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집권 후 한나라당 점점 '조갑제' 닮아가
[박동천의 집중탐구⑤] 진보와 보수-2
2009.02.26 07:02:00
MB 집권 후 한나라당 점점 '조갑제' 닮아가
제3절 현안에 관한 반응과 장기적 고려

그렇다고 하면, 이제 두 개의 질문이 뒤따라 나온다. 진보와 보수를 순서 척도로 사용하더라도 모종의 이념형은 필요할 것 아닌가? 불분명한 중간지점에서 경계는 어떻게 그을 것인가? 진보적인 성향과 보수적인 성향을 구분하는 지표로서 자주 사용되는 질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빈곤은 개인 탓이 더 큰가 아니면 사회 탓이 더 큰가?
현재 사회질서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고칠 수 있다고 보는가?
현재의 법체계는 만인에게 공평한가?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을 희생시켜도 좋은가?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불평등이 불가피한가?
환경보존이 중요한가 개발이익이 중요한가?
정의가 물리력보다 우선인가 아니면 정의도 물리력에 복종하는가?
다원적인 사회가 바람직한가 획일적인 질서가 바람직한가?


현재 사회가 불평등하다고 볼수록, 그 불평등의 원인이 사회구조에 있다고 볼수록, 근본적인 개선이 가능하다고 볼수록 진보적인 성향이기가 쉽다. 조직보다 개인을 중시할수록, 성장보다 소수의 인권 및 환경을 중시할수록 진보적인 성향이기가 쉽다. 정의가 물리력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할수록 진보적인 성향이기가 쉽다. 이 밖에도 물론 진보와 보수라는 차원에서 구분할 수 있는 가치추구의 노선들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노선도 논리적으로 계속 연장하다보면 일관성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운 지점을 만나게 된다. 예컨대 환경보존을 중시한다고 자연물의 이용을 모두 반대할 수는 없다. 당장 150년 전만 해도 인간은 자동차도 전기도 없이 살았다. 그 전이나 그 후나 인간의 삶이 기본적으로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함으로써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환경과 개발의 문제도 두 원칙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개발을 어떤 상황에서 허용하느냐(또는 허용하지 말아야 하느냐)고 하는 문제, 즉 시의(時宜)에 따른 선택이 진짜 문제가 되어야 한다.

물리력과 정의의 문제 역시 양자택일인 것만은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서로 겹쳐지고 만다. 영화 <O.K. 목장의 결투>에서 그려지듯(이 영화는 실화를 토대로 한 것이다) 미국 서부개척 시대에는 한 지방의 실력자가 곧 법을 소유하는 경우가 있었고, 그럴 때 정의란 종종 실력에 의해서 결판날 때도 많았다. 20세기에 있었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영미식 정의와 독일식 정의 사이의 주도권 경쟁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영미의 산업생산력과 일대일로 경쟁하는 것이 불공평하게 느껴졌지만, 영미의 입장에서는 산업경쟁에서 밀린다고 무력도발을 일으키는 것이 부당한 일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경합이 발생해서 누구도 양보하지 않는다면 실력으로 결판을 낼 도리밖에 없다.

프랑스 혁명도, 미국 혁명(독립전쟁)도, 미국의 남북전쟁, 일본의 메이지 유신, 한국의 4월혁명, 군사쿠데타, 6월항쟁, 등등, 인류 역사 속에서 허다한 정치변혁이란 모두 서로 다르게 이해되고 적용되는 정의 사이에서 경합이 붙었을 때, 실력에 의해서 사태를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얼핏 매력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념이 일정한 지점에서 일관성을 잃어버리고 마는 난점은 하나의 발상을 논리적으로 무한히 연장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때로는 어떤 정책이나 노선을 논리적으로 연장해서 일관성이 어디까지 유지될 수 있는지를 검토해볼 필요는 있다. 그래야 정치인들의 말이 공허한 립 서비스에 불과한지 아니면 진실로 실천할 의사가 있는 것인지를 분별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논리의 연장을 해당 맥락에서 필요한 데까지만 해야지, 그 한도를 넘어가버리면 언어적 변별력이 붕괴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진보와 보수의 문제처럼 흔히 이념이라고 이해되는 사항에서는 논리적 일관성이 상당한 수준으로 요청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거기에도 현실맥락에서 나오는 적실성이라는 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나중에 제4부에서 선험주의를 비판하면서, 적실성과 시의성에 대해서는 더욱 본격적으로 강조할 것이다. 여기서는 일단 어떤 관념이나 이념이든지 일정한 맥락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한 가지 의미 요소로부터 논리적인 추론을 무한정 길게 연장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 그친다. 이는 물론 진보와 보수의 의미를 주어진 정치 현실의 맥락을 바탕으로 삼아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치더라도, 정치 현실의 맥락이라는 것 역시 경계가 지극히 모호하다. 다른 점들은 접어두더라도 우선 단기적 고려와 장기적 고려가 일치할 때도 있지만 충돌하는 경우도 대단히 많다. 조선 태종은 무력에 의한 통치를 자기 대에서 끝내고 아들 세종부터는 문치의 시대를 열 수 있도록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 뜻을 받들어 세종은 문치의 시대를 과연 열었지만, 다시 수양대군에 의해 무력의 정치가 재개되고 말았다. 세조의 정치는 아버지보다 할아버지를 닮았을 뿐이다. 세종대만 본다면 태종의 무자비한 살육이 무력투쟁을 종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세조 이후를 본다면 태종의 무력은 오히려 나쁜 선례를 하나 더 추가한 셈이 된다.

