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만큼 큰 철학자, 펑유란을 아십니까?
[프레시안 books] <펑유란 자서전>
중국만큼 큰 철학자, 펑유란을 아십니까?
"나는 1946년에서 1948년 사이에 미국에 한 차례 가서 여러 지방을 다니며 중국 철학사를 강의했다. (…) 당시 서양의 한학자(중국 연구자)들은 중국 문화를 죽은 것으로 여기고 연구했으며, 중국 문화를 박물관에 진열된 견본쯤으로 여겼다. 내가 그때 서양에서 중국 철학사를 강의했으니 박물관에서 해설사가 된 꼴이었다. 강의를 하다 보면 나 자신도 박물관 진열품이 된 느낌이 들었고, 그런 열등감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599쪽)

1984년에 출판된 <펑유란 자서전>(원제 : 삼송당자서(三松堂自序))에서 펑유란(馮友蘭, 1895~1990년)이 과거를 회고하면서 언급한 한 대목이다.

펑유란과의 만남

펑유란 하면 중국 철학사, 중국 철학사 하면 펑유란이 떠오를 정도로 그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현대 중국의 대표적 철학자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의 <중국 철학사>를 통해 중국 철학의 세계에 입문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중국 철학사>는 펑유란이 1947년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중국 철학사를 강의하면서 준비한 강의안을 정리하여 그 이듬해에 미국에서 출판한 것이다. 물론 영미권 독자를 위해 영어로 쓰인 것이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중국 철학사 입문서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말 번역본은 1977년에 초판(정인재 옮김)이 출판되어 나왔는데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중국 철학사의 교재로 처음 접했다. 정작 중국 대륙에서는 우리보다 늦게 1985년에 중국어 번역본이 나왔는데 당시에는 중국과 수교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사정조차 알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는 사실 펑유란이 누구인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그 책을 썼는지 또한 당시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니 앞서 언급한 그의 심정은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대로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날 뿐이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지난 후에 현대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현대 신유가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이 자서전을 읽게 되었는데 중국 철학이라는 '생명체'의 탄생과 성장 과정, 혹은 현대 중국의 대표적 지식인의 눈으로 본 격동의 중국 현대사를 다룬 잔잔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처럼 빠져 들어갔다. 그 후 이 책은 나의 인생의 행로를 바꾼 책이 되었다.

펑유란은 누구인가?

▲ <펑유란 자서전>(펑유란 지음, 김시천·황종원·송종서·이원석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웅진지식하우스
<중국 철학사>는 유명하지만 정작 그것을 쓴 펑유란의 인생이나 중국 현대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많다. 머우쫑싼(牟宗三)과 같은 타이완의 학자가 대표적인데 펑유란의 철학을 고름 철학이라고 비판한다. 겉은 반질반질하지만 속에 고름이 잔뜩 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머우쫑싼의 학문적 영향으로 펑유란에 대해 은연중에 비판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비판의 이유는 주로 그가 신중국에 남아 과거 자신의 철학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한 일이나 문화 대혁명 당시 공자 비판 운동에 가담한 사실 때문이다. 어떤 입장을 취하는가는 각자의 몫이지만 펑유란 자서전의 번역본 출판을 계기로 중국 현대사나 펑유란의 인생에 대해 이해가 깊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펑유란은 1895년에 허난성 당허현(唐河縣) 치이진에서 비교적 부유한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나서 1990년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향년 95세. 청 왕조, 중화민국, 신중국에 걸쳐 근 100년 가까운 삶을 산 것이다.

거대한 제국 혹은 문명에서 근대적 민족 국가로 탈바꿈하는 과정 속에서 중국은 반식민지로 전락하기도 하고 북벌 전쟁, 항일 전쟁, 국공 내전 등 많은 전쟁과 혁명을 치른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장제스의 국민당을 물리치고 신중국을 탄생시킨 이후에도 문화 대혁명과 같은 '대동란'을 겪는다.

