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집에 모시지 못 해 죄송합니다"
우토로 주민회 김교일 회장의 인생사
"어머니, 집에 모시지 못 해 죄송합니다"
2007년 8월 2일은 일본 교토부 우지시에 위치한 재일동포 마을 '우토로'의 운명이 다시 한 번 갈리는 날이다. 우토로 토지 소유주인 일본의 부동산 회사 서일본식산이 "우토로 토지를 매입하기 원하는 제3자가 나타났다"며 우토로 주민들에게 토지매입 여부를 7월 말까지 결정지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서일본식산은 시세(7억 엔)보다 높은 금액을 요구하고 있고, 한국에서 모금한 돈에 우토로 주민들의 재산을 다 모아도 서일본식산이 요구하는 돈을 지불할 수 없는 우토로 주민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한국정부의 지원에 한 가닥 기대를 걸었지만, 외교통상부는 '적극적 지원'의 입장에서 '강제철거 후 고령자 노인복지시설 알선'의 소극적 입장으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우토로 주민들은 다른 방법이라도 찾기 위해 서일본식산에게 "시간을 더 달라"고 요구했고, 서일본식산은 시간을 더 줄지 여부를 8월 2일에 통보하기로 했다.

우토로 주민들은 7월 21~23일 '마지막 지원 호소'를 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었다. 그동안 우토로를 후원해온 사람들을 만나고 국회의원들도 만났지만, 어떠한 약속도 듣지 못하고 우토로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한국정부와 일본정부 모두에게 외면 받은 채 그들의 운명을 다시 부동산 회사에게 맡길 수밖에 없게 됐다.

김교일(68) 우토로 주민회 회장도 '마지막 호소'를 위해 방문했었다. 재일동포 2세인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우토로에서 살아왔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고향을 빌어 "고향은 전라도 보성"이라고 얘기하는 그는 '전라도 사람'이지만 서툴게 하는 한국말에는 경상도 억양이 섞여 있다. 주변의 재일동포들이 대부분 경상도 출신이기 때문이다. 온갖 고생을 하며 여러가지 막일에 잔뼈가 굵은 그는 우토로에서 제법 규모가 큰 토목 회사를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1989년부터 주민회장을 맡은 김 회장이 2006년 11월 '우토로를 널리 알리는 모임'이 주최한 우토로 전시회에 참석해 그의 인생과 우토로에 대한 강연을 했었다. '우토로를 널리 알리는 모임'은 반전평화운동을 하는 일본인들이 만든 단체로, 이들은 우토로를 통해 일본인들로 하여금 일본의 과거 침략 전쟁의 역사를 알게 하고 반성케 해야 한다며 활동을 벌이고 있다.

김 회장이 그 강연에서 한 얘기를 '우토로를 널리 알리는 모임'의 미즈타니 교이치(78) 사무국장이 녹취를 해 구술사로 풀어 작은 책을 발간했다. 200자 원고지 40매 분량의 이 책자에는 김 회장이 살아온 인생이 요약돼 있다. '우토로를 널리 알리는 모임'은 <나의 역사, 우토로에 살다>라는 제목의 이 책을 100엔에 판매하며 우토로를 돕는 일에 사용하고 있다. 미즈타니 씨는 앞으로 김 회장의 구술을 모아 후속편도 낼 계획이다.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문화교류가 단절돼 일본 사회에 대해 알 기회가 부족했다. 그러나 문화교류가 시작되고 일본 문화가 물밀듯 밀려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재일동포들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 한다. 그들은 대부분 일제시대 강제로 일본으로 건너가 전후에도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에서 차별 속에 사회 하류층에 머물러야 했다. 그 어느 가족사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난을 겪어야 했던 동포들에게 너무 무관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프레시안>은 '우토로 국제대책회의'의 도움을 받아 일본어로 된 이 책의 전문을 번역해서 소개한다. 다소 거친 표현이 있지만, 거의 그대로 실었다. 한국말에 서툰 김 회장의 육성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편집자>

