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식 경영'을 고발한다"
[인터뷰] 삼성 '천지인' 자판 발명 직원이 인권위를 찾은 이유
2008.05.20 10:35:00
"'삼성 식 경영'을 고발한다"

삼성전자 현직 직원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인사상 불이익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다. 삼성전자 국내영업사업부 경영지원팀 소속 최인철 차장이 주인공이다.

그는 삼성 애니콜 '천지인' 자판 발명자로 널리 알려졌다. 천지인 입력 방식은 모든 한글 모음을 천(·), 지(ㅡ), 인(ㅣ) 세 개의 버튼만 입력하여 구현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한글의 특징을 잘 반영한 '천지인' 자판은 삼성 애니콜 휴대전화가 국내 소비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데 크게 이바지한 요소로 꼽힌다.

'천지인' 발명자가 인권위 찾은 까닭은?

이런 그가 19일 인권위를 찾았다. 마침, 이날은 '발명의 날'이다. 그의 주장은 이렇다.

"발명을 통해 회사의 이익에 큰 공을 세운 내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차장 진급에서 연거푸 탈락됐다. 그 결과, 동기들보다 3년 이상 늦게 차장으로 진급했다. 연봉도 입사 동기들보다 3000만 원 이상 적다. 지난 2001년 회사를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한 후부터 갑작스레 겪는 차별이다. 당시 소송은 '천지인' 발명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요구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요구의 대가로 심한 고용 차별을 겪고 있다. 이는 평등권 침해다."

그는 지난 2001년부터 회사 측이 그를 업무에서 배제했다고 했다. 함께 일할 동료, 부하 직원도 없어졌다. 그저 책상만 지키고 있다는 것. 또 아무런 연고가 없는 부산으로 갑작스럽게 전출되는 등 다양한 보복성 인사를 경험했다고도 했다.

진정서를 내자마자, 그는 <프레시안>을 찾았다. 기자와 만나는 동안, 그는 한 번도 '오프 더 레코드(off-the-record, 기록을 남기지 말아달라는 요청)'를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보도해 달라. 이름도, 얼굴도 숨길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

삼성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제보하는 이들에게서는 매우 드문 태도다. 삼성 관련 제보자들은 극도로 주위를 경계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게 보통이었다.

 

"삼성은 약자에게 강하다"

이런 이례적인 태도는 '발명'과 '혁신', 그리고 '권리'에 대한 그의 생각과 관계가 있다.

그는 "발명과 혁신의 가치를 무시하는 기업 문화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 이런 문화를 후배들에게까지 넘겨주고 싶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부당한 조치에 맞서 권리를 요구하는 쪽이 오히려 주눅이 드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싫다. 회사에 대해 떳떳하게 권리를 요구하는 선례를 만들고 싶다"라고도 했다.

이어 그는 "삼성은 약자에게 강하다. 비굴한 태도를 보이면,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혁신을 통해 '사회적 비용'을 낮추는 대가로 이익을 얻는 게 좋은 기업이다. 하지만 삼성은 협력업체를 쥐어짜고, 발명자의 몫을 가로채는 등 마땅히 부담해야 할 비용을 지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익을 얻는다. 이런 분위기에서 창조적 혁신은 이뤄지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거듭 했다.

삼성 비리 의혹에 대한 조준웅 특별검사팀의 수사가 진행될 당시, 삼성 내부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했다. 컴퓨터 하드 디스크 속에 있는 내용을 지우는 소프트웨어가 회사 전체에 배포됐다는 것, 그리고 자신은 컴퓨터 속 자료를 지우지 않고 버티다 인사팀 담당자에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는 것이다. 단 한 차례를 제외하면, 특검 수사팀이 찾아올 때마다 회사 측이 미리 알고 대비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관련 기사: "누가 삼성을 범죄집단 취급했나?")