정치가나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펑유란도 이런 시대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의 집안은 100년에 걸쳐 그 지방에서 이름을 떨쳐 온 명문 가문이었다. 진사 합격자 아버지에 고전에 조예가 있었던 어머니, 게다가 큰아버지와 삼촌까지 모두 수재(秀才, 생원)였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묵향이 가득한 학자 집안에서 자라났다.

펑유란은 어린 시절에 가숙에서 한학의 기초를 다진 후 1915년 베이징 대학 철학과에 입학한다. 유명한 5·4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가 이미 베이징 대학을 졸업한 이후였다. 하지만 학창 생활을 지배했던 문화적 분위기는 그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다.

5·4 운동을 전후로 한 시기는 중국과 서양의 문화가 격렬하게 충돌했던 시기였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서양의 각종 사조가 물밀듯이 들어오는 한편 이에 대한 전통 사상의 반발도 거세었던 것이다. 과연 중국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중국 문화의 나아가야 할 길은 어디에 있는가? 전면적으로 서양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고유의 문화를 부흥시켜야 하는가? 이런 문제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곤 하였다.

펑유란은 베이징 대학을 입학한 이후로 자신이 고민한 문제는 철학사를 중심으로 한 동서 문화의 문제였다고 회고한다. 그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1919년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에 유학을 간다. 그는 여기서 스승 존 듀이와 윌리엄 몬태규를 만나 각각 실용주의와 신실재론을 사사받는다.

3년 만에 "인생이상의 비교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펑유란은 1923년 귀국한 이후 몇 개 대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1929년 명문 칭화 대학의 교수로 부임한다. 항일 전쟁 기간 중에 칭화 대학은 쿤밍에서 베이징 대학, 난카이 대학과 연합해서 저 유명한 시난연합대학으로 변신하는데 거기서도 그는 문과 대학의 학장을 맡았다.

이 시기를 전후로 중국은 북벌 전쟁, 항일 전쟁, 국공 내전 등 계속된 전쟁으로 전국 시대에 비견될 만큼 혼란스러웠지만 그는 철학사뿐만이 아니라 신리학(新理學)이라는 자신의 철학 체계를 구성하는 여섯 권에 달하는 저작(정원육서)을 속속 발표하면서 학문적으로 절정의 시기를 맞이한다.

앞서 말한 <중국 철학사>는 바로 이런 격변의 시기를 배경으로 탄생된 그의 학문적 성과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매우 짧고 간략하기는 하지만 이미 상하권의 두꺼운 철학사와 신리학이라는 철학 체계를 완성한 이후의 저작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깊게 들어가서 얕게 나온 심입천출(深入淺出)의 내공이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말이다. 원래 펑유란의 문장은 복잡한 문제를 간결하게 서술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신중국 이후의 펑유란

국공 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기울자 상당수의 저명한 학자들은 장제스를 따라 타이완으로 향했지만 그는 예상 외로 베이징을 떠나지 않았다. 신중국 성립 이후에 칭화 대학 철학과가 베이징 대학에 통합되자 그는 1952년부터 이 대학 철학과 교수로 줄곧 봉직하였다.

하지만 펑유란이 대륙에 남은 대가는 혹독했다. 토지 개혁에 참가해야 했으며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비판해야 하는 등 모진 시련에 직면해야 했다. 1957년 전통 계승의 방법론으로 그가 제기한 '추상계승법'은 맹렬한 비판을 받기에 이른다. 문화 대혁명 기간에는 반동학술권위로 몰려 고생하다가 비림비공운동(批林批孔, 린뱌오를 비판하고 공자를 비판한 운동)의 와중에 베이징 대학과 칭화 대학으로 구성된 공자 사상 대비판 그룹의 고문에 불려 나가게 된다.

이는 평생 견지했던 자신의 존공(尊孔)의 입장을 부정하는 것이었지만 물질적으로는 편안한 시기였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문혁을 10년간의 대동란으로 비판한 개혁 개방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는 8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에 또 다시 곤란한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 자서전은 바로 이런 배경 하에서 그의 나이 89세에 완성한 것이다. 4장, 5장, 6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가 구술하고 나중에 전집을 편찬한 제자 투유광(涂又光)이 받아 적은 것이다.

