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끔찍한 삶을, 다시 한번 살라니?!
[마녀의 '도서관 편지'] 5년 전 숙제 내 주신 이광희 씨에게
이 끔찍한 삶을, 다시 한번 살라니?!
이광희 씨에게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편지를 쓰려니까 걱정이 앞섭니다. 벌써 5년 전의 일이니 이광희 씨는 다 잊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08년 12월 23일 제게 숙제를 내준 것을. 그때 저는 인터넷에 서평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독일 작가 엘케 하이덴라이히의 <세상을 등지고 사랑을 할 때>(한희진 옮김, 이레 펴냄, 2005)라는 소설집에서 제가 인용한 글을 읽고 이 선생님은 이런 댓글을 남겼습니다.

"'하나의 삶을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것이 할 만한 일인지 알고 싶었다. 하나 이상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한 번 이상의 죽음을 죽어야 함을 그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 글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혹여 이 글에 답이 될 만한 글을 소개해주겠습니까?"

댓글을 읽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똑같은 글을 저보다 더 큰 무게로 받아들이는 진지한 독서에 놀라고, '답이 될 만한 글'을 단 한 편도 떠올리지 못하는 제 무식에 부끄러움을 느꼈지요. 새해의 숙제로 삼아 열심히 찾아보겠노라 답을 하면서도 과연 용렬한 제가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5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대답을 드리지 못하는 저에 대한 기대를 접고 이 선생님이 직접 답이 될 만한 글을, 아니 답을 찾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죄송하기는 하지만 정말 기쁜 일입니다. 이제야 답이 될 만한 글을 찾은 듯싶어 편지를 쓰지만 사실 이것이 답이 될지 어떨지 자신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중언부언하지 않겠습니다. 누가 내주었든 이것은 제 숙제고 지금은 제 숙제를 할 때이니까요.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펴냄). ⓒ펭귄클래식코리아
제가 답이 될 만하다고 생각한 것은 니체의 책입니다. '뭐든 필요하면 거기 어울릴 말을 니체에게서 인용해주겠노라' 빈정거린 사람이 있을 만큼 여러 주제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남긴 니체이니 제 선택이 너무 빤하다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5년 만에 찾은 답이 니체가 된 것은 저로선 뜻밖입니다. 아니, 니체를 읽은 것부터가 제게는 의외의 일이었지요. 니체와 그의 대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 코리아 펴냄)의 경우, 숱한 인용과 무성한 소문들 때문에 몰라도 아는 듯 읽지 않아도 읽은 듯, 그러다 막상 읽으려 들면 어디서도 접하지 못한 요령부득의 문장에 치여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기에 나와는 인연이 없다 덮어두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몇 달 전 미국의 인문학자 제임스 밀러가 쓴 <성찰하는 삶>(박중서 옮김, 현암사 펴냄)을 읽다가 처음으로 니체에게 강한 끌림을 느꼈습니다. 스무 살 때 "나는 왜 살아 있는가? 나는 어떻게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으며, 나는 왜 그 존재로부터 고통을 받는가?"('교육자로서의 철학자')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기 위해 철학을 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움찔했지요. 난해하게만 여겨졌던 그의 철학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면 어렵더라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밀러가 인용한, <즐거운 학문>에 실렸다는 영원회귀에 관한 아포리즘을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당장 <즐거운 학문>(<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니체전집12)>(안성환·홍사현 옮김, 책세상 펴냄))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두어 번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도전했다가 포기한 기억이 있어 걱정했는데 이 책은 염려했던 것보다 편하게 읽혔습니다. '단념하라, 너 자신을 극복하라'고 가르치는 도덕을 통박할 때는 통쾌했고, 인과론과 목적론에 대한 철저한 비판은 흥미진진했으며, 세상에 인정받지 못하는 고독감을 토로할 때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을 흔든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니체가 1881년 여름 질스마리아에서 벽력처럼 받은 영감을 풀어놓은 대목이었습니다.

어느 날 낮 또는 어느 날 밤 그대가 가장 쓸쓸한 고독 속에 잠겨 있을 때 악마가 그대 뒤로 슬며시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그리고 또다시 살아야 할 것이다. 무수히 반복해서. 거기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기쁨… (네 삶의)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틀림없이 네게로 찾아올 것이다. 똑같은 차례와 순서로.

