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오세훈 '뉴타운 광풍'과는 다른 '낙원삘딍' 탄생사
[김경민의 도시 이야기] <7> 낙원빌딩과 낙원아파트
MB·오세훈 '뉴타운 광풍'과는 다른 '낙원삘딍' 탄생사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에 위치한 낙원빌딩. 정확한 명칭은 '낙원상가 아파트'다. 과거 외래어 표기법을 따른 '낙원삘딍(NAK WON BLDG)'이란 현판이 외벽에 걸려 있다. 건물 안벽에는 작가를 알 수 없는 완성도 높은 부조물이 눈길을 끈다. 겉보기에도 형편없는 수준은 결코 아니다. 이 역사 깊은 건물이 수십 년째 철거 위기를 면치 못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익선동 166번지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은 '낙원상가'라는 거대한 건물에 가로막혀 있다. 이 근대적 건축물은 워낙 덩치가 큰 탓에 중압감마저 준다. 낙원상가를 떠올리면 건물 아래 침침한 도로가 떠오르고, 동성애자 집합소라는 낯선 이미지가 겹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낙원상가를 전면 철거하자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라, 1980년대 말부터 계속된 주장이다.

1987년 서울시는 낙원상가 아파트를 철거하는 '도시 설계안'을 2년여 준비한 끝에 발표했다. 설계안에는 낙원상가와 파고다공원 사이의 환경 불량 지구를 재개발 사업 지구로 추가 지정한다는 계획이 담겨 있었다. 또 낙원상가 서쪽 재개발 구역을 주차 및 상업 복합 용도 건물로 사업 계획을 변경하는 안도 포함됐다.

낙원빌딩 탄생 과정을 돌이켜 보면 매우 놀랍고 흥미롭다. 불과 몇 년 전 서울에서 뉴타운 재개발 광풍이 불던 때의 풍경과 상당히 대조적이다. 21세기 들어 추진됐던 뉴타운 사업에선 일방적으로 사업을 강행하려는 서울시와 이에 반발하는 지역 주민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개발 과정에서 드러난 민-관 갈등 구조는 연이어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반면 낙원빌딩 개발 사업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었음에도, 민과 관이 한발씩 양보해 추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 낙원상가 아파트 내벽에 있는 거대한 부조물. ⓒ서자민

▲ 낙원상가 건물 전경과 '낙원삘딍' 현판. ⓒ서자민

"서울시가 청사진 보여주자, 반대하던 주민들도 선회"

1960년대 서울시는 종로에서 제3한강교(현재 한남대교)를 잇는 도로를 건설하려 했다. 문제는 낙원상가였다. 낙원상가 위에 있던 재래시장은 도로 건설 계획에 걸림돌이었다. 이에 서울시는 '1층은 도로로 건설하고 상부는 저층형 상가로 개발하자'고 건설사들에 제안해봤으나, 건설사들에 전부 거절당했다. 토지 소유 관계가 복잡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던 중 인근에서 탑골공원 아케이드를 시공하던 대일건설이 서울시의 일부 수정안을 수락하며 비로소 사업이 시작됐다.

낙원시장의 영세 상인들은 처음엔 반발했다. 도로에 편입될 사유지 보상 가격이 시가에 한참 못 미쳤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자신들의 땅 1500여 평에 국공유지 1400여 평을 합산해, 3000여 평 토지에 고층 건물을 건설하자고 제안했다. 고층 건물에 현대식 슈퍼마켓(현재 낙원상가)과 아파트(낙원아파트)를 만들고, 이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건의였다.

도로 위에 건물을 세우는 것은 당시 도로법과 건축법 위반이었다. 그러나 서울시는 1층에 차량이 오갈 수 있는 도로를 만든다는 조건으로 주민들의 건의를 수용한다. 차량 통행에 지장이 없도록 개발하면, 주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도 무방하다는 판단이었다.

지난 4월 23일 만난 낙원상가 주식회사 대표이사 ㄱ 씨는 "당시 서울시는 주민들에게 새로운 근대적 건축물인 낙원상가에 들어갈 수 있다는 청사진을 보여줬다. 그러자 상가 주인 대부분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서울시는 처음엔 지역 상인들에게 토지를 기부 채납하라고 했고, 지역 상인들이 '불가'를 강하게 외치며 반발했다. 시와 주민 사이의 갈등은 사업의 걸림돌이었다"며 "그러다 서울시가 양보해 기부 채납 없이 1층 도로를 시가 무상으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사업 계획안을) 조정했다"고 말했다.