삼성에는 반드시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곁들였다. 그는 삼성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내부에서 총수의 전횡을 견제할 힘이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삼성 직원들에게서 창조성을 앗아가고, 수동적인 태도를 몸에 배이게 하는 것이 총수의 막강한 영향력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총수의 간섭 때문에 직원들의 창조성이 얼어붙는 일을 막으려면, 노조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천지인' 둘러싼 법정 다툼…삼성이 지키려 드는 특허 낸 직원에 대한 보상은?"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실명을 내걸고 이런 이야기를 전한 삼성 현직 직원은 그가 처음이다.

그는 오래 전부터 온라인 공간에서 '유명인사'였다. '천지인' 자판 발명을 둘러싼 논란의 한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이 논란은 두 갈래로 진행돼 왔다.

하나는 발명가 조관현 씨와 삼성전자의 법정 다툼이다. 조 씨도 '천지인' 자판 관련 특허를 갖고 있다. 삼성전자는 1998년 조 씨의 특허를 사들이려 했다. 하지만 최인철 씨가 발명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판단해서, 결국 조 씨의 특허를 사지 않았다. 이후 조 씨는 삼성전자가 자신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900억 원의 소송을 제기했다. 조 씨는 1심에서 패소했고, 현재 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에 맞서, 삼성전자는 지난 2003년 조 씨의 특허를 상대로 특허 무효 심판을 제기했다. 1심인 특허심판원은 지난 2005년 조 씨의 특허와 삼성전자의 특허 내용이 같다며, 조 씨의 특허 일부가 무효라고 판단했다. 이어 2심인 특허법원은 조 씨의 특허와 삼성전자의 특허가 다르다고 판단했다. 1심은 삼성전자를, 2심은 조 씨를 편든 셈이다. 이어 3심인 대법원은 삼성전자의 편을 들었다. 이에 따라 현재 고등법원에서 진행 중인 민사소송도 삼성전자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다른 하나는 "삼성전자가 특허를 소유하고 있는 '천지인' 자판을 발명한 삼성 직원이 보상은 고작 29만 원의 상여금이 전부"라는 이야기다. '최인철'이라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들도, 한 번쯤 들어봤음 직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이들이 추정하는 '천문학적인 이익'의 규모는 수백억 원부터 수조 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게다가 조관현 씨와 삼성전자의 법정 다툼이 사실상 삼성전자 측의 우위로 가닥이 잡히면서, 이런 이야기에는 살이 붙고 있다. "삼성전자는 900억 원이 걸린 법정 다툼을 벌이며 자사의 특허를 지키려 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기를 쓰고 지키려 드는 특허를 낸 직원에 대한 삼성전자 측의 보상은 고작 29만 원에 불과했다"라는 것.

"'합의'로 끝난 일인 줄 알았는데…"

최인철 씨에게 인터넷에서 떠도는 '29만 원 상여금' 이야기의 진위부터 확인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다. 우선, 최인철 씨가 받은 상여금 액수는 29만 원보다 적다. 10만 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는 2003년 11월 직무발명 보상에 대한 부당이득금 반환청구소송을 취하하는 대가로 삼성 측에게서 돈을 받았다. 아주 적은 돈은 아니지만, 호사가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는 적은 돈이다. 그는 "서울 강남에서 30평 아파트를 사기에 한참 부족한 돈"이라고 설명했다.

'소송을 취하하는 대가로 돈을 받았으면, 이제 다 끝난 일 아닌가. 그런데 지금, 왜?' 이런 의문이 드는 게 당연하다. 사실 그도 '다 끝난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10만 원 상여금에도 불만 없던 시절"

그가 '천지인' 자판을 발명한 것은 1994년 10월이다. 그리고 1998년 10월, 회사 측이 그에게서 특허권을 양도받아 등록을 마쳤다. 이 과정에서 그가 받은 것은 10만 원 조금 넘는 상여금이 전부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회사에 별 불만이 없었다. '발명의 재미' 그 자체에만 푹 빠져 있던 시절이었다.

이어 그는 백화점 영업을 담당하는 부서에 배치됐다. 이곳에서도 그는 뛰어난 실적을 거뒀다. 전산 시스템을 개선하여 회사 측으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인사 고과에서도 최고점을 받았다.

