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삼성 앞에서 분별을 잃었다"
[인터뷰] 에버랜드 CB 사건 고발한 곽노현 교수
2009.06.02 11:43:00
"대법원, 삼성 앞에서 분별을 잃었다"
사람은 대개 말버릇이 있다. 기자가 관찰한 그의 말버릇 가운데 하나는 '반칙'이다. 이치에 어긋난 일을 볼 때면, 그는 "그건 반칙"이라는 말을 툭 내뱉는다. 법학자인 그가 '반칙'에 민감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반칙'을 용인하는 법이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반칙 고발, 그리고 9년

지난달 30일, 그를 만나기로 한 찻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기자의 머릿속을 메우고 있던 낱말도 '반칙'이었다. 하루 전인 5월 29일, 대법원은 삼성에버랜드 CB 헐값발행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룹 총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회사 지분을 시가보다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살 수 있었다면, 이는 분명히 반칙이다. 보통 사람들은 누릴 수 없는 기회를 혼자 누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상 회사가 손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회사에 투자하거나 기여한 바가 없는 개인을 위해 회사에게 손해를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런 반칙이 무죄라고 했다.

그래서 그와 약속을 잡았다. 삼성에버랜드 CB 헐값발행 사건이 반칙이라는 점을 가장 먼저 지적한 게 그였다. 그는 한국방송통신대학에서 법학을 가르치는 곽노현 교수다. 그를 포함한 법학교수 43명은 지난 2000년 6월 29일 삼성에버랜드 대표이사·이사·감사 전원, 주주 계열사 대표이사 전원, 그리고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에 대한 형사 고발장을 서울지검에 제출했다. 삼성 경영권 승계 문제의 핵심으로 꼽혔던 삼성에버랜드 CB 헐값발행 사건을 둘러싼 법정 공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기소가 이뤄지기까지만 3년이 걸렸다. 2003년 12월, 공소시효 만료를 하루 남겨둔 날이었다. 그나마 '몸통'인 이건희 전 회장은 조사와 기소대상에서 빠졌다. 이 사건 고발장이 접수된 뒤, 검찰총장이 8번 바뀌었지만 이 전 회장을 불러 조사할 만큼 '간 큰 검사'는 없었다.

결국 삼성 내부 고발자가 나온 뒤에야 이 전 회장에 대한 조사가 이뤄질 수 있었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을 계기로 꾸려진 삼성특검이 이 전 회장을 소환조사했고, 결국 기소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최종무죄 판결을 내렸다. 같은 사건으로 기소된 허태학·박노빈(삼성에버랜드 전직 사장들) 씨에게 징역형을 선고한 1·2심 판결을 뒤엎은 것이다.

대법원 판결이 나온 다음날, 당시 고발을 주도했던 곽노현 교수를 만났다. 서울시내 한 찻집에서 만난 그는 "그 사이 흰머리가 꽤 늘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피고인이 누군지 몰랐어도, 이런 판결 나왔을까"

- 삼성에버랜드 CB 헐값 발행 사건이 일어난 게 1996년 12월이다. 이렇게 보면, 5월 29일 대법원 판결은 13년째 이어져온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소회가 복잡할 듯하다.

▲ 곽노현 방통대 법학과 교수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정책위원장이었던 1997년 3월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민교협·민주노총 공동심포지엄을 열어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다.

이재용 씨가 아버지인 이건희 전 삼성 회장으로부터 받은 61억 원을 계열사 내부 거래를 통해 불려나간 과정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다. 당시 비슷한 사례가 연거푸 일어났다. 이재용 씨가 1997년 3월 삼성전자가 발행한 사모 CB 600억 원어치 가운데 450억 원어치를 매입하여 주식으로 전환한 사례도 그 중 하나다. 다만, 삼성전자와 삼성에버랜드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삼성전자는 상장회사이고, 삼성에버랜드는 비상장회사라는 것. 상장회사의 경우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CB를 발행하는 일은 일어나기 어렵다. 이건희 씨가 450억 원을 들여서 매입한 삼성전자 지분이 고작 0.8%밖에 안 되는 것도 그래서다.

반면, 비상장회사의 경우는 다르다. 그래서 당시 상장회사인 삼성전자에 대해서는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비상장회사인 삼성에버랜드에 대해서는 형사소송을 하는 쪽으로 시민단체들이 방향을 잡았다. 삼성전자에 대한 소송을 당시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위원장이었던 장하성 고려대 교수가 맡았고, 삼성에버랜드에 대한 소송을 내가 맡았다.

