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두 개의 '상식'
[기자의 눈] '시민의 상식' 사라진 언론
2008.03.10 18:21:00
엇갈린 두 개의 '상식'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4시 기자 회견 예정. 삼성 떡값과 연루된 새 정부 인사 명단 발표 예정. 청와대와 삼성의 반론 예상됨.'

지난 5일, 사제단이 기자 회견을 연다는 소식을 접한 기자들은 모두, '누가 명단에 포함됐나'라는 데 관심을 가졌다. 시간과 장소가 정해지자마자 각 언론사의 사회부 기자들이 출동했다. 이들의 임무는 '떡값 인사가 누구인지'를 가장 빨리 알아내는 것이었다. 방송사는 생중계 차량을 내보냈다. 사제단 신부의 입을 통해 ooo, xxx라고 흘러나오는 명단을 실시간으로 방영하기 위해서.

기자들의 입장에선 '당연히' 청와대와 삼성에서 해명 또는 반론이 나와야 했다. 그래야 기사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객관성'을 잃었다는 평을 피하려면, 혹은 대립각을 보여주려면 누군가의 반론은 필요했다.

'이미 떡값 인사 얘기가 나도는데 청와대가 조사하지 않았을 리 없다. 국정원장 내정자도 포함돼 있다지? 특검을 통해서건, 국정원을 통해서건 명단은 이미 알아냈을 것이다. 기사를 쓰자니 반론을 받아야 하고, 마감 시간(일반적으로 오후 4시)은 다가오고….'

이런 상황에서 "엠바고(보도 유예) 지켜줄래요? 미리 브리핑 하겠습니다"라고 했다는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의 요청을 대다수 기자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거기에 화답한 것은 어쩌면 '기자의 상식'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미래는 정해져 있나? 그것은 영화의 세계관이다"

그리고 이틀 뒤인 지난 7일, YTN '돌발영상'이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제목을 단 영상을 내보냈다. 지켜본 시민들은 경악했다. 사제단의 발표를 듣고 낸 줄 알았던 청와대의 논평(혹은 반박)이 사실은 사제단 기자 회견 1시간 전에 나왔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래에 발생할 일을 미리 예측해서 먼저 행동한다'는 내용의 영화 장면과 똑같았다.

'사제단이 발표를 하기도 전에 반박이 어떻게 먼저 나올 수 있지? 청와대가 예언을 했나? 사제단이 미리 알려줬을 리도 없고….'

게다가 돌발영상은 곧 YTN에 의해 자체 삭제됐다. 신사 협정 또는 엠바고를 깼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포털사이트나 동영상사이트 등에 이를 옮겨온 누리꾼들의 게시물까지 삭제됐다. 국민들의 의구심은 한층 더 커진다. '왜 갑자기? 청와대가 압력을 넣었나?'

돌발영상이 삭제되면서 인터넷 공간은 오히려 더 들끓고 있다. '문제의 동영상'을 해외 동영상 사이트인 '유투브'에서만 볼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청와대 압력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한 누리꾼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청와대의 행태를 이렇게 비판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미래는 정해져 있나? 아니다.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영화의 세계관이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며 비상식적이다. YTN 돌발영상이 꼬집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청와대의 비상식적인 행동. 사제단이 어떤 짓을 하든, 우리의 발표 내용은 예정돼 있다는 그들. '태초에 야훼가 모든 것을 정해놓으셨다'는 대통령의 믿음이 너무 강해서 그럴까?

생각해보니 그들의 비상식적인 세계관은 여러 정책에 투입될 예정이다. 대운하. 국민, 너희들이 어떻게 하든 간에 대운하가 파지는 미래는 정해져 있다."
▲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 올라온 한 누리꾼의 패러디.

