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의 상처를 덧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선에 묻힌 인권법안·⑧] 형법 일부 개정안
성폭력 피해자의 상처를 덧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2004년 '개혁국회'라는 꼬리표를 달고 시작했던 17대 국회가 이제 마지막 정기국회를 열었다. 하지만 대선을 앞둔 상황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들이 제대로 된 토론을 거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어둡게 한다. 중요한 인권 쟁점을 담고 있지만, 대선을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 속에서 자칫 외면될 수 있는 인권 관련 법안들을 인권운동사랑방이 살펴봤다.
  
  다음은 형법 일부 개정안에 관한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의 글이다. 이 글은 "성폭력특별법의 처벌규정을 형법으로"라는 제목으로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오름>에도 실렸다. <편집자>
  
- 대선에 묻힌 인권법안
  
  ① [출입국관리법 일부개정안] "7개월 전 여수 참사, 벌써 잊었나"
  ② [에이즈 예방법 개정안] "'죽어 마땅한 자'는 어디에도 없다"
  ③ [학생인권법] 억압의 교육을 넘어 인권의 교육으로
  ④ [사회복지사업법] 사회복지시설은 복지재벌의 사유재산?
  ⑤ [국가정보원법] 국정원 개혁, '정치 개입 근절'만으로는 부족하다
  ⑥ [개인정보보호기본법] 폭주하는 개인정보 유출, 늘어나는 감시
  ⑦ [노동조합법 일부 개정안] "특수고용직,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고…."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된지 14년. 그동안 아홉 번에 걸친 법개정도 있었고 성폭력수사전담제, 진술녹화제, 아동성폭력전담센터, 원스톱(One-stop)지원센터 등 많은 정책들도 마련되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연일 신문, 방송에서는 성폭력 사건이 보도되고 있고, 성폭력 신고율 10%미만, 기소율 45%미만이다. 무엇보다 많은 여성들에게 성폭력은 여전히 일상의 삶을 위협하는 범죄로 체감되고 있다.
  
  특히 폭행, 협박과 저항의 정도를 엄격하게 따지는 '최협의설'은 강간의 판단기준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수사·재판 담당자들의 인권감수성과 성폭력피해자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2차피해가 늘고 있다.
  
  따라서 용기를 내어 고소를 한 피해자들은 수사와 재판과정이 이렇게 힘들 줄 알았더라면 절대 고소하지 않았을 거라며 분노와 고통을 호소한다.
  
  한편에서는 우리나라 사법부에 성폭력 사건을 맡길 수 없다, 과연 법이 무엇을 해결하는가 하는 강력한 문제제기도 일고 있다.
  
  여성인권법연대에서는 법의 내용뿐만 아니라, 운용과정에서의 문제점 등을 체계적으로 모니터링, 비판, 제언을 하는 반(反)성폭력법제화 운동이 아직도 유효하다고 보고, 2년여 동안 성폭력특별법의 대안찾기를 해왔다.
  
  드디어 올해 초 성폭력특별법의 처벌규정을 기본법인 형법으로 재정리하고 내용도 대폭 수정한 법안을 마련, 4월에 임종인 의원의 대표발의로 국회에 상정되었다. 이번 형법개정안의 의의는 크게 다음 두 가지다.
  
  성폭력특별법에서 형법으로
  
  먼저 법의 형태면에서 성폭력특별법의 처벌조항을 형법으로 재정리 했다. 1991년 성폭력특별법 제정 운동 당시에 여성인권운동단체에서는 많은 법조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특별법 형태를 주장했었다.
  
  당시에 성범죄는 형법의 틀 안에서 다뤄왔지만 실제 피해생존자들의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갈수록 흉포화되는 성범죄에 대한 적극적인 조치와 예방대책 마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성폭력을 규정한 형법 제32장의 제목도 '정조에 관한 죄'였던 상태에서 형법에 우리들의 요구를 담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했고, 입법자나 법조인 누구도 이를 형법으로 반영하겠다는 제안을 하지 않았었다. 또한 형법에 성폭력피해 생존자의 보호 및 권리보장을 위한 조항을 다 담아낼 수는 없었다.
  