▲ 김교일 우토로 주민회장(왼쪽)과 미즈타이 교이치 '우토로를 널리 알리는 모임' 사무국장(오른쪽) ⓒ프레시안

시작하며

방금 소개받은 우토로주민회 회장 김교일입니다. 오늘은 미즈타니 선생님으로부터 자신의 생애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1세대에 대해 말해주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만, 저는 2세대이기 때문에 모르는 것도 많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기 때문에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저의 아버지, 어머니는 전시 중에 일본에 건너오신 1세대입니다만, 언제 일본이 왔는지는 잘 모릅니다. 아버지는 우토로에 살았고 비행장건설 때 노동자로서 일하셨습니다. 당시의 상세한 것들은 생전에 어머니에게도 물어봤지만, 어머니도 정확히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친척이 한국으로 귀국하게 됐는데, 아버지는 그 짐을 운반하다 트럭에서 떨어져 오랜 기간 입원하셨습니다. 퇴원 후에는 우토로의 함바(공사현장에서 숙소나 식당으로 쓰기 위해 합판이나 철판 등으로 만든 임시 가건물. 편집자)인 나가야의 방 한 칸에서 요양하셨습니다.

당시 닛산차체(비행장을 건설하던 일본국제항공공업의 후신. 편집자) 앞에는 논에 물을 보내기 위한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한 여름의 어느 날 아버지께서는 몸 상태가 아직 좋아지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곳에서 물놀이를 하시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때 우토로 민족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민족학교로 통보가 와서 저를 비롯해 모두가 저수지로 달려갔습니다. 우토로 사람들도 모두 아버지를 도우려고 열심히 저수지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이미 돌아가셨고, 연못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제 나이 7살 때였습니다.

어머니의 고생
▲ 우토로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함바의 흔적. ⓒ프레시안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우리 집 생활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종전 후 일본인에게도 일이 없는 상황에서 조선인에게는 더욱 일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일본어를 제대로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누나가 열 살, 제가 일곱 살, 어머니가 마흔일곱 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여자 혼자 아이 둘을 키우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는 하나 있는 아들인 저를 굉장히 예뻐하셨습니다.

언제나 멀리까지 가셔서 철, 알루미늄이나 동선 등을 주우러 돌아다니셨습니다. 죠요(城陽)·나가이케(長池)의 미군 사격연습장에서 탄피 등을 주워 모아 보자기에 싸서 짊어지고 돌아오셨습니다. 돌아오시면 철, 동, 알루미늄으로 구분해 그것을 팔아 생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매일 주워 모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농가를 찾아가서 풀베기나 모내기 등을 도와 돈을 버셨습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풀베기나 모내기 등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느라 몸이 녹초가 되어 돌아오셨습니다.

가까이에 니시무라반챠(西村番茶)라는 큰 차밭이 있어 거기에도 일을 가셨습니다. 차 밭 주위의 풀베기, 5월 중순의 찻잎 따기, 찻잎 따기가 끝나면 반챠(질이 낮은 엽차)를 말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한 달에 몇 번은 산에 가서 마른 소나무 잎을 주웠습니다. 불을 떼기 위한 연료용이었습니다. 소나무 잎 주우러 갈 때는 누나와 저도 같이 갔습니다.

이런 고생도 하셨습니다. 우토로에서 공동으로 사용했던 우물물이 점점 말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기 집에 펌프를 설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50mm 정도의 둥근 파이프를 약 8m~10m정도 박아 넣어야 물이 나왔습니다. 그 공사비용이 어머니에게는 매우 큰 부담이었습니다. 주위의 아저씨가 싸게 해 주신 덕분에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토로에 상수도가 들어간 것은 1988년이다. 우토로 주민들은 끊임없이 상·하수도 설치를 우지시에 요청했으나, 우지시는 토지의 소유주인 닛산차체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며 상·하수도 설치를 미뤄왔다. 그 사이 우물물에서 전염병 위험이 발견되고, 비인간적 대우를 받는 우토로를 목격한 일본인들이 나서서 우토로에 상수도 설치를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다. 현재의 일본인들이 구성한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도 당시 상수도 설치 운동을 벌이며 생긴 것이다. 결국 닛산차체는 1987년 우토로 토지를 매각하면서 비로소 상수도 설치에 동의를 해줬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토로에는 하수도가 설치돼 있지 않다.<편집자>

