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를 '겁 많은 한국'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요"
[아시아 인권 투어] <11> 한국은 '한국 밖'을 모른다
2006.08.04 11:31:00
"버마를 '겁 많은 한국'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요"
'8888'. 한번 들으면 좀처럼 잊혀지지 않을 듯한 이 숫자는 역사 속의 한 날을 뜻한다. 1988년 8월 8일. 이 날은 버마인들이 신군부에 맞선 '버마민중항쟁의 날'이었다.

경기도 부천에 있는 세 평 남짓한 작은 사무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 한국에서 '8888 항쟁'의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이들의 손길이 바쁘다. 바로 버마의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정당 민족민주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의 한국지부다.

이 곳에서는 현재 22명의 당원이 활동 중이며 그 중 6명은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한국에서 10년 째 살고 있는 샤린 씨가 바로 현재 NLD 한국지부에서 활동 중인 '정치적 난민' 중의 한 사람이다.

<프레시안>은 지난 5월부터 연재한 '아시아 인권 투어'의 마지막 순서로 한국에서 난민으로 체류 중인 버마인들을 만났다.

(신군부와 이들이 바꾼 국호 '미얀마'를 인정하지 않는 민주화운동가들의 뜻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이 글에서는 미얀마 대신 '버마'로 표기한다.)

"해외에서 버마를 어떻게 도울지 고민했죠"
▲ 한국에서 10년 째 체류 중인 샤린 씨. 그의 뒤에는 버마 국기가 걸려 있다. ⓒ프레시안

샤린 씨는 96년 한국에 올 당시 대학생이었다. 신군부는 96년에 집회, 시위를 이유로 전국의 대학을 일방적으로 폐쇄해버린 상태였다. 그는 '일단 해외로 나가고 보자'라는 심정이었다. 한국을 택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 '물가가 좀 더 저렴해서였다'고 한다.

"한국에 온 뒤부터 온갖 공장에서 일했죠. 주로 가구 공장, 프레스 기계 공장, 도금 공장 같은 데서 일했어요."

여느 외국인 노동자와 다를 바 없이 살던 그는 1998년 다른 버마인들과 함께 '해외에서 우리가 버마 국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뜻을 굳히고 NLD 한국지부를 만들었다. 현재 NLD는 태국에 본부가 있으며 뉴질랜드, 일본, 미국 등에도 지부가 있다.

한국지부 당원들의 의지는 투철했지만 활동을 지속하는 과정이 쉬울 리 없었다.

"우리 중에는 버마에서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도 있고, 한국에서 처음 운동을 시작한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엔 40명 정도가 모였는데 막상 해보니 어렵고 하니까 많이 떠나서 6명만 남았을 때도 있어요. 그러다 다시 사람들이 찾아오고…. 지금은 20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어요.

부천에 버마인은 약 300명 정도 살고 있지만 NLD 활동에는 겁내는 사람이 꽤 많아요. 다시 버마로 돌아갔을 때 신군부가 민주화운동 했다고 보복을 할까봐 두려운거죠."

대부분 당원들이 부천 등지의 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스스로 당 활동을 꾸려나가는 일 자체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당원들은 한달에 15만 원씩 회비를 내요. 그 돈으로 사무실 운영도 하고, 태국 난민촌에 있는 어린이들 교육도 지원합니다."

"버마의 민주화보다 가스 개발에 더 관심있는 한국"
▲ NLD 태국 본부에서 보낸 소포가 도착했다. 당원들이 민주화 항쟁에 대한 책과 선전물을 확인하고 있다. ⓒ프레시안

현재 버마는 88년 이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오히려 신군부의 탄압은 그 강도가 높아졌다.

1990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NLD는 특히 탄압의 대상이다. 아웅산 수치의 가택연금을 비롯해 약 1200명 이상의 양심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88년 신군부 집권 이래로 지금까지 대학은 폐쇄 상태가 반복되고 있고, 또 세 집마다 감시원이 존재하는 3호 담당제가 존재한다. 인터넷, 팩스 등을 통한 해외와의 정보교류는 완전히 차단돼 있다.