이런 그가 회사에 맞서게 된 것은 2001년이다. 당시 회사는 그가 근무하던 백화점 영업부서를 자회사로 옮기려 했다. 퇴직을 강요받게 되리라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이런 상태로 직장에서 쫓겨난다면….' 끔찍했다.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방패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무발명인가? 자유발명인가?

그래서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권리를 찾기로 했다. 회사를 상대로 부당이득금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자신에게서 양도받은 특허로 회사가 막대한 수익을 올렸지만, 정당한 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 최 씨는 이 소송에서 천지인 발명이 '직무발명'이 아닌 '자유발명'이라고 주장했다.

직무발명은 직장 구성원이 담당 업무와 관련하여 수행한 발명을 가리킨다. 자유발명은 직무와 관련 없이 개인적으로 수행한 발명을 뜻한다. 현행 발명진흥법 11조에 따르면, 직무발명이라도 "사용자들이 당해 직무발명에 관한 권리를 승계한 후 대통령령이 정하는 4개월 이내에 출원을 하지 아니하는 경우 또는 서면으로 그 출원을 포기한 경우의 당해 직무발명은 자유발명으로 본다"라고 돼 있다.

삼성전자가 천지인 발명을 출원한 것은 1995년 5월이었다. 최 씨가 직무발명 신청서를 작성하여 회사 측에 권리를 넘긴 지 약 7개월 뒤였다. 따라서 최 씨는 발명진흥법 11조에 따라 자신의 발명이 '자유발명'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1심 법원은 지난 2002년 판결에서 최 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허 출원 시점은 늦었지만, 실질적인 정황으로 볼 때 직무발명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것.

현행 특허법은 직무발명에 대한 보상 규정이 모호하다. 그래서 '천지인' 발명이 자유발명이 아닌 직무발명으로 취급되면, 보상을 받는 게 상대적으로 더 까다로워진다.

특허청, 법원 "직무발명 수익의 일정 비율은 발명자의 몫"

최 씨는 1심 판결에 승복할 수 없었다. 마침 국내외에서 직무발명에 보상을 인정하는 판례도 다양하게 쏟아졌다.

2002년 일본에서는 히타치제작소가 직무발명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전직 연구원에게 1억 6300만 엔을 지급하라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한국, 일본 등에서 직무 발명 보상에 관한 인식을 새롭게 한 계기가 된 판결이다.

이듬해인 2003년, 한국에서도 비슷한 판결이 나왔다. 한 제약회사 전직 연구원이 직무발명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발명으로 얻은 이익의 5%를 직원에게 양도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소송을 제기한 연구원은 약 3억 원(이 발명으로 회사가 얻을 이익 200억 원 × 발명자들에 대한 보상률 5% × 발명자들 가운데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의 기여율 30%)의 보상을 받았다.

특허법 40조 2항에 따르면, 직무 발명 보상 금액에 대한 기준은 대통령령 또는 조례로 정하게 돼 있다. 하지만 이런 대통령령 또는 조례는 제정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특허청이 2001년 "발명 수익의 15%를 직무발명자에게 보상금으로 지급 한다"라는 내용의 시행령을 마련했으나, 전국경제인연합 소속 대기업의 반발로 보류된 것이다. ☞'직무발명 보상'을 둘러싼 논란

비록 대기업들은 다른 견해를 보이지만, 특허 당국과 법원은 "발명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수익 가운데 일정 비율은 직무발명자의 몫"이라고 판단한 셈이다.

이런 판단에 힘입어 최 씨는 항소를 준비했다. 천지인 발명은 '자유발명'이라는 입장을 유지하면서, "설령 '직무발명'이라 해도 수익 가운데 일정 비율은 발명을 수행한 직원의 몫"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관련 기사:'얌체회사'서 2200억 받아낸 나카무라의 '쓴소리')

"돈보다 인사 혜택에 더 끌렸다. 하지만 회사는 약속을 어겼다"

하지만 걸림돌이 많았다. 우선 당사자인 최 씨가 개인적인 문제로 무척 지쳐 있었다. 그리고 2002년 갑자기 부산으로 발령받았다. 회사를 상대로 부당이익금 반환 소송을 한 대가였다.