'보도 가치가 있는 사실'과 '알아야 할 사실'

당시 사제단은 기자 회견에 앞서 "엠바고를 전제로 국정원과 청와대에서 오늘 사제단에서 발표하기로 마음먹은 몇 분에 대해 자체조사 결과 사실무근이라는 논평을 냈다고 한다. 저희가 밝히려는 인사가 누구인지, 저희의 심경을 어떻게 알아맞췄는지 모르겠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말을 이럴 때 써야 되는지도 모르겠다"라고 밝혔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 있던 100명이 넘는 기자들은 그 발언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그날 쓰려 했던 기사의 주제(누가 뇌물을 받았는지)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기자들 중 누구도 청와대는 어떻게 사제단의 발표가 있기도 전에 이른바 '뇌물 인사'의 명단을 파악했고, 나아가 자체 조사 결과 '문제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돌발영상을 본 시민 대다수가 경악했던 일을 놓고 기자들 대다수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다.

이쯤되면 청와대의 '비상식적 논평'보다 이를 알면서도 보도하지 않았던 기자들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든다. 한마디로 말해 시민의 상식과 너무 크게 벌어져 있었다. 한쪽은 '그림 되는 기사'를 생각했고, 다른 한쪽은 '사실 그대로'를 원했다. 기자에게는 '청와대의 반론'이 보도해야 할 사실이었고, 국민의 입장에서는 '청와대가 사제단의 발표 내용을 미리 반박했다'는 게 알아야 할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언론계의 잘못된 관행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떻게 100여 명이 넘는 기자들이 모두 일제히 침묵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일종의 대답이다. 여기서 시민의 상식에 기초한 의구심은 커진다. '어쩌면 이번뿐만 아니라 늘 그래왔던 게 아닐까?'

'시민의 상식'과 괴리된 '기자의 상식'

맞다. '엠바고'라는 전제 하에 이 같은 일들은 사실 꽤 자주 있어왔다. 그것은 취재원과 기자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또 취재원의 권력이 클수록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을 때 얻는 이익도 그만큼 컸다.

'이 말은 없던 걸로 해주세요', '이 말은 4시 이후에 한 걸로 해주세요'라는 청와대 대변인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마감 시간을 지키기에도, 청와대라는 최고 권력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에도 좋지 않은가. 어쩌면 지면 혹은 화면에 나온 내용이 전부일꺼라 믿을 수밖에 없는 이들보다 '몇 시에 공개할 정보'를 미리 알고 있다는 우월감도 있었을 테다.

'편의'를 위해, 권력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자신의 존재이유인 '문제의식'을 죽인 언론. 이에 대해 상식에 기초한 불신은 한층 더 커진다. 그것은 힘없는 일개 개인이 제보를 위해 언론사 문을 두드릴 때 '권력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언론 자신의 '편의'를 이유로 거절당할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다. 시민의 상식과 다른 '상식'을 가진 언론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결국 YTN 돌발영상이 논란이 된 뒤에도 주요 언론매체는 이 같은 논란이 있다는 사실 자체도 보도하지 않음으로써 일반의 불신만 더욱 키우고 있다. 온라인 공간은 누리꾼들의 분노로 끓고 있는데 언론은 냉담하기만 하다. 언론 스스로 '그들만의 상식'을 고수하고 있는 셈이다.

"<프레시안>, 역시 반성합니다"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다. <프레시안>도 사실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제단 기자회 견 현장에 있었던 기자 또한 '청와대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가장 막강한 정보력을 지닌 청와대, 그것도 '청와대보다 더 막강하다'는 정보력을 지닌 삼성과의 관계가 걸린 문제였다. 정보가 빠르게 오갔으리라는 지레짐작은 응당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짚어보아야 할 문제의식을 가로막았다.

결국 돌발영상이 문제를 제기했을 때 자발적으로 청와대의 정보력을 믿었던 당시 상황이 떠올랐다. '기성 매체와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자'고 외쳐온 <프레시안>의 기자로서 기성 언론의 관점에 기대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택했었다는 사실에 낯이 뜨겁다.

'기자의 상식'과 너무 쉽게 타협했던 기자도 이 글을 통해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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