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수사와 박연차 수사, '극과 극'
김용철 진술은 무시, 박연차 진술은 신뢰
2009.05.27 10:23:00
이건희 수사와 박연차 수사, '극과 극'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검찰이 '죽은 권력'을 상대로 지나친 수사를 했다며 원통해 하는 목소리가 높다.

'지나친 수사'와 '모자란 수사'

'지나친 수사'가 서러운 이유는 이미 '모자란 수사'를 봤기 때문이다. 늘 '지나친 수사'만 봤던 이들이라면, 그게 유독 서러울 까닭이 없다. 하지만, 우리 국민은 '모자란 수사'를 생생히 기억한다. 피의자에게 공개적인 망신을 줬던 박연차 게이트 수사와 대조적으로, 피의자를 철저히 보호했던 수사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지난해 조준웅 특검이 진행한 삼성 비리 수사가 이런 경우다.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는 2007년 10월 양심고백을 통해 이건희 전 삼성 회장 등이 연루된 삼성 비리를 공개했다. 크게 세 가지 범주였다. 정·관·법조계 등에 대한 불법 로비, 비자금 조성 및 탈세, 경영권 불법 승계 등이다. 이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박연차 전(前) 태광실업 회장이 저지른 비리와 같은 종류다.

박연차 전 회장은 힘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돈을 뿌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김용철 변호사가 공개한 내용도 비슷했다. 삼성은 정·관·법조계뿐 아니라, 언론계, 문화계, 학계까지 돈을 뿌리며 촘촘히 인맥을 관리한다는 게 김 변호사의 고백 내용이었다.

물론, 둘 사이에 차이도 있다. 박연차 전 회장은 불법 로비 작업을 대부분 자신이 직접 챙겼다. 반면, 삼성은 구조본을 통해서 처리했다. 비리 규모와 범위에 따른 차이인 셈이다. 이 정도를 제외하면,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삼성 돈 받았다" 지목된 공직자는 승승장구

▲ 이건희 전 삼성 회장. ⓒ뉴시스
그런데 두 비리 사건에 대한 수사 방식은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삼성 구조본의 불법 로비에 대해 수사했던 조준웅 특별검사팀은 내부고발자인 김용철 변호사의 진술을 철저히 무시했다. 특검은 오히려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김 변호사의 진술이 일관성이 없다며 공격하는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특검이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삼성에게서 돈을 받은 인물'로 지목한 이들을 불러 조사한 것도 아니다.

임채진(현 검찰총장), 이종백(현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이귀남(현 법무부 차관), 이종찬(현 정부 첫 대통령실 민정수석, 현 변호사), 김성호(현 정부 첫 국정원장), 황영기(KB금융지주 회장) 등은 언론에 '삼성 장학생'으로 공개됐지만, 현 정부에서 승승장구했다. 심지어 이명박 대통령은 "삼성 돈을 받았다"라고 알려진 이들을 승진시키기도 했다. 이귀남 차관이 대표적인 사례다.

"박연차 돈 받았다" 지목되면 수감…'살아있는 권력'은 예외

▲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연합뉴스
박연차 게이트 수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대목이다. 이 수사에서 검찰은 철저하게 박연차 전 회장의 진술에만 의존했다. 삼성 비리 수사를 맡은 특검이 김용철 변호사를 믿을 수 없다고 못 박은 것과 달리, 박연차 게이트 수사팀은 박 전 회장의 진술이 얼마나 믿을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예 따지지를 않았다.

박 전 회장이 로비 대상자로 꼽은 이들에 대한 소환조사 역시 자의적으로 이뤄졌다. 박 전 회장이 돈을 줬다고하는 명단에 포함된 노 전 대통령 측근들은 모두 구속됐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국회 부의장은 박 전 회장으로부터 세무조사 무마 청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일찌감치 수사대상에서 제외됐다.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은 건드리지 못하고, '죽은 권력'만 치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래서였다.

"삼성 비자금은 수사 불가"

비자금 문제로 들어가면, 둘의 차이는 더 선명해진다. 삼성 비리 수사 당시, 특검은 삼성 해외 법인을 통해 조성한 비자금은 수사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해외 계좌를 추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국내 비자금 역시 덮어버리긴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삼성화재가 조성한 비자금이다.

조준웅 특별검사팀은 2008년 1월 25일 새벽 서울시 중구 삼성화재 본관과 이 회사 전산센터 등을 전격 압수 수색 했다. 삼성 계열 보험회사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한 사람의 제보에 따른 것이다. 당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삼성화재는 고객에게 지급하기로 했으나 합의 등의 이유로 지급하지 않은 미지급 보험금, 고객이 잘 찾아가지 않은 렌트카 비용 등 소액의 돈을 따로 모아 차명계좌에 빼돌리는 방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왔다. 그리고 제보자는 이렇게 조성한 비자금이 삼성 구조본에 전달됐다고 했다.

그런데 특검은 이 사건을 삼성화재 사장 개인의 횡령으로 처리했다. 미지급 보험금 등을 빼돌린 사실을 확인했으면서도, 이 돈이 구조본에 전달됐다는 진술만 외면했다. 삼성 그룹 차원의 비자금 조성으로 결론 나는 것을 막은 셈이다.
▲ 삼성SDI(옛 삼성전관)과 삼성물산 해외법인 사이의 거래에 관한 서류들. 삼성 그룹이 해외 법인을 이용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자료다. ⓒ프레시안
삼성 SDI가 해외법인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을 입증하는 'SDI 메모랜덤' 역시 특검이 외면했다. 이 서류가 1994년 작성된 것이어서 너무 오래됐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SDI 메모랜덤'에 있는 내용은 기본 계약이다. 이후에도 계속 같은 방식으로 비자금을 만들어왔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특검은 이런 가능성을 무시했다. (☞관련 기사: 여전히 수상한 샘플비…특검은 뭐 했나?)

"박연차 비자금 수사는 원활"

비자금 수사에 대한 이런 금기들이 박연차 게이트 사건 수사에서는 말끔히 제거됐다. 지난 3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발표에 따르면, 정대근 전 농협중앙회 회장은 250만 달러의 해외 비자금을 차명으로 관리해 왔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건넨 돈이다. 박 전 회장이 홍콩 APC계좌에서 차명으로 관리한 비자금 역시 검찰은 파헤쳤다. 해외 비자금 수사 역시 수사기관이 마음만 먹으면 꼭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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