부산은 모든 게 낯설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을 그의 부모에게 맡기고 부산에서는 혼자 생활했다. 게다가 회사는 그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다. 무료하고 쓸쓸한 생활 속에서 그는 지쳐갔다. 이런 그에게 회사는 '협상'을 제안했다.

윤종용 삼성전자 대표이사의 위임을 받은 김인수 당시 인사팀장(현 부사장)이 그에게 항소를 취하하는 대가로 금전적 보상과 인사(人事) 혜택을 약속했다. "서울 강남에서 30평 아파트를 사기에 조금 모자란 돈"을 받고 합의했다. 갑작스런 퇴직에 대한 불안감에 떤 경험이 있는 그는 돈보다 인사 혜택에 더 끌렸다. 2003년 11월께의 일이다.

하지만 약속했던 '인사 혜택'은 없었다. 이듬해 그는 차장 승진에서 탈락됐다.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부산이 아닌 서울에서 근무하게 해 달라는 요구는 이듬해에서야 간신히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연구'와 '발명'에 관한 업무를 하게 해 달라는 요구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발명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 경험이 다른 연구원들에게 번지는 것을 회사가 두려워했다"라고 말했다.

"'혁신의 가치' 무시하는 삼성, 내부 직원이 개혁해야"

맡은 업무가 없어서 책상만 지키는 날이 이어졌고, 진급과 연봉 모두 동기들보다 크게 뒤처졌다. 2003년 당시 그에게 '인사 혜택'을 약속했던 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따지는 그에게 돌아온 것은 "인사를 '각서'로 하는 회사가 어디 있느냐"라는 말뿐이었다. '인사 혜택' 약속을 순진하게 믿었느냐는 조롱으로 들렸다.

분통이 터졌지만,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때 열정을 쏟았던 회사의 어두운 면을 생생히 지켜본 듯했다. 시간이 흐르는 사이, 그도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재혼을 했고, 집도 장만했다. 가정이 안정을 찾자 자신감이 생겼다.

마침,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지냈던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이 불거졌다. 삼성 현직 직원으로서, 그는 김 변호사를 열렬히 응원했다. 이후 삼성 특검의 수사를 보면서, 다시 실망했지만 '이나마도 소중한 성과다' 싶기도 했다.

현직 삼성 직원들이 침묵하는 한, 삼성 외부로부터의 개혁은 한계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단지 인사상 불이익에 항의할 생각뿐이었다면, 굳이 언론에 자신을 노출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발명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하지 않는 문화가 삼성의 구조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다고 여긴다. 오로지 '총수에 대한 충성도'만으로 직원을 평가하는 탓에 혁신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한 번 말문이 트인 그는 '삼성 식 경영'의 폐해에 대해 격정적으로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가 최근 여러 차례 기자와 만나 나눴던 이야기를 정리했다.

▲ 서울 명동의 한 찻집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나온 최인철 씨. 그는 "당당한 모습으로 보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프레시안

"획일적인 '6시그마' 적용, 직원 통제 수단일 뿐"

프레시안 : 당신은 삼성경제연구소(SERI) 홈페이지에서 기업혁신 방법론을 연구하는 포럼을 꾸리고 있다. '6시그마'(통계적 방법을 통한 경영 혁신 기법 가운데 하나) 등 최근 유행하는 경영혁신 방법론을 비판한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최인철 : 삼성에서 오랫동안 '6시그마' 방법론이 유행했다. 삼성 비리 의혹에 연루돼 퇴진한 김인주 전 전략기획실 사장이 이 방법론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1980년대 말 미국 모토로라에서 마이클 해리 박사가 창시한 방법론이다.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GE)이 '6시그마' 방법론을 적용해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통계 분석에 바탕한 '6시그마'는 직원들의 창의성을 고양하기보다, 통제하는 방법론에 가깝다. 그래서 '6시그마'는 주로 제조공정의 품질관리를 위해 주로 쓰인다. 그런데 삼성을 비롯한 많은 국내 대기업들은 거의 모든 부서에 '6시그마'를 도입하려 했다. 하지만 공장의 품질관리를 위한 기법이 연구개발 부서에서 통할 리는 없다. 마케팅, 서비스 부서 역시 마찬가지다. 업무의 성격에 맞는 경영혁신 기법이 필요한데, 왜 삼성을 비롯한 국내 대기업들은 일률적으로 같은 방법론을 적용하려 했을까.