소학교 시절

어머니께서 누나와 저를 학교에 보내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현재 우토로의 마을회관이 있는 곳에 민족학교가 생겼습니다. 저는 46년부터 내 나라의 말, 역사 등을 배우기 위해 민족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러나 1949년에 일본정부의 탄압에 의해 우토로 민족학교는 강제 해산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우지시의 오오쿠보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열 살이었지만 1학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열 살이었어도 일본말 '아이우에오'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를 어머니가 가엾게 생각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 우토로 마을 풍경. ⓒ프레시안

현재 긴테츠전철로 이세다역에서 오쿠보역까지 통학했습니다. 가끔 어머니가 저를 업고 이세다역까지 데려다 주셨습니다. 같이 가는 친구도 없이 혼자 멀리까지 통학하는 저를 가엾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열 살에 1학년에 들어갔기 때문에 몸은 가장 컸습니다. 차별도 있었습니다. 3, 4학년 때에도 일본 아이들은 제 뒤에서 "쟤는 조선인이야, 조선인과 놀지마. 조선인은 더러워' 등의 말을 했습니다.

당시는 정부의 생활보호도 없고, 집은 함바가 있던 자리에 지은 작은 판잣집으로 겨울에는 여기저기 틈새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종이 같은 것으로 막지 않으면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비가 오면 비가 새 양동이나 대야, 걸레 등으로 받지 않으면 안 됐고, 빗 물 떨어지는 자리를 피해 잘 곳을 여기저기 옮겨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집에 화장실이 없어 밖에 있는 공동화장실을 사용했는데, 겨울에는 추워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욕실이 없어 집 안에서 물을 끓여 몸을 씻었습니다. 목욕탕이 가까이에 없어, 한 달에 한 번 정도 그것도 전철을 타고 모모야마고료(桃山御陵)까지 갔습니다. 이 날이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었습니다.

또 우토로의 토지는 주변보다 낮은데다 배수구가 없기 때문에 비가 오면 마을이 바로 침수됐습니다. 신발을 게타상자 위에 올리고 물을 퍼내야 하기 때문에 매우 힘들었습니다.

1952년 소학교 5학년 때입니다. 우토로에 수백 명의 경찰부대가 강제조사를 하러 왔습니다. '스파이' 혐의가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새벽녘 아직 사람들이 자고 있는 시간에 경찰들이 집 안에 신발 신은 채 들어와 조사를 했습니다. 정말 무서웠습니다.
1952년 3월 우토로는 2번 강제조사를 받았다. 첫 번째는 약 350명, 두 번째는 약 1000명의 경찰부대가 아침 일찍 우토로를 포위, 급습했다. 항의하는 주민이 폭력행위, 공무집행방해협의로 매 번 여러 명이 체포되어 반미전단지나 막걸리가 압수되었다. 당시 우토로 주민은 스스로의 생활보장이나 민족교육보장 등을 요구하며 우지시청에 연일 항의하고 농성을 했다. 이 운동은 주민의 생활실태를 바탕으로 한 절실한 것이었고, 전국적인 재일조선인운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강제조사는 이처럼 우토로주민의 운동에의 GHQ(일본이 점령하에 있었던 당시의 연합군총사령부)와 일본정부의 탄압이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필자>