3년여에 걸친 준비 끝에 2000년 6월 29일, 삼성에버랜드 CB 사건 소송을 시작했다. 굳이 6월 29일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다. 이날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시민 앞에 항복한 6·29 선언일이다. 독재정부가 무너지고, 민주화로 이어진 것과 같은 일이 경제 영역에서도 일어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 뒤 어느 검찰총장도 이건희 전 회장을 소환조사하지 못했다. 정치적 민주화는 어느 정도 진행됐지만, 경제 영역에서는 여전히 특권이 보장되는 성역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다. 특권이 있는 곳에 민주주의가 있을 리는 없다.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내부 비리에 대한 충격적인 고백을 하고난 뒤에야 이 전 회장에 대한 조사와 기소가 이뤄졌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5월 29일 대법원 판결은 재벌의 특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준 것이었다. 나는 정말로 묻고 싶다. '만약 피고인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판결을 내렸더라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게다."

"꼭대기가 면죄부를 받았으니, 바닥은…"

대법원이 지난달 29일 내놓은 판결문은 영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이들이 많았다. 실제 현실에서 다루는 일을 다룬 글이 아니라, 똑똑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어리석은 '헛똑똑이'를 경계하는 교훈을 주는 우화처럼 읽힌다는 이야기다.

대법원은 이날 "삼성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 사건은 '무죄', 삼성 SDS BW 헐값 발행 사건은 '유죄'"라고 판결했다. 이 두 사건은 본질상 다를 게 없다. 회사 경영진이 회사 바깥에 있는 이재용 씨에게 회사 재산을 헐값에 넘긴 것이다. 다만 절차상의 차이가 있었다. 삼성 에버랜드의 경우, 기존주주를 심부름꾼으로 활용했다. 주주들이 CB를 인수하자마자 실권하여 이재용 씨에게 넘긴 것이다. 반면, 삼성 SDS의 경우는 중간단계가 생략됐다. A가 택배요원을 통해 B에게 물건을 줬는데, 법원은 "A로부터 물건을 받은 것은 B가 아니라 택배요원이다. 택배요원이 물건을 받은 것은 죄가 될 수 없다"고 판시한 꼴이다.
▲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허태학ㆍ박노빈 전 에버랜드 사장'에 대한 전원합의체 상고심 선고에서 김영란 대법관이 주문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 이번 판결에서 대법관 소수의견은 기존 주주들이 CB를 인수하자마자 실권한 비율이 97%에 달하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사실상 제3자 배정으로 보는 게 옳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3자 배정 방식이라면, CB를 헐값에 발행한 것은 '유죄'이며 적정한 가격에 발행하는 게 옳다는 판단에는 대법관 전체가 동의했다. 그런데 대법관 다수는 주주들의 실권 사실에는 눈을 감은 채, 형식적으로 주주 배정방식을 취한 점에만 주목했다. 그리고 주주 배정방식이면 적정가격에 발행할 의무가 없다는 법리에 따라 무죄라고 판단했다. 이례적으로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이 단 한 표 차이로 갈라졌다. 다수의견에 대해 할 말이 많을 듯하다.

"법은 형식논리로만 이뤄진 게 아니다. 법에는 사회적, 역사적 맥락이 있다. 이런 맥락을 무시한 채, 단순한 개념조작과 형식논리에만 기대 결론을 끌어내는 게 대법관이 할 일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번 판결은 법철학의 빈곤에서 철저히 비롯된 것이다. 대법관 다수의견은 총수일가를 위한 배임성 헐값 발행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반영돼 있지 않다. 한국 재벌 소유지배 구조의 특징과 그것이 회사법 집행에서 갖는 함의에 대해 고민한 흔적도 전혀 없었다.

대법관들이 이번 사건에서 고려해야 할 맥락은 내부 지분율이 높은 한국 재벌의 특성이었다. 그리고 이런 특성을 이용해 재벌이 세금 없는 경영권 승계를 시도해왔던 현실이었다. 총수의 가족을 위해 회사 법인이 손해를 뒤집어썼는데, 법에 따른 처벌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너도나도 이런 시도를 하게 될 것이다.

이번 판결이 안타까웠던 이유가, 단지 삼성 총수 일가를 단죄할 수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삼성처럼 견고한 재벌이 아닌, '형성 중인 재벌'이 저지른 범죄 역시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계열사를 늘려가며 막 성장하고 있는 재벌은 대개 비상장 회사로 구성돼 있다. 비상장 회사에서 총수 가족에게 지분을 헐값에 넘기는 방식으로 경영권을 넘기는 일은 흔하다. 이렇게 하면 세금 없는 상속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판결로 이런 사례들이 모두 면죄부를 받게 됐다. 증여 행위에 대한 세금 징수를 포기하라는 이야기와 다를 게 없다.

이 소송을 제기하면서 품었던 생각은 '꼭대기를 바로잡아서 바닥까지 바로잡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로 이와 정반대 상황이 돼버렸다. 꼭대기가 면죄부를 받았으니, 바닥에도 죄를 물을 수 없게 돼버렸다. 특정 개인을 위해 비상장 회사 지분을 헐값에 넘겨서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에 대해 단죄할 수 없게 됐다.