혁신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영 관행의 한 단면을 보여준 사례라고 본다. 이런 사례는 흔하다. 내가 삼성항공에 입사한 1989년 당시 기억이 자주 떠오른다. 그때 삼성에서는 '개인별 사업부제'라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다. 모든 직원이 하루 동안 한 일을 일기 쓰듯 정리해 보고하는 것이다. 이런다고, 기업의 가치가 높아질까. 전혀 그렇지 않다. 직원들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기법에 불과하다. 다행히 내부 반발 때문에 '개인별 사업부제'는 폐지됐다. 하지만 이런 제도를 도입한 발상의 뿌리는 여전하다. 직원을 통제하고, 쥐어짜는 기업 문화 속에서 '창조적 혁신'은 불가능하다.

"옛날 삼성은 이렇지 않았다"…'타임머신' 팀의 경험

프레시안 : '6시그마' 방법론에 열광하는 관리자들의 모습에서 '삼성 식 경영'의 단면을 읽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당신이 경험한 삼성 식 경영은 늘 그랬나?

최인철 :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금처럼 혁신이 이뤄지기 어려운 문화는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급격히 확산했다. 이학수, 김인주 등을 정점에 둔 이른바 '재무라인'이 삼성의 실세가 되면서 벌어진 일이다. 과거에는 '인사라인', '재무라인' 등 여러 세력이 서로 견제하는 구조였다.
▲ 삼성전자 사보에 '타임머신' 팀 구성원으로 소개된 최인철 씨. ⓒ프레시안

내 경험을 이야기해보겠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1989년 삼성항공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내가 품었던 꿈은 비행기를 설계하는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입사하고 보니, 이런 일을 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나마 연구소에 배치받았다는 점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뒤, 내가 속한 연구소가 삼성전자에 인수됐다.

그리고 1992년 7월, 삼성전자에 '타임머신'이라는 팀이 꾸려졌다. 지금과 같은 문화에서라면, 상상할 수 없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창의적인 인재들을 모아 자유롭게 지내며 아이디어를 내도록 한 조직이다. 회사 전체에서 10명이 뽑혔는데, 나도 포함됐다. '타임머신'에서 일했던 시기가 내 인생의 전성기였다. '천지인' 아이디어도 그때 나왔다.

"타임머신 근무자에게 약속한 혜택, 회사는 지키지 않았다"

대표이사 직속 T/F팀인 '타임머신'은 구성원의 자율성을 철저하게 보장했다. 목표와 일정을 스스로 관리하고, 예산 역시 스스로 편성·운영하게끔 했다. 출·퇴근시간도 전혀 통제하지 않았다.

회사 측은 '타임머신' 근무 경력을 승진에 반영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타임머신'에서 제안한 아이디어가 사업화될 경우, 수익 가운데 일정 비율을 인센티브(성과에 따른 보수)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모두 깨진 약속들이다. '천지인' 자판 발명으로 인해 생겨난 이익에 대한 보상도 없었고, 승진 혜택도 없었으니까.

과거의 삼성전자에서는 '타임머신'과 같은 조직도 꾸려질 수 있었다. 이런 회사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재무라인'이 전권을 쥐면서, 모든 게 변했다. 철저하게 재무적인 지표로만 평가하는 문화가 일반화됐다. 이런 문화 속에서는 숫자로 표현될 수 없는 자산은 설 자리를 잃는다. 기술과 서비스의 혁신이 가진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게 된다. 혁신의 기풍은 사라지고, 위에서 할당한 재무적인 목표에 맞춰 쥐어짜는 일만 남는다.
▲ 1992년 7월 삼성전자 사보에 실린 타임머신 팀 소개 기사. ⓒ프레시안

"협력업체 쥐어짜는 게 혁신인가?"