1953년 9월, 13호 태풍으로 우토로의 대부분이 침수되는 등 커다란 피해가 있었습니다. 주민 대부분이 쿠제(久世)중학교(현재의 니시우지중학교) 강당으로 피난했습니다. 우지시로부터 모포, 빵, 우유 등 구호물품을 받아 몇 일간 강당에서 지냈습니다. 마을로 돌아가니 삼목껍질로 덮은 지붕이 날아가고, 벽도 날아가 없어져 있었습니다. 다다미는 전부 쓸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여자 혼자 몸으로 힘들었습니다. 몇 개월이나 지난 후이지만, 어머니가 너무 힘든 나머지 때때로 막걸리를 마시면서 우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학생 시절
▲ 1950년대 우토로 풍경. ⓒ프레시안

1954년, 쿠제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공부가 싫었습니다. 그래도 의무교육은 받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저는 빨리 일을 해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언젠가는 일본인 집처럼 기와지붕 집에서 살게 해 드릴게요"라고 말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입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도시락을 싸오라고 했지만, 가지고 갈 수 없었습니다. 도시락을 쌀만한 밥도 없고, 반찬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사정도 듣지 않고 도시락을 싸오라 지시한 것입니다. 이것도 조선인차별입니다. 우토로 사람들은 학교에서 집까지 가까웠기 때문에 대부분이 집까지 밥 먹으러 갔습니다. 그것도 집에 밥이 있는 사람이 있지만, 밥이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밥이 있는 사람은 보리밥을, 없는 사람은 고구마 등을 먹으러 점심시간에 집에 갔습니다. 이즈음에 선생님에게 자주 혼났습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동급생이 있었던 니시무라반차야(차밭)에서 5월 중순부터 6월 10일경까지 학교를 쉬고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2학년 때도, 3학년 때도 일하러 갔습니다.

또 집에서는 돼지를 키웠습니다. 암퇘지가 새끼를 6마리에서 13마리 정도 낳습니다. 새끼 돼지를 1개월 이상 키워서 돈을 벌었습니다. 한 마리에 3000엔 정도 되었습니다. 돼지우리 청소, 돼지 먹이주기 등 매일이 힘들어서 놀 시간도 없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멀리 떨어져 있는 기후의 나카츠가와까지 가서 막노동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기후까지 간 이유는 동급생들에게 막노동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몸이 다 크지 않았던 저에게 토목작업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상당한 중노동이었습니다. 12월이 되자 눈이 내렸습니다. 눈 속에서 모래, 시멘트, 손으로 생 콘크리트를 반죽하는 것인데 빨리 하지 않으면 눈이 쌓이기 때문에 겨울엔 눈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의무교육제도로 인해 1년에 185일을 학교에 가야만 합니다. 이것이 교육을 이수하기 위한 최소일수였습니다. 저는 학교를 상당히 많이 쉬고 아르바이트에 갔기 때문에 185일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학교는 가난한 가정임을 생각해 줘 일수를 많이 늘려주셔서 열아홉 살 때 무사히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열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졸업하기 까지 매우 길었다고 생각합니다.

결혼과 어머니
▲ 삼목껍질로 얼기설기 이어 만든 판자집. ⓒ프레시안

누나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결혼했습니다. 어머니는 누나의 결혼식 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입혀 시집보낸 것이 가슴 아프셨을 것입니다.

제가 스물세 살 때 어머니가 저에게 혼사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같은 우토로 사람으로부터 혼사가 들어왔는데 저로서도 우토로 사람이라면 같이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고, 또한 어머니의 고생이 보기 힘들어서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결혼비용은 제가 3년간 산쿄연염(三共練染)에서 일했을 때 저금한 23만 엔이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가구류 등을 마련했고, 여러 가지 살림살이를 준비했습니다.

결혼식은 우토로의 민족학교였던 곳에서 조선식으로 했습니다. 신혼여행은 시가현 오고타의 国花荘에서 2박 3일을 보냈습니다. 어디에도 갈 수 없어 오오츠역 근처에서 영화를 봤습니다.