소수종족들에게 행해지는 '초토화작전'은 매년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낳고 있으며 현재 태국과 버마-태국 국경 근처의 난민캠프에 있는 난민들은 최대 1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샤린 씨는 "버마 국내에 사는 이들은 해외와 차단돼 있다"며 "한국에 있는 우리가 운동을 지속하는 이유는 버마의 정치, 경제, 사회 상황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그 당위성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현재 이들은 버마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2004년부터 서울 여의도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매주 목요일 1인 시위를 진행 중이고, 한국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캠페인도 벌이고 있다.

"해외에서 캠페인하는 것이 버마에 어떤 도움을 주냐고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만나면 '도와주겠다'고 하고서 아무 일도 안 하더라고요. 오히려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버마 가스개발에 투자하기 바쁘죠. 모두 자기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으면 행동에 나서지 않아요. 미국이 이라크를 왜 공격했나요? 석유를 위한 것 아니었나요? 한국이 버마에 투자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쪽이 더 이익이 되니까요. 다른 나라의 민주화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들의 '이익'이예요."

"한국에서 난민 인정받아도 별 차이 없더라구요"
▲ 사무실 앞에 앉아 있는 NLD 한국지부 회장 아웅 민 스위 씨. 며칠 전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한 회사에 전화했지만 '난민 같은 거 모른다'며 거절당했다. ⓒ프레시안

샤린 씨는 2004년 1월 '정치적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자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가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법적 자격을 획득한 것이다. 어렵게 받은 난민 지위지만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는 이전에 비해 큰 차이점이 없다고 얘기한다.

바로 며칠 전의 일이었다. 역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NLD 한국지부의 회장 아웅 민 스위 씨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한 회사에 전화했다.

"외국인이예요?"
"네. 그런데 불법 아니예요."
"한국 여자랑 결혼했어요?"
"아니요. 난민 인정 받았어요."
"난민? 그런 거 몰라요. 다른 데 알아봐요."

이제 머리가 희끗한 아웅 민 스위 씨는 취직하려면 일단 결혼부터 해야겠으니 어디 참한 여자 없냐며 쓴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저기 저 커피잔 있잖아요. 저걸 사려고 가게에 들어갔는데 가게 주인이 '이 컵 너무 예쁘지? 너희 나라엔 이런 거 없지?'라고 하더라고요. 식당에 들어가면 '너희 나라엔 쌀 없지?'라고 물어요. 그런 말에 이제는 '네, 우리 나라엔 쌀 없어서 물 마시고 살아요'라고 대꾸하죠."

처음에는 화가 나서 그런 사람들과 싸우기도 했다는 샤린 씨는 담담히 덧붙인다. "전 그런 한국 사람들 이제 이해해요. 한국 밖에 있는 세상을 잘 모르니까 그러는 거예요."

"버마를 '겁많은 한국'처럼 만들고 싶지 않아요"

샤린 씨의 눈에는 한국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한다.

"한국은 '겁이 많은 나라'예요. 북한도 무섭고, 미국도 무섭고, 중국도 무섭고…. 난 버마가 민주화된다면 이런 식으로 나라를 만들지 않을 거예요."

계속 한국에서 살 거냐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젓는다.

"기회만 되면 버마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러진 못하고…. 일단 앞으로 더 공부하고 싶어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는데 이제 정치나 국제 관계를 배워보고 싶어요. 공부는 한국보다 여건이 좋은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하고 싶고요."

인터뷰가 끝나고 그와 작별한 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군부 독재에 맞서 민주화를 이룬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과 피부색과 인종이라는 잣대로 외국인을 판단할 뿐 '한국 밖'의 상황에 무감한 한국, 그 두 가지 모습 가운데 어느 것이 진짜 우리의 모습일까?

NLD 한국지부는 '8888 민중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참여연대, 국제민주연대 등의 시민단체들과 함께 6일 오후 명동성당 앞에서 사진전을 개최할 계획이며 8일에는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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