프레시안 : 삼성에서 혁신을 장려하는 분위기가 사라졌다는 뜻으로 들린다. 이런 지적은 전에도 자주 나왔다. 하지만 삼성이 거둔 막대한 성과 앞에서 빛이 바래곤 했다.

최인철 : 진정한 '혁신'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게 진정한 혁신이다. 그리고 이런 혁신을 통해 좋은 제품을 싸게 시장에 내놓는 조직이 좋은 기업이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삼성은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혁신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대신 협력업체를 쥐어짜거나, 발명자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가로채는 방식으로 비용을 줄였다. 유독 구매부서가 재무적인 목표를 잘 달성하곤 하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관련 기사: 삼성전자 협력업체의 반란, 이유는?, 안철수 "이명박 정부, 약육강식 경제 만들까 우려", "기업가 정신? 삼성이 죽였다", "'젊은 기업'이 없다", 공정위, 삼성전자에 사상최대 과징금 부과)

이렇게 줄어든 비용은 '사회적 비용'과 다르다. 그리고 이런 식의 비용 절감을 통한 성장은 언젠가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생각해보라. 협력업체가 언제까지 대기업의 횡포에 당하고만 있겠는가. 또 합리적인 보상이 이뤄지지 않는데, 누가 자발적으로 좋은 아이디어를 궁리하겠는가. 지난 10여 년 동안, 뛰어난 연구원들이 대거 연구소를 떠난 것도 사실이다.

"'통제'로 '기술유출' 막는다?…천만에!"

프레시안 :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연구직을 꺼리는 것은 이미 사회적인 문제가 돼 있다. 또 대기업 연구원들이 직장을 떠나면서, 중요한 기술을 빼돌린다는 우려도 나온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해 우리 사회가 내놓은 해법은 엄격한 '통제'다. 지난해 와이브로 관련 기술 유출 사건이 터졌을 때의 반응이 대표적이다. 당시 국가정보원은 기술 유출 혐의가 있는 이들에 대해 감청을 허용해야 한다는 보도 자료를 내놓았다. '혐의'만으로 감청을 허용한다면, 사실상 무제한적인 감청이 허용되는 셈이다. 기술을 다루는 이들의 인권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언론 대부분은 이런 보도 자료를 베끼다시피하여 기사화했다. (☞관련 기사: 국정원은 '무제한 감청'의 길 열려 한다)

최인철 : 공감한다. '통제'로 기술유출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직무발명에 대한 합리적 보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다시 꺼낸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기업이 직원을 동반자로 여기는 자세가 절실하다. 직원의 발명이 낳은 수익에 대해 일정한 지분을 제도적으로 보장한다면, 누가 기술을 밖으로 빼돌리려 들겠는가. 또 연구하는 일에서 이탈하려는 동기도 훨씬 약해진다.

"연구 업무는 위험이 크다…'직무 발명 보상' 통해 균형 맞춰야"

하지만 정부와 기업은 '합리적 보상'보다 '엄격한 통제'만으로 문제를 풀려 한다. 이래서는 창조적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다. 혁신을 위한 연구에는 늘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수많은 연구 과제 가운데 실용적인 성과를 내는 것은 극소수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는 경로는 모두 제각각이다. 어떤 연구를 진행하며 얻은 지식과 경험이 다른 연구에서는 별 도움이 안 될 수 있다. 오랜 노력이 물거품이 될 위험이 늘 있는 셈이다.

이런 점이 관리 업무와 다른 점이다. 전혀 다른 분야일지라도, 관리 업무는 비슷한 절차를 따르는 경우가 많다. 정해진 절차를 따르기 때문에 한 번 익혀두면, 계속 활용할 수 있다. 따라서 연구 업무보다 위험이 적다.

직무 발명에 대한 보상을 제도화하는 것은 이런 위험의 차이를 메우는 의미도 있다. 위험이 큰 업무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해서 균형을 맞추자는 것이다. 이런 장치가 마련돼야 '창조적 혁신'을 도모하려는 이들이 계속 생겨난다.

