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기업'이 없다"
'대기업만 하기 좋은 나라' 기조에 비판 쏟아져
2008.03.27 08:01:00
"'젊은 기업'이 없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가 국정지표가 된 지 이미 오래됐다. 많은 국민들이 이런 방향에 동조했다. 그래서 기업인 출신 대통령이 탄생했고,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낯선 표현이 유행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주어가 빠진 질문

하지만 이런 구호에 담긴 뜻은 모호하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기업을 세우기 좋은 환경을 갖춘 사회"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에 대한 제약이 적은 사회"라고 이해한다.

이 두 가지 뜻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전자가 가리키는 것은 기업 경영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 즉 아직 기업 경영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유리한 환경이다. 기술과 아이디어만 갖고 있는 이들이 창업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뜻이다.

반면 후자가 가리키는 것은 창업 단계를 이미 거쳐 기업 경영자가 돼 있는 이들에게 유리한 환경이다. 창업을 통해 기존 시장에 새로 진입하려는 이들이 극복해야 할 경쟁자들에게 유리한 환경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를 '창업하기 좋은 나라'로 받아들이고 싶은 이들과, '기존 기업 경영자들이 편하게 사업할 수 있는 나라'라고 받아들이려는 이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전자가 도전자라면, 후자는 기득권을 갖고 있는 방어자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 뒤에는 이처럼 엇갈리는 이해관계가 있다.

그리고 '기존 기업 경영자들이 편하게 사업할 수 있는 나라'라고 받아들인 경우 역시 모두 이해관계가 같을 수는 없다. 중소기업 사장과 재벌 계열사 사장의 입장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벌 계열사 사장이 편하게 사업하는 나라'라는 방향과 '중소기업 사장이 경영하기 편한 나라'라는 방향을 동시에 쫒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정부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만 되뇌어서는 안 된다. '기술과 아이디어만 있는 사람이 기업을 세우기 좋은 나라', '중소기업 사장이 사업하기 좋은 나라', '재벌 회장이 행복한 나라' 등 전혀 다른 뜻으로 읽힐 수 있는 여러 가능성 앞에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구호는 고도 성장기에 대한 국민들의 막연한 향수를 자극하는 정치적 수사를 넘어설 수 없다.

도전자를 허용하지 않는 재벌…제조업 진입장벽, 신규 창업자에게 너무 높다

그런데 정부 당국자들이 모호하게 방치해 둔 이런 구호를 선명하게 풀어 설명한 보고서가 나왔다. 경제개혁연대가 발행하는 <경제개혁리포트> 2008년 제5호다.

26일 나온 이 보고서는 "한국 경제에서 제조업 부문의 과점화 및 5대 재벌의 경제력 집중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경고한다. "특히 석유정제업, 전자부품·영상·통신장비업, 자동차산업, 조선업 등 우리나라 대표산업의 경우, 50대 기업군 소속 거대기업의 매출액 점유율이 50%를 넘어 과점화 현상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한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가 가리키는 대상에서 중소기업은 빠져있다는 뜻이다. 그동안의 경제 환경은 대기업을 거느린 재벌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것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이밖에도 많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모든 기업군에서 1960년대에 설립된 기업이 가장 많았다. 그리고 1981년 이후 최근 25년 동안 설립된 '젊은 기업'이 50대 기업군에서는 7개사, 51∼100위 기업군에서는 13개사, 101∼200위 기업군에서는 32개사로 나타났다. 규모가 큰 기업군일수록 '젊은 기업'의 비중이 적은 셈이다.

또 50대 기업군에 속한 '젊은 기업'(최근 25년 동안 설립된 기업) 7개사 가운데 제조업체는 LG필립스엘시디 단 한곳뿐이다. '젊은 기업'도 드물지만, '젊은 제조업체'는 더 적은 셈이다.

'젊은 기업'이 50대 기업군의 문턱을 넘기 어렵다는 것은 한국 경제가 이미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에게 유리한 질서로 짜여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창업을 통해 새로 시장에 진입한 도전자가 기득권을 갖고 있는 기존 대기업을 꺾기 힘들다는 것.

"IMF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기업 매각'이 재벌 살 찌웠다"

역대 정부가 강조해 온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가 '창업하기 좋은 나라, 신규 창업자를 북돋워주는 사회'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대신 대기업을 거느린 재벌에게는 매우 유리한 환경이다. 보고서를 계속 읽어 내려가면, 더욱 분명해지는 사실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200대 기업 중 127개사가 40개 재벌그룹 소속 계열사다. 그리고 이들이 200대 기업 자산 합계의 62.7%, 매출액 합계의 69.5%를 차지한다. 특히 50대 기업 가운데 5대 재벌 계열사는 17개(34.0%)나 포함돼 있다. 이들이 50대 기업 자산 합계의 42.0%, 매출액 합계의 50.1%를 점유하고 있다.
▲ 삼성특검 수사관들이 삼성 본사를 압수수색하던 날, 한 삼성 직원이 내부 사진 촬영을 통제하고 있다. 삼성 계열사 4개 사가 50대 기업군에서 차지하는 매출액 점유 비중은 16.6%로 다른 재벌에 비해 훨씬 높다. ⓒ연합뉴스

하지만 5대 재벌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1위 재벌인 삼성이 워낙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삼성의 경우, 4개 계열사가 50대 기업군에 속해 있는데, 그 자산 점유 비중은 15.1%, 매출액 점유 비중은 16.6%에 달한다. 다른 재벌에 비해 훨씬 높은 비중이다.