이 당시 이미 <중국 철학사 신편> 1권과 2권이 나왔지만 펑유란은 중국 철학사를 새롭게 쓰는 작업을 계속한다. 이는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일이었지만 문화 대혁명 기간 중에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개혁 개방 이후에 비로소 다시 본격적인 작업을 계속한 것이다.

그리하여 펑유란은 85세부터 시작하여 9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 몇 달 전까지 10년 동안 그야말로 생명을 바쳐 <중국 철학사 신편> 일곱 권을 완성한다. 당나라의 시인 이상은의 시구처럼 "봄누에는 죽어서야 실뽑기를 그치고 촛불은 재가 되어서야 눈물이 비로소 마른(春蠶到死絲方盡 蠟炬成灰淚始乾)" 격이었다.

눈도 잘 보이지 않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 이런 고령의 나이에 이토록 방대한 저작을 완성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하겠다. 펑유란은 그가 해야 할 일을 완수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숨을 거두었다. 그가 중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헤치며 온갖 환란을 겪으면서도 자살하지 않고 실명된 상태에서 한 순간 한 순간 차오르는 죽음을 참아내며(忍死須臾) 자신이 짊어진 이런 역사적 사명을 어떻게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결국 유가(儒家)의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知其不可而爲之)" 집착의 정신과 "구름은 푸른 하늘에, 물은 물병에 있다네(雲在靑天水在甁)"라는 시에서 표현된 불가 혹은 도가의 초탈의 정신의 조화가 아닐까 한다. <중국 철학사 신편>을 <중국 철학사>와 비교하면 일단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한 이후의 저작이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시장 경제의 길을 걷고 있지만 엄연히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는 요즘 중국에서 유학이나 공자가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것을 비추어 볼 때 그 차이란 당시에 생각했던 것처럼 큰 것이 아니었다.

구방신명(舊邦新命)의 철학

펑유란이 평생 좋아했던 말 중에 "주나라는 비록 옛 나라지만 그 천명은 새롭다(周雖舊邦 其命維新)"는 <시경>의 한 구절이 있다. 일생에 걸친 그의 학문적 실천은 바로 이 구절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철학적 작업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송명 시대의 이학(理學) 그중에서도 정주이학(성리학)의 전통을 현대화의 시대에 맞게 적용하려고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펑유란의 철학적 성과는 대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시야를 세계적인 범위로 놓고 보면 최고라고는 할 수 없다. 마치 세계 속에서 중국의 지위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말년에 그가 희망적 전망을 한 것처럼 중국이 부상함에 따라 언젠가 중국 철학도 새롭게 등장할 날이 올 것이다. 그의 철학은 미래의 중국철학에 훌륭한 자양분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마지막으로 인물 평가와 관련해서 그가 시대와 맞설 수 있는 강골의 인물은 아니고 정치에 굴복한 연약한 측면이 있는 점,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크게 볼 때 그것은 학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비극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펑유란의 소개를 겸한 서평을 마무리하기 전에 번역본과 관련해서 몇 마디 덧붙인다. 먼저 출판사가 책의 띠지에서 광고한 것처럼 펑유란이 마오쩌둥이 존경한 20세기의 공자는 아니다. 마오쩌둥이 공자를 존경했다고 말할 수도 없거니와 '20세기의 공자'를 굳이 들라면 마오쩌둥이 존경한 루쉰이라고 하겠다.

원서에 달린 중요한 서문을 번역하지 않은 점, 제4부 전망 부분을 편집상에서 "추고 이상을 펼치다"라고 처리한 점 등은 아쉽다. 하지만 원서에는 없지만 자서전 출판 이후의 연보를 부록으로 추가한 점은 한국 독자를 위한 훌륭한 배려다. 중국 철학 전공자로서 번역자들의 오랜 노고를 치하하고 번역본 출간을 함께 기뻐하고 싶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mal@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