"'가치 있는 혁신' 구별 못하는 경영자, 유행만 쫓는다"

물론, 창조적 혁신에 대한 합리적 보상이 이뤄지려면 미리 확보돼야 할 게 있다. 혁신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역량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역량이 너무 약하다. '황우석 사태'가 대표적이다. 황우석 씨가 거둔 성취는 '거짓 혁신', '비도덕적 혁신' 이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 사회는 너무 쉽게 속았다. '거짓 혁신', '비도덕적 혁신'을 구별할만한 눈을 가진 이들이 적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삼성을 비롯한 많은 대기업에서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경영자들이 '가치 있는 혁신'을 구별해낼 줄 모르니까, 모든 업무에 획일적인 평가 척도만 들이댄다. 그래서 '6시그마'처럼 유행을 타는 경영 기법이 나오면, 맹목적으로 쫓는 현상이 벌어진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 능력이 없는 경영자가 유행하는 방법론만 맹신할 때 빚어지는 부작용을 삼성에서 똑똑히 목격했다. 물론 이런 문제가 삼성만의 문제는 아닐 게다. 다만 삼성 특유의 엄격한 통제 문화 속에서 이런 부작용이 극대화될 따름이다.

'창조적 혁신'을 경험한 사람이 경영자가 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이 거둔 혁신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삼성에서는 이런 구조가 만들어지기 어렵다.

"'삼성의 힘' 확인한 삼성 직원들, 창조적 혁신은 더 어려워져"

이유는 이렇다. 정상적인 기업에서라면, 밖에서 돈을 잘 벌어오는 사람이 우대받는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삼성에서는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총수에 대한 '충성도'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충성하는 듯 보이는 능력'이다. 이학수, 김인주를 위시한 재무라인이 삼성의 실세가 된 것도 이런 능력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인맥 관리를 잘하고, 윗사람에게 잘 보인 이들이 승진하게 된다.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좋은 제품을 만들려고 열심히 연구하는 이들은 설 자리를 잃는다. (☞관련 기사: "'순진하면 사회생활 못 한다'는 사회가 정상인가")

최근 삼성 특검 기간 내내 회사 안에서 팽배했던 분위기는 이런 문화의 확산을 부추겼다. 경영진은 회사 전체가 한 덩어리가 돼 공범이 되도록 요구했다. 컴퓨터 속의 업무 자료를 지우도록 강요했고, 이를 따르지 않으면 강하게 질책했다. 나도 이런 질책을 경험했다. 또 특검 수사팀이 방문할 때마다, 미리 알고서 대비를 했다. 내가 경험한 범위 안에서, 삼성이 미리 대비하지 못한 경우는 단 한 번뿐이었다.

이런 모습을 본 젊은 직원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권력과 긴밀히 연결된 삼성의 힘을 생생하게 느꼈을 게다. 그리고 이런 힘 앞에서 주눅이 들었을 게다. 사법 권력도 총수 앞에서는 무력했다. 이제 어떤 직원이 감히 총수의 전횡에 대해 맞설 수 있겠는가.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경쟁은 더 가열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될수록, 창조적 혁신이 어려워지는 것은 물론이다.

"답은 노동조합이다"

프레시안 : 삼성 직원들이 지금보다 더 수동적으로 변하게 되리라는 우려로 들린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을까?

최인철 : 답은 노동조합이다. 삼성에는 노조가 꼭 필요하다. 총수의 영향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총수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은 다를 때가 종종 있다. 이럴 때마다 총수의 부당한 입김을 견제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 이런 힘을 규합할 수 있는 것은 노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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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대반격'에 삼성 비리 묻힐까 두렵다"

 

"'탁 치니까 억 하고 죽더라'는 말, 누가 믿었나?"
"PD수첩 수사하듯 삼성 수사했다면…"
"검찰만 제 구실을 하면, 큰 문제는 없다"


"삼성전자? 삼성생명? 무섭지 않다. 진짜 두려운 건…"

"삼성이 그렇게 무섭나"?
이기는 게 정의'?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삼성을 생각한다>가 나오기까지

<또 하나의 약속>을 보며 <삼성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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