▲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안성환·홍사현 옮김, 책세상 펴냄). ⓒ책세상
(<즐거운 학문>은 안성환·홍사현이 옮긴 책세상 간(刊) 니체전집 제12권으로 읽었으나, 여기 인용한 부분은 시인이며 니체 연구자인 진은영이 펭귄클래식 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실린 레지널드 홀링데일의 서문을 옮긴 데에서 가져왔습니다. 진은영은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그린비 펴냄, 2007)이라는 책도 썼는데,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니체를 알기 위해 위의 두 저작 외에도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학>, 유고 등을 읽으며 끙끙거릴 때, 흠잡을 데 없는 우리말로 명료하게 쓴 그녀의 책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잊고 있었던, 그러나 아주 잊지는 못한 오래 전 그 밤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자고 있었으니 꿈이었겠지만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해서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선연한 그 밤, 허공에 뜬 제가 제 자신에게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던 말이 거기 그대로 적혀 있었습니다. 똑같은 삶을 다시 한 번 살 거라던 그 말. 공포가 해일처럼 저를 덮쳤고 저는 숨이 막혀 꺽꺽대다가 악, 하는 비명과 함께 깼습니다. 꿈은 깼으나 두려움은 깨지지 않았습니다. 이 끔찍한 생을 다시 살아야 하다니! 절망한 저를 보며 그때 알았습니다. 제가 제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제 안에 삶을 혁신할 아무런 힘도 의지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제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타성에 젖은 수치스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런 삶을 다시 산다는 말은 제게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저주라 여겼던 그것을 니체는 가슴 뛰는 영감으로 받아들이고, 햇빛 찬란한 "정오의 순간"이라 부르더군요. 놀랍고 부럽고 궁금했습니다. 똑같은 말이 왜 그에겐 저주가 아니라 영원회귀의 영감이고 축복이 될 수 있는지, 그 긍정을 가능케 한 힘은 무엇인지. 실마리는 니체가 <즐거운 학문>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던 무렵에 적어놓은 유고(遺稿)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과대망상이며 이는 두려움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질타를 읽으며, 어쩌면 변화하고 소멸하는 나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악몽의 시작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대 이후 만연한 휴머니즘은, 인간이 이 세계의 잣대도 목적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다른 모든 존재처럼 인간이란 존재 역시 우연한 진화의 산물일 뿐이며 그렇게 소멸해간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줍니다. 그처럼 저 역시, 저라는 존재의 갱신을 꿈꾸면서도 제 생명과 정체성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신생(新生)'을 바라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겠더군요. 말로는 신생이니 거듭남이니 하였으나 실상 나라는 정체성은 계속 유지된다는 망상을 버리지 못한 것이지요.

문득, 그날 저를 절망에 빠트렸던 악몽이 일종의 계시로 여겨졌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소멸이 두려워 영원을 꿈꾸지만, 영원히 변치 않는 세계란 불멸을 탐했다가 매미가 되어버린 신화 속 티토노스처럼 그저 저주일 뿐임을 일러주는 계시 말입니다. 그러자 저를 절망에 이르게 한 그날 밤의 말이 다르게 읽혔습니다.

모든 힘들은 지금과 똑같이 분배되어 있다 : 이 순간을 낳은 순간도, 현재 이 순간의 아이로 태어난 그 순간도. 오, 사람아! 네 삶 전체는 모래시계처럼 되풀이하여 다시 거꾸로 세워지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끝날 것이다. …그 다음에 너는 모든 고통과 모든 쾌감과 모든 기쁨과 적과 모든 희망과 모든 오류와 모든 풀줄기와 모든 태양빛을 다시 되찾을 것이다. 모든 사물의 연관 전체를 되찾을 것이다. 네가 하나의 낟알로 들어 있는 이 고리는 항상 다시 빛난다. (유고 1881년 봄~가을)

비로소 제게 '출구 없는 삶'의 저주로 여겨졌던 영원회귀가 니체에게는 왜 빛나는 정오의 순간이 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나'라는 고집스런 주체를 버리고 내 삶으로 눈길을 돌리자, 이 삶을 가능케 하는 빛나는 고리와 그 속에 하나의 낟알로 반짝이는 삶이란 행운이 보였습니다. 기뻤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도 차라투스트라를 좇아서, "고통이 쾌락이기도 하고 저주가 축복이기도 하며 밤이 낮이기도 하"니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고 모든 것이 영원하며 모든 것이 사슬로 이어져 있고 실로 꿰어져 있고 반해 있다면 그대들은 세계를 사랑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들 영원한 자들이여, 고통에 대해 '사라져라, 하지만 되돌아오라!'고 말하라." 하고 노래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에 제 혀는 아직 딱딱하고 그와 함께 춤추기에 제 다리는 너무 무겁습니다. 영원회귀가 삶의 긍정이 되기 위해서는 '나'를 비롯한 모든 고정불변한 실체를 지워야 하며, '익숙하지 않은 것'에 인과론을 들이대는 오랜 습관을 버려야 하며, 마침내 '나'의 죽음을 '나 아닌 나'의 탄생으로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한마디로 이제까지의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수긍하면서도 저는 여전히 그 죽음이 두렵기만 합니다.

물론 저도 압니다. 당신이 전율을 느꼈던 하이덴라이히의 말처럼, 전혀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한 번 이상의 죽음을 죽어야 함을. 제가 이 삶을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어머니에게 기생했던 열 달간의 삶을 버렸듯이,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또 한 번의 죽음을 각오해야겠지요. 니체가 가르쳐주었듯이, 고통을 피하려고 애꿎은 이들을 원망하며 "원한" 속에서 생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도덕이니 국가니 하는 "우상"의 노예가 아니라 "나 자신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 정체모를 불안과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남은 생을 전전긍긍하지 않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제 자신을 극복해야겠지요.

아직은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 겨우 한 발을 뗐을 뿐이라 생각하면 실망할 일은 아니지 싶습니다. 언젠가는 니체처럼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 번!"이라고 외칠 날이 올지도 모를 일, 생각만으로도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환해집니다. 비록 5년이나 걸렸지만 답을 드리겠다던 약속을 지킨 것도 기쁘고요. 느리지만 이렇듯 조금씩 나아간다면 '하나 이상의 삶'을 살 수도 있을 것 같아 즐거운 마음으로 인사를 전합니다. 제게 큰 숙제를 내주신 이광희 선생님, 부디 또 다른 삶에서 안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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