"오직 형식논리만 남은 판결, 무분별의 극치다"

법은 분별의 학문인데, 이번 판결은 무분별의 극치다. 법적 판단에 필수적인 타당성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 모든 규정에는 전제와 요건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 무시하고서는 타당성 있는 판단을 내리는 게 불가능하다.

예컨대 법원은 '주주 배정 방식'에 대해서는 적정가격으로 발행할 의무가 없다고 본다. 그래서 삼성에버랜드 CB가 적정가격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가격에 발행된 것도 무죄라는 게다. 하지만, 적정가격으로 발행할 의무가 없다는 게 터무니없는 가격도 허용한다는 뜻일 리는 없다. 적정가격을 산출하기까지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으므로, 굳이 엄격하게 적정가격을 따질 필요는 없다는 뜻에 가깝다. 이렇게 보는 게 타당성 있는 판단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규정과 판단의 배후에 있는 전제와 요건을 무시했다. 오직 형식논리에만 기댄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판결의 효력이 미치는 범위를 설정하기도 어려워진다. 대법관들은 이번 판결이 정말 모든 범위에서 효력을 갖기를 원했을까. 그래서 비상장 회사의 지분을 특정인에게 헐값에 넘긴 모든 행위에 대해 면죄부를 주고 싶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전제와 요건을 무시한 채 형식논리에만 기댄 판결을 한 결과, 그렇게 돼 버렸다. 이번 판결이 무분별의 극치라고 했던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이번 사건은 회사 제도에 대한 신뢰의 근본을 다룬 것이었다. 개인이 아닌 회사 법인의 형태로 재산을 관리할 때 어떤 책임이 따라야하는지에 관한 문제라는 뜻이다. 대법관 다수는 CB를 인수한 주주 가운데 상당수(97%)가 실권하여 지배주주가 바뀐 상황에 대해 '피고인들이 회사의 재산을 보호할 의무를 위배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판단했다. 지배주주가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지 않았는데 아무런 문제제기를 할 수 없다면, 회사가 어떻게 공신력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보면, 이번 판결에서 소수의견을 낸 다섯 대법관들의 입장은 합리적이다. 이들은 '주주배정 방식을 택해도 실권분이 상당한 정도에 이른다면 이사회가 제3자 배정의 성격에 맞게 적정가격을 책정하는 게 옳다'고 판단했다. 적어도 이런 판단은 상황과 맥락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게 정상적인 법적 판단이다. 소수의견을 낸 이홍훈, 김능환, 박시환, 김영란, 전수안 대법관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들의 이름을 잊지 않을 것이다."
▲ 지난해 7월 16일 열린 삼성특검 사건 1심 재판 풍경. 선고가 이뤄지기 직전 상황이다. 당시 재판을 진행한 민병훈 부장판사(현 변호사)는 "삼성 에버랜드 사건은 무죄"라는 소신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했었다. 법원 수뇌부가 굳이 이런 소신을 가진 판사에게 삼성 사건을 배당한 이유 역시 논란거리다. ⓒ손문상

"이건희 재판, 끝나지 않았다"

-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이례적인 대목은 또 있다. 삼성SDS BW 헐값 발행 사건에 대해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점이다. 2심 법원은 같은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었다.

"삼성SDS 사건은 1999년 참여연대의 고발로 시작됐다. 이 사건 역시 숱한 진기록을 세웠다. 검찰이 무려 6번이나 불기소 처분을 한 것도 그 중 하나다. 이 사건도 김용철 변호사의 고백이 있은 뒤에야 특검에 의해 기소될 수 있었다. 삼성특검 사건에 대한 1심 법원은 면소, 2심 법원은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대법원은 결국 유죄로 판단했다.

이 사건에 대해 유죄 판결이 내려지면서, 삼성 사태는 다시 진행형이 됐다. 1심에서 이 사건에 대해 면소 판결을 내린 민병훈 재판부는 BW 헐값 발행으로 삼성SDS가 입은 손해액이 44억 원 이하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공소시효가 10년인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특경가법)상 배임 혐의가 적용되지 않았다. 특경가법상 배임 혐의가 적용되려면 손해액이 50억 원을 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민병훈 재판부는 삼성SDS의 손해액을 계산하면서 이 회사 주식의 적정가격을 9192원이라고 판단했다. 삼성SDS 주식의 적정가격이 이보다 조금만 높게 산정돼도 삼성SDS의 손해액은 50억 원을 넘기게 된다. 이렇게 되면, 특경가법이 적용돼 이 전 회장에 대한 면소 판결이 뒤집힌다.

이건희 전 회장은 조세포탈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이 선고된 상태다. 여기에 삼성SDS 사건까지 유죄로 확정되면, 이 전 회장은 실형을 피할 수 없다. 파기환송심 재판부가 어떤 판단을 할지 계속 지켜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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