물론 이런 결과만 놓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를 내건 정부가 사실상 재벌만을 편들어 왔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다소 무리다. 하지만 보고서의 다음 내용을 읽다보면, 생각이 바뀐다.

200대 기업 가운데 설립 이후 지배권 변동을 경험한 회사가 총 71개사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인 39개사가 공기업 민영화(1997년 IMF 외환위기 이전) 또는 구조조정기업의 매각(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과정에서 재벌 계열사로 편입된 경우다. 그리고 재벌의 급격한 확장은 이런 과정에 힘입은 결과였다.

공기업 민영화 및 구조조정기업의 매각을 주도한 정부의 결정이 재벌의 확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그리고 재벌이 몸집을 더 불릴 수 있는 계기는 앞으로도 더 남아 있다. 외환 위기 이후 생겨난 구조조정기업 가운데 아직 채권단 관리 하에 있는 기업이 8개사에 이르기 때문이다. 보고서에는 "향후 이들의 매각 결과가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 정도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므로, 매각 절차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담겨 있다.

"재벌 구조 유지되는 한, 신규 창업은 없다"

이제까지의 정부 정책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사실상 재벌만을 살찌우는 내용에 불과했다는 지적은 사실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창업을 통해 새로 시장에 진입한 기업이 기존 대기업의 견제를 뚫고 일정 규모 이상 성장하기 어렵다는 지적 역시 마찬가지다. 중소·벤처기업 경영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익숙한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현재의 재벌 역시 과거 설립 당시에는 중소기업이었다. 하지만 1960~70년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성장한 뒤, 재벌은 중소기업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그리고 과거 중소기업을 재벌로 키웠던 정부 역시 지금은 중소기업보다 재벌을 지원한다. 정부의 이런 태도는 공정하지 않다. 중소기업으로 출발한 현재의 재벌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늘 수혜자의 입장이었던 반면, 현재의 중소기업은 항상 반대 위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벤처기업인으로 꼽히는 안철수 씨 역시 최근 비슷한 주장을 했다. 그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소신을 꺾지 않는 '모범생 경영인'으로도 유명하다. 여느 벤처기업인들이 김대중 정부의 벤처 육성책에 취해 흥청거릴 때, 과감하게 '벤처 거품론'을 강력히 경고했던 게 대표적인 사례다.

2005년부터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안철수 씨는 <시사IN>최근호와의 인터뷰에서 "대기업만 산다고 우리 경제가 사는지 면밀하게 따져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런 설명이 뒤따랐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양극화의 근본 원인은 대기업의 단기 시각에서 비롯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 관행으로 인해 중소기업이 다 죽어나갔고, 그로 인해 우리나라 대기업이 사상 최대 수출을 해도 그 열매는 외국 중소기업에 돌아가고 있다. 대기업이 글로벌 아웃소싱이라는 이름으로 외국 중소기업으로부터 납품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대기업만 살리면 우리 경제가 좋아질 줄 알고, 국민 세금으로 환율 방어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데, 그 혜택도 외국 기업이나 대기업에만 간다."

그리고 안 씨는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의 창업지수가 세계1위였는데, 지금은 세계 꼴찌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시장을 지배하고,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재벌이 있는 한 당연한 일이다. 갓 설립된 중소·벤처 기업이 이런 재벌과 공정한 경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안철수 "'비즈니스 프렌들리'라고 '무법천지' 만들면 곤란"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이런 지적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출자총액제 폐지, 지주회사 규제 완화, 금산분리 완화 등 재벌의 요구 사항을 모두 이명박 정부의 정책 과제로 수용한데서 잘 드러난다. 이런 정책을 내세우며, 대통령과 정부 당국자들은 '비즈니스 프렌들리', '작은 정부' 등의 표현을 꼭 곁들였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여전히 모호하기만 하다. 재벌과 중소기업 가운데 어느 쪽의 비즈니스에 대해 프렌들리(우호적)하게 굴겠다는 것인지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물가를 통제하는 작은 정부' 역시 어색한 일이다.

'비즈니스 프렌들리'와 '작은 정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정부 당국자의 발언보다 안철수 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편이 더 나을 듯하다.

안철수 씨는 당시 인터뷰에서 "'비즈니스 프렌들리'가 무법천지를 만드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가 진정으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꿈꾼다면, 재벌이 제멋대로 활개치도록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그리고 '작은 정부'에 대해서도 한마디 했다. "'작은 정부'에서 중요한 점은 공정한 룰을 만들고 기업이 잘 지키는지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다. 무조건 규제만 푼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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