결혼사진은 우지의 사이토카메라점에서 찍었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어서 찾으러 가지 못했고, 결혼한 지 1년 정도 지나 찾으러 갔는데 "1년 이상은 보관하지 않는다"면서 "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식 결혼사진이 없는 것이 지금도 섭섭합니다.

드디어 어머니가 직업안정소의 실업대책사업 일을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매일 일이 끝나면 현금을 가지고 돌아오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손자의 과자, 과일, 반찬을 사 오셨기 때문에 일당이 거의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휴일 이외의 일상이었습니다. 저는 가끔 어머니에게 아이들에게 너무 단 것을 사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만, 어머니는 손자가 귀여워서 자꾸자꾸 매일 조금이라도 사 오셨습니다. 저의 장녀, 장남, 차남은 여전히 할머니가 예뻐해 주셨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실업대책 일이 있는 것을 어머니께서는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실업대책에 다닌 지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저에게 자동태엽 손목시계를 사 주셨습니다. 결혼할 때 손목시계도 사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이미 시계는 가지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마음을 담아 사주셨던 그 시계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저와 아내가 싸움을 해도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며느리를 감싸주셨습니다. 어머니는 말씀이 적고 상냥하신 분이었습니다. 며느리에게도 언제나 잘 해주셨습니다. 아내도 아직까지도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 하수도가 설치되지 않아 여전히 하수도 역할을 하고 있는 배수로. ⓒ프레시안

또 어머니는 때때로 누나를 잘 돌봐주라며, 둘 밖에 없는 남매이기 때문에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고 저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될 수 있는 대로 노력해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오랜 세월 여자 혼자 몸으로 고생만 하시고 먹을 것도 제대로 드시지 못했습니다. 원래 작은 체구인데 먹을 것이 생겨도 손자에게만 먹이셨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쇠약해져 입원하시게 되었는데, 오랜 세월 고생을 하셔서인지 빨리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집에 데려가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5명이나 있는 집에서 어머니를 보살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도 집으로 모셔오는 것이 어떠냐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저는 집에서는 보살펴 드리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병원에 계시도록 하자고 했습니다.

얼마 후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1970년 7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부탁도 들어드리지 못하고, 아내의 말도 듣지 않고 집에 모셔오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가여워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저의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이 식민지가 되어 생활을 위해 일본에 건너올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나 어머니였습니다. 말도 모르는 일본에서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차별과 빈곤 속에서 자식들을 키워주신 부모님. 특히 여자의 몸으로 고생에 고생을 거듭해 오신 어머니에게는 정말로 감사할 뿐입니다.

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염색업을 시작으로 토목작업원도 하고, 트럭으로 운송업도 했습니다. 폐품회수업도 했습니다. 휴일도 없이 일했습니다. 저를 도와주시는 많은 분들 덕택으로 현재는 카나야마건설을 포함해 3개의 회사를 경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저를 지탱해 온 것은 어머니의 고난과 따뜻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투쟁에의 지원을
▲ 김교일 회장. ⓒ프레시안

우토로는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습니다.

토지문제가 발생한지 벌써 18년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 저의 부모님을 포함해 많은 1세대 분들이 돌아가셨습니다. 우토로는 우리들의 고향입니다. 우리들의 부모가 지켜온 장소입니다. 18년이라는 세월은 짧은 듯 합니다만, 아이가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해 사회인으로서 일을 시작하기까지의 세월입니다. 그 동안 계속 퇴거의 불안 속에서 지내왔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험난한 차별 속에서 일하고 아이들을 키우며 우토로 마을을 만들어 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60년이나 지난 지금 강제집행의 불안과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우리의 집이 어떻게 될까하는 불안정한 매일을 보내왔습니다.

최근 최고재판소의 결정에서 우토로의 토지 소유권자가 결정되어 우토로주민회로서 토지매매 이야기가 시작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을 만들기' 구상이 드디어 현실계획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토로 주민들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정부로부터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으로도 우리들은 싸워 갈 것입니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따뜻한 지원과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richkhy@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