▲ 당시 서울시가 제시한 청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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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건설업자·정부, 모두 '윈-윈(win-win)'

ㄱ 씨에 따르면, 서울시가 개발안을 조정한 후 상인(지주)들은 조합을 만들어 낙원상가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낙원상가 주식회사는 현재도 낙원상가의 지분을 가지고 운영 주체 역할을 맡고 있다. 건설회사는 낙원아파트 건설 수익금으로 건설비를 제하고 개발 이익을 가져갈 수 있었다. 덕분에 낙원상가 건설비는 상가에 들어가 장사를 하게 될 상인들이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상인 대부분은 낙원상가에 재정착했다고 한다.

비록 완공 이후 각종 소송전이 벌어지며 잡음이 일었으나, 낙원상가는 공공과 민간이 한발씩 양보하며 개발됐다는 데 나름의 가치가 있다. 1층에 도로를 만들어 불법성 문제를 해결한 서울시의 탄력적 법안 해석은 시와 지주에게 모두 '윈-윈(win-win)'이었다.

시의 이런 노력으로 공공을 위한 도로가 확보됐음은 물론, 이해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해 토지 정리 작업이 수월해졌다. 건설사는 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었고, 대일건설은 개발 이익을 얻었다. 기존 재래시장 상인들의 커뮤니티도 보존됐다.

뉴타운을 비롯한 각종 재개발 사업에서 건설회사들만 이익을 얻고 지역 커뮤니티는 외려 해체되는 때에 주목할 만한 사례다. 지자체가 나서 이처럼 관련법을 탄력적으로 해석하고, 능동적으로 이해 당사자들의 갈등을 조정했던 일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근래 우리가 뉴스에서 자주 보았던 것은 '서울시는 인허가권자일 뿐'이라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모습이었다.

낙원빌딩은 한국식 공공-민간 협동 개발의 한 역사를 열었던 역사적 건물이다. 그리고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당시 서울시장이 '불도저 시장'으로 불렸던 김현옥 씨라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외국 방문객이 즐겨 찾는 '허름한 재래시장'

▲ 낙원상가 지하 재래시장과 '착한 식당' 제1호점으로 선정된 일미식당. ⓒ김경민

낙원빌딩은 1970년대 중반까지 강남 지역 아파트와 전세 가격이 비슷할 정도로 서민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고급 주택이었다. 지하 1층에 있던 상가는 부유층을 위한 고급품과 미제 물건을 취급하던 현대식 상가였다. 어찌 보면 2000년대 초반을 휩쓴 주상복합의 진정한 선구자였던 셈이다.

낙원상가 지하는 현재 재래시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모습이다. 방앗간, 정육점, 분식점, 채소 가게, 생선 가게, 수입 식료품점 등이 즐비하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장소가 있었구나'란 생각이 자연히 들게 한다. 물론 낡고 어둡고 허름한 모습이 주변 경관을 해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낙원빌딩을 당연히 철거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낙원상가를 외국인들은 '신기하다'며 방문하고 있다.

몇 달 전 낙원상가 지하 재래시장에서 만난 한 상인은 "최근엔 중국인·일본인 관광객들이 단체로 낙원상가 지하 재래시장에 자주 온다"며 "가게에 우리 농산물과 외국 것을 모두 꺼내 놓으면, 외국 손님들은 우리 콩과 고추 등을 사간다. 한국에 오면 한국적인 것을 맛보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라고 말했다.

낙원상가 지하에 있는 '일미식당'은 최근 종합편성채널 채널A의 음식 소개 프로그램인 <이영돈의 먹거리 X파일>에서 '착한 식당 제1호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방송은 낙원상가 지하의 허름한 재래시장이 가진 또 다른 가능성을 잘 보여줬다.

김경민의 도시 이야기
<1> 서울, '200년 역사' 상하이보다 못하다…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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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울 최고의 한옥 지구 만든 그는 왜 잊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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