2008년 총선에서 서울 지역의 한나라당 후보들이 뉴타운 공약으로 인기를 끌자, 민주당 후보들마저 그런 소리를 입에 담고야 말았다. 결과가 참패로 나오자 원칙도 실리도 다 잃어버린 어리석은 행위였다고 안팎에서 꾸지람을 들었다. 그러나 만일 그 전략이 통해서 김근태, 정동영을 비롯한 많은 후보들이 당선되었다면 어땠을까?

2009년 용산참사 이후 민주당이 보이고 있는 행보에서도 드러나듯이, 한나라당이 추구하는 방식의 뉴타운에 민주당이 장기적으로 동조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목전의 선거승리가 더 중요하다는 명분도 언제나 가능하다. 일단 승리한 다음 정책은 수정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2008년의 선거에 임하는 입장에서 단기적 고려를 우선시할 것인가 아니면 장기적 고려를 우선시할 것인가는 어떤 교과서나 이론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추론될 수는 없는 실존적 선택에 해당한다. 실존적 선택이란 일반적 원칙으로부터 추론된 결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맥락에서 적실성을 가지는 다양한 목적들을 종합해서 시의에 맞은 노선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나는 이것이 정치가 추구해야 할 진짜 문제라고 본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나는 진보나 보수라는 단어를 철저하게 현상학적인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현상학적 의미란 현실정치의 공방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를 가리킨다. 즉, 2009년 초의 상황을 예로 들면 용산참사에 관해 검찰의 수사에 의혹이 많다고 여길수록, 김석기 서울경찰청장과 같은 경찰 지휘부 및 나아가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여지가 많다고 여길수록, 농성자들이 화염병까지 던지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수록 진보가 되고, 거기서 멀어질수록 보수가 된다. 이러한 지표는 우리 사회에서 대부분이 동의할 것이고 이의를 제기할 여지도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상학적 의미는 일종의 주먹구구에 가까운 것으로서, 세밀한 사항에서는 대단히 엉성한 부분들이 드러난다. 예컨대 용산참사에 관한 의혹제기를 끝내 수사당국이 받아들이지 않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를 생각해보자. 특검이나 국정조사를 요구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일단 접고 후일을 기약하는 길이 가능하다. 또는 평화적인 거리 시위로써 끈질기게 요구를 계속하는 방법도 있다. 또는 가장 극단적으로는 무력을 불사하는 투쟁까지 생각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 중에서 어떤 길이 "진보"가 선택해야 할 길인지는 스스로 진보를 자임하는 사람들 안에서도 이견들이 분분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점들에 관해서는 진보/보수의 분류를 가능하면 적용하지 않을 것이다.

▲ 특검이나 국정조사를 요구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일단 접고 후일을 기약하는 길이 가능하다. 또는 평화적인 거리 시위로써 끈질기게 요구를 계속하는 방법도 있다. 또는 가장 극단적으로는 무력을 불사하는 투쟁까지 생각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 중에서 어떤 길이 "진보"가 선택해야 할 길인지는 스스로 진보를 자임하는 사람들 안에서도 이견들이 분분할 것이다. ⓒ프레시안

제4절 좌익과 우익

나는 이 연재에서 좌익 또는 좌파를 진보와 거의 같은 의미로, 우익 또는 우파를 보수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정치적 노선과 성향을 진보/보수 또는 좌/우라는 두 진영으로만 분류할 때도 있겠지만, 중간에 중도라는 세 번째 진영을 넣을 때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순서 척도라는 관념이 바탕에 깔려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좌익이라는 말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통해서 불행한 의미가 섞여 들어 와 있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발생한 증오의 의미가 그것이다. 공산주의를 표방한 좌익들이 저지른 폭력 가운데에는 분명히 인간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한도를 넘는 것들이 있었다.

