조사'에서 약 40퍼센트의 직장 여성이 지난 2년 동안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대답했다. 그 중 80퍼센트 가량은 아무런 사후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대응해도 변화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랬다는 응답이 25퍼센트였는데 실제로 사후 조치를 취했을 때 상대방에게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응답이 50퍼센트가 넘었다.

문제 제기를 하면 업무나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을 것 같아서 침묵했다는 응답도 25퍼센트였는데 실제로 사후 조치를 취했을 때 그러한 불이익을 받았다는 응답이 50퍼센트 가까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누가 이은의처럼 문제 제기를 할 수 있겠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은의는 존경스럽다. 그녀의 용기와 끈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책에 해답이 있다.

이렇게 내가 지쳐 나가떨어지듯 퇴사해 버리면 그게 바로 선례가 될 터였다. 앞으로 성희롱이나 왕따를 당해서 문제제기를 하면 나를 선례로 삼아 구조 조정해 버리겠다는 말로 들렸다. 매일 아침 신문을 보면서 불끈 솟아나던 정의감이 일상에서는 망각되기 일쑤였는데, 엉뚱하게도 회사가 그것을 상기시켜주었다. (245쪽)

'내가 이은의를 알았다면 그녀를 대리해서 싸울 수 있었을까?'

이것은 변호사로서 고민하게 되는 또 다른 문제다. 내가 피해자일 때에는 내가 피해자라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피해자일 때에는 내가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쉽게 문제 제기하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노동자가 회사를 상대로 싸우는 것,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기 때문이다. 정보와 권력과 사람까지 독점한 회사는 언제든지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를 은폐하고 유리한 정보를 가공해 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는 것도 고통이지만 그 과정에서 동지들까지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긴 왕따 생활을 하는 동안 의지가 되었던 재무팀의 계약직 언니는 '나는 자존심을 지킬 힘이 없으니 연락을 하지 말아 달라'는 문자를 끝으로 연락을 끊었다. 언니의 비감이 그대로 느껴져 슬펐다. (216쪽)

이런 상황에서 이길 수 있으니 같이 싸우자, 당신은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하게 들린다. 특히 성희롱 사건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회사는 진실을 밝혀내기보다는 진실을 덮어버리려 한다. 회사가 진실을 밝혀내려는 액션을 취하는 경우에도 객관적인 제3자 대신 가해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이 조사를 하고 있으니 진실이 밝혀질 턱이 없다.

결국 문제를 제기한 사람만 불만 세력 혹은 부적응자로 낙인찍힌다. 회사는 피해자를 '꽃뱀'으로 몰아가면서 피해자가 해고를 당하거나 강등된 것은 피해자의 무능력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그리고 먹히기 때문에 이런 똑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된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 발생이 확인된 경우 지체 없이 행위자에 대하여 징계나 그밖에 이에 준하는 조치를 하여야 한다",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성희롱 피해 발생을 주장하는 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정하고 있지만 법과 현실은 괴리되어 있다.

법과 현실이 괴리된 데에는 섬세하지 못한 법 규정에도 책임이 있다. 성희롱 발생 시 사업주가 해야 할 조치에 대해 단 몇 줄이라도 법에 명시가 되어 있다면 회사가 이렇게 뻔뻔하게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 진데 이은의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그리고 그의 대리인 역시 지난한 싸움에서 이은의가 용기를 잃지 않게 해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감정이 들기도 쉬운 게 아닌데, 끝까지 버텨준 이은의에게, 그리고 그의 대리인에게도 고맙기까지 하다. 내가 이은의를 알았더라도 나는 그녀를 대리해서 싸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삼성과 싸우느라 삶이 피폐해졌다고들 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삼성이 우리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싸움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어야 할 것을 주고,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으면, 언젠간 그것들이 부메랑이 돼서 돌아오기 마련이다. (273쪽)

사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에는 고약한 심보가 먼저 발동했다. 아무리 겸손해한 척 한들 에세이가 결국 길게 늘여 쓴 자기 자랑밖에 더하겠냐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무리 객관적인 척 한들 작가적 관점에 의해 이미 한 번 걸러진 이야기 아니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비전문 작가의 에세이는 더욱 그렇다. 대필인지 아닌지 의심부터 하게 된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악질 상사로 묘사된 K 부서장이 정말 악질이기만 한 것일까라는 의문은 든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제법 쓸 만한 선수가 돼가고 있었다"라는 문장을 읽었을 때에는 역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는 손은 점점 더 빨라진다.

문장 하나하나에서 작가의 진심, 솔직함 그리고 섬세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어느 순간 책에 밑줄까지 쳐 가며 읽게 된다. "나도 여자라서 받는 상처가 많았지만, 누군가에게는 내가 여자인 게 상처가 되고 있었다"라던가 "다행히 절망보다 분노가 컸다"라는 문장에는 밑줄이 두 번 그어져 있다. 에세이가 주는 편안함 대신 긴박감이 앞서는 것도 신기하다. 작가의 필력이 여느 소설가 못지아니하다.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있는 기분이다.

아쉬운 점이 있기는 하다. "삼성을 살다"라는 제목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다. 삼성에 입사했다는 이유로 작가를 '엄친딸'로 설명한 것도 못 마땅하다. 광고 효과를 높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말이다. 작가의 이야기는 삼성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치졸하기 짝이 없는 대응 방식은 삼성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회사의 경우에도 비일비재하다.

엄친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작가와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런 용기 있는 행동은 엄친딸이어서가 아니라 '이은의'여서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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