  따라서 당시 성폭력특별법제정특별위원회를 꾸려 활동했던 여성단체로서는 특별법의 형태라도 성폭력에 관한 강력한 조치가 필요함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지난 14년 동안 사회적 인식과 법, 제도가 많이 변화했고, 특별법이 갖는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기본법인 형법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에서 이번에 성폭력특별법의 처벌조항을 형법 안으로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법으로
  
  이번 형법 개정안은 성폭력을 기존의 '정조에 관한죄', '강간과 추행의 죄'에서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한 죄'로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무엇보다 법에서 성폭력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는 곧 국가가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자 법철학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 형법 개정안에서는 성폭력특별법에 해당 법을 나열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명확하게 성폭력 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또한 강간의 개념을 확장해 남성성기의 여성성기에의 삽입 외에 구강성교라든가 항문성교 등의 행위를 포함하고 있으며, 강간죄의 객체를 '부녀'에서 '사람'으로 확장하고 있다.
  
  따라서 현행 성폭력특별법에서 13세 미만의 아동에게만 적용되는 유사강간형태의 범죄들, 즉, 구강성교나 항문성교 뿐만 아니라 신체의 일부 또는 도구를 이용하여 성기 또는 항문에 삽입하는 행위까지 강간에 준한 처벌을 받도록 하고 있다.
  
  이는 강간죄 구성에서의 남성성기중심적인 사고의 전환이며, 실제적으로 피해생존자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의(개정안 306조의 2) 규정에 '사람'이란 법률상 또는 사실상 혼인관계에 있는 자를 포함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아내강간을 처벌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동의없는 성적 행동'과 '성적 행동의 강요'라는 새로운 용어로 강제추행을 구분하고 있다. 이 개념은 그동안 여성인권법연대에서 많은 논의를 거쳐 기존의 강제추행에서 제외되고 있는 수많은 형태의 성폭력을 포괄할 수 있는 대안으로 마련한 것이다.
  
  물론 이는 앞으로 많은 논의를 거쳐 좀 더 명확한 법적규정이 필요한 부분일 수 있다. 또한 '최협의설'의 문제를 입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단순 폭행·협박을 행사한 경우와 소위 저항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폭행, 협박을 행사한 경우를 구별하여 후자를 가중처벌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압하는 강제력 행사를 기존의 폭행, 협박 외에 '위력'을 추가하였다. 나아가 성폭력 피해생존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아래 오히려 생존자의 인권을 침해해왔던 친고죄를 전면 폐지하였다. 기타 가중처벌 규정을 정비하고, 일부 법정형을 조정했다.
  
  이번 형법 개정안은 현행 성폭력특별법의 규정보다 피해생존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더욱이 기존의 법체계에 매우 도전적이고 전복적일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앞으로 논란이 예상된다. 문제는 이러한 규정들을 법·정책 담당자들이 어떤 시각으로 해석하느냐일 것이다.
  
  현재 형법개정안은 지난 4월 발의된 이래, 8월에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검토의견을 각계로부터 수렴하는 작업을 한 것 외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뿐만 아니라, 미성년자 공소시효 정지, 강간죄 객체 확대, 피해자 권리 보장 등을 담은 성폭력특별법 개정안도 6개나 상정되어있지만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지난 8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한국정부에 부부강간죄가 여전히 처벌되고 있지 않은 점, 친고죄 규정으로 인하여 성폭력 범죄의 기소율과 유죄판결율이 낮은 점을 지적하며 여성폭력에 대한 인식제고의 노력을 강화하고 안전한 쉼터 제공, 법률 지원 등의 피해자 보호를 포함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럼에도 곧 17대 국회가 마감되는 이 시점에서 성폭력문제 해결을 위한 의원들의 적극적인 의지는 실종된듯하다.
  
  연쇄성폭력이나 어린이성폭력 등 사회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반짝 관심을 보이는 태도는 성폭력 문제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의원들의 관심과 성의 있는 노력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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