예컨대 고 문익환 목사 같은 분도 어린 시절 용정 일대에서 겪은 행패 때문에 일생동안 공산당을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1930-40년대의 만주나 해방에서 한국전쟁기까지의 남한에서 우익에 의한 행패나 폭력이라고 해서 본질적으로 정도가 덜했던 것은 아니다. 제주도의 4·3학살이나 거창의 학살을 비롯해서 국가권력 또는 권력의 비호를 받는 우익집단의 폭력 역시 대단히 많았다.

내가 이런 일들을 새삼 되새기는 까닭은 좌익 폭력을 두둔하기 위함이 아니라, 폭력은 좌익에 의해서든 우익에 의해서든 사라져야 할 죄악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럼에도 남한, 즉 대한민국에서는 우익 이데올로기가 지배했던 까닭에 좌익 폭력에 대한 비난은 목청껏 내지를 수가 있었지만, 우익 폭력에 대한 비난은 자칫 "빨갱이"로 낙인찍힐까봐 숨을 죽이고 살아야만 하는 시절이 오래 지속되었다. 그 사이에 폭력이나 잔혹한 행위는 으레 좌익의 한 특성인 것처럼 오해되는 풍조까지 생겨났다.

개인적으로 좌익 폭력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좌익을 혐오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나는 믿는다. 똑같은 이유로 우익 폭력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우익을 경원하는 것도 인지상정이라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와 같은 개인적인 감정들은 참고사항 정도로만 다루고 중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에서 좌파/우파를 말할 때에는 어느 쪽이 특별히 악한 쪽이라는 의미는 배제하고, 단순히 현실의 정치지형에서 각자가 차지하는 상대적인 위상을 가리키는 의미에 국한한다.

이러한 내용들이 많은 독자들에게 아무리 뻔하고 기초적인 이야기일지라도, 아직 한국 사회에는 이 정도의 내용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따라서 한국전쟁기 이전에 좌익과 우익이라는 단어들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었는지를 서양의 역사를 통해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특정한 정치적 성향을 왼쪽과 오른쪽이라고 나누어 부르게 된 기원은 일반적으로 프랑스 혁명기에 시작되었다고 본다. 프랑스 국민의회(1789-1791)에서 귀족과 승려 의원들이 오른쪽에 앉고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한 제3신분, 즉 시민의원들이 왼쪽에 앉은 것이다.

이후 좌와 우라는 명칭으로써 정치적 노선을 구분하는 편리한 관행은 이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그런데 18세기 및 19세기 중후반까지도 현실체제는 왕정과 봉건제가 주류였다. 따라서 자유무역이나 표현의 자유, 법 앞에 평등 정도를 주장하는 것만도 당시에는 충분히 "좌파"였다. 따라서 노동당이 출현하기 전까지 영국에서는 대체로 자유당이 좌파에 해당했고, 심지어는 보수당 수상으로 자유무역에 찬동해서 곡물법 폐지에 앞장섰던 필(Robert Peel)도 좌익이라고 불릴 때가 있었다.

좌익/우익과 관련된 혼동의 계기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이념이 고개를 들면서 찾아왔다. 자유주의는 자유경쟁을 주장하여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일어나게 했다면,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안에 얼마나 많은 부자유가 함축되어 있는지를 고발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주로 정치적 법적 자유를 주장한 데 비해 사회주의는 경제적 문화적 자유까지 주장한 것이다. 자유주의와 왕당파로 구성된 스펙트럼에서는 자유주의가 좌파였지만, 더 왼쪽에 사회주의가 등장한 셈이다.

이러한 변화는 덴마크 자유당의 명칭과 이념적 위상 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덴마크 자유당은 2009년 2월 현재 덴마크 의회에서 47석을 보유한 제1당으로서 보수인민당과 연립하여 집권하고 있다. 이 당은 전형적인 고전자유주의, 즉 시장자유주의를 추구하여 현재 덴마크의 정당체제에서는 중도 내지 중도 우파에 해당한다. 연립에 참여한 보수인민당은 이보다 오른쪽이고, 중도에서부터 좌익으로는 자유동맹, 사회자유당, 사회주의인민당, 사회민주당, 등이 분포한다.

그런데 덴마크 자유당의 공식명칭은 "좌파, 덴마크 자유당"(Venstre, Danmarks Liberale Parti)이다. 이 당은 1870년에 당시의 스펙트럼에서 좌파에 속했던 세 정당이 "통합좌파"라는 이름으로 합해져서 출발했다가 "좌파개혁당"을 거쳐, 1910년부터 단순히 "좌파"라는 명칭을 쓴다. 위에 언급한 "사회자유당"도 덴마크어 명칭을 직역하면 "발본좌파"(Det Radikale Venstre)가 되는데, 실제노선은 자유주의에 사회주의적 정책을 가미한 중도정당이다. 1905년 "좌파개혁당"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면서 명칭이 그렇게 붙은 것이다.

이 때문에 덴마크 정치지형에서는 좌파(venstre)는 자유주의를 가리키고, 좌익(venstrefløj)이라고 해야 사회주의를 가리키게 된다. 덴마크에 관한 이상의 내용은 Wikipedia에서 "left-wing politics", "folketing", "venstre", "radikale venstre" 등을 보면 찾아볼 수 있다. 추가적인 조사를 위한 실마리도 거기서 찾을 수 있다. 아울러 나는 영어 radical에 해당하는 한국어로 "급진"보다는 "발본"(拔本)을 쓸 것이다. "급진"이란 오직 무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성급하게 변화를 추구하는 성향을 가리킬 때에만 사용한다. 이에 관해서는 한국어 『위키피디아』, "철학적 발본주의" 항목을 보라.

이처럼 좌와 우는 기본적으로 상대적이고 순서를 가리키는 척도이다. 한국사회에서 "좌파" 내지 "좌익"이라는 말이 "공산주의 이념에 눈이 멀어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는 패거리" 또는 "북한과 내통하는 간첩"이라는 의미를 일부에게나마 풍긴다면, 그것은 단지 한국현대정치사의 굴곡 때문이다. 현재 정치를 이야기하면서 과거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야기에서 과거의 원한을 되새긴다면 발전은 기약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공공연히 이런 어리석고 유치하며 소모적이기만 한 화법이 횡행한다. 조갑제 따위 군국주의 파시스트가 보기에는 자기를 빼면 모두가 빨갱이로 보일 것이다. 좌우의 스펙트럼에서 모두가 그보다는 왼쪽에 위치하는데, 그에게는 정도의 차이를 식별할 지각능력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 조갑제 따위 군국주의 파시스트가 보기에는 자기를 빼면 모두가 빨갱이로 보일 것이다. 좌우의 스펙트럼에서 모두가 그보다는 왼쪽에 위치하는데, 그에게는 정도의 차이를 식별할 지각능력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그런데 이명박이 집권한 이후로는 우파가 점점 파시스트를 닮아가는 경향이 보인다. 홍준표는 용산에서 저지른 경찰의 만행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반정부 좌파연대"라고 불렀다. 그런 홍준표까지 싸잡아서 공성진은 김석기 경질론은 곧 "체제전복 시도"라고 하며, 정두언은 아마도 원희룡과 남경필 또는 홍정욱을 가리켜 한나라당내의 "좌파친북"이라고 시비를 건다. (☞관련 기사 : 홍준표, "민주, 반정부 세력과 좌파연대로 정국혼란 획책"(<프레시안>, 2009년 2월 2일), 공성진, "김석기 사퇴요구는 체제전복 시도"(<한겨레>, 2009년 2월 2일), "한나라당에도 좌파·친북 인사있다"(<한겨레>, 2009년 2월 2일))

이런 표찰들이 서술적인 의미에 국한해서 보면 반드시 틀린 것만은 아니다. 노랑보다는 노랑주황(yellow orange)이 붉고, 노랑주황보다는 주황이 붉고, 심지어 노랑도 하양보다는 붉듯이, 조갑제에 비하면 남경필뿐 아니라 정두언이나 홍준표, 공성진, 그리고 이명박도 좌파친북이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처럼 순서 척도라는 차원에서 옳다는 사실을 명목 척도의 차원으로 슬그머니 비화시키는 데에 있다. 즉, 상대적으로 더 왼쪽에 있다는 사실을 가지고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빌미를 삼는 것이다. 전자의 상대적인 의미는 맞는다. 그러나 노랑이 하양에 비해 빨강에 가깝다고 해서 노랑이 곧 빨강이 되지는 않으며, 노랑주황이 노랑에 비해 붉은 기를 띤다는 이유로 노랑주황이 곧 빨강이 되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빨강이라고 해서 곧 악을 의미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색깔론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두언이든 조갑제든 아니면 어느 누구든, 자기 필요에 따라서 예컨대 나에게 "빨갱이"라고 낙인을 찍고자 한다면, "나는 빨갱이가 아니"라는 식으로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보다 붉은 것은 맞는데 그래서 뭐가 잘못이냐?"고 응수하는 것이다.

조소앙과 조봉암에서부터 김대중과 노무현, 그리고 현재 한나라당이 "좌파"라고 부르는 이 나라의 모든 국민들이 단지 "나는 좌파가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은 지나치게 소극적이다. 파시스트를 빼고 모두를 "좌파"라고 부르는 어법이 정치적으로 효과를 가지지 못하게 하려면 "좌파"라는 낙인 자체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모두더러 좌파라고 하면, "그래 우리가 너희보다는 왼쪽인 것이 맞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대답해 주면 된다. "너희는 왜 그렇게 오른쪽에 있니?"라